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치솟는 쌀값, 구두값...고물가에 신음하는 샐러리맨
조선일보 2024. 12. 21
20세기 전반 등장한 샐러리맨 계층, 요즘처럼 연휴 기다리는 맛에 살아
20세기 들어 경성에도 샐러리맨 계층이 대거 등장했다.1930년대 중반 전시 물자통제로 가죽값이 오르자 구두값이 월급 절반인 20원, 30원까지 폭등해 한숨을 쉬게 했다. 박봉의 샐러리맨들은 구두코가 찢어져도 새 구두 한 켤레 살 엄두를 못내고 전전긍긍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1920년대만 해도 조선은 농업국가였다. 하지만 경성같은 대도시엔 샐러리맨 계층이 대거 형성됐다. ‘경성 조선사람 직업중에서 제일 많기는 전기한 바와 같이 상업의 8만4000여명이 제일 많고, 관리, 공리 등 월급생활하는 사람 4만8437명이 다음으로 많다.’(대경성생활기2, 조선일보 1924년11월6일) 1923년말 조사 기준으로, 경성의 조선인 공직(公職·공무원)및 자유업 월급생활자는 4만8437명(남 2만4839명, 여 2만3598명)으로 상업 종사자 8만4454명 다음으로 많았다.
◇ 월급쟁이의 사치 넥타이
양복 걸친 월급쟁이들이 누릴 수 있는 사치는 많지 않았다. 넥타이는 적은 돈으로 누리던 멋이었다. ‘인텔리, 더구나 월급쟁이에게는 이 넥타이가 그 너절한 월부 양복의 값을 올리는 ‘레텔’이라는 것보담도 그 자신의 품격, 취미의정까지도 말하는 것이다. 50전짜리 넥타이가 잘 팔리는 것은 이들의 각일각으로 변하는 식견때문이라 할까, 갈급한 문화욕때문이라할까, 기름때 묻은 칼라에도 새롭고 깨끗한 넥타이가 달려있음이 우습다.’ (푸른 기폭, 50전짜리 넥타이, 조선일보 1934년5월13일) 만문만화가 안석주는 양복쟁이들의 멋을 쓸쓸하게 표현했다.
월급쟁이 신사의 유일한 사치품은 넥타이였다. 박봉과 고물가에 시달리는 샐러리맨들의 유일한 낙은 요즘처럼 '이틀 거푸 노는' 연휴였다. 만문만화가 안석주가 쓰고 그린 작품이다. 조선일보 1934년5월13일자
◇ 연휴 목매고 기다리는 샐러리맨
연휴 고대하는 샐러리맨들의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듯하다. 당시 신문에도 새해가 오면, 그해 연휴를 헤아리는 기사가 났다. 일요일 휴무조차 생소하던 시절, 연휴는 월급쟁이들만 누리는 사치였다. 1931년은 ‘월급쟁이에겐 축복받은 해’였다. 공휴일이 일요일과 겹치는 날이 하루도 없고, 이틀 연휴가 네번이었다. 하루 건너 휴일도 세번이나 있었다. ‘샐러리맨에게 반가운 이틀 거푸 노는 날’(조선일보 1931년1월4일)이 기사 제목이었다.
◇ 월급만 안오르고 다 오르는 인플레이션
1930년대 들어 물가가 폭등하자 월급쟁이들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인푸레 경기를 가는 곳마다 말하고 있으나 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노동 임금은 이에 따라 조금도 오르지 않아 지난 1월중의 노동 임금의 지수는 의연히 149.46으로 재작년 12월 이래 물가가 2,3할 심한 것은 5할까지 폭등한 것과는 관계 없이 1년이상이나 조금도 변동이 없으니 결과로 본다면 노동자와 월급생활자에게는 비상한 타격이다.
