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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글쓴이: 김은수 목사
성산 장기려의 삶을 뒤 돌아 보면서 글 제목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고민 끝에 장기려 선생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 지인들에게 남긴 말씀이 생각났다.
“내가 죽으면 나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 주시오”
"주님을 섬기다 간사람”
16년 전에 경기도 마석 묘란 공원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이다.
그분은 전 생애를 주님을 섬기는 일에 충성했던 위대한 믿음의 거성이셨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 의 실제 모델이며,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성산 장기려 박사는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1995년 86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평생 자신의 전 생을 소외된 이웃과 가난한 사람을 벗으로 삼아 인술과 박애정신의 아름다운 사랑의 꽃을 피워냈던 “참된 의사요”참된 신앙인이요” 그리스도의 참사랑이 무엇인가? 를 실천으로 보여준 “참된 사랑의 실천가”였다.
인간 장기려는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흠모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었던가?
이 글이 한 인간의 장기려를 추앙하거나, 추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려고 애썼던 그분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첫째는 장기려의 개인적인 인간 사상에 대해, 둘째는 그분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천적 삶에 대해 알아보면서 오늘의 타락된 크리스찬의 삶과 목회자, 그리고 나 자신에게 조용히 신앙의 한 모델로, 그리고 나의 삶의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첫째, 장기려의 개인적 사상
1. 선한 의사 장기려
1911년 음력 8월14일에 평북용천군 양하면 임암동 739번지가 교향인 장기려 선생은 부친 장윤섭과, 모친 최윤경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조모인 이경신(1851~1922)으로부터 아침과 저녁의 가정 경건 회 때마다,
⌈이 금광석(애명)이가 자라나 하나님나라와 현실 나라에서 크게 쓰여 지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라는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선생은, 어머니 최윤경의 젖을 먹고, 할머니 이경심의 믿음과 기도로 자랐으며, 아버지 장윤섭으로 부터 성경을 배웠다. 그는 송도보고 3학년 때, 성령세례를 받고 그때부터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 하였고, 그리스도인의 참된 형상을 이루어 가게 된 것이다.그는 경성의전에 입학할 때,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 했다.
⌈하나님! 경성의전에 들어가게만 해 주신다면 의사를 한 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매일 서원기도를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것이 선한의사로서의 인생의 출발이 되었고, 그의 생애를 결단했던 기도의 응답이었으며, 하나님께 드린 약속의 시행이었던 것이다.
1930년3월20일 22세의 나이로 경성의전을 졸업 후, 그해 4월9일에 김복숙과 결혼 하였고, 당대 최고 외과의사인 백인재 선생 밑에서 수련의로 수업을 쌓았다.
1940년11월 평양연합 기독병원(기홀 병원)에 원장 직으로 부임했으나, 세브란스의 의전 출신들의 텃세와 시기로 두 달 만에 원장 직에서 물러나 외과 과장으로 강등 되었고, 이런 사항에서도 자기의 맡은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이때 그의 기도가 “예수님이 만일 저와 같이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했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 너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하면 되잖아” 라는 응답을 받고, 그는 그 응답에 순종했던 것이다. 그는 사면초가(四面楚歌)속에서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신념을 갖고 일한 결과 1년 후에는 그들이 오히려 창피를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2. 그는 본분에 충실했다.
*1942년 “농흉에 관한 세균학적 연구” 논문을 발표했고.
*“근염의 조직학적 소견”이라는 논문을 발표 했으며.
*1943년 “간암 설상 절제수술 시행”을 조선 의학 회에 발표했다.
*해방후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위생과장, 제1인민병원(도립병원)원장겸 외과 과장
*김일성대학 외과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학 강좌 장, 등 의사가 된 처음부터 그의 경력은 화려 했다.
이때에 그는 신앙인으로서 주일 성수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주일은 일할 수 없다는 조건하에 근무하게 되었고, 근무하는 동안 주일을 지키는 일과, 환자수술을 하기 전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는 일관된 삶을 살았다.
