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와 소염시 양귀비라 하면 서안의 화청지가 떠 오른다. 서안은 진시황의 병마용갱과 화청지로 유명해진 중국 관광특구이기 때문이다. 특히 화청지는 무려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시안(西安)의 북동쪽에 위치한 온천 휴양지로 산세가 좋고 온천수가 좋아 역대 황제들의 별장을 만들어 겨울철의 휴양지로 쓸 만큼 각광 받았던 왕실 원림 역할을 하던 곳이다. 서주시절에는 주유왕이 리궁(驪宮)을 지었고, 이후 진시황과 한 무제도 여기에 행궁(行宮)을 지었다고 한다. 특히 당 현종(玄宗)이 60만㎡의 넓은 면적 안에 건설한 궁전과 누각이 가장 화려했는데 이때 정식으로 화청궁(華淸宮)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화청지입구)
특히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함께 거울을 지내던 곳으로 온천이 유명한 데 현종이 양귀비를 위해 이곳에 화려한 누각들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 서안의 화청지는 호수를 중심으로 양귀비가 실제로 목욕을 했다는 해당탕이라 불리는 목욕탕과 양귀비의 석상까지 세워져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양귀비가 온천욕을 즐기게 된 것은 중국역사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그녀의 액취증(암내)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양귀비는 키는 대략 155cm, 몸무게는 65kg 정도였다고 하는데 당시 미인의 기준은 지금처럼 훤철한 키에 납렵한 S자 몸매가 아니라 토실토실한 몸매였던가 보다.
(화청지)
화청궁의 전체 구조는 4문, 10전, 4루, 2각, 5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연못가에는 양귀비의 이름을 딴 버드나무가 늘어지고, 석방(石舫)이나 어전, 정자, 회랑을 배치한 중국식 정원이 있고, 양귀비상도 서 있다. 어탕견지(御湯遣址)박물관에는 양귀비의 부용탕(芙蓉湯)과 현종의 구룡탕을 복원하여 연화탕으로 꾸며 놓았다. 이 온천의 물은 석탄, 탄산, 망간을 포함하며, 항상 43도를 유지하고 수량도 풍부하다. 화청궁 안의 오간청(五間廳)은 1936년에 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오간청에는 장개석이 잠깐 숙박하다가 장쉐량(張學良)에게 체포당하면서 생긴 총탄의 흔적과 구멍 뚫린 유리창 등이 당시 그대로 남아 있다.
양귀비는 미녀가 많다는 사천성 포주(蒲州) 영락(永樂: 지금의 산서성 영제永濟) 출신으로 고아로서 숙부 양립(楊立)의 집에서 자랐다. 성은 양(楊), 이름은 옥환(玉環)이다. 어려서부터 춤과 악기를 잘 다루었고 피부는 백옥같이 희고 허리는 가늘고 몸은 풍만하였다고 한다. 16살 때 이런 재주로 궁녀로 뽑혀 후일 황태자로 책봉된 현종의 18째 아들 이모의 눈에 들어 결혼까지 하게 된다.
당현종의 본래 이름은 이용기(685~762)로 예종의 3째 아들로 황위를 선양받아 황제에 오른 사람이다. 황위에 오른 현종은 왕비 무혜비가 살아있을 때는 선군의 정치를 펼쳤으나 왕비가 죽자 정사를 멀리하고 비탄의 나날을 보낸다. 3000 궁녀가 있었지만 눈에 차지 않아 채홍사까지 파견해 보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우울했다. 그러든 어느 날 궁에서 춤을 추는 무희를 우연히 보고는 마음이 동했다. 그 무희가 바로 양귀비인 것이다.