물가가 오르는 것 만큼 노동 임금과 월급이 오르지 못하게 됨으로 사실상 받는 수입은 실질상으로 적어진 셈이니 일반 서민 근로계급의 생활에는 큰 위협이다.’(인프레 경기도 월급쟁이엔 눈물,조선일보 1934년3월6일)
월급은 제자리신세라 푸념만 늘었다. ‘물가는 오른다 오른다 하니 대체 얼마나 오르다마는고. 백가지 물가가 다 오른다는데 오르지 않는 것은 월급쟁이 봉급뿐이라고. 물가가 오르니 오른 만큼 봉급은 깎이운 셈이라 이래서야 되겠는냐고’(딱총, 조선일보 1938년5월4일)
박봉의 샐러리맨은 연말이면 밀린 빚 독촉하러 오는 사람들로 포위당했다. 연말 보너스는 빚잔치로 끝나기 일쑤였다. 안석주가 월급쟁이들의 비애를 쓰고 그렸다. 조선일보 1928년 12월18일자.
◇ 쌀값 폭등에 시름
당장 입에 풀칠 할 쌀값부터 폭등했다. 두달만에 세번이나 쌀값이 오른 것이다. ‘지난 달 이래로 두번씩이나 백미(白米)의 판매 가격을 올린 경성 시내 각 공설시장은 8일에 이르러 세번째 다시 올리게 되어 매 킬로그램에 5리씩을 또 올렸다.
그 이유인즉 현미의 시세가 지난 달 이래로 출회의 감소로 등귀하는 일면을 계속하여 왔는데 6월이 되면서 더욱 공급이 달리는 경향을 보여 전번에 21원20전을 보이던 것이 이미 22원50전의 고가를 보여 1원30전의 등귀를 보였는데, 저장조(貯藏租)의 해제가 되기 전에는 오르는 시세가 그대로 지속되겠다 하여 그와 같이 올린 것이라는 바 봉급생활자는 물론 일반 세궁민의 생활상 영향되는 바가 크다고 한다.’ (월급쟁이 죽여내는 천정 모르는 쌀값, 조선일보 1934년6월9일)
풍작인데도 쌀 공급을 늘리지 않고 소위 ‘미곡통제’로 가격을 조절하는 총독부 정책을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쌀 한 가마니에 11원80, 90전, 월급쟁이 못살겠다는 소리가 풋득풋득 들린다…풍작에 먹을 쌀이 없어 걱정, 소위 미곡통제의 은택이랄까’.(풍문첩, 조선일보 1934년6월12일) 월급쟁이들도 문제지만, 농민들도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쌀은 이미 팔아치웠고 먹을 쌀을 사먹어야 할 때가 왔는데 총독부의 고미가(高米價)정책 때문에 지출만 늘어나게 된 것이다.
◇ 치솟는 구두값에 한숨만
1937년 7월 중일전쟁으로 전시(戰時)체제가 들어서면서 월급쟁이들의 고통도 심해졌다. 물자통제 탓에 가죽 값이 올라 구두값도 덩달아 폭등한 것이다. ‘도야지(돼지) 가죽까지 통제하는 세상이라 소가죽값이 오를 것은 정한 이치이겠만 구두 한 켤레에 20원이니 30원이니 하는 통에 기약한 월급쟁이들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관만 하고 있다는 것도 그럴 것이,기껏 받아야 40,50원 받는 책상물림 샐러리맨들이 월급의 절반을 털어넣기 쉬운 일인가.’
하지만 샐러리맨으로서 초라하게 다닐 수도 없으니 이래저래 고민만 늘었다. ‘갓을 쓰고 옷을 입고 신발을 걸맨다는 데 관심이 없어서는 도시 생활에 군색한 꼬락서니를 면치 못하기 때문에, 금방 발가락이 신 코밑으로 삐죽 나온대도 조바심치면서 선뜻 구두 한켤레 새로 장만 못하는 심정 누가 알아주리오.’(이상 색연필, 조선일보 1938년6월23일) 집값, 학원비, 음식값 상승으로 고물가에 시달리는 샐러리맨들의 처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