이러한 그가 김일성주석의 맹장 수술을 담당했을 때, 수술대에 누워있는 김일성 주석에게 “나는 예수를 믿는 의사이기 때문에 수술하기 전에는 내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장군님도 예외일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철저한 신앙의 절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에 있었다.
*1947년 김일성으로부터 모범 일꾼 상 수상,
*그 이듬해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북한 최초로 의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다. 이것은 당대에 최고의 의사였음을 말해 준다.
3. 참된 의사로서의 장기려
1950년12월18일 남북의 전쟁 발발로 부인과 5남매를 북한에 두고, 둘째아들 장가용만을 데리고 월남함으로 이때부터 가족의 그리운 이별이 시작 되었다.
1951년 6월20일에 부산으로 피난 온 후, 당시 한상동 목사와 전영찬 선생의 권고로 부산시 영도구 남항동 영선 초등학교 공지에 천막3동을 치고서 무료 진료소를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부산 복음병원의 초석이 되었고, 한부선 선교사님과 말쓰베리 선교사님 등의 도움과 부산 기독인들의 도움 등으로 현제의 부산 복음병원이 탄생 되었고, 여기 원장 직을 맞게 되었다.
무료로 진료를 시작하면서, 남한에서의 첫 의술을 펼치게 된다. 당시 천막으로 시작한 병원은 무료 진료를 하고 있었기에 40여명의 직원들의 월급이 없었다. 사과 상자를 모아서 수술대를 만들고, 전기가 모자라 촛불을 켜고 수술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의 개혁 선교회로부터 매월500달러라는 뜻하지 않은 지원금을 받게 되자, 원장인 장기려는 계급에 따라 월급을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가족의 식구 수대로 월급을 나누자고 제안을 하므로, 장기려는 두 식구이므로 항상 전 직원 중에서 제일 적은 월급을 받게 되었다.
아무나 이렇게 할 수 없는 일을 장기려는 당당히 그렇게 한 것이다. 이러한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바로 사랑의 힘에서 나온 것이리라 믿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헌신된 참된 한 사람의 모습이요,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참 사람이 아니던가!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진료를 하기위해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 라는 기치아래 “청십자 의료협동조합”을 창설하여 전 국민 의료보험 시대를 여는 발판을 만들었다.
1985년9월, 꿈에도 그리던 북한의 가족을 상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나는 매일같이 영적으로 아내와 교통하고 있으니 나는 괜찮으니 내 대신 다른 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라며” 자신의 방북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헌납하는 그 희생은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그리스도의 참 형상이었다.
그러면서 장기려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의 편지 한 토막의 내용에서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 만일 우리 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 뿐 아니라 떠나있을 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라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다렸소⌋라고 말하는, 아내를 사모하는 그 애끊는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장기려의 의사로서의 그분의 열정을 어찌 짧은 지면에 말로서 다 표현 할 수가 있겠는가? 복음병원의 원장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부산대학교 의과대학교수 및 학장, 카톨릭의대 외과학교수 및 백병원 원장 등을 겸하고 있었고, 각 의대에서는 장 박사님을 모셔 가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장 박사님의 이름만 있어도 환자가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창세기2장에 나오는 유프라테스 강의 축복, 즉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까지 복이 임하는 축복의 매신저(messenger)이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복을 받게 되었던 사건과 동일한 축복이 아닌가?
내가 가는 그곳에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임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겠는가?
4. 장기려의 삶에 대한 이상
장기려의 삶에 대한 원동력은 철저한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의 조모님의 끊임없는 기도와 부친의 성경의 가르침이 삶의 기초가 되었고, 따라서 그는 언제나 그의 심령 깊숙한 곳에 자신을 가르치며 지도하고 이끄시는 한분이 계셨으니,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낮고 천한 인간 세상에 오시어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죄인이라 외면당하는 그들을 찾아 위로하시며,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셨던, 바로 그분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흠모하며 살았던 그였다.
