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다시 탑산사로 들어갑니다. 주지 아들하고 둘이 두 달 정도 지내게 될 것입니다. 금년에는 광주 무등산에 한 달, 독일에 한 달 묵으며 돈도 제법 썼는데 다시 집을 떠나려 생각하니 가족에게 특히 염치는 없으나 이 길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값싸고 좋은 방법으로 보이니 어찌합니까! 지금 다시 몸을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체중 8kg 감량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오래 동안 출간을 고민하던 인문학자가 수필형식으로 쓰는 [우주생성과 인간] -천문학사 입문서-를 이번에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무신론자라고 말했다기에 나는 무신론자인지 반문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범신론(汎神論. pantheism), -과학과 종교-]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직 미완성된 글이지만 마음에 들면 위에 말한 천문학 입문서에 끼어넣을 생각입니다. (첨부파일)
범신론(汎神論. pantheism) - 이 재 진 (전 단국대 교수)
-과학과 종교-
2010년 독일 여행 중 여러 도시를 들렀지만 도나우 강이 제법 크게 흐르기 시작하는 울름(Ulm)도 찾아갔다. ‘울름의 재단사’와 아인슈타인이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카로스(Ikaros)부자의 이야기를 신화라 치부한다면 울름의 재단사(Ulmer Schneider)가 인간으로서는 최초로 기구를 사용하여 하늘을 날고자 했던 비행사이다. 도나우 강변을 따라 걷고 또 걸었지만 공사 중이어서 그런지 1811년 날아서 강을 건너다 추락한 재단사의 발자취는 찾아보기 싶지 않았다. 조금 언덕진 곳에 간신히 아주 조그만 명패를 찾았다. (이 사람에 대해 브레히트는 짧은 시를 썼다. 그 시는 많은 뜻을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다음 기회에 함께 읽어보도록 한다.) 아인슈타인의 생가는 바로 정거장 앞에 있다. 몇 갈래 대리석 기둥으로 얼기설기 세워 놓은 아인슈타인의 생가역시 재단사의 흔적만큼이나 쓸쓸했다. 물론 전후 독일은 위대한 천체물리학자가 살던 집을 거창하게 짓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후손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을 추방하고 국적을 박탈했던 독일을 아인슈타인은 조국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여행을 끝내고 귀국하면서 뒤쎌도르프 역에서 책을 한 권 샀다. [虛想의 神](우리의 경우 [만들어진 신]으로 번역 출판됨)이란 도킨스(Richard Dawkins. The God Delusion)의 책이다. 책 겉표지에 도킨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종교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종교는 우리를 안심시키고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교(기독교)는 우리를 현혹시키고 현실에 안주케 하고 결국 현실을 직시할 능력을 빼앗아간다는 이런 생각은 브레히트의 희곡작품 [도살장의 성 요한나]의 핵심주제이다. 내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대사지만 이 보다 더 무서운 대사를 나는 읽어본 적이 없다.
요한나
그러니 누군가 아래에서
하느님은 계시다고
그렇지만 아무에게도 보이지는 않는다고
보이지는 않으시나 자기들을 도와줄 거라고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사람의 머리는 아스팔트에 태질을 처야 할 것이다.
도킨스는 무신론자(atheist)인가?
누군가 내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됐지만! 하지만 나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 친구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내가 믿지 않기에 나를 무신론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무신론자는 아니다. 그렇다, 나는 성경의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 독일에서 10분정도 독일어로 강연하는 과제를 수행했다. 발표내용은 모두 생각이 나지 않으나 그 가운데 니체를 흉내 내며 “신은 늙었다!”라고 흥분한 부분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하기야 우주가 약 137 억 년 전에 창조되었다니 창조주의 나이도 꽤나 많이 먹은 것이 틀림없다.
NASA의 과학자들에게 ‘신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다수가 신은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 역시 신의 존재를 믿는다. 하늘의 신비를 찾아내려고 천문학 책을 늘 가까이 하는 작은 과학자로서 나는 우주를 창조한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를 인정하려면 시작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위해서는 어떤 형태든 시작을 있게 한 그 무엇인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간이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인문학자로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 와 있는지 무대에서 끈임 없이 실험을 통해 그 의문을 규명해 보려는 연극쟁이로서 우주의 창조주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호와(Jahwe)를 나는 믿지 않는다. 소돔과 고모라를 잿더미로 만든 여호와는 너무나 무책임하고 잔인하기 때문이다. 돌아보지 말라는 말 한마디를 어겼다고 죄 없는 여인을 소금기둥으로 만들어 버리는 하나님은 너무 무정하기 때문이다. 인디언을 죽일 때 백인들의 총부리에 달라붙어 탈환을 아까워하며 죽임을 응원하던 여호와는 너무나 무섭기 때문이다. 신부들은 두꺼운 성경 밑에 일식, 월식이란 몇 가지 천문학 지식을 챙겨 넣고 몽매한 아프리카를 찾아들어갔다. 슈바이처는 한 손에는 청진기를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었다. 검은 아프리카를 하얗게 만든 하나님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편파적이다. 내가 여러 번 소개한 신정론(神正論)을 읽으며 비교해 보시라!
