♡ 한식의 유래 ♡
한식은 동지날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로서 양력으로 4월 5일이나 4월 6일쯤 된다. 한식과 청명은 하루 차이인데 올해는 청명이 4월5일 한식이 4월 6일이다.
한식의 유래로 개자추 이야기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개자추(介子推)는 19년간 진문공을 수행하다.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으로 개자추라고도 불린다.
진 문공이 공자(公子)였을 때 국내 정변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했는데, 개자추가 19년 동안 문공을 수행했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내정은 아주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진나라 헌공이 여희(?~기원전 677)의 꾐에 빠져 태자 신생을 죽였고, 그 위기상황이 작은 아들 중이(훗날의 진문공)에게도 미칠 판이었다.
이에 중이는 가신들을 거느리고 국외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개자추는 중이를 수행하며 충심을 다해 모셨다.
중이가 배가 고파 먹을 것이 없을 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고깃국을 끓여 줄 정도였다.
여기에서 ‘허벅지 살을 베어 주군을 받들다’는 뜻의 ‘할고봉군 (割股奉君)’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개자추의 회한과 진문공의 후회
19년의 망명 생활 끝에 진나라 사람들과 진(秦, 중국 최초 통일국가)의 도움을 받아 중이는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데, 군주로 즉위한 중이는 춘추오패의 한 사람인 진문공이다.
그는 먼저 자신의 망명생활을 수행하며 도운 신하들을 모두 관직에 봉했다.
그런데 개자추에게만 공로도 녹봉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개자추는 집으로 돌아와 홀어머니에게
“문공께서 돌아와 군주의 자리를 이은 것은 하늘의 안배 입니다.
그런데 몇몇 인사들이 그것을 자신의 공로라고 떠벌리고 있으니 어찌 공로와 상을 탐내고 군주를 속이는 짓이 아니겠 습니까?
저는 정말이지 그런 자들과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숨어 살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네가 정말 그렇게 마음 먹었다면 나도 함께 가마.” 라고 아들을 격려하였다
이때 개자추의 처지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궁궐 곳곳에 무기명 으로 “용이 하늘로 나니 다섯 마리 이무기가 보좌하는구나
용이 이미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네 마리 이무기가 각자 그 자리를 차지하는구나.
오직 한 마리가 원망하니 그 간 곳을 아무도 모르는구나.” 라는 글을 붙였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문공은 “그건 바로 개자추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군왕이 되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이 정말 개자추 때문인데 그를 비굴하게 만들었구나.” 라며 급히 사람을 보내 개자추의 행방을 찾게 했다.
마침내 개자추가 면산에 어머니와 함께 숨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문공이 몸소 면산으로 가서 사람들과 함께 개자추를 힘껏 불렀으나 산이 워낙 깊은지라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이에 문공이 누군가의 건의를 받아들여 면산에 불을 질렀다.
효자로 이름난 개자추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올 것이라는 권유 때문이었다.
불은 3일 밤낮으로 탔지만 개자추 모자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불이 온 산을 다 태우고 꺼진 뒤 비로소 모자가 끌어안은 채 나무 밑에서 새까맣게 타죽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공은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문공은 개자추 모자를 기념하기 위해 면산 주위의 땅을 개자추의 땅으로 봉하고 면산을 개산으로 고쳐 부르게 하는 한편, 그 일대 지역을 ‘개자추가 쉬었다’는 뜻의
‘지에시우(介休) 현’으로 불렀다. 또 매년 면산에 불을 지른 날(청명절 하루 전날)을 한식(寒食)날로 정해 더운 음식을 먹지 못하게 했다.
문공은 불에 탄 면산의 나무로 나막신을 만들어 신었다고 한다.
걸을 때마다 발 밑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개자추 생각을 했다 는 것이다.
이때부터 귀한 친구를 부를 때 ‘족하(足下)’라 했다고 하며, 흔히 일본의 고유한 신발로 알려진 ‘게다(下駄)’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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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참 좋은 날
YouTube에서 '한식 유래 - 개자추 이야기' 보기
https://youtu.be/fsIeNnKt8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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