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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찬경, 「『수경주(水經注)』를 통한 고구려 평양의 위치 검토」『국학연구』제21집, 2017.12.
『수경주(水經注)』를 통한 고구려 평양의 위치 검토
임찬경(국학연구소 연구원)
* 이 논문은 2017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이다(AKS-2014-KFR-1230006).
[목차]
1. 서론
2. 『수경주』권14 「패수」 관련 기록의 원천적 오류
3. 『수경주』를 인용한 후대 학자들의 패수 및 평양 관련 서술의 오류
4. 『수경주』를 통한 고구려 평양의 위치 검토
5. 결론
[국문개요]
『수경주』의 원문 전체에는 평양이란 지명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바로 역도원 당시의 지명인 평양으로 비정할 대상이 『수경주』에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역도원이 비정하려던 패수가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 일대에 있었다면, 역도원의 『수경주』에 평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의 지명을 현재의 지명으로 비정(批正)해 주어야, 고대를 현재와 연관시켜 이해하는 지리서로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서술을 종합해보면, 역도원이 『수경주』를 쓸 당시에, 역도원이 패수로 비정하려는 현재의 대동강 일대에는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이 절대 없었다. 그 때문에 역도원의 『수경주』「패수」에 평양이란 지명이 언급되지 않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역도원이 『수경주』를 쓸 당시에 고구려의 평양은 어디에 있었는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주제어] 水經. 浿水, 水經注, 酈道元, 衛滿朝鮮, 樂浪, 卒本, 平壤, 平壤城, 遼陽
1. 서론
패수(浿水)는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조선열전」에 처음 사용된 물길의 명칭이다. 서기전202년 한(漢)이 건국된 이후 연(燕) 지역과 조선의 경계로 정해진 것이 패수였다.주1) 패수는 조선의 역사 해석과 관련하여 중요한 지명임에도 불구하고, 관련 문헌의 기록이 적다. 『사기』 이후에 서한(西漢) 말기의 상흠(桑欽)이 그의 『수경(水經)』에 단지 18자로서 그 물길이 어느 지점에서 어느 방향으로 흐르다 바다로 들어간다고만 기록했다. 그리고 북위의 역도원(酈道元)은 『수경』의 패수가 바로 현재 한반도의 대동강이라고 『수경주(水經注)』권14 「패수」에 간략하게 서술해 놓았다.
조선시대에 『수경주』는 문인들에 의해 여러 경우의 서술에 두루 활용되었다. 고대의 조선이나 낙랑과 관련한 서술에는 『수경주』의 인용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 비록 관점의 차이는 있지만, 패수가 한반도 서부 지역 어느 하나의 물길이라는 인식이 공유되어졌다. 역도원 『수경주』의 패수가 조선시대에 한반도 안의 어느 물길로 정착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위만조선을 대동강 아래에 위치시키는 유사 이래 최대의 한국사 왜곡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필자는 여러 상황을 검토하여, 이미 오래전에 『수경주』의 패수는 한반도에 있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여러 문헌으로, 서기전195년 위만이 망명하기 위해 건넜던 패수가 한반도 안에 있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수경주』의 패수는 역사사실로서 논할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확실히 『수경』의 패수와 『수경주』의 패수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본고에서는 『수경주』의 원문 중의 “其地今高句麗之國治,余訪番使,言城在浿水之陽”이란 부분의 해석을 통해, 역도원 시기의 고구려 도읍인 평양이 어느 지역에 있을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분명히 『수경주』의 원문 전체에는 평양이란 지명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지리서에서는 고대의 어느 곳인지 잘 알지 못하던 지명을 탐색하여, 현재의 어느 지명에 비정(比定)하는 작업을 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독자들은 고대의 지리를 현재와 연관시켜 이해하는 것이다. 『수경주』의 전체에서도 그런 서술이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수경주』의 원문 전체에 평양이란 지명이 없는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바로 역도원 당시의 지명인 평양으로 비정할 대상이 『수경주』에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역도원이 비정하려던 패수가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 일대에 있었다면, 역도원의 『수경주』에 평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의 지명을 현재의 지명으로 비정(比定)해 주어야, 고대를 현재와 연관시켜 이해하는 지리서로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서술을 종합해보면, 역도원이 『수경주』를 쓸 당시에, 역도원이 패수로 비정하려는 현재의 대동강 일대에는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이 절대 없었다. 그 때문에 역도원의 『수경주』「패수」에 평양이란 지명이 언급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도원이 『수경주』를 쓸 당시에 고구려의 평양은 대동강 일대가 아닌 그 어디에 있었는가? 본고에서는 이 문제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주1) 『史記』卷115 「朝鮮列傳」第55 “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
2. 『수경주』권14 「패수」 관련 기록의 원천적 오류
1) 『수경주』란 역사지리서의 기본적 오류
중국 고대 하천의 대략적인 흐름을 기록한 『수경』의 저자와 그 작성연대는 분명하게 전하지 않는다. 여기저기 전하는 설(說)을 종합하여, 일찍이 남송(南宋, 1127년∼1279년)의 저명한 목록학가(目錄學家)인 진진손(陳振孫)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주2)
『수경』 3권은 상흠(桑欽)이 지었고, 『수경주』 40권은 후위(後魏)의 어사중위(御史中尉)인 범양(范陽)의 역도원(酈道元) 선장(善長)이 주석(注釋)을 붙인 것이다.주3) 상흠은 어느 곳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 『한단서목(邯鄲書目)』에는 한인(漢人)이라 했고, 조공무(晁公武)는 성제(成帝, 서기전51∼서기전7년) 때의 사람이라 말했으니, 마땅히 근거가 있는 말일 것이다.주4) 『당지(唐志)』에서 주(注)를 달거나 혹은 말하기를 곽박이 지었다고 했다.주5) 또 두우(杜佑, 735∼812년)의 『통전(通典)』에 의하면, 『수경』은 진(晉)의 곽박(郭璞, 276∼324년)이 주석했는데 2권이었고,주6) 후위의 역도원이 40권으로 주석하였는데, 모두 지은 자의 이름이 상세하지 않고, 또한 어느 시기의 책인지도 알지 못한다.주7)
역도원은 『수경』의 서술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자 『수경주』를 작성하였다. 특히 『수경』의 서술이 거칠면서도 간략하고 또 누락된 부분이 심하다고 비판하고, 자신이 그를 보완하려 했다. 또한 『수경』을 포함한 지난 시기의 지리 관련 저서들의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목적으로 『수경주』를 작성하였다.주8) 보완과 오류의 정정(訂正)이라는 편찬 동기에 맞게, 『수경』에서는 135개 하천의 물길을 서술했지만, 『수경주』에서는 3,000여 개의 하천이 서술되었다.주9)
그에 따라 『수경』은 3권으로의 구성에 내용은 1만여 자에 불과하였지만, 『수경주』는 40권에 32만 자로 재구성되었으며, 당연히 인용한 문헌자료도 매우 풍부해졌다. 그러므로 후대의 학자들이 배송지(裴松之, 372∼451년)의 『삼국지주(三國志注)』 및 유효표(劉孝標, 463∼521년)의 『세설신어주(世說新語注)』와 함께 『수경주』를 3대 ‘주사(注史)’의 명작으로 부르게 되었다. 사실, 역도원의 주석은 단순히 주(注)를 덧붙이는 범주를 넘었으며, 자못 창의성을 갖춘 재창작의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수경주』는 비록 전문적인 지리서(地理書)이지만, 그 작용과 가치는 지리학에 그치지 않고, 역사학 심지어 문학에서도 일정한 지위를 지니고 있어, 사람들에 의해 『수경주』는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기이한 서적[宇宙未有之奇書]”으로도 불리게 되었다.주10)
그러나 『수경주』가 지리적, 역사적 혹은 문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훌륭한 저작임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결함 또한 많이 지닌 저작임을 부정할 수 없다. 아마도 1천5백여 년 이전의 지리서로서, 서술하는 범위가 넓고, 언급한 자료가 방대하다보니, 크고 작은 서술의 오류들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역도원은 대량의 하천을 지리적으로 언급했는데, 단지 당시의 조건과 인식의 수준에 근거하여 서술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조건은 끊임없이 변화되고 또한 사람들의 지리환경에 대한 인식 수준 또한 높아지면서 후대의 학자들이 『수경주』의 오류를 발견 및 비판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오히려 정상적인 것이다.주11)
『수경주』에 대한 비판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801년에 완성된 『통전』에서는 황하의 발원지와 제수(濟水) 및 하수(菏水) 그리고 분수(汾水) 등에 대한 『수경주』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수경주』에 적힌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매우 황당하고 전혀 근거가 없다.”고 혹평하고 있다. 또한 『수경주』는 황하의 발원지에 대해 『산해경(山海經)』이나 『사기(史記)』 및 『한서(漢書)』 등의 기록을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한 측면이 있는데, 두우(杜佑)는 그 점에 대해서도 “역도원은 모두 자세히 살펴 바로잡지 못했다[酈道元都不詳正].”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주12)
『수경주』가 황하 이남의 하천에 대해 서술할 때 특히 많은 오류를 보인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일찍이 청(淸)의 지리학자인 유헌정(劉獻廷, 1648∼1695년)은 『수경주』가 북방의 여러 하천을 서술할 때는 작은 사실도 빠뜨리지 않지만 남방의 장강(長江). 회수(淮水), 한수(漢水), 면수(沔水)에 대해서는 오류가 많다고 비판하였다. 역도원은 북방 사람이기 때문에 남방의 물길에 대해 눈으로 보지 못했고, 작은 것들이 개별적으로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며, 이러한 점을 잘 살펴가며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주13)
그러나 위의 지적과는 달리, 실제로는 북방의 물길에 대한 『수경주』의 서술에서도 숱한 오류가 발견되기는 마찬가지다. 북방이란 범위가 매우 넓고, 하천도 몹시 많기 때문에, 자료수집과 역도원의 직간접적 체험 역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역도원은 『수경주』권14에서 유수(濡水)를 지금의 난하(灤河)로 비정하여 서술하고 있지만, 그 발원지에 대한 서술 부분에서부터 일종의 오류에 빠졌거나 혹은 지나치게 간략하다는 후대의 비판을 받고 있다. 즉 『수경주』에서 “유수는 어이진(禦夷鎮) 동남쪽에서 나온다. 그 물은 두 곳의 원천이 두 개의 물길이 되어, 산을 끼고 서북으로 흐르며, 산을 나와 합쳐서 하나의 하천을 이룬다.”고 서술했는데,주14) 이에 대해 대진(戴震, 1724∼1777년)은 “역도원은 당시에 직접 그 곳을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산을 끼고 모인 삼도하(三道河)를 난하의 발원지로 알았는데, 전혀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다.”라고 비판했고, 웅회정(熊會貞, 1859∼1936년)은 독석구(獨石口) 동남쪽의 산 속에서 발원하는 삼도하가 하나로 모여 하나의 하천이 되는데 역도원은 단지 2개의 원천을 두 개의 물길로 불렀으니 지나치게 간략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주15)
위에 예로 든 『수경주』권14에서 역도원은 지리적 인식 오류와 함께 고대 문헌에 대한 이해의 오류를 동시에 드러내기도 했다. 즉 유수(濡水)를 설명하던 역도원은 『수경주』에서 제(齊)의 환공(桓公)이 고죽(孤竹)을 정벌하러가는 고사(故事)를 인용하며 “비이산(卑耳)의 계곡에 이르렀을 때 찬수(贊水)가 있었다.”고 했고, 그 문장의 뒤에 “비이의 하천인 찬계(贊溪)라는 것 역시 그 위치를 알 수 없다.”고 서술했다.주16) 역도원은 『관자(管子)』에 나오는 “비이의 계곡에 이르렀을 때, 물을 건너게 도와주는 자가 있었다[至卑耳之谿,有贊水者].”란 문구에서 ‘찬수(贊水)’ 즉 “물을 건너게 도와주는 자”란 표현을 잘못 이해하여, ‘찬수(贊水)’란 물길이 비이의 계곡에 있었던 것으로 오해했다. 지리적 인식도 잘못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관자』란 문헌의 그 부분을 완전히 잘못 해석한 것이다.
