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 허수경 詩『이 가을의 무늬』
- 시집〈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빗소리 듣는다. 가만 곰곰해지는데 나는, 무슨 생각이 이리 깊은 것이냐. 덥다와 춥다 사이. 휘둘리지 않고 온몸의 감각을 만끽할 수 있는 계절이구나 가을은. 창문을 좀 더 열어둔다. 셀 수도 따질 수도 없는 많은 것이 들어오고 나가고 있다.
지금 나는 가을을 ‘타는’ 모양이다. 사전을 열어 ‘타다’를 검색해본다. 아홉 갈래의 의미가 있구나. 하나하나 대입해본다. 불꽃이 일어 ‘타는’ 것도 말이 된다. 마른 마음 위로 번져가는 기운이 있으니. 올라 ‘타는’ 것도 그럴듯하네. 일렁이는 무언가에 올라탄 듯 휘어지고 흔들리고 있다, 지금 나는. 섞는 것도 받는 것도 다 어울린다. 정확한 뜻은 찾을 생각 없이 이리저리 상상을 이어가다가 피식 웃고 만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상태. 그것이 가을이겠다.
그러나 갈팡질팡 갈피를 잡기 어렵다 하여 괴로운 것은 아니다. 아주 잠깐이라는 것을 잘 안다. 곧 시리고 추운 날씨가 되면 나는 내 안으로 꽁꽁 숨어 꼼짝달싹 못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가을을 기다리게 되겠지. 그러니 이런 계절에 나는 무얼 하면 좋을까. 책을 폈다가 덮고,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잠시 나를 내버려두기로 한다. 숨 쉬고 바라보고 맡고 만지고 하는 나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나를 둘러싼 환경, 내게는 전부이고 그러니 세계이고 우주인 당장을 만끽해보려는 것이다. 모두 지나가므로 속절없이 과거가 되어 가고 있으므로, 사랑해야지. 이 가을 무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