그러기에 때로는 현실을 너무도 모르는 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그러한 오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다른 이의 오해로 자신의 삶에 대한 이상이 흔들릴 수 없었으니, 그러한 오해 속에서도 달라는 자에게 주는 삶이었고, 필요한 자를 찾아서 채워주는 삶이었으며,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이었다. 그는 일평생동안 무소유적 삶을 살았던 분이다. 이러한 그에게 어떤 이는 “한국의 슈바이져”라는 별명을 붙였으나, 나는 그분에게 “예수의 형상을 입은 자”라고 부르고 싶다.
그분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대체로 무엇이 되느냐에 집착한다, 그러나 삶의 진정한 가치는 어떻게 살았는가?“ 에 의해서 매겨 지는 것이다⌋ 이것이 장기려의 삶에 대한 이상이다.
5. 장기려의 삶은 무소유적 삶이었다.
장기려 선생은 당대에 할아버지가 400석을 하는 부자였으나, 후에 그 유산을 아버지께서 다 날린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라며 술회한 것도 선생의 신앙관에서 나온 말이다.
1947년까지 당대에 최고의 연봉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재도구를 팔아야만 했고, 48년 이후에는 아내가 재봉틀로 환자의 의복을 짓는 등 부업을 해서 생계를 꾸려 나가야만 했던 선생님의 삶은 무소유적 삶 그 자체였다.
그의 월급의 모두는 남을 돕는데 사용했으며, 월급날을 장기려 본인보다 먼저 알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리여카를 사 달라는 날품꾼들이었다. 원장님의 월급날에는 벌써 병원 앞에 줄을 서 있었고, 지난달에 받아갔지 않았느냐며, 돌려보내는 운전기사에게 호통을 치던 장기려 선생님이셨다.
79년 라몬 막사이사이 평화상, 상금을 비룻하여 상패까지 모두 팔아서 병원의 낙후된 장비 구입과 어려운 환자와 고학생들을 위해 사용했던 청빈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그 모습 자체였다.
지나치게 잘 먹는 것은 죄가 된다고 하시면서 물욕이 많으면 불행을 불러 온다는 사실을 알고 실천한 거성이셨다.
그가 의대를 입학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제가 의사가 되면 의사를 한 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겠습니다.”라고 약속한 것처럼 주님 앞으로 부름 받아 가던 1995년12월25일 86세가 될 때까지 복음병원의 단칸 옥탑 방에서 자신이 뭍일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무소유적 삶을 사셨던 분이셨다.
6. 장기려의 신앙관
그분의 신앙관은 한마디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교회 관, 그분의 사회 관, 그분의 국가 관, 모두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이라는 이 한 마디 속에 다 포함 되리라 본다.
그는 믿음의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단순한 동정심조차 일으키지도 않고 조금의 기부금도 내는 사람이 적은 것은 이 얼마나 저주 받은 사회인가! 라고 하며 이러한 사회 또는 개인에게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한탄의 말을 남기기도 했던 장기려 였다.
이러한 자본주의 가치와 물질지향적인 사회, 가지려고만 하는 교회, 그리고 믿는 자 개개인의 삶에 대한 평가를 볼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관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원했던 것은 물질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교회보다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나타나는 그러한 교회와 신앙관을 사모 했던 것이다.
7. 장기려의 내세적 본향 관
그는 내세적 본향에 대한 그리움을 늘 갖고 살았다.
선생은, 본향을 사모하는 신앙인은 결코 이 땅의 소유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는 내세적 본향관이 확고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땅의 삶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그는 이 땅의 물질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땅에 자신의 명예나 권세를 쌓아두려는 어떤 이들과 다른 범인의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그가 살았을 때 간디의 교훈에서 말하기를 “간디는 죽었을 때 물레밖에 남긴 것이 없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라는 말에서 그분의 내세관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삶의 최고의 목표로 삼았고, 사랑, 믿음, 진실, 정의, 정직, 봉사, 전도, 등이 그의 삶을 표현하는 핵심어가 되었다.
8. 장기려의 인간관
장기려의 인간관은 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내가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간관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1).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극히 소중한 존재이며, 더욱이 하나님 자신이 사람 되어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사람을 제어 할 수도, 업신여길 수도 없는 매우 귀중한 존재이며, 그 생명은 천하보다도 귀중한 인간관을 말하고 있다.