[도표 1] 『수경주도(水經注圖)』의 평륙현 및 뇌수산 고죽 유적 일대 지도(중국 산서성)
비이산이나 찬수(贊水)에 관련된 역도원의 인식 오류에 대해, 조일청(趙一淸, 1709∼1764년)은 “『사기(史記)』「제세가(齊世家)」에서 환공이 말하기를 자신은 남쪽으로 소릉(召陵)과 망웅산(望熊山)을 정벌하고, 북쪽으로 산융(山戎)과 이지(離枝) 및 고죽을 정벌했으며, 서쪽으로 대하(大夏)를 정벌하고 유사(流沙)를 건넜다. 말을 묶고 수레를 매달아, 태항산에 오르고, 비이산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비(卑)의 음(音)은 벽(辟)이라 했는데, 이것이 옳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비이산은 하동(河東)의 태양현(太陽縣)에 있다고 했다. 『방여기요(方輿紀要)』에서 비이산은 산서(山西)의 평륙현(平陸縣) 동쪽에 있다고 했다([도표1] 참조). 환공이 서쪽으로 정벌하며, 태항산과 비이산에 올랐는데, 마땅히 한(漢)의 태양현에 있다. 그러나 역도원은 산골짜기의 이름으로 인식하여 유수(濡水)에 기록했다. 『관자』의 구절을 인용했는데, 그것을 적은 것은 서로 맞지만, 두 지역은 완전히 다른 것이며, 그것을 잘 알지 못한 것이다.”라고 비판했다.주17) 그런 지리적 인식의 오류와 함께 『관자』의 원문을 잘못 이해하여 난하 주위의 어느 곳에 비이의 계곡과 함께 ‘찬수(贊水)’가 있었다고 엉뚱하게 서술했던 것이다.
주2) 중국의 목록학은 서한(西漢) 무렵부터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고대 중국에서 중요시하는 학문 분과 가운데 하나이다. 그 내용은 서지학(書誌學)과 도서관학을 포함한다. 자료로서 완비된 서적 목록을 작성하고, 그 자료를 활용하여 한 시대 또는 몇 시대에 걸친 학술 전승(傳承)의 계통을 정확히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청(淸) 건가(乾嘉) 시기의 저명한 사학자이며 고거학가(考據學家)인 왕오성(王嗚盛)은 그의 저서인 『십칠사상각(十七史商榷)』에서 “목록학은 학문 중 가장 긴요(緊要)한 것이다. 반드시 이곳으로부터 길을 물어야, 비로소 문(門)을 얻을 수 있고 또 들어갈 수 있다(目錄之學, 學中第一緊要. 必能此問途, 方能得其門而入).”라며 목록학의 학문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姚名达著, 『目录学』. 商务印书馆, 1934, 7쪽).
주3) 선장(善長)은 역도원의 자(字)이다.
주4) 조공무(1105∼1180년)는 남송 시기의 저명한 목록학가이며 장서가이다.
주5) 여기에서의 『당지』는 『신당서』의 「예문지」를 말한다(『新唐書』卷58 「志」第48 藝文2 “桑欽水經三卷一作郭璞撰. 樊文深中嶽潁州志五卷, 酈道元注《水經》四十卷.”
주6) 여기에서의 “2권”은 진진손이 잘못 기록한 것임이 분명하다. 『통전』의 원문에는 분명히 “진의 곽박이 3권으로 주석하였다.”고 기록하였다(『通典』 「州郡」4 風俗 “按水經,晉郭璞注三卷,後魏酈道元注四十卷,皆不詳所撰者名氏,亦不知何代之書。”).
주7) 『直齋書錄解題』卷8 地理類 “『水經』 三卷, 『水經注』 四十卷, 桑欽撰. 後魏御史中尉范陽酈道元善長注. 桑欽, 不知何人. 『邯鄲書目』以爲漢人. 晁公武曰成帝時人, 當有所据. 案『唐志』注或云郭璞撰. 又杜氏『通典』案『水經』, 晉郭璞注, 二卷. 後魏酈道元注, 四十卷. 皆不詳所撰者名氏, 亦不知何代之書.”
주8) 徐中原, 「郦道元撰著《水经注》之因探析」『吉林师范大学学报:人文社会科学版』2011年第4期, 42쪽.
주9) 그간 『당육전(唐六典)』에 근거하여, 『수경주』에서 1,252개 하천의 물길을 분석했다고 서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 통계에 근거하여 호(湖), 정(淀), 택(澤), 천(泉), 거(渠), 지(池), 고독(故凟) 등 모두 2,596개의 물길 관련 명칭이 『수경주』에서 언급되었다는 연구가 있다. 『수경주』의 원문은 북송(北宋) 시기에 5권이 유실되었는데, 뒤에 남은 35권을 다시 40권으로 재구성하였다. 그러므로 북송 때 5권이 유실되기 이전의 『수경주』에 기록된 물길은 대략 3천 개를 넘는 것으로 볼 수 있다(赵永复, 「《水经注》究竟记述多少条水」『历史地理』第二辑, 1982, 115쪽).
주10) 古今, 「《水经注》简介」『-历史教学问题』1986年第1期, 59쪽.
주11) 陈桥驿, 「第十章 《水经注》的错误和学者的批评」『郦道元评传』, 南京大学出版社, 1997, 참조.
주12) 『通典』「州郡」4 風俗 “按水經云… 詳水經所作,殊為詭誕,全無憑據。”
주13) 『廣陽雜記』卷4 “予嘗謂酈善長天人,其注水經,妙絶古今,北方諸水,毫發不失. 而江、淮、漢、沔之間,便多紕繆。酈,北人,南方之水,非其目及也。小别不知在何許,更考之。”
주14) 『水經注』卷14 濡水 “其水二源雙引,夾山西北流,出山,合成一川 濡水出禦夷鎮東南,其水二源雙引,夾山西北流,出山,合成一川。
주15) 『水經註疏』卷14 濡水 “戴云,按濡水即今灤河,源出巴延屯圖古爾,山名都爾本诺爾,西北至茂罕和碩,三道河始自東會之。道元當时未經親履其地,遂以夹山来會之三道河为灤河正源,殊屬失實。會貞按,今上都河發源獨石口東南山中,舊名三道河,其水一出摩霍爾達巴罕,一出伊克達巴罕,一出楚庫爾蘇達巴罕,各相距十餘里,滙爲一河。道元但稱二源雙引,猶略也。戴氏不知此爲滦河正源,遂爲酈氏未親歷其地而駁之,不知籌宜六鎭明見本傳,何得謂未親歷其地耶?”
주16) 『水經注』卷14 濡水 “又按管子,齊桓公二十年,征孤竹,…至卑耳之溪,有贊水者,從左方涉,其深及冠;右方涉,其深至膝。已涉大濟,桓公拜曰:仲父之聖至此,寡人之抵罪也久矣。今自孤竹南出,則巨海矣,而滄海之中,山望多矣,然卑耳之川若贊溪者,亦不知所在也。”
주17) 『水經註疏』卷 濡水 “趙云, 按史記齊世家云,桓公稱曰,寡人南伐召陵、望熊山,北伐山戎、離枝、孤竹,西伐大夏,涉流沙。束馬懸車,登太行,至卑耳山還。定義云,卑音辟,是也。索隱曰,卑耳山在河東太陽縣。方輿紀要,卑耳山在山西平陸縣東。桓公西伐登太行、卑耳,宜在漢之太陽,而道元以为溪名,記于濡水,是因管子之文,相仍書之,兩地懸殊,未知熟是也。”
2) 『수경주』「패수」 관련 기록의 오류
역도원의 『수경주』권14 「패수」 관련 기록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❶ 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于海。
❷許慎云,浿水出鏤方,東入海。一曰出浿水縣。
❸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鏤方縣在郡東。❹蓋出其縣南逕鏤方也。❺昔燕人衛滿自浿水西至朝鮮。❻朝鮮,故箕子國也。箕子教民以義,田織信厚,約以八法,而不知禁,遂成禮俗。❼戰國時,滿乃王之,都王險城,地方數千里,至其孫右渠,漢武帝元封二年,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討右渠,破渠于浿水,遂滅之。❽若浿水東流,無渡浿之理,其地今高句麗之國治,❾余訪番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漢武帝置,而西北流。
❿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⓫又漢興,以朝鮮為遠,循遼東故塞至浿水為界。⓬考之今古,於事差謬,蓋經誤證也。
역도원은 『수경주』에서 패수(浿水)를 한반도에 있는 대동강에 비정(比定)하려 시도했다. 즉 역도원은 고대의 대동강 일대에 기자(箕子)가 와서 교화(敎化)한 조선이 있었으며, 뒤에 위만이 이곳에서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했고, 한(漢)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켜 낙랑군을 설치했는데, 왕험성이나 낙랑군의 군치(郡治)인 조선현이 모두 패수 일대에 있다는 것이다. 『사기(史記)』「조선열전」에 기록된 패수가 바로 현재의 대동강이라는 것이다.