(양귀비와 현종)
양귀비가 처음 궁에 들어 온 것은 현종의 18번째 왕자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눈에 들어 비로 간택되어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 현종과 양귀비 둘의 관계는 시아버지와 며누리인 셈이다. 현종은 총애하던 왕비 무혜비가 죽은 후에 양귀비를 만났는데 그때 현종 나이 58세(740년)였고 양귀비는 22살이었다고 하니 둘의 나이차가 36세나 된다. 로맨스인가 불륜인가. 그래서 제왕은 후안무치(厚顔無恥)라고 했던가. 허긴 삼국지의 영웅 조조도 무려 25명의 처첩을 두었다고 한다. 기록에 나온 것만은 15명인데 그 중에서 7~8명은 남의 아내를 가로챈 것이라고 하니 조조에 비하면 약과라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조금은 양심이 있었던지 현종은 양귀비의 미모에 반했지만 자산의 며누리인 양귀비를 바로 취할 수 없어 환관 고력사(高力士)와 모사를 꾸며 양귀비를 도교 여도사로 만들어 화산으로 출가시킨 후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韋氏) 성을 가진 새 아내를 맞게 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부부의 관계를 끊게 하여 양귀비의 신분 세탁을 해준 셈이다. 그리고 양귀비를 다시 궁으로 불러 태진궁(太眞宮)을 지어주고 태진이라는 법호를 내려 여도사로 머물게 했다. 태진궁은 사실상 양귀비와 현종의 밀회장소가 된 셈이다. 그 후 천보(天寶) 4년(745)에 마침내 양귀비를 정식 귀비로 책봉하였다고 한다. 그때 양귀비 나이는 24였다고 한다. 귀비로 책봉된 양귀비는 현종으로부터 끝내 황후로는 책봉 받지 못했지만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 결과 외척의 난립과 부정부패로 시기하는 반대세력의 봉기와 안록산의 난 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불행이도 현종은 37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양귀비와는 자식이 없었다.
(해당탕)
당 현종의 몰락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는 양귀비와의 만남이고 둘째는 양귀비가 안록산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안산의 난(755~763)의 발발 원인이 양귀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양귀비가 안록산을 처음 만난 곳은 천보 6년(747) 정월 현종이 변방의 절도사 안록산을 환영하기 위해 베푼 흥경궁(興慶宮)의 연회 장소였다고 한다.
그 후 안록산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안록산을 양귀비는 수양아들로 삼았다. 현종과 양귀비와의 나이 차이는 37세였지만 그때 안록산과 양귀비와의 나이 차이는 17살이었다. 그것도 돌권족 출신의 야성미 넘치는 사내를 만났으니 구중궁궐에서 늙은 현종만 바라보던 색기넘친 젊은 양귀비가 어찌 혹하지 않겠는가. 안록산은 현종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자주 입궐하여 양귀비를 만났으며, 양귀비는 그를 화청지로 데려가 목욕을 시켜주기까지 했다고 했다. 심지어 목욕이 끝난 다음에는 오색천으로 요람을 만들어 안록산을 어린애처럼 굴게 하고 그를 요람에 눕히기도 하였다. 일설로는 수십명의 궁녀가 요람을 흔들어 주었고, 양귀비가 나타나면 안록산은 그녀를 "엄마, 엄마” 하고 불렀다고 한다. 17살이나 차이가 나는 아들을 둔 20대의 젊은 엄마, 가끔은 젖을 물리기도 하여 모성애(母性愛?)를 발휘하기도 했단다. 참으로 대단한 모성애가 아닌가. 한번은 너무 열열한 모성애(?)로 유두(乳頭)에 상처가 나자 양귀비는 현종에게 들킬 것을 두려워 이를 감추기 위해 붉은 비단 천으로 가슴을 가렸는데 그것이 훗날 "허즈(河子)" 또는 "뚜떠우(?兜)"라고 하는 중국식 '브래지어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소염시<小艶詩> 一段風光畵不成 일단풍광화불성> 洞房審處設愁情 동방심처설수정> 頻呼小玉元無事 빈호소옥원무사> 只要檀郞認得聲 지요단랑인득성
(금을 타는 양귀비)
아름다운 그 맵시,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리지 못하리니 깊고 싶은 규방에서 애만 태운다. 자주 자주 소옥을 부르지만 소옥에겐 일이 없고 오직 님께 이 소리를 알리려는 뜻이라네 (양귀비도)
이 시가 바로 그 유명한 당나라 현종의 애첩 양귀비와 안록산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시다. 소염(小艶)은 처음 피려할 때의 산뜻하고 아름다운 꽃송이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양귀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안록산과 눈이 맞아 남몰래 자주 밀회를 할 때는 언제나 안록산을 부르는 신호로 자신의 몸종인 소옥(小玉)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안록산은 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비밀 통로의 문이 열려 있음을 알고 몰래 들어와서 만나곤 하였다.