유태인은 전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세례를 받는다. 아인슈타인은 알베르트(Albert)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는 유태인의 전통과 관습과 규율에 예속되었던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 속(종교적 자유)에서 자란 알베르트는 뉴턴 이후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을 성취할 수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종교관 역시 이런 정신적으로 넓게 트인 가정 분위기 속에서 점차 생성되었을 것이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아인슈타인의 어록 중에는, “종교를 배제한다면 학문은 절름발이(lame)가 된다, 하지만 학문을 도외시하면 종교는 눈먼 장님(blind)이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우리와 친교 하는, 감정을 들어내는 인격화된(anthropomorph) ‘살아있는’(persönlich) 하나님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에게서 종교적인 냄새가 난다면 그것은 오직 이 세상의 오묘한 구조에 대한 경건함에서 베어 나왔을 것이라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우주의 구조와 같은 오묘함은 종교가 아니라 자연과학이 밝혀야 될 학문의 몫이라 아인슈타인은 생각한다. ”나는 엄청 믿음이 깊은 비종교인이다.“ 라고 익살스럽게 말한 적도 있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가장 크게 갈라지는 곳은 바로 진화의 목적성(teleology)에 있다. 신이 뜻을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론과, 결과를 보고 그 어떤 원인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진화론과의 차이점이 핵심이다. 아인슈타인도 자연(우주)에 어떤 목적이나 목표가 설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은 너무나 인위적이고 인간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자연에서 보고 느끼는 것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파악할 수없는 엄청남 규모의 구조이다. 사료 깊은 인간이라면 이 앞에서 겸허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마음이 바로 순수한 종교적 마음가짐일 것이다. 이런 마음은 신비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 부분에서 도킨스 역시 자신도 종교인이라고 고백한다.
세상만사에 개입하는, 우리들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살아있는, 인격화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아인슈타인이 공언하자 미국의 종교계는 격앙되었다. 구약의 뿌리를 둔 유대인으로 태어난 아인슈타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부인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여호와를 믿는 것은 너무나 낯설고 너무나 감상적으로 다가온다고 말한다. 미국 신학계나 보수주의진영에서의 비판과 비난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어느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면 그 분야에서는 대가로서 발언권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모든 분야에 끼어들어 떠들 수는 없는 일이라며 아인슈타인의 ‘종교적 무지’를 성토했다. 즉 아인슈타인은 신학을 연구한 적이 없으니 신의 존재를 이해할 이도 없고 신의 문제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비판했다. 심지어 그런 생각을 공공연히 떠들려면 말도 못 꺼내던 그곳, 고국 독일로 돌아가라고 협박했다. “당신의 그 엉터리 진화론 타령일랑 집어치우고 당신이 도망쳐 나왔던 독일로 다시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려면 당신을 따뜻하게 받아준 이 나라의 시민들의 믿음에 망치려들지 말던지.”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관을 코미디로 격하시키는 가혹한 비판까지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cosmic religion)에는 철자가 하나 잘못 되어 있다. ‘s’자를 빼고 ‘우스꽝스런 종교’(comic religion )라고 써야 맞다.”
아인슈타인은 무신론자(無神論子. Atheist)일까? 아니면 유신론(有神論. Theism), 이신론(理神論. Deism),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에 가까울까? 아인슈타인은 공개적으로 스피노자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하나님이 아닌, 생명체에 자연법칙에 따른 조화를 행사하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다면 아이슈타인은 범신론에 가깝다. 유신론자는 이 세상을 창조한 전능한 초능력자를 믿는다. 그런 하나님은 항상 창조물의 운명을 관리하고 주관한다. 기도를 들어주고 용서하고 벌을 주고, 기적을 행사한다. 이신론자들도 초능력자인 실체를 믿지만 그 하나님은 어떤 법칙을 세워놓고 그 이후로는 일체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신론자들의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 벌하고 인간의 회개를 듣고 용서해 주지도 않는다. 기적을 행사해 주지도 않는다. 범신론자들은 초능력의,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범신론자들이 생각하는 신은 우주를 주관하는 자연법칙의 대명사이다. 이신론자들은 범신론자들처럼 신을 초자연적 능력자로 여기는 반면 범신론자들은 신을 우주법칙의 상징적 혹은 비유적 의미로 사용한다. 범신론이 무신론의 변종이라면 이신론은 유신론의 아류다. (일시 중단)
* 본 글은 이보生의 선배이신 이재진 전 단국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님이 보내오신 글입니다.
첫댓글 .............!!!!!!!!!!
평소에 궁금했던 점이 조금 이해 할수 있을 듯한 글이였어요 신이 없이도 무탈하게 다스려진 종교도 있는 반면 신이 있는데도 왜 그리 큰일들을 치러야 했을까?윗글처럼 인디언들의 잔인한 죽음 검은 아프리카를 하얗게 만든 ..마녀사냥..지금도 끝없이 자질구레 다툼이 들끓는 중동지역..왜 그런 무서운 일을 신께서 허락 했을까?하는 의문점 그게 유신론,이신론,범신론의 하나님이 있으셨군요.가끔 다른데도 왜 느낌이 비슷하지하고 의문이 있었는데 이런게 범신론자의 하나님도 있으셨구나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그렇다면 과학이 발달한시대 유신론은 과학과 잔잔한 충돌..스피노자의 하나님은 과학과는 충돌이 많지 않겠다 싶네요
인간에게 일어난 일을 신이 해결해 주시것이라는 즉 외부 밖에서 찾으려는 것과 그 일이 내부가 아닌 외부 안에서 찾으려는 것 ..이시대에 맞는 기도의 길은 무엇인지...
좋은 글 감사하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