역도원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써 『사기』「조선열전」, 『수경』, 『한서』「지리지」, 『설문해자(說文解字)』, 『십삼주지(十三州志)』의 기록을 인용했다. 또한 고구려로부터 온 사신에게 물어 들은 대답도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역도원이 제시한 이들 근거 대부분은 오히려 패수가 현재의 대동강 일대에 있을 수 없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우선 위에 인용한 『수경주』권14 「패수」의 원문에서 ❶부분은 『수경』의 기록인데, “패수는 낙랑 누방현(鏤方縣)을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고,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분명하게 기록했다. 서쪽으로 바다에 흘러드는 한반도의 대동강을 패수와 연결시키려는 역도원의 시도는 출발부터 문헌기록과 맞지 않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위 인용문의 ❷는 허신(許愼)의 『설문해자』에서 인용한 것이다. 100년에서 121년 사이에 씌어진 『설문해자』의 수부(水部)에 140여 개의 하천이 나열되었는데,주18) 그 중에서 패수에 대해 “(패수가) 낙랑 누방을 나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수부(水部)이고 발음은 패(貝)이다. 혹은 패수현(浿水縣)에서 나온다고 말한다.”고 기록했다.주19) 역시 『수경』과 마찬가지로 『설문해자』의 기록에 따르더라도, 역도원은 패수가 한반도 서부 일대에 있으며 또한 패수가 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는 주장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에 역도원이 인용한 문헌은 ❸의 『십삼주지』이다, 그러나 『십삼주지』의 인용 또한 역도원의 주장을 위한 유용한 근거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역도원의 주장을 스스로 극적으로 반증(反證)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도표 2] 『십삼주지』의 패수 관련 기록
북위의 지리학자이면서 역도원보다 조금 앞선 시기의 학자인 감인(闞駰)의 『십삼주지』는 북송 시기에 이미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청(淸)의 학자인 장주(張澍) 등이 여러 문헌에 남겨진 기록을 근거로 집본(輯本)을 만들었다.주20) 그런데 『십삼주지』의 기록을 전반적으로 분석해보면, 『십삼주지』는 그 서술하는 지리범위가 북쪽으로는 황룡성(黃龍城)인 지금의 요녕성 조양(朝陽) 북쪽과 투수(渝水) 즉 지금의 대릉하 일대에 불과한 저술이었다. 즉 『십삼주지』는 고대의 중원과 중원의 서북 및 서남 그리고 강절(江浙) 즉 지금의 장강(長江) 하류 일대의 지리와 역사 및 민족 그리고 경제 및 문화와 민속을 중점적으로 서술한 문헌인 것이다.주21)
즉 『십삼주지』의 서술 범위가 북쪽으로 대릉하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삼주지』에 패수와 관련된 짧은 기록이 있지만, 여기서의 패수는 대릉하를 넘지 않는 지리범위에 존재하던 패수였던 것이다. 즉 『수경주』에서 『십삼주지』의 “패수현은 낙랑의 동북에 있고, 누방현은 낙랑군의 동쪽에 있다.”라는 기록을 인용했지만,주22) 『십삼주지』의 저자인 감인은 여기서의 패수현과 낙랑 및 누방현이 모두 대릉하의 서쪽 어느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서술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도원이 『십삼주지』를 인용하여, 패수의 위치를 대릉하를 동쪽으로 넘어서서 심지어 한반도의 서부 일대에 비정하려 했던 점은 그 자체가 일종의 오류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상에 언급한 여러 문헌은 역도원이 패수를 대동강에 비정(比定)하게 만드는 서술작업의 한계로 작용하였는데, 그럼에도 역도원은 여기에 끝내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에게 남은 입증방법이란 패수에 대한 기존의 서술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방법 이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역도원은 고구려 사신에게 패수에 대해 물어 얻은 답변과 함께, 그의 주장에 가장 적합한 『한서』「지리지」의 패수란 현(縣)의 명칭에 덧붙여진 “水西至增地入海”란 짧은 설명을 주요한 근거로 내세우며,주23) 패수의 상황을 처음 기록한 『한서』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부정하였고, 그런 방식으로 패수가 대동강이란 관점을 형성하여 『수경주』에 담아놓았다.
이렇게 역도원이 『수경』의 패수 관련 기록을 “잘못된 것”이라 부정하면서까지, 패수를 굳이 한반도의 대동강에 비정(比定)하려한 이유는 그의 사관(史觀) 때문이다. 역도원은 470년 혹은 472년에 태어나 527년에 사망했는데,주24) 당시는 중국역사상 유례없이 전국이 여러 국가로 분열되어 서로 대치하던 남북조(南北朝, 420∼589년) 시기였다. 물론 이러한 분열에 의해 한편으로는 민족의 융합이 촉진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도원은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국가의 분열, 국토의 피폐, 잦은 전쟁, 국민의 유리(流離) 상황 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역도원은 출생 이래 한번도 통일된 중국을 보지 못했지만, 그는 역사상 위대했던 어느 왕조의 강역을 그 서술범위로 하여, 이것으로써 어떻게 통일된 조국을 갈망하고 또 이룰 수 있을지를 설명해보려 했다. 이런 의도로 역도원은 자신이 역사상 가장 강성했다고 여기는 서한(西漢, 서기전202∼8년)의 판도(版圖)를 『수경주』의 서술 범위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주25) 그리고 『수경』에서 서술된 범위를 『수경주』에서는 심지어 국외에까지 확대하여 과감하게 서술하였는데, 한반도의 패수는 그런 의도에서 조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18) 刘绪义, 「《说文解字》“水部”的文化阐释」『语文学刊:高等教育版』2006年第1期, 20쪽.
주19)『說文解字』卷12 「水部」 浿水 “出樂浪鏤方,東入海。从水貝聲。一曰出浿水縣。”
주20) 王昌波, 「《十三州志》辑本述论」『图书与情报』1998年第2期, 참조.
주21) 汪受宽⋅李春楼, 「关于《十三州志》的几个问题」『敦煌学辑刊』1996年第2期, 83∼85쪽. 물론 이 논문에서 『수경주』의 서술 범위가 대릉하 동쪽 지역은 다루지 못했음을 지적한 점은 옳은 관점으로 받아들여 이곳에 인용하지만, 황룡성을 지금의 조양(朝陽) 북쪽 일대로 보든가 혹은 투수(渝水)를 대릉하로 비정하는 등의 관점은 앞으로 더욱 검토가 필요한 부분으로서 그대로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주22) 현재 전해지는 장주(張澍) 등의 『십삼주지』 집본에 의하면, 이 부분의 기록이 “浿水縣在樂浪東北,鏤方縣在朝鮮郡東。”으로 되어 있다. 본문의 [도표 2] 참조.
주23) 『한서』「지리지」에 서술되는 군현(郡縣)들에는 보통 일종의 짧은 설명이 덧붙여지는데, 그 설명을 작성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경우는 모두 반고(班固)가 직접 작성한 원주(原註)로 볼 수 있다는 관점도 있다(张孟伦, 「汉书地理志在中国史学史上的价值」『兰州大学学报:社会科学版』1983年第2期, 27쪽). 그러나 역도원이 패수가 서쪽으로 흐른다는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유일한 문헌증거인 반고(班固)의 『한서』「지리지」 낙랑군 관련 기록들이 과연 반고가 직접 작성한 주석(注釋)에 해당하는지, 과연 그 기록들이 사실과 부합하는지는 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주24) 역도원의 출생시점에 대해서는 학계에 다양한 견해가 있다. 본고에서는 470년이란 관점과 함께(赵永复, 「郦道元生年考」『复旦学报:社会科学版』1980年第1期. 张鹏飞, 「郦道元年谱拾遗补正」『甘肃社会科学』2012年第5期), 472년이란 견해도 수용한다(陈桥驿, 「爱国主义者郦道元与爱国主义著作《水经注》」『郑州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1984年第4期).
주25) 陈桥驿, 「《水经注军事年表》序」『浙江大学学报:人文社会科学版』1988年第4期, 2∼3쪽. 陈桥驿, 「爱国主义者郦道元与爱国主义著作《水经注》」『郑州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1984年第4期, 참조.
3. 『수경주』를 인용한 후대 학자들의 패수 및 평양 관련 서술의 오류
1) 조선시대에 나타난 패수와 평양 관련 사실의 왜곡
『고려사』에 의하면, 1091년 음력 6월 18일에 송(宋)에서 돌아온 사신 이자의(李資義) 등이 “(송의) 황제가 고려에 서적 선본(善本)이 많다는 말을 듣고, 관반(館伴)에게 명하여 구하고자 하는 책의 목록을 써주면서 말하기를, 비록 권제(卷第)가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반드시 전사(傳寫)하여 보내오라고 했다.”고 왕께 아뢰었다.주26) 『고려사』에는 또한 그 책의 목록을 상세하게 나열해 놓았는데, 그 중에는 『수경(水經)』 40권이 보인다. 40권이란 그 숫자로 보면, 바로 『수경주』를 말하는 것이다.주27) 이 기록을 통해, 『수경주』가 고려의 문인들에게 이미 읽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검토해보면, 조선시대 이후의 문인들은 『수경주』의 기록을 폭넓게 글쓰기에 인용하고 있었다. 당연히 역사와 관련된 서술에도 『수경주』의 지리 인식이 활용되고 있었는데, 요수(遼水)와 패수의 위치를 『수경주』의 기록을 근거로 비정해보려는 몇몇 서술들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중 『수경주』의 패수와 관련된 조선시대의 해석들은 대체로 일정한 경향성을 띠고 있다. 즉 『수경』에 기록된 패수의 위치를 현재 북한 평양 인근의 대동강에 비정(比定)시키려 했던 『수경주』의 기록을 근거로, 위만조선의 도읍으로 알려진 왕험성(王險城) 또한 현재의 평양 일대에 있었다고 서술하고, 또한 평양 인근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현재의 대동강을 위만조선 시기의 패수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주류(主流)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미 앞에서 역도원의 『수경주』가 지닌 지리인식의 한계를 살펴보았듯, 이러한 경향 자체가 일종의 인위적 역사 조작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수경』에 기록된 패수를 현재의 대동강으로 조작하고, 나아가 『수경주』를 근거로 그 패수 인근에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험성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왜곡된 서술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역도원이 『수경주』를 집필하던 515년에서 527년 무렵에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이 바로 그 패수 즉 현재의 대동강 인근에 있었다는 왜곡된 서술까지 조작해냈다.
그 왜곡의 대표적인 사례는 안정복(安鼎福, 1712∼1791년)이 1778년에 완성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사강목』「패수고」의 관련 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역도원의 『수경주』에 “위만(衛滿)이 패수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다.”고 말했으니, 만일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넜을 리가 없다. 내가 고구려 사신에게 물었더니, “성(城) ⓵검토해보면 평양성(平壤城)을 가리킨다. 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말했다. 그 강은 서쪽으로 흘러 낙랑군 조선현(朝鮮縣)을 지난다. 그러므로 『지리지』에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말했으니, 『수경』이 착오다.”라고 하였는데, ⓶이 주는 『수경』의 “패수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는 말을 착오라 하였는데, 이 주가 옳다. 이것은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하나의 증거이다.주28)
안정복은 위의 인용문에서 ⓶의 주석을 특별히 달아, “패수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는 『수경』의 기록을 잘못 되었다고 비판한 『수경주』의 관점에 분명하게 동의하였다. 이러한 동의는, 안정복 역시 역도원과 마찬가지로 패수가 대동강이었다는 관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에게 직접 물어보고 들은 대답 중의 ‘성(城)’을 ‘평양성(平壤城)’이라며, ⓵과 같이 “검토해보면 평양성을 가리킨다[按指平壤城].”는 주석을 특별히 붙여 놓았다(아래의 [도표 3] 참조). 안정복은 그 “성”을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에게 패수의 위치를 물어보고 그 대답을 들어서 『수경주』에 기록하던 515년에서 527년 무렵에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이 바로 현재 대동강 일대에 있었다는 사실을 조작해내려 했다.
