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파스칼에게 빠졌고 당연히 인문학은 파스칼이 1 빳 따 인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독일 놈 괴테(1749-1832)도 파스칼 못지않게 인생을 멋지게 살다간 사람입니다. 그는 세기의 문호일 뿐 아니라 미술 광이며, 정치, 자연과학을 섭렵했고 거기다 직장생활까지(10년) 했으니 그야말로 인문학의 베이스가 탄탄한 인간입니다. 괴테를 만든 것은 당시 유럽 사회의 양대 산맥이었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라는 넓은 세상을 만난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저도 열열이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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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의 지속도가 높고 많을수록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있고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른 놈이 설교를 해야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최근에 안 일이지만 니체의 상승을 추구하는 '힘의 의지'는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힘의 의지'와 갈등 국면을 겪으면서 강철(새 창조)이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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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의 '윈 윈' 전략말입니다. 75학번(1775)이었던 괴테는 산업혁명의 두 축이었던 1. 제니방적기와 2.증기기관에 일찍부터 관심이 있었다 네요. 자신은 한 번도 기차를 타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말입니다. 괴테는 집안만 빼고필자와 콜라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미술인이며, 정치, 자연과학에 관심이 있고, 직장생활20년에 성경 묵상40년을 했으며 아직까지 공중전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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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7살에 소년 가장이 되어 80년 광주 항쟁과 한국의 산업화 현장에 서서 온몸의 상흔 투성이지만 처가나 친가 쪽 어느 도움도 받지 않았으니 인생의 후반 전은 악동 파우스트를 출간할 지 누가 압니까?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던 시기의 유럽은 영국과 프랑스가 선진국이어서 독일은 혁명의 흐름을 비켜나갈 수 있었고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후발산업국의 대열에 올라섰는데 제 생각에는 괴테라는 천재의 공이 컸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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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루이16세가 마리 앙뜨아네트와 정략결혼을 하는 날 슈트라스부르(프, 독일 국경지역)에서 세러머니를 했는데 당시 청년 유학생이었던 괴테가 행사장에 갔다가 라파엘로의 '메데이야'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불행의 상징이라면서 분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랬을까? 우리가 아는 대로 '마리'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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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시대의 사상가로 칸트, 헤겔, 쉴러가 있었다면 음악가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까지 그야말로 인물 전국시대입니다. '마왕'과 관련한 일화를 소개하자면 한번은 슈베르트가 괴테의 시를 '마왕'으로 만들어 괴테에게 받쳤습니다. 그러나 끝내 답장을 못 받은 것은 괴테는 음악가로는 모차르트밖에 몰랐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괴테의 갈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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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자신의 길이 문학, 관료, 미술인지 잘 몰라서 정치관료로 10년 동안 열심히 일하다가 돌연 사표를 내고 이탈리아로 야반도주를 합니다. 2년 동안 교회를 돌아다니며 그림만 보고 살았다니 대단한 집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본령은 글쓰기라는 결론을 얻어 집필에 몰두합니다. 그때부터 '거침없는 하이 킥'이 그를 세기의 대문호를 만들었습니다. 장장60년의 대작 파우스트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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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의 가치관과 충동하였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빌헬름 마이스터 수업시대'을 통해 나의 본질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이해하였으며 '파우스트'를 통해 나는 온 세상을 두루 달리며 삶의 의미를 찾았다는 것 아닙니까? “부지런한 자에게 세상은 침묵하지 않는답니다.” 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의 생애 83년을 기준으로 한다면 제게는 23년의 세월이 남아있습니다. 인생의 후반전, 괴테를 등에 업고 신나게 M60을 쏘는 날이 올까요?
2023.12.1.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