2).모든 사람은 자유하며 평등하다. 라고 말한다.
3).모든 사람은 동등한 의무를 지닌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는 아무도, 그 어떤 환경도, 불공평하게 제한하지 못한다. 라고 하는 인간관을 말하고 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명언이 있다. “너 자신을 환자의 입장에 두라”이것은 의료 사업의 “황금률”이다.
이 말은“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유래한 것이다.
장기려 박사는 피 영향성이 강하고 순종을 잘했다. 그는 성실하고, 경건하며, 순수하며, 순진할 정도로 하나님의 권위를 두려워하는 참 신앙인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헌신의 삶을 살았다.
그는 복음병원 원장25년, 백병원 원장, 서울대, 부산대 의과대 교수 및 학장, 카톨릭의대 교수 등을 지냈으나, 향연 86세 돌아가실 때 까지 자기의 단칸방 한 칸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물레 밖에 남긴 것이 없었다고 하는 간디에 비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자신을 탓했으니, 아! 하늘아래 이 같은 위인을 언제 또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장기려 선생의 인간관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각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하는 실천적 윤리로 나타났고, 예수님의 사랑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희생이 따른 사랑의 실천으로 믿음과 생활의 일치와 조화를 행동으로 일구어 낸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인가! 그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가 부산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세계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천적 삶
◈복음병원에 원장으로 있던 어느 날이다.
회진시에 퇴원해도 좋다고 했던 환자가 병실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왜 퇴원을 하지 않느냐? 라고 했을 때, 진료비 낼 돈이 없어서 서무과에서 신분증을 가져가고, 진료비를 계산할 때까지는 퇴원할 수 없다. 라고 했다는 말에 갑자기 화가 난 장기려는 발걸음을 서무과로 돌려 직원에게 “여기가 병원이지 세무서냐?”라며 사무실의 책상을 뒤엎어 버렸다. 엎어진 서랍 속에서 모자라는 입원비 대신에 받아둔 반지, 시계, 목걸이, 등이 튀어 나온 것을 보고 장기려는 걸상에 덥석 주저앉아, 천막의 무료진료로 시작한 병원이 이렇게 타락한 것에 한탄을 하며, 괴로워했던 작은 예수, 장기려-
이러한 모습의 장기려는, 예루살렘성전을 장사의 소굴로 만들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세리와 제사장들을 책망하며, 매매하던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과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든 예수님의 모습과 똑 같은 모습이다.
그러고는 환자에게 찾아가서 살짝 도망쳐 나가라고 귀띔을 해 주던 일들,--
◈살짝 도망쳐 나가시오
경남 거창에 살고 있던 한 가난한 농부였다. 입원비가 밀려 퇴원할 수 없는 것을 알고 환자에게 말하기를,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살짝 도망쳐 나가시오” 라고 알려 주고는 그날 밤에 밤이 어스름한 틈을 타서 이불 보자기를 던 가족과 환자가 입구에 나타났을 때, 어둠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기려가 농부의 거친 손을 덥석 잡으며 “얼마 안 되지만 차비요, 가서 일 열심히 하시오”라고 하고서 환자를 도망하게 도와주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원장님! 106호 환자가 간밤에 도망쳤습니다. 이때 원장 장기려의 하는 말, “오죽 딱했으면 그리 했겠소?”그러나 직원들은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날은 원장, 장기려와 직원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고 말았다.
◈혼수로 가져온 이불을 고학생에게
아들 가용(현 서울의대 해부학 교수)이 결혼했을 때의 일이다, 며느리의 지극한 정성으로 장기려에게 드리기 위해 마련한 비단이불을 가져 왔는데, 장기려는 가끔 만나는 고학생이 늘 감기를 앓는다고 걱정하시며, 그 학생의 자치 방에 같다주었던 사실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입고 나갔던 옷을 거지들에게 늘 벗어 주고 오셨던 일들--
그분은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삶이 몸에 배어 있었으니, 이분이 곧 작은 예수가 아니었는가!