[도표 3] 성(왕험성)을 평양성으로 왜곡한 부분[오른쪽에서 3번째 줄의 ‘按指平壤城’]
그러나 『수경주』「패수」의 원문을 검토하면, 여기서의 “성(城)”은 고구려의 평양성이 아닌 왕험성을 가리키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수경주』「패수」의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연(燕)의 사람 위만(衛滿)이 패수 서쪽에서 조선으로 갔다. 조선은 옛 기자국(箕子國)이다. 기자(箕子)는 의(義)로써 백성을 가르쳤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을 도탑게 하고, 여덟 가지 법조문을 지키게 하니, 금하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마침내 예속이 이루어졌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위만이 그 왕이 되어 왕험성(王險城)에 도읍하였는데[Ⓐ滿乃王之都王險城], 땅이 사방 수천 리였다[Ⓑ地方數千里]. 그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렀다. 한무제(漢武帝)가 원봉(元封) 2년(서기전109년)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보내 우거를 쳤다. 패수에서 우거를 쳐부수고, 마침내 조선을 멸망시켰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널 까닭이 없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가 다스린다[Ⓒ其地今高句麗之國治]. 내가 고구려의 사신을 찾아가 물어보니, 성(城)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말했다[Ⓓ言城在浿水之陽].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 조선현을 지나는데[Ⓔ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즉 낙랑군의 치소(治所)이며[Ⓕ即樂浪郡治], 한무제가 설치한 것이다. 또한 서북쪽으로 흐른다.주29)
위의 인용문에서 Ⓐ“위만이 그 왕이 되어 왕험성(王險城)에 도읍하였는데[滿乃王之都王險城]”는 Ⓓ“성(城)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말했다[言城在浿水之陽]”와 연결되는 서술이다. 즉 문장의 앞부분에서 위만이 왕이 되어 도읍한 왕험성을 설명하고,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서 그 성(城)인 왕험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었다는 대답을 들은 것이다. 역도원은 고구려 사신에게 왕험성과 패수의 위치를 물어본 것이며, 고구려 사신은 그에 대해 답한 것이다. 물론 고구려의 사신이 역도원의 질문을 받고, 당시의 정확한 지리인식을 전달해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수경주』「패수」와 관련된 위의 인용문에서 Ⓐ에서 Ⓓ로 연결되는 서술구조를 통해 “성(城)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말했다[言城在浿水之陽]”에서의 성(城)은 바로 왕험성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안정복이 『동사강목』「패수고」에서 역도원의 『수경주』「패수」에 나오는 “성(城)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말했다[言城在浿水之陽]”라는 부분 중 “성(城)”에 “검토해보면 평양성을 가리킨다[按指平壤城].”란 주석을 특별히 덧붙인 것은, 안정복에 의한 일종의 의도적 사실조작 시도로 볼 수 있다. 사실 역도원은 『수경주』「패수」에서 평양성을 언급할 의도가 전혀 없었고, 단지 패수와 왕험성 그리고 낙랑군 조선현의 관계만을 서술하려 했었다.
만약 역도원이 『수경주』「패수」에서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을 언급할 의도가 있었고, 혹은 고구려 사신으로부터 그곳이 고구려 도읍인 평양이란 얘기를 분명하게 들었다면, 『수경주』「패수」에는 고구려 도읍인 평양에 대한 다른 얘기가 반드시 기록되었을 것이다. 『수경주』 연구자들 다수가 역도원이 기이(奇異)한 것을 좋아하고 또 지나치게 길게 인용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주30) 만약 역도원이 자신이 패수로 비정하려는 현재의 대동강 일대에 고구려 도읍인 평양성이 있었음을 파악했다면, 그에 대한 다소 장황한 서술이 빠질 수 없는 것이다. 즉 당시 역도원이 파악하려는 패수 즉 현재의 대동강 일대에는 고구려 도읍인 평양성이 없었고, 이 때문에 『수경주』「패수」에는 평양 관련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이다.
안정복이 그의 『동사강목』「패수고」에서 『수경주』의 “성(城)”을 “평양성”이라고 특별히 주석을 달아 강조하는 이유는, 단지 패수의 위치를 지리적으로 해석하는 서술이 아닌, 평양에 대한 그 자신의 해석을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정복에게는 평양이 기자(箕子), 위만, 고구려의 도읍지로서 중시되는 곳이었다. 그 평양에 대동강이 있으니, 위만이 와서 도읍한 왕험성도 그곳에 있어야 했고, 따라서 당연히 패수는 대동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의 도읍도 마땅히 그 평양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아래의 『동사강목』「패수고」를 보면, 안정복의 그런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가,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稱)한 설(說)은 과연 어찌해서인가?” 하기에 나는,
“『사기』와 『한서』의 문세(文勢)를 가지고 말하겠다. 그 말에 ‘조선(朝鮮)이 관리(官吏)를 두고 장새(障塞)를 쌓았는데, 진(秦)이 요동(遼東)의 변경에 소속시켰다.’ 하고, 또 ‘노관(盧綰)이 연(燕)이 쌓은 요동 장새가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 변방 요새를 고쳐 쌓고,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하고, 또 ‘위만(衛滿)이 옛 진(秦)의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障)을 구해 살았다.’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가 일반 문세이다. 그 ‘변경’이라느니 ‘연이 쌓은 장새는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느니 ‘옛 진의 공지를 구해 살았다느니’ 한 것은 모두 지금의 해서(海西) 지방인 것 같고, 그 중간을 비어둔 것은 지금 서북 두 나라의 경계와 같았던 것이다.
지금의 평양(平壤)은 기자(箕子)의 도읍지인데, 지금의 한양(漢陽)에도 평양이란 이름이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김헌창(金憲昌)의 아들이 자립하여 평양에 도읍하였다.’ 하고, 『삼국사기』「지리지」에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고구려 남쪽 평양을 취하여 도읍하였다.’ 하였는데, 모두 지금의 한양을 가리킨 것이다. 한양을 또 평양이라고 칭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건대, 전국(戰國)의 말기에 기씨(箕氏)가 나라를 잃고 동쪽으로 지금의 한양에 옮기고서 옛이름을 그대로 칭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위만이 도읍한 평양도 지금의 한양인 것이다. 만일 이와 같다면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임이 틀림없다. 또 상고하건대, 『한서』「지리지」는 모두가 당시 전벌(戰伐) 및 강역을 경계지을 때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그 글이 모두 진실하고 답험(踏驗)한 말이요, 멀리서 잘못 전해들은 것이 아니다. …
전후 제유(諸儒) 중에 패수를 논한 것은 하나뿐이 아닌데, 누구나가 지금의 평안(平安) 한 도를 우리의 강역으로 보고 또는 지금의 평양을 위씨(衛氏)의 도읍지로 삼고서는, 별도로 패수를 찾으니, 이는 그 실지를 얻지 못하고 더욱 후인들의 의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하였다.주31)
안정복은 문장 첫 부분에 『사기』「조선열전」의 ‘요동의 변경’, ‘연(燕)이 쌓은 장새(障塞)’, ‘진(秦)의 옛 공지(空地)’를 언급하며 이들 모두가 해서(海西) 즉 현재의 황해도에 있었다고 말한다.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 다음 문장은 “평양은 기자(箕子)의 도읍지”라는 실증될 수 없는 허구(虛構)로 시작되는데, 평양의 이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나열하다가, “그렇다면 위만이 도읍한 평양도 지금의 한양인 것이다. 만일 이와 같다면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임이 틀림없다.”는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린다. 이런 서술법은 논증이 아닌 오류와 억측 그 자체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한서』「지리지」는 …그 글이 모두 진실하고 답험(踏驗)한 말이요, 멀리서 잘못 전해들은 것이 아니다.”는 평가는 그저 안정복 개인의 관점이라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뒤의 “지금의 평안 한 도를 우리의 강역으로 보고 지금의 평양을 위만의 도읍지로 삼는” 그런 인식을 패수를 대동강에 비정하는 하나의 근거로도 제시하는 안정복의 사관(史觀)이 지닌 억측과 오류는 분명하게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도 그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패수변(浿水辯)」에서 『수경주』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패수가 평양의 대동강이라고 주장한다.
패수는 평양의 대동강이다. 상흠(桑欽)의 『수경』은 본래 오류가 없었다. 그러나 역도원이 쓸데없는 오해가 생기도록 만들었고, 뒷날의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그 물길을 찾게 만들었다. 『수경』에서 패수는 낙랑 누방현 동쪽에서 나오고, 남쪽으로 임패현의 동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수경』의 문례(文例)에 의해 『수경』의 패수 기록이 오류가 없음을 알았다. …상흠이 어찌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고 말했겠는가? 지금의 평양 대동강은 분명히 덕천현(德川縣) 동쪽을 나와, 남쪽으로 증산현(甑山縣)의 동쪽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한서』에서 말하는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이 이것이다.주32) 『我邦疆域考』其三 「浿水辯」 “浿水者,平壤之大同江也。桑欽之經本無差謬,而酈道元枉生疑惑,使後人別求他水。『水經』云:“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於臨浿縣東,入於海。” …鏞案 『水經』文例,知浿水之經無誤也。…桑欽何嘗以浿水爲東流哉?今平壤之大同江明出德川縣東,南過於甑山縣東,入于海。『漢書』所謂‘浿水西至增地入海’者,此也。“
또한 정약용은 『대동수경』에서도 패수를 “평양의 물[平壤之水]” 즉 대동강이라 주장하고, 그 근거는 『수경』과 『한서』「지리지」라고 밝혔다.주33) 정약용은 평양은 고대의 기자(箕子), 위만, 고구려의 도읍이었다는 사실에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기 패수의 위치를 탐색하는 고민은 하지 않았다. 정약용은 『수경』 자체가 원래 오류가 없었는데, 역도원과 후대 학자들이 그 문구를 잘못 해석항 오류를 만들어냈다고 지적했다. 정약용은 『수경』의 원문을 “浿水出樂浪鏤方縣東”, “南過於臨浿縣東”, “入於海”의 세 부분으로 끊어 해석함으로써 『수경』에 기록된 패수의 흐름이 대동강과 같다고 주장했다.