「자주 자주 소옥을 부르지만 소옥에게는 일이 없고 오직 님께 이 소리를 알리려는 뜻이라네」 라고 하는 이 시의 마지막 귀(句)가 언어 밖에서 다른 뜻이 있다는 의미에서 종문무고(宗門武庫)에 오조법연과 진제형거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과 같이 선가(禪家)에서는 화두(話頭)로서 자주 활용하고 있다.
(귀비청)
755년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의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長安)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이 소식을 접한 현종은 가랑비 내리는 한여름 새벽에 승상 위견소(韋見素), 양국충, 양귀비 자매와 소수의 금위병만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장안성 연추문(延秋門)을 벗어나 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일행은 마외파(馬嵬坡, 지금의 섬서성 흥평(興平)에 이르렀으나, 병사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현종에게 양국충과 양귀비를 비롯한 양씨 일족들을 모두 죽이기를 강요했다. 결국 양국충과 일족들의 목이 잘리고 시신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양귀비에게는 마외역관 앞 배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진하도록 명을 내렸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고 했던가. 이로서 양귀비의 삶도 종국을 맞게 되니 그때 나이는 37세였다고 한다. 22살에 최고 존엄의 권좌에 있는 황제 현종의 품에 안기고 24때 귀비로 책봉까지 되었지만 37세에 제대로 피지도 못하고 비운의 죽임을 당한 여인 양귀비. 누가 말했던가.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꽃도 부끄러워 고개 숙였다는 화청지의 주인은 어디로 가고 무심한 연못 위에 일렁이는 버들 그림자, 님 없는 빈 정자에 무심한 바람소리 뿐이다.
훗날 마외파에 양귀비의 분묘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마외파에 묻힌 양귀비의 분묘는 지금은 둠처럼 조성되어 있는데 양귀비가 묻힌 분묘의 흙을 떠서 얼굴에 바르면 예뻐진다는 속설 때문에 처음에 조성되었던 양귀비의 분묘의 흙을 파가는 여인들이 많아 분묘가 붕괴되자 이를 막고자 중국정부가 돌로서 분묘를 만든 것이 지금 섬서성 마외파의 분묘라고 한다.
@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후 당현종은 왕위를 물려주고 태상황(太上皇)이 되었고, 그의 아들 숙종(肅宗)이 난을 평정하면서 황제라 칭하였다. 현종은 장안으로 돌아왔지만 죽은 양귀비를 잊지 못하여 우울한 날을 보내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중국정부가 공식 인증한 양귀비 초상)
@양귀비의 죽음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안록산의 난 때 현종의 명으로 죽음에 이르자 환관과 짜고 양귀비 대신 그의 몸종을 목매달게 하고 양귀비는 일본 상인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현재 일본연해 구진(久津)이라는 곳에 양귀비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그녀의 유물과 사당, 무덤 등이 전해지고 있는데 안사의 난을 피한 양귀비가 이렇게 3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30년간을 살다가 68세에 죽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양귀비도
월나라의 서시, 한나라의 왕소군, 삼국지의 왕윤의 딸로 여포에게 출가한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으로 칭송되는 해어화(解語花) 양귀비. 비록 짧은 생애에 비운의 삶을 살다갔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얼마나 뭇 시인묵객들의 몸을 달구고 입에 회자했던가. 그녀를 소재한 시문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백거이의 장한가가 단연 백미(白眉)로 일컫는다.
馬嵬坡下泥土中, 마외파 언덕 아래 진흙 속에는 不見玉?空死處。 옥같은 얼굴 보이지 않고 죽은 곳만 공허하네 君臣相顧盡沾衣, 군신은 서로 돌아보며 옷이 눈물에 젖으며 東望都門信馬歸。 동쪽으로 도성문을 보며 말이 돌아가기를 믿을 뿐 ~백거의 장한가 중에서~
|
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첫댓글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