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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라는 뜻으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어 강압으로 인정하게 됨 또는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함을 이르는 말이다.
指 : 가리킬 지(扌/6)
鹿 : 사슴 록(鹿/0)
爲 : 위할 위(爪/8)
馬 : 말 마(馬/0)
(유의어)
견강부회(牽强附會)
백마비마(白馬非馬)
손초수석(孫楚漱石)
수석침류(漱石枕流)
아전인수(我田引水)
영서연설(郢書燕說)
원록화마(苑鹿化馬)
위록위마(謂鹿爲馬)
이록위마(以鹿爲馬)
추주어륙(推舟於陸)
침류수석(枕流漱石)
출전 : 사기(史記) 진이세본기(秦二世本紀)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자신을 진(秦)나라의 처음 황제라는 뜻의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고 후계자들을 이세 황제, 삼세 황제라는 식으로 호칭하도록 만들어 진나라가 영원히 번영하기를 기원했지만, 제5차 순행 도중에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천수가 다했음을 직감했던지 환관(宦官) 조고(趙高)에게 명하여 큰아들 부소(扶蘇)에게 주는 편지를 만들게 하였다. 편지에는 '군사를 몽념(蒙恬)에게 맡기고 함양(咸陽)에서 나의 관을 맞아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고 쓰도록 했다. 큰아들 부소에게 자신의 장례를 주관케 하라는 유서였던 것이다.
편지가 봉함되어 사자의 손에 전해지기도 전에 시황이 승하하였다. 편지와 옥새는 모두 환관 조고가 지니고 있었다. 시황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다만 호해(胡亥)와 승상 이사(李斯)와 조고, 그리고 심복 환관 오륙 명뿐이었다. 조고는 먼저 호해를 설득한 다음, 회유와 협박을 다 동원하여 승상 이사까지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세 사람은 비밀리에 담합하여 호해를 황위 계승자로 세우고, 부소와 몽념 장군에게 자결하라는 내용의 유서를 조작했다. 부소는 자살했고, 몽념은 자결을 거부하다가 반역죄로 잡혀 사형을 당했다. 이세 황제(二世皇帝)가 된 호해의 무능을 이용하여 조고는 모든 권력을 쥐었으며, 급기야는 모반죄를 뒤집어 씌워 승상 이사까지 제거해 버리고 자신이 승상이 되었다.
조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의 자리를 노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러 신하들이 따라 주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하여 조고는 신하들을 시험하기 위해 사슴을 이세 황제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이것은 말입니다."
趙高欲爲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馬也.
이세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잘못 본 것이오. 사슴을 일러 말이라 하는구려."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조고가 대신들을 둘러보며 묻자 어떤 사람은 말이라고 하며 조고의 뜻에 영합했다. 어떤 사람은 사슴이라고 대답했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암암리에 모두 처형했다. 모든 신하들은 조고를 두려워했다.
問左右, 左右或言馬, 以阿順趙高. 或言鹿者, 高因陰中諸言鹿者以法. 候群臣皆畏高.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진이세본기(秦二世本紀)에 나오는데, 조고가 신하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사슴을 말이라고 했다는 말에서 '지록위마'가 유래했다.
역사에 뒤가 맑은 간신은 거의 없다. 그는 유방의 군대가 진의 수도 함양으로 올라오자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3세 황제로 옹립했다. 자영은 호해와 달랐다. 그는 등극 즉시 조고를 주살해 버렸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애쓰는 자는 남들이 그를 끌어내린다. 이름을 들어 말하지 않고, 지위를 들어 말하지 않고, 인맥을 들어 말하지 않아도 남들은 안다. 그가 누구인지를. 권세는 남이 보기에 아름다워야 빛이 난다. 세상에 홀로 빛나는 건 적다. 태양이 있기에 그 빛이 고운 것이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중국 역사서 초한지(楚漢志)에 보면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있다. 이는 가리킬 지(指)에 사슴 록(鹿) 위할 위(爲)에 말 마(馬)자를 쓰는데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사람들을 농락하여 권세를 부린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또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 남을 속이려 하는 짓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의 조(趙)나라, 위(魏)나라, 초(楚)나라, 연(燕)나라, 제(齊)나라를 잇달아 무너뜨리고 기원전 221년 중국 대륙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진(秦)나라를 세우고 자손만대(子孫萬代)가 이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덕이 삼황(三皇)보다 낫고 공적은 오제(五帝)보다 높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호칭(呼稱)를 왕(王)에서 황제(皇帝)로 바꾸었다. 이어 그는 자신이 첫 황제이므로 처음 시(始)자를 붙여 시황제(始皇帝)라 칭하라 했다. 그런 이후 아들을 이세황제(二世皇帝), 그 다음을 삼세황제(三世皇帝)라 부르도록 했다.
또 황제의 명(命)은 제(制), 령(令)은 조(詔)라 하고, 짐(朕)과 옥새(玉璽)란 말도 황제만 사용할수 있도록 했다. 그는 승상 이사(李斯)를 시켜 천하제일의 명옥(名玉) 화씨지벽(和氏之璧)에 '하늘에서 명을 받아 영원히 번창 한다'라는 뜻의 수명우천 기수영창(受命于天 旣壽永昌)이라고 새긴 옥새를 만들라 하였다.
이렇듯 불로장생과 영원한 제국을 꿈꾸었던 진시황은 중국 대륙을 천하 통일한지 11년만인 기원전 210년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같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진나라도 2세 황제 호해(胡亥)에 이르러 15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진시황 사망 후 5년을 넘기지 못하였다.
그 연유(緣由)는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죽자 측근 환관(宦官)인 조고(趙高)가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현명한 태자(太子)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리석은 호해(胡亥)를 세워 2세 황제(皇帝)로 삼았다. 현명(賢明)한 부소(扶蘇)보다 용렬한 호해(胡亥)가 다루기 쉬웠기 때문이다. 황제에 오른 호해(胡亥)는 천하(天下)의 모든 쾌락(快樂)을 마음껏 즐기며 살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역심이 생긴 조고(趙高)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2세황제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陛下), 천하의 명마(名馬)을 바치오니 거두어 주시오소서"라고 말하자, "승상(丞相)은 농담도 잘 하시오.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指鹿爲馬)...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이 사슴이 말로 보이시오?" 하면서 호