주26) 『高麗史』卷10 「世家」卷第10 宣宗 8年 6月 “丙午, 李資義等還自宋, 奏云, 帝聞我國書籍多好本, 命館伴, 書所求書目錄, 授之乃曰, 雖有卷第不足者, 亦須傳寫附來.”
주27) 『수경』은 원래 3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역도원이 주석을 붙여 40권의 『수경주』로 편찬한 것이다.
주28) 『東史綱目』 附卷下 「浿水考」
주29) 『水經注』卷14 「浿水」 “昔燕人衛滿自浿水西至朝鮮。朝鮮,故箕子國也。箕子教民以義,田織信厚,約以八法,而不知禁,遂成禮俗。戰國時,滿乃王之,都王險城,地方數千里,至其孫右渠,漢武帝元封二年,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討右渠,破渠于浿水,遂滅之。若浿水東流,無渡浿之理,其地今高句麗之國治,余訪番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漢武帝置,而西北流。”
주30) 陈桥驿, 「第十章 《水经注》的错误和学者的批评」『郦道元评传』, 南京大学出版社, 1997, 참조.
주31) 『東史綱目』 附卷下 「浿水考」(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참조)
주32) 『我邦疆域考』其三 「浿水辯」 “浿水者,平壤之大同江也。桑欽之經本無差謬,而酈道元枉生疑惑,使後人別求他水。『水經』云:“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於臨浿縣東,入於海。” …鏞案 『水經』文例,知浿水之經無誤也。…桑欽何嘗以浿水爲東流哉?今平壤之大同江明出德川縣東,南過於甑山縣東,入于海。『漢書』所謂‘浿水西至增地入海’者,此也。“
주33) 『大東水經』其三 「浿水一」 “浿水者,平壤之水也。…其一,以大同河爲浿水,桑氏『水經』及班氏「地志」所言,是也。…諸書之中,桑氏『水經』最得其正,故此經特云‘平壤之水’者,從桑氏之經也。“
2) 한국 역사학계의 『수경주』를 통한 평양 인식 오류
이병도(李丙燾, 1896∼1989년)는 1933년에 패수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주34) 그는 패수를 청천강으로 비정(比定)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병도 역시 『수경주』에 기록된 소위 고구려 사자가 말한 “성(城)”은 “평양성”이라 해석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사자가 평양성의 남쪽을 흐르는 강을 패수로 말한 것은 대동강의 옛 명칭인 열수(列水)를 망각하고, 패수로서 이를 ‘모칭(冒稱)’ 즉 이름을 거짓으로 꾸며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수경주』의 패수를 고구려의 평양성과 연관시킨 이병도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북위의 석학으로, 저 한(漢)의 상흠의 저(著)라고 하는 『수경』에 주(註)를 내인 역도원이 일찍이 수경패수설(東入于海)에 큰 의문을 품고 있다가 마침 위(魏)에 파견된 고구려(문자왕 때인 듯)의 사자와 접견, 질의 끝에 드디어 경설(經說)의 잘못된 것을 알았다는 그의 주설(註說 즉 水經浿水註)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余訪蕃使(高句麗使者)言城(平壤城)在浿水之陽(北), 其水西流, 逕故樂浪朝鮮縣, 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中略) 考之今古, 於事差謬, 蓋經誤證也.
여기에 이른바 패수는 지금의 평양 부근의 대동강을 가리켜 말한 것인데, 결국은 한대(漢代)의 패수(청천강)를 잘못 모칭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지식인 사이에는 대동강의 구명(舊名)인 열수(列水)를 망각하고 사상(史上)에 저명한 패수로써 이를 모칭하였던 모양이다. 그는 어떻든간에 낙랑군치(樂浪郡治)로서의 조선현이 지금 대동강의 북안인 평양이 아니라 도리어 그 남안이었다고 한 고구려 사자의 설을 직접 듣고 기록한 역씨의 주(註)는 신빙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주35)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이병도는 『수경주』를 인용하면서 고구려 사신을 의미하는 ‘蕃使’의 뒤에 ‘高句麗使者’를, ‘城’의 뒤에 ‘平壤城’을, ‘陽’의 뒤에 ‘北’을 괄호로 덧붙였다. 여기서 괄호 안에 덧붙인 일종의 주(註)는 이 문장에 대한 이병도의 해석과 관련이 있다. 위에서 이미 서술했듯, 안정복이 그의 『동사강목』에 『수경주』를 인용하면서 역시 ‘城’에 ‘按指平壤城’ 즉 “검토해보면 평양성을 가리킨다.”고 주(註)를 특별히 덧붙인 것과 같은 경우이다.
즉 이병도가 『수경주』를 인용하면서 문장 중의 ‘城’을 특별히 ‘平壤城’으로 해석했다 혹은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을 덧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경주』의 “余訪蕃使言城在浿水之陽”이란 문장은 이병도에 의해 “내(역도원)가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보니, 평양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말했다.”로 해석된다. 물론 이병도는 대동강을 고대의 열수로 인식했기 때문에, 이병도 식으로 말하면 “평양성은 열수의 북쪽에 있다”고 고쳐야 한다, 하지만 패수든 열수든 그 위치비정의 차이를 떠나, 이병도도 『수경주』에 고구려의 평양성이 대동강 북쪽에 있었다는 서술이 담긴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노태돈의 논문에서도 『수경주』와 고구려의 수도를 연관시킨 서술이 보인다. 그 논문에서 『수경주』의 원문을 인용하며 “㉠言城在浿水之陽”과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의 두 곳을 특별히 표시해놓았다. 그의 논문에서는 ㉠과 ㉡의 두 문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수경주』의 편찬 동기는, 진⋅한 대 이래의 지리에 관한 지식이 오호십육국 시대를 거친 후 혼란해진 상태에서, 이를 재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역도원은 강의 흐름에 대한 자연지리학적인 지식뿐 아니라, 그에 관계된 역사지리에 대해서도 진⋅한 대 이래의 수많은 각종 사서의 기록을 구사해 고증을 시도하였다. 패수조에서도 그는 기자 및 위만조선과 그리고 한군의 침공루트에 대한 서술을 하였다. 그러한 면들을 고려할 때, 역도원이 『수경』의 패수에 대한 기사에 의문을 품었을 때, 자연 강의 흐름을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와도 연관해서 생각하였을 것임은 능히 추측되는 바이다. 그의 조상이 낙랑군과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럴 때 그가 모처럼 만난 고구려 사신에게 그 수도와 패수의 관계만을 질문하였을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런 개연성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위의 (B)에서 ㉠에 이어 ㉡에서 “其水西流 (……) 而西北流”라 하였다. 이때 “서류”와 “서북류”는 고구려 도성 지역에서 서쪽으로 흘러, 낙랑군 조선현 자리를 지나 서쪽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즉 고구려 도성과 옛 낙랑군 조선현 자리가 패수의 흐름의 방향을 기술하는 각각의 기준이 되었다. 역도원이 참조한 이전 시기의 문헌에서 패수의 흐름과 위의 두 지점과의 위치 관계를 기록한 것이 없는데도, 이렇듯 명기(明記)하였던 것은 고구려 사신과의 문답을 통한 지식에 의해서라고 보아야겠다.주36)
노태돈은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을 만났을 때, 단순히 고구려의 도읍과 패수와의 관계만을 물어보아, “言城在浿水之陽”의 대답만을 듣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수경주』에 기록된 낙랑군 조선현과 패수의 흐름에 대한 정보인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등도 역시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과의 문답을 통해 얻어냈다는 것이다.
물론 역도원은 고구려의 사신을 만나, 우선은 자신의 큰 관심사인 패수에 관한 질문을 던졌을 것이고, 상황이 허락되는 범위에서 여러 대화를 나누었을 것임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역도원은 고구려의 사자에게 물어 “言城在浿水之陽”이란 대답을 들었다고만 『수경주』에 기록했다. 물론 그 성(城)의 남쪽을 지나 “서류”하고 또 낙랑군 조선현을 지나 “서북류”하는 물길 상황도 고구려의 사신에게 물어 확인한 정보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역도원이 『수경주』에 짧게 기록한 “言城在浿水之陽”이란 대답을 놓고, 노태돈은 어떻게 역도원이 “고구려의 사신에게 고구려의 도읍과 패수와의 관계 등을 물어” 그 대답을 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었을까? 『수경주』의 전문(全文)에 고구려의 도읍이나 평양에 관한 언급이 단 한 차례도 없는데, “言城在浿水之陽”이란 문구에서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어떻게 추론해낼 수 있었을까?
혹시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 안정복이 『동사강목』에 『수경주』를 인용하면서 ‘城’에 ‘按指平壤城’ 즉 “검토해보면 평양성을 가리킨다.”고 특별히 주(註)를 미리 덧붙인 것과 같은 경우인가? 혹은 이병도가 『수경주』를 인용하면서 문장 중의 ‘城’ 뒤에 괄호로 ‘平壤城’을 특별히 덧붙여 해석한 것과 같은 경우인가? 그렇다면 노태돈 역시 “言城在浿水之陽”에서 ‘城’에 이미 고구려 도읍이란 일종의 주석(注釋)을 달아놓고, 즉 그 문구에서의 ‘城’이 고구려 도읍이란 선입견(先入見)을 갖고 위와 같은 서술을 했던 것은 아닐까?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면,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위만조선이나 패수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수경주』를 인용하는 경우에 “言城在浿水之陽”에서의 ‘城’을 평양성 혹은 고구려 도읍으로 해석하는 사례가 일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런 경향에 대해 조법종은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왕험성을 낙랑군과 연결지으며 또 그 위치를 고구려 수도인 평양과 연결짓는 인식이 제기되어 있다. 이 견해를 대표한 존재는 5세기말 6세기초에 활동한 북위인 역도원으로서 『수경주』를 통해 평양=낙랑군 조선현 인식을 부각시켰다.주37)
그러나 『수경주』의 “言城在浿水之陽”에서의 ‘城’에 대한 해석과 관련된 이러한 경향은 자칫 역사사실을 왜곡하는 오류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수경주』의 패수를 대동강으로 비정하여 위만조선은 물론 초기의 낙랑군이 그곳에 존재했었다는 가설(假設)를 설정하고 또 교과서에 역사사실로 고정시켜 왔던 과거 우리 역사학계의 폐습(弊習)은 이제 극복되어야 한다. 또한 『수경주』의 저자인 역도원이 그 ‘城’을 평양성 혹은 고구려 도읍으로 해석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그 ‘城’을 평양성 혹은 고구려 도읍으로 기정실화된 것처럼 서술하는 경향은 이제 지양(止揚)되어야할 학술태도인 것이다. 특히 안정복, 정약용 등 조선시대 학자들에서 나타난 이러한 경향이 그 뒤 해방 이후의 역사학계에서 제대로 비판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현재 혹은 미래의 후대 학자들에게도 나나타고 있는 현실은 우리 역사학계가 깊이 반성할 사안인 것이다.
