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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직접 경전을 쓰진 않았을 텐데 자세한 묘사를 보고 놀랐습니다. 부처님이 당시 설법하셨을 때 본인의 경험을 예로 들어서 설법하셨을까요?
전법선언에서 홀로 가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수자타 아이들의 눈빛이 바라나시에서 구걸하던 아이들과 다르게 선명하고 맑아서 감화를 받았습니다. 이 아이들도 괴로움이 있을 텐데 마음공부나 불교를 가르치나요?
환영식 때 춤을 췄던 학생들을 보니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고 좋은 옷을 입고 있었어요. 제가 알고 있던 정보와 달라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새벽에 독송한 경전 내용 중 ’ 이치에 맞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아쉽지만 9시가 되어 내일 순례를 위해 법회를 마쳤습니다. 9시 30분에는 법사님, 스태프들과 일정에 대해 논의한 후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 예불을 올린 후 수자타 아카데미를 출발해 보드가야까지 걸어서 이동합니다. 부처님이 전정각산에서 6년간 고행하다가 고행을 멈추고 보드가야까지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오후에는 가야산을 참배하고 저녁에는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법회를 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성지순례 안내가 있었기 때문에 지난 12일 한국에서 열린 금요 즉문즉설 강연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작년에 코로나 후유증으로 심장에 무리가 와서 응급실에 실려 갔고 죽음 직전까지 경험을 했습니다. 그 짧은 찰나였는데도 ‘나는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 하는 마음속의 몸부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고비를 넘겼지만 그 뒤부터 계속 죽음이라는 화두를 안고 살았습니다. 죽음은 어느 순간 그냥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을 제가 직접 경험을 했기 때문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불교대학을 공부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여여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을 배우면서 한 줄기 빛을 만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는 돈, 직업, 커리어, 명예, 이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도 제가 경험했지만, 또 일상생활로 돌아오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시 또 돈이 필요하고, 직장에서도 더 일을 잘해야 되고, 미래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죽음이 갑자기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도 제가 만들어낸 집착일까요? 죽음이 올 때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질문자는 여여함을 아주 좋아하시네요. 질문자의 사유에 문제가 있다면 '나는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 이렇게 사물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자에게 죽음이 인생의 큰 과제가 되어버린 겁니다. 문제의 첫 단추가 거기에서 잘못 끼어진 거예요. 산을 오르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든, 교통사고가 나든, 병이 나든, 죽을 수 있는 경지까지 갔을 때는 이렇게 사물을 봐야 합니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네. 죽는 것은 간단하네!’
죽음은 어느 순간 언제든지 내 가까이에서 일어날 수 있어요. 코로나에 감염되어 죽을 수도 있지만, 길을 가다가 발을 헛디뎌서 죽을 수도 있고, 차에 치여서 죽을 수도 있고, 음식을 잘못 먹어서 죽을 수도 있어요. 우리는 죽음을 전혀 생각 안 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데, 질문자처럼 죽을 고비를 한번 겪어보면 ‘이렇게 죽을 수도 있네’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 인생을 사는 데에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직장에서 승진하려고 아등바등 안 해도 돼요. 갑자기 죽을 수도 있었는데 아등바등 경쟁해서 뭐해요? 그렇다고 직장을 다니지 말라는 게 아니라 어떤 집착도 내려놓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연애하다가 헤어졌다 하더라도 죽는 것에 비하면 그게 뭐 그리 중요해요? 갑자기 죽을 수도 있는데 연애하다가 헤어지는 정도는 아쉽기는 하지만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승진이 안 되면 어때요? 죽을 수도 있는데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그렇다고 게으르게 살라는 뜻이 아니에요.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는 별로 연연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한번 경험해 봄으로 해서 오히려 이런 여유를 가질 수가 있지 않을까요?
똑같은 경험을 해도 질문자는 '나 이렇게 죽으면 억울해' 이런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죽음이 질문자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된 겁니다. 그 상처가 지금 계속 덧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죽음을 경험하면서 '죽음이라는 게 이렇게 갑자기 올 수도 있네' 이렇게 받아들였으면 앞으로 살면서 온갖 일에 도움이 됩니다. 어쩌다가 돈을 잃어버렸다 해도 '죽기도 하는데 돈이 뭐가 중요하냐?' 하고 별일 아닌 것처럼 여기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아시는 분은 아들이 갑자기 죽었어요. 충격이 컸는데 다행히 잘 극복을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다 풀리진 않았겠죠. 자식이 죽었는데 어떻게 응어리가 풀리겠어요? 그래도 그분은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나니까 삶이 굉장히 여유로워졌습니다. 자식이 죽어도 사는데 무슨 일을 못 하겠어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 안 쓰게 되고, 남편이 죽는다고 해도 별로 신경을 안 쓰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죽는 것은 자식이 죽는 것과 그 고통이 비교가 안 되잖아요. 집에 불이 나서 손실을 입어도 마음의 여유가 있게 됩니다. 자식이 죽어도 사는데 집에 불난 게 그렇게 대수냐 이거죠. 어떤 사건이 경험으로 축적되면 이렇게 미래에도 많은 도움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는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계속 고민거리로 작용하는 겁니다. 지금은 죽을 뻔한 경험이 똥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 경험을 거름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똥을 거름으로 바꾸는 방법은 ‘이렇게도 죽을 수 있네’, ‘죽음이란 게 참 간단하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면 삶에 훨씬 여유가 생깁니다.
회사에 다니면 승진이 필요하잖아요. 그렇지만 승진에 목매달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살다 보면 인기가 필요하지만 거기에 목매달 필요는 없어요. 결혼이 필요하지만 거기에 목매달 필요는 없습니다. 건강이 필요하지만 거이에 목매달 필요는 없어요. 죽음을 한 번 경험해 본 사람은 어떤 일이 안 됐다고 쉽게 낙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보다 더 큰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큰스님들은 전부 죽을 고비를 한 번씩 넘긴 분들입니다. 부처님도 6년 동안 고행을 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나는 일체의 두려움이 없다’ 이렇게 선언하는 모습이 경전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49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예수님을 죽일 것이라고 미리 알았잖아요.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길을 갔습니다. 자살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과거의 경험을 트라우마로 갖지 말고 오히려 소중한 자산으로 삼아 보세요. ‘죽기 싫어. 이렇게 죽으면 억울해’ 하는 게 아니라 ‘죽는 게 간단하네. 이렇게 죽을 수도 있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죽음 앞에서 다른 게 뭐 그리 중요해요? 이 말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승진이 필요하면 승진을 위해 노력을 하세요. 대신 그게 안 됐다고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과거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된 사람은 ‘그런 일이 또 생기면 어떡할까?’ 하고 두려워하게 되는데, 이미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별일이 아닙니다. 비난도 처음 받을 때 힘들지 몇 번 비난을 받고 나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옛말에 ‘욕이 뭐 배 따고 들어가나?’ 이런 말이 있듯이요. 과거의 일을 상처가 아닌 경험으로 쌓아 나가면 삶에 여유가 생기고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죽음이 간단하네. 이렇게 죽을 수도 있네’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집착을 좀 내려놓으면 도화지처럼 하얀 공간이 남아 있게 될 것 같아요. 그러면 하얀 도화지 위에 어떤 그림을 채워나갈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화지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아무렇지 않게 내일 아침밥 먹고, 직장 나가면 돼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죽을 수도 있었는데 뭐 이게 대수라고’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도화지처럼 되는 것입니다. 도화지에 무슨 그림을 또 어떻게 그리려고 그래요? 자꾸 그렇게 생각하면 머리만 아파요. 좀 단순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네, 잘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