◈책보다 돈이 낫지 않겠나?
어느 날 원장님의 서재 방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이 보자기를 펴고 책을 싸려는 순간 장기려와 눈이 마주쳤다.“젊은이 그 책 가져가게 되면 고물 값밖에 더 받겠소? 그러나 나에게는 아주 소중한 것이라오, 무거운 책 보다는 돈이 더 낫지 않겠소? 그때 도둑은 떨면서 원장님 죽을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며, 돈을 받아 달아났다. 이 사실을 경비원이 목격하고 멍하니 보고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오늘날 이 시대 속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동화와 같은 실제의 사건이었다.
그는 참으로 이 시대의 어두움을 비춰 주는 등불 이었다. 암흑과 같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빛을 대신 전하는 빛의 전달자였다.
그는 또 많은 “상”들을 받았다. 대한 적십자사의 인도상, 부산 시민상, 대한 의학회 학술상, 국민 훈장, 막사이사이 평화상, 호암상--등 많은 상들이 주어졌으나, 수상을 거절하며 시상식에 나가지 않았던 일도 많았다.
오직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조용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주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경기도 마석 묘란 공원에 묘지의 비문처럼 “조용히 주님을 섬기다 간사람” 이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창조의 목적이 아니던가!
그분의 삶은 서거16년이 지난 지금도 “이 땅의 작은 예수” “한국의 슈바이쳐” ”살아있는 십자가“ 라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오늘 그분이 살아 있다면 이러한 찬사를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평생 이웃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신 사랑의 전달자 장기려였다.
사랑의 전달자 장기려는 86년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그가 묻힐 땅 한 평, 작은 집 한 칸 없었던 청빈한 삶을 살았다. 지금 그의 자녀들 또한 묵묵히 선친의 뒤를 이어 가고 있다.
북에 있는 큰 아들 장택용은 약학박사가 되어 국제회의 등에 참가 하고 있다.
큰딸 신용은 식품 공학사, 성용은 핵물리학 박사, 인용은 이론 물리학 박사, 진용은 교사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한에 있는 둘째 아들 장가용은 서울대 외과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마무리--
성산 장기려 선생은, 오늘날 물질만능주의로, 권세로, 인간의 탐욕 등으로 어두워진 사회와 그리고 한국교회에 크리스찬들과 목회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참 사랑이 무엇이며, 믿는 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위대한 가르침의 스승이셨다.
비록 육신은 이 땅에 없으나, 장기려 선생의 그 가르침은 참된 삶의 무지 속에 있는 자들에게 진정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그리고 물질의 탐욕에 정신이 혼미한 자들에게 탐욕과 물질을 초월하는 방법을, 소유의 욕심에서 해어 나오지 못한 자들에게 무소유의 지혜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정한 참 사랑과 선행이 어떤 것인가를, 그리고 믿는 크리스찬들에게 본향을 바라보고 사는 참된 내세관이 어떤 것인가? 등을 우리의 가슴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며 깨우치는 역사가 계속되리라 믿는다.
“오직 주님 한 분만을 진실 되게 섬기고 간사람!”
지금 이시간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 13년이상, 장기려 박사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 왠지 하염없이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린다.
그분이 그리워서일까? 아니면 그분을 사모함 에서 일까? 그런데 이 둘 다겠지만, 그러나 지금 나는, 이보다 더 한, 후회와 아쉬움이 함께 디섞인 나머지,- 왜 이런 휼륭한 믿음의거성을 곁에 두고서도, 내 자신 그분처럼 닮지를 못했을까?
왜 좀더 그분의 삶을 배우기 위해 더 열심하지 못했을까! 하는, 한없는 후회와 아쉬움이 나의 심장을 막망이질 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가슴깊이 사모함을 갔는다. 참으로 그립다. 많이 보고 쉽다.
다시 한번 장박사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 예수그리스도 다음으로 닮고, 본 받고 싶은 그분, 성산 장기려 박사-
첫댓글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분에관한글에 몸에전율을 느낍니다. 은혜로운글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