주34) 李丙燾, 「浿水考」『靑丘學叢』13, 1933.
주35) 李丙燾, 「樂浪郡考」『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140쪽.
주36) 盧泰敦, 「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韓國史論』23, 1990, 6∼7쪽.
주37) 조법종, 『고조선 고구려사 연구』, 도서출판 신서원, 2006, 261쪽.
4. 『수경주』를 통한 고구려 평양의 위치 검토
1) 『수경주』권14 「패수」의 고구려 관련 사실 해석
원문을 잘 검토해보면, 역도원은 『수경주』「패수」에 고구려와 관련된 기록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단지 패수의 위치를 추적하는 과정에, 고구려의 사신으로부터 들은 패수와 관련된 상황만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경주』에는 고구려와 관련된 매우 단편적인 사실만이 남아있지만, 사실은 그조차 어느 문헌 못지않은 소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아래의 『수경주』「패수」의 관련 부분에 담긴 고구려 관련 사실을 파악해본다.
옛날에 연(燕)의 사람 위만(衛滿)이 패수 서쪽에서 조선으로 갔다. 조선은 옛 기자국(箕子國)이다. 기자(箕子)는 의(義)로써 백성을 가르쳤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을 도탑게 하고, 여덟 가지 법조문을 지키게 하니, 금하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마침내 예속이 이루어졌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위만이 그 왕이 되어 왕험성(王險城)에 도읍하였는데[Ⓐ滿乃王之都王險城], 땅이 사방 수천 리였다[Ⓑ地方數千里]. 그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렀다. 한무제(漢武帝)가 원봉(元封) 2년(서기전109년)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보내 우거를 쳤다. 패수에서 우거를 쳐부수고, 마침내 조선을 멸망시켰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널 까닭이 없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가 다스린다[Ⓒ其地今高句麗之國治]. 내가 고구려의 사신을 찾아가 물어보니, 성(城)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말했다[Ⓓ言城在浿水之陽].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 조선현을 지나는데[Ⓔ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즉 낙랑군의 치소(治所)이며[Ⓕ即樂浪郡治], 한무제가 설치한 것이다. 또한 서북쪽으로 흐른다.주38)
위의 인용문은 두 개의 문단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앞의 문단은 위만조선이 기자조선을 뒤이어 성립하고, 우거에 이르러 멸망하는 과정까지를 서술했다. 뒤의 문단은 앞에 설명한 위만조선과 관련된 역사사실과 함께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으로부터 들은 정보를 도태로 패수의 위치를 서술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내용상 두 문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그 안에 적힌 사실들은 앞뒤로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는 서술구조이다. 그러므로 위의 인용문에서 고구려 관련 사실을 파악하게해주는 주요 문구들을 Ⓐ∼Ⓕ까지 표시했는데, 이들 문구 사이의 연관 관계를 파악하면 역도원의 고구려 인식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 Ⓐ의 “滿乃王之都王險城”은 Ⓓ의 “言城在浿水之陽”과 연관된다. 즉 “위만은 그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였는데,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보니) 그 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역도원의 문맥에 따르면, Ⓓ의 ‘城’은 바로 앞 문장의 왕험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위에서 안정복, 정약용, 이병도, 노태돈 등은 Ⓓ의 ‘城’을 고구려의 도성(都城)인 평양성으로 해석했는데 이는 『수경주』「패수」 원문에서의 문맥을 살피지 않은 자의적 해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의 “地方數千里”는 Ⓒ의 “其地今高句麗之國治”와 연결된다. 즉 “(왕험성에 도읍한 위만의) 땅은 사방 수천리였는데, 그 땅은 지금 고구려란 국가가 다스린다.”는 해석이다. Ⓑ의 ‘地’와 Ⓒ의 ‘其地’가 서로 연관되는 것이다. 한 문단 안에서 앞선 ‘땅’과 그 뒤에 ‘그 땅’이 서로 연관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 예로 든 안정복, 정약용, 이병도, 노태돈의 경우처럼 Ⓓ의 ‘城’을 평양성으로 오해하여 Ⓒ의 “其地今高句麗之國治”를 “그 지역은 지금 고구려의 국성(國城)이다.”라고 잘못 해석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다.주39) 이런 해석의 오류는 Ⓑ와 Ⓒ를 연관지어 해석하지 못하는 문맥 파악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한자 자구(字句)를 엄밀하게 따져보지 않은 결과이다. Ⓒ의 “其地今高句麗之國治”에서 ‘國治’를 국성(國城) 혹은 국도(國都)로 해석할 수 없다. 고대의 한자에서 ‘治’의 쓰임은 분명하여, 주(州)나 군(郡)의 치소(治所)로 쓰이는 용어이며,주40) 한 국가의 도읍를 나타내는 ‘都’란 개념으로는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경주』「패수」에서 고구려 사신을 통해 파악한 정보로써 고구려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수경주』에서 역도원이 패수라고 비정하려는 대동강 일대는 당시 고구려가 통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其地今高句麗之國治]. 둘째, 고구려 사신의 말에 의해, 당시 대동강의 북쪽에 하나의 성이 있었는데[言城在浿水之陽], 이것을 역도원은 왕험성이라고 파악했다. 셋째, 사신의 말대로 한 물길이 있어, 성(城)의 남쪽을 지나 ‘서류’하고 또 낙랑군 조선현을 지나 일시 ‘서북류’하는 물길은 현재 대동강의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而西北流]. 넷째, 역도원이 자신의 꼼꼼한 저서인 『수경주』에 그 지역이 특별히 고구려 도읍인 평양성임을 기록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보면,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을 만날 당시의 고구려 도읍은 대동강 일대에 없었다는 것이다.
주38) 『水經注』卷14 「浿水」 “昔燕人衛滿自浿水西至朝鮮。朝鮮,故箕子國也。箕子教民以義,田織信厚,約以八法,而不知禁,遂成禮俗。戰國時,滿乃王之,都王險城,地方數千里,至其孫右渠,漢武帝元封二年,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討右渠,破渠于浿水,遂滅之。若浿水東流,無渡浿之理,其地今高句麗之國治,余訪番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漢武帝置,而西北流。”
주40) 『康熙字典』 ‘治’ “又州郡所駐曰治,如蜀刺史曰治成都,揚刺史曰治會稽。”
2) 『수경주』권14 「패수」에 의한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 검토
역도원은 25세가 되던 493년에 당시 북위의 수도였던 평성(平城)에서 관료가 되어, 494년에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 32세가 되던 500년까지 중앙의 관료로 근무했다. 501년 이후는 지방의 관료로서 여러 곳을 옮겨 다녔는데, 그의 관료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이렇게 여러 지방을 옮겨다녀야 했던 그의 이력에 따른 견문, 그의 남다른 안목과 특정 관심에 따른 자료수집은 『수경주』 작성의 기초가 되었다. 역도원의 『수경주』가 작성된 시기는 515년에서 527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주41) 실제로 그가 면직(免職)을 당해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었던 518년에서 523년에 이르는 6년 사이에 본격적인 집필이 이루어졌을 것이다.주42)
역도원이 관료 생활을 시작한 493년 이후 시기의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의 사신이 거의 매년 북위를 방문하고 있다. 당시 고구려의 문자왕은 491년에 즉위하였으며, 광개토왕과 장수왕에 이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성기의 고구려를 대하는 북위의 태도는 중원에 존재했던 역대의 그 어느 왕조보다도 우호적이었다. 북위의 관료였던 역도원 역시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고구려의 위상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고구려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도 이미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역도원은 자신이 패수로 비정(比定)하고 싶은 현재의 대동강 일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여기서 역도원 개인이 잘 모른다는 것은, 한편으로 북위 사회 역시 잘 몰랐다는 표현일 수 있다. 『수경주』에 기록된 바와 같은 방대한 자료를 수집한 능력을 갖춘 역도원이 노력해도 수집할 수 없는 정보라면, 어쩌면 북위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정보였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리서를 작성하려는 역도원이 정보를 수집하기 쉽지 않은 지역에 관한 것이라면, 그 지역은 다소 낙후하고 편벽한 곳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패수로 비정하려는 현재의 대동강은 역도원에게 아주 편벽한 곳으로 인식되었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접근하면, 역도원이 『수경주』「패수」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당시의 대동강 일대는 역도원에게는 물론 고구려에게도 중심으로부터 거리가 있는 편벽한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의 여러 지역들 중 북위의 학자인 역도원에게 가장 잘 알려진 지역은 당시의 수도인 평양이었을 것이다. 장수왕은 427년에 평양에 천도했는데, 그 8년 뒤인 435년에 북위의 세조(世祖)가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사신으로 평양에 보냈다.주43) 그 때 이오가 고구려의 이곳저곳에서 목격한 바가 『위서(魏書)』「고구려전」에 전해진다. 또한 사신의 왕래가 집중되는 곳은 그 나라의 도읍이기 때문에, 북위와 고구려의 두 나라 도읍은 서로에게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밝혔듯, 『수경주』의 원문 전체에는 평양이란 지명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지리서에서는 고대의 어느 곳인지 잘 알지 못하던 지명을 탐색하여, 현재의 어느 지명에 비정(比定)하는 작업을 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독자들은 고대의 지리를 현재와 연관시켜 이해하는 것이다. 『수경주』의 전체에서도 그런 서술이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수경주』의 원문 전체에 평양이란 지명이 없는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바로 역도원 당시의 지명인 평양으로 비정할 대상이 『수경주』에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역도원이 비정하려던 패수가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 일대에 있었다면, 역도원의 『수경주』에 평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의 지명을 현재의 지명으로 비정(比定)해 주어야, 고대를 현재와 연관시켜 이해하는 지리서로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서술을 종합해보면, 역도원이 『수경주』를 쓸 당시에, 역도원이 패수로 비정하려는 현재의 대동강 일대에는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이 절대 없었다. 그 때문에 역도원의 『수경주』「패수」에 평양이란 지명이 언급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도원이 『수경주』를 쓸 당시에 고구려의 평양은 대동강 일대가 아닌 그 어디에 있었는가?
문헌과 유적으로 고구려의 평양을 찾아나설 때, 우선 주목되는 지점은 고구려 고분군(古墳群)이 집중되어 있는 몇몇 지역이다. 도성에 집중되는 지배계급들이 남긴 유적인 고분군은 고구려 특유의 장례문화를 담고 있어, 고구려 도성이 있던 지역의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 역사학계에서 고구려 고분군이 집중된 지역으로 분류된 곳은 현재의 평양과 집안이다. 그러나 그 두 곳 모두 역도원 시기의 고구려 도읍인 평양이 아님은 위에서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지역범위를 더 넓혀, 다른 곳에서 고구려 고분군을 찾을 때 또한 주목되는 지점은 바로 요녕성 요양(遼陽)이다.
