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허세 떠는 모던 보이, 바이올린 끼고 활보하다
조선일보 2024. 12. 28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1920년대 모던 보이, 모던 걸의 과시품, 빈 케이스만 들고 다니기도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사랑법. 1920년대엔 바이올린 연주로 프로포즈정도는 할 줄 알아야 모던 보이 대접을 받을 수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바이올린은 연애의 상징이자, 패션 도구역할까지 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바이올린은 1920년대 경성에서 요즘보다 더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것같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보란듯이 거리를 활보하면서 청춘의 아이콘처럼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빈곤층을 다룬 ‘고국’ ‘탈출기’를 쓴 작가 최학송은 이런 모던 보이의 행색이 언짢았던 모양이다. 대중잡지 ‘별건곤’(제10호,1927년12월20일)에 이렇게 썼다. ‘빠이오링, 피아노나 치고 앉아서 연애자유나 부르고 걸핏하면 정사(情死)-그렇지 않으면 실연병에 술이나 마시고 다니는 것은 세기말적의 퇴폐 기분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바이올린을 피아노와 함께 연애꾼의 ‘액세서리’처럼 묘사했다.
서양식 모자와 나팔바지 차림 모던 보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왼쪽 남자는 바이올린을 들었다. 조선일보 1928년 2월7일자
◇ 허영의 산물, 바이올린
석영 안석주가 그린 만문만화 ‘모던 보이의 산보’(조선일보 1928년2월7일)에도 구레나룻 수염을 기르고 나팔바지를 입은 ‘모던 보이’가 왼손엔 바이올린 케이스를, 오른손엔 책을 든 채 거리를 활보한다. 바이올린 정도는 켤 줄 알아야 모던 보이 대접을 받을 것만 같다. 1921년 당시 ‘원동(苑洞)재킷’으로 이름을 날린 ‘모던 걸’ 김화동의 하루를 소개하는 기사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연애를 상징한다는 자줏빛 ‘짜케트’(재킷)와 연녹색 치마에 붉은 해당화 빛이 나는 단을 대어 입고, 좀 갸름하고도 고와보이는 어여쁜 얼굴에 단장 화려히 하고, 옆으로 넘긴 트레머리에 일부러 두세 줄 머리털을 이마 앞으로 넘겨놓고, 굽높은 구두를 발끝만 디디고 가는 허리를 맵시 있게 가누면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양은...’(’원동 재킷’의 애사 1, 조선일보 1921년 1월23일)
허영기 많은 김화동에 대한 소개다. 여기에 ‘그의 아리땁다는 소문과 늘 속 빈 빠오링(바이올린)갑을 들고 다닌다는 풍설이 점점 널리 퍼진 결과, 원동 사는 ‘짜케트’입고 다니는 어여쁜 여학생이라면 여간 사람은 거의 다 짐작을 하기에 이른 것’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바이올린 없이 케이스만 들고다니며 폼잡는 경우까지 있었던 모양이다.
바이올린을 든 모던 보이가 쓰러져가는 초가집 창가에서 세레나데를 연주하면서 구애하고 있다. 안석주가 조선일보 1928년 4월6일자에 실은 만문만화 '로미오와 줄리엣'
◇ 안국동 모던 보이의 바이올린
경성제대 예과에 다니던 조용만(1909~1995)의 안국동 스케치에도 바이올린이 등장한다. ‘햇빛에 번쩍이는 복사빛 파라솔과 봄바람에 날리는 노란빛 넥타이 그리고 구두 뒤축에 질겅질겅 씹히는 ‘곤세-루’바지와 정갱이 위에 펄렁거리는 ‘사-지’ 치마, 급한 일이나 있는 것같이 부리나케 달아나는 ‘뽀이’의 손에는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바이올린이 앞으로 왔다갔다, 황새 같은 ‘뽀이’를 따라가려고 아기적어리는 ‘껄’의 손에는 오페라 빽스가 대롱대롱….’(동아일보 1928년 4월19일) 바이올린은 당시 모던 보이, 모던 걸이 선호하던 패션소품이었다.
바이올린이 얼마나 유행했으면 중학생들까지 겨드랑이에 바이올린을 끼고 다닐 정도였다. ‘요새는 소위 남녀 중학생아이들까지 겨드랑이에 바이올린을 끼고 다니고 부자 연인(戀人)을 졸라서 제집에다 피아노를 사놓고 무엇이 무엇인지 멋도 모르며 뚱당거리고 앉았는 모양이란….’(현대남녀음악가에게 與하노라, ‘별건곤’ 제2권3호, 1927년3월)
◇ 바이올린 세레나데로 프로포즈
안석주는 1928년 봄 세태를 풍자한 만문(漫文)만화를 신문에 냈다. 양복 차림 청년이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창문 아래 서서 바이올린을 들고 세레나데를 연주하다 여인의 손등에 입맞추는 그림이었다.
‘ ‘룸펜 바이올리니스트’ 한 분이 어느 다ㅡ쓰러져가는 초가집 창밑에서 어제밤 달뜰때부터 오늘 해뜰때까지 바이올린을 긁고 있었으니 그의 서툰 바이올린도 처음부터 끝까지 세레나데를 가늘게 또한 굵게 긁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바야흐로 뭇집의 대문 여는 소리가 요란할 때 홀연히 그 창문이 열리며 노리끼한 손이 나오니 이 사나이는 불시에 눈물을 흘리며 그 손을 고이 고이 잡고서 손등에 키쓰를 하는 것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조선일보 1928년4월6일)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살아도 세레나데 정도는 바쳐야 근사한 프로포즈라고 생각할 만큼, 바이올린의 위력은 대단했다.
◇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잇따라 내한
1923년 경성공회당에서 ‘사랑의 기쁨’ 작곡가 프리츠 크라이슬러와 바이올린의 신(神)이라는 야사 하이페츠가 내한 연주를 갖고, 이듬해 에프렘 짐발리스트까지 찾아오는 등 1920년대 경성엔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잇달아 선보였다. 바야흐로 바이올린의 시대였다.
◇ 바이올린의 등장
바이올린은 조선의 음악가들이 즐겨 선택한 악기였다. 일본의 최고 음악교육기관인 동경음악학교 졸업생들의 전공을 살펴보면, 피아노와 바이올린, 성악 3분야로 압축될 만큼, 바이올린 전공자들이 많았다. 1920년대 조선에서 유행한 각종 음악회에 바이올린은 감초처럼 빠지지 않았다. 서양음악하면 바이올린이 떠오를 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홍난파, 문학준, 김생려, 안병소처럼 유명 연주자들의 활약도 바이올린의 인기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특이한 것은 여성 음악가들의 경우, 대부분 성악이나 피아노를 택한 반면, 바이올린 연주자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동시대 일본에선 여성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상당수 활동한데 비해서도 특이하다. 음악사 연구자들의 밝혀내야할 과제다. 바이올린은 이렇게 야릇한 스캔들처럼 등장했다.
◇참고자료
최학송, 데카단의 상징, 모-던 껄, 모-던뽀-이 대논평, 별건곤 제10호,1927년12월
박연, 현대남녀음악가에게 與하노라, 별건곤 제5호, 1927년3월
김지선, 근대시기 일본의 음악학교에 유학한 조선인-도쿄음악학교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음악사학보 41, 20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