사실 요양은 고대 동북지역의 요충지(要衝地)에 있으며, “요양은 고대의 양평(襄平)”이라는 기존의 허구(虛構)를 극복하고 다시 살펴보면, 요양은 고구려 도읍인 평양으로서의 적지(適地)이다. 그러나 사대사관 및 식민사관에 의해, 요양은 고대의 연(燕) 및 한(漢)의 양평이라는 고정관념이 오랫동안 형성 및 유지되어 왔고, 심지어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조차 아직 그 허구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요양을 역도원 시기의 평양으로 검토해보기 위해서는 요양=양평이라는 허구를 먼저 극복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고대의 양평이 현재의 요양 일대에 있었다는 허구의 역사는 애초에 극복할 대상으로서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미 권오중은 1995년에 쓴 그의 논문에서 전국시대의 연(燕)이나 전한(前漢) 초기에는 현재의 요양 일대에 요동군이나 양평을 설치할 수 없었다고 분명하게 해석했다. 전국시대의 연(燕)과 전한 초기의 요동군이나 양평은 현재의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라는 것이다. 그 시기의 요동군이나 양평을 현재의 요양이 아닌 계현에 위치시키면, 여러 역사적 문제들이 비로소 해결된다는 것이다.주44)
최은형(崔恩亨)은 2009년의 논문에서 고대의 양평을 현재의 요양에 위치시키는 역사의 허구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동시에 양평의 위치 왜곡이 우리의 고대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출발점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현재 중국에서는 요녕성 요양을 옛 양평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앞서 언급한대로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신당서』등 일부 기록만을 그대로 믿고 아무런 고증도 없이 ‘요양=옛 양평’설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라며, 요동군 양평은 현재 요양이 아니라 하북성 노룡현(盧龍縣) 부근이었다고 주장하였다.주45)
양평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앞으로 우리 학계가 더욱 깊은 토론을 거쳐야겠지만, 그 위치가 현재의 요양 일대가 아님은 분명하다. 이렇게 고대의 양평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전제된다면, 비로소 요양을 역도원 시기의 평양으로 검토 및 비정(批正)해보는 작업이 가능하다.
먼저 요양 지역 고분군의 고구려 관련성을 검토할 수 있다. 요양 지역에서는 평양이나 집안의 고분군과 유사한 형태의 고분들이 다수 출토되었고, 지금도 계속 출토되고 있다. 한국의 역사학계는 지금까지 요양 지역 고분들의 고구려 관련성을 검토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요양 일대가 우리 한국사 특히 고구려사의 지역범위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한국의 대표적인 고분벽화 전문가인 전호태도 압록강 중류와 평양 일대만을 고구려 문화권으로 설정하여 고구려 고분을 연구한다. 이러한 연구의 제한으로, 이미 발굴되거나 연구된 요양 지역 고분들의 고구려 관련성이 오히려 은폐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대표적 사례 하나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 청(淸)으로 향했던 사신들의 연행(燕行) 기록을 보면, 다수의 사신들이 하룻밤 묵어가는 영수사(迎水寺)란 지명이 있다.주46) 영수사는 현재의 요양시 태자하(太子河)를 서쪽과 남쪽으로 끼고 그 북쪽에 위치해 있다. 1918년 8월 요양 일대에 폭우가 쏟아져 전답과 가옥이 물에 잠기는 홍수가 발생했다.주47) 영수사촌으로 불리던 그 지역도 큰 피해를 입었다. 1919년 5월 이후 제방을 복구하기 위해 땅을 파던 중 벽화가 그려진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영수사벽화묘라 부른다.
이 벽화의 발굴에 참여한 야기 쇼자부로(八木奘三郎)는 1921년 2월에 발표한 논문에서, 벽화 속 인물의 민족관계를 서술하면서, “벽화에 보이는 부부상(夫婦像)은 예로부터 중국식 석벽화(石壁畵)에는 없는 것이다. 이는 부여족의 선조인 주몽(朱蒙) 부부를 기리는 상태와 매우 비슷한 바가 있고 또 그 계통은 조선의 고분벽화와 연관을 지니고 있기에 이를 고구려족(高句麗族)의 유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며 그 고구려 관련성을 분명하게 언급했다.주48)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도 1921년 3월에 발표한 논설에서 “고분의 연대에 대하여, 야기씨(八木氏)는 한대(漢代)의 것이라고 하고, 교토대학 모씨는 고구려시대라고 했다고 전해 들었다. 야기씨가 가지고 돌아간 토기는 보지 않았으므로 모르겠지만, 발굴된 고전(古錢)은 사출오수(四出五銖), 반량(半兩), 화천(貨泉)이다. 사출오수는 동한의 영제(靈帝) 시대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고전(古錢)만으로 시대를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는 오히려 벽화의 성질로 보아 고구려시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 여긴다.”고 주장하였다.주49)
한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도 1921년 7월에 발표한 논문에서 그 벽화의 고구려 관련성에 대한 그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벽화의 성질은 조선의, 이른바 고구려의 고분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쓰카모토((塚本) 박사 및 나이토(內藤) 박사 등의 설(說)에 따라 고구려라고 해도 좋다고 본다. 후한(後漢)이건 고구려이건, 연대적으로 말하자면 모두 서기 1∼2세기 무렵의 것으로 두 가지 설(說)이 같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고분벽화도 물론 한대(漢代)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이 닮아 있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고구려설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요양 부근의 것은 기와무덤과 석관, 이렇게 두 가지 종류로서 전자는 중국 각지의 무덤과 비교했을 때 보통 한인(漢人)이라 하고, 후자는 조선의 고구려와 같은 석재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인으로 하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이 논리로 말하자면 고구려설이 옳다고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이 기와무덤이나 석관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완전히 동일하여 그 차이를 전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기와를 사용했던 한인들도 이 적절한 석재가 많이 있었던 요양 부근에서는 석관을 만들었다고 해도 결코 불합리하지 않다. 그러한 점으로부터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오늘에 있어서도 거의 결정하기 어렵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단지 고구려설이 조금 더 온당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할 뿐이다.주50)
위에서 살펴보았듯, 1919년에 요양에서 발견된 벽화고분인 영수사벽화묘에 대해 직접 현지를 고찰한 세 명의 일본학자가 1921년에 남긴 관련 논문들에서 모두 고구려 관련성을 언급하였다. 이는 한국사학계의 고구려 벽화고분 연구뿐만 아니라, 고구려사의 전반 연구에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주51) 즉 우리가 요양 지역이 고대의 사서(史書)들에 기록된 양평이었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요양 지역의 고대사를 이해하고, 그러한 새로운 역사지리인식에 근거하여 그 지역의 고분 전반에 대해 연구한다면, 그곳이 역도원 시기의 평양일 수 있는지 그 여부에 대한 더욱 명백한 검증도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실 고구려의 첫 도읍인 졸본의 위치를 고증해보면, 요양 지역은 고구려가 성립되는 시기부터 줄곧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즉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고구려의 첫 도읍인 졸본은 현재의 요하 서쪽 의무려산 일대의 대릉하(大陵河) 연안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고(아래의 [도표 4] 참조), 뒤에 도읍은 다른 곳에 옮겨졌지만 고구려는 그 첫 도읍 졸본을 줄곧 고구려의 영역으로 유지하였는데,주52) 요양([도표 4]의 B 지점)은 졸본의 동쪽에 있었기에 줄곧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도표 4] 『삼국사기』에 비정된 고구려 첫 도읍 졸본(흘승골성) 위치(A) 주53)
한편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대무신왕 3년인 20년 봄에 동명왕 사당을 졸본에 세웠다.주54) 그 뒤 167년, 179년, 228년, 260년, 332년, 521년, 560년, 619년에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한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들 시기 모두에 졸본은 고구려에 의해 통치되는 지역 즉 강역 안에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특히 167년, 332년, 521년, 560년, 619년 등의 시기에는 고구려왕이 졸본에 한 달 정도 체류했다고 한다. 졸본이 안정적으로 확보된 고구려 강역 안의 지역이고, 또한 시조 사당의 제사에 종사 및 수행하는 다수의 인원들이 장기 체류할 수 있는 여건이 졸본에 갖추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위와 같은 기록이 담긴 『삼국사기』에는 그 졸본이 현재의 요하 서쪽 의무려산 일대라고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제사 기록으로 보면, 고구려는 건국 이후 정치적으로 해체되는 668년 무렵까지 현재의 요하 서쪽 의무려산 일대의 졸본을 강역으로써 상당히 안정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요양이 역도원 당시의 고구려 도성 즉 평양일 수 있는 가능성은, 북위가 고구려에 전달한 작위(爵位)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역도원 시기의 고구려왕은 문자왕인데, 492년 문자왕이 즉위하자 북위의 효문제(孝文帝)는 사신을 보내어 문자왕에게 사지절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使持節 都督遼海諸軍事 征東將軍 領護東夷中郞將 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이란 작위를 전해온다. 물론 그 이전의 장수왕 시기에도 북위의 세조가 435년 사신 이오(李敖)를 보내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都督遼海諸軍事 征東將軍 領護東夷中郞將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이란 작위를 보내왔었다.
여기서 북위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룬 장수왕은 물론 문자왕에게 보낸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라는 관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독요해제군사는 요해(遼海)의 여러 군사집단에 관한 모든 것을 총괄하는 장관(長官)이란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중요한 함의(含意)를 지닌 단어는 바로 ‘요해(遼海)’이다. 장수왕과 문자왕은 ‘요해’의 모든 군사권을 장악하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요해’가 어느 지역인지를 알면 장수왕과 문자왕의 정치적 위상은 물론 당시 고구려의 통치영역을 대략적으로 파악해볼 수 있는 것이다.
『위서』와 『주서』의 요해 관련 기록을 종합하면, 요해란 현재의 시라무렌하 상류 동쪽으로 요하와 그 남쪽의 대릉하 및 발해를 낀 해안과 요동반도 일대 및 그 이동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북위의 세조가 고구려의 장수왕과 문자왕에게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라는 직함을 부여한 것은, 바로 고구려가 현실적으로 이 요해 지역들을 군사와 정치 및 문화와 경제적으로 온전하게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의 정치적 중심인 평양성이 그 요해란 지역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이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란 직함의 부여가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당시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이 한때 한(漢)의 낙랑군 소재지였던 현재의 북한 평양 일대에 있었다면, 고구려가 그 평양을 중심으로 하고 그 북쪽으로 압록강 일대까지 차지한 그런 국가였다면, 북위가 그런 고구려에게 부여할 수 있는 정치적 직함은 낙랑왕(樂浪王) 혹은 낙랑군공(樂浪郡公) 정도가 아니었을까?
현대의 중국학자들도 고대 요해란 지역의 중심지가 현재의 요양이었음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중국학자 천위안(陈涴)은 “요해란 개념은 늦어도 북위와 진(晉)의 시기에는 이미 지역의 명칭으로 사서에 나타났으며, 현재까지 약 2천년이 넘게 쓰이는 개념으로서, 그 지리적 함의는 좁은 의미로 볼 때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동쪽으로부터 발해와 황해 사이의 공간 범위를 말한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요해는 발해와 황해 이북 지역의 동북지역 전체를 모두 포함한다.”고 해석한다.주55) 왕위랑(王禹浪)과 왕원이(王文轶)는 “현재 학술계에서는 요해란 지명의 연원에 대해 일반적으로 『위서』에서 시작되었다고 인식하지만, 사실상 『후한서』와 『삼국지』의 주석(注釋) 중에 이미 요해와 관련한 기록이 나타났다. 요해란 말은 요지(遼地)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요하와 황해 및 발해를 대표하며, 요녕 지구의 지역문화 및 유역문화(流域文化)와 해양문화의 다원화문명(多元化文明)을 표현해낼 수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주56) 또 티엔이에(田野)와 천띠(陈迪)는 “역사상의 요해는 그 남쪽 경계는 발해와 황해 해역임이 분명하고, 그 북쪽은 대체로 전국시대 진한(秦漢)의 장성으로 형성된 경계이다. 대체적으로 고대의 요해 지역은 대체적으로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와 내몽고의 적봉시(赤峰市) 그리고 요녕성 전역과 한반도 북부 일대를 포함한다.”고 해석하였다.주57)
바로 위에서 언급한 티엔이에(田野)와 천띠(陈迪)가 해석한 요해 지역을 고구려가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북위가 장수왕은 물론 문자왕에게 도독요해제군사란 직함을 전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고구려의 정치적 중심인 평양성 또한 그 요해란 지역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에서 위의 [지도 2]와 같은 관점에서는, 장수왕이 427년에 천도한 평양을 현재의 요양 일대로 보게되는 것이다. 또한 역도원 당시의 고구려 도읍 또한 현재의 요양인 것이다. 『수경주』에서 현재의 대동강을 패수로 비정하려던 역도원이 평양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역도원 시기에 고구려 도읍은 대동강 일대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도읍은 현재의 요양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주41) 『수경주』의 본문에 역도원 자신과 관련한 연대로서 가장 최후의 기록은 연창(延昌)4년 즉 515년이고, 역도원은 527년에 죽었다. 이를 통해 그 책의 작성 시기를 515년에서 527년 사이로 추정한다(陈桥驿, 「论郦学硏究及学派的形成与发展」『水经注硏究二集』, 山西人民出版社, 1987, 참조).
주42) 张鹏飞, 「郦道元年谱拾遗补正」『甘肃社会科学』2012年第5期, 190쪽.
주43) 『三國史記』卷第80 「髙句麗本紀」第六 長壽王 “二十三年, 夏六月, 王遣使入魏朝貢, 且請國諱. 世祖嘉其誠欵, 使録帝系及諱以與之, 遣貟外散騎侍郎李敖, 拜王為都督遼海諸軍事·征東将軍·領護東夷中郎将·遼東郡開國公·髙句麗王.”
주44) 權五重, 「前漢時代의_遼東郡」『人文硏究』17(1), 1995, 270∼278쪽.
주45) 崔恩亨, 「遼陽은 옛 襄平이 아니다」『백산학보』제85호, 2009, 57∼82쪽.
주46) 영수사(永壽寺)로도 불렸다(『薊山紀程』第1卷「灣渡」 慈航寺).
주47) 辽阳县志编纂委员会办公室编, 「辽阳县志』, 1994, 29쪽.
주48) 八木奘三郞, 「遼陽發見の壁畫古墳」, 『東洋學報』第十一卷第一號, 1921, 143쪽.
주49) 塚本靖, 「遼陽太子河附近の壁畵する古墳」『考古學雜誌』第11卷第7號, 1921, 225쪽.
주50) 濱田耕作, 「遼陽附近の壁畵古墳」『東亞考古學硏究』, 岡書院, 1930, 425∼426쪽.
주51) 임찬경⋅박지영, 「요양 영수사벽화묘의 고구려 관련성에 관한 두편의 논문」『선도문화』제23권, 2017, 참조.
주52) 임찬경, 「고구려 첫 도읍 위치 비정에 관한 검토」『선도문화』제20권, 2016, 참조.
주53) 임찬경, 「고구려 첫 도읍 위치 비정에 관한 검토」『선도문화』제20권, 2016, 310쪽.
주54) 『三國史記』卷第14 「髙句麗本紀」第2 大武神王 “三年, 春三月, 立東明王廟.”
주55) 陈涴, 「“辽海”古称由来考实」『史学集刊』2008年第3期, 117∼120쪽.
주56) 王禹浪∙王文轶, 「“辽水”、“辽海”地名考」『哈尔滨学院学报』2010年第12期, 1∼6쪽. 王禹浪∙王文轶, 「辽海”地名渊源考」『哈尔滨学院学报』2014年第12期, 1∼4쪽.
주57) 田野∙陈迪, 「基于辽海史源、地望与区位的考证」『辽宁师范大学学报』2016年第3期, 133∼138쪽.
5. 결론
본문에서 검토하였지만, 상흠 『수경』의 패수와 역도원 『수경주』의 패수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상흠 『수경』의 패수는 위만이 건넌, 한(漢) 초기 연(燕)의 지역과 조선의 경계로 설정되었던 바로 그 패수이다. 사마천의 『사기』「조선열전」에 기록된 바의 패수가 상흠 『수경』의 패수이다. 그에 비교하면 역도원 『수경주』의 패수는 조작된 패수이다. 『수경주』의 패수는 위만이 건넌 그 패수가 아닌 것이다.
본문에서 서술했듯, 조선시대의 안정복과 정약용은 『수경주』의 패수와 상흠 『수경』의 패수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반도 안으로 패수를 끌어들였다. 위만이 건넌 패수가 한반도 안에 있게 됨으로써, 대동강 일대를 『사기』「조선열전」의 연극 무대로 만들었다. 안정복과 정약용은, 위만이 건넌 패수가 대동강이었다는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기껏해야 현재 북경 서남 일대를 점거하고 있다가 가솔(家率)과 궁인(宮人) 및 친신(親臣) 모두 합쳐 천여 명을 이끌고 서기전195년에 서북쪽 흉노의 지역으로 망명한 연왕(燕王) 노관(盧綰) 아래에 있던 위만, 그 위만이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와 곧 평양의 왕험성에 도읍했다는 그런 소설을 어떻게 만들어내 역사화할 수 있었을까? 『수경주』도 그 배후인가?
안정복과 정약용은 또한 위만조선 관련 사실을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수경주』를 해석하며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도 왜곡했음을 위의 본문에서 밝혔다. 『수경주』의 “其地今高句麗之國治”와 “言城在浿水之陽”을 해석하며,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城’에 ‘按指平壤城’ 즉 “검토해보면 평양성을 가리킨다.”고 특별히 주(註)를 미리 덧붙였다. 그런 해석은 후대에도 계속되어졌다. 뒤의 이병도는 『수경주』를 인용하면서 문장 중의 ‘城’ 뒤에 괄호로 ‘平壤城’을 특별히 덧붙여 놓았다. 또한 노태돈 역시 “言城在浿水之陽”에서 ‘城’을 고구려 도읍인 평양성으로 해석했다.
역도원이 『수경주』에서 조작한 패수는 안정복과 정약용 등에 의해 역사가 되었고, 때문에 우리 역사학계에는 아직도 『수경주』의 패수를 갖고 논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수경주』의 조작이 아직 살아있다는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은 실로 부끄러운 것이다. 최근에도 그 조작이 역사서술처럼 인용되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볼 수 있었다.
중국 북위왕조 때의 학자인 역도원이 저술한 『수경주』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나타난다. “그 땅(고조선 수도: 평양)은 지금 고구려국의 수도이다. 내가 고구려 사신(蕃使)에게 물어보니 말하길, ‘성은 패수(浿水)의 북쪽에 있다. 그 강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 조선현을 지나는데, 곧 낙랑군의 치소이다. 한 무제(漢 武帝) 때 두었다’라고 하였다.” 북위의 역도원은 5세기 말∼6세기 초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당시는 고구려는 장수왕⋅문자명왕의 재위기였고, 수도는 대동강 이북의 대성산성 혹은 안학궁 일대로 비정된다. 이때 역도원과 만난 고구려의 사신은 패수(대동강)의 북쪽에 고구려 수도가 있으며, 이 강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의 중심치소였던 (남쪽의) 조선현 지역을 지난다고 언급했던 것이다.주58)
위의 인용문에서, 『수경주』의 “其地今高句麗之國治”를 “그 땅은 지금 고구려국의 수도이다.”라 해석하였다. 본문에서 이미 비판했듯, 이는 『수경주』의 저자 역도원의 생각과는 다른 해석이다. 위 글의 작성자는 “북위의 역도원은 5세기 말∼6세기 초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당시는 고구려는 장수왕⋅문자명왕의 재위기였고, 수도는 대동강 이북의 대성산성 혹은 안학궁 일대로 비정된다.”는 자신의 관점을 먼저 확실히 밝혀놓고, 그 다음에 “역도원과 만난 고구려의 사신은 패수(대동강)의 북쪽에 고구려 수도가 있”다고 말했다고 서술한다. 먼저 밝힌 자신의 관점에 맞게, 역도원 『수경주』를 해석한 것이다. 안정복 등이 『수경주』를 해석할 때 이미 사용한 방법이다. 안정복이 ‘城’에 미리 ‘按指平壤城’ 즉 “검토해보면 평양성을 가리킨다.”를 덧붙여놓았고, 이병도가 ‘城’ 뒤에 괄호로 ‘平壤城’을 특별히 덧붙여 놓았으며, 또한 노태돈 역시 “言城在浿水之陽”에서 ‘城’을 고구려 도읍인 평양성으로 해석한 경우처럼 자신의 관점을 미리 밝히고 그에 맞게 해석한 것이다. 위 글의 필자는 이와 같은 해석에 “관련 연구는 노태돈, 「고조선 중심지 변천에 대한 연구」,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2000, 43~46쪽을 참조”라는 주석을 특별히 달아놓았다. 『수경주』의 조작은 아직 살아 활동 중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수경주』의 원문 전체에 평양이란 지명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역도원이 패수에 비정하려던 대동강 일대에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이미 검토했듯, 『수경주』의 원문을 문맥에 맞추어 해석하면, 그러함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위와 같이, 역도원이 『수경주』를 작성할 당시에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들은 답변 내용을 통해 당시 고구려 도읍인 평양성이 현재의 대동강 일대에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렇다면 그 평양성이 어디에 있을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검토해보았다. 본고는 고구려 도읍인 평양성의 비정(批正)을 위한 문제제기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본고의 부족한 점은 이후 더 깊은 탐색을 곁들여 보충하고자 한다.
주58) 안정준,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역사비평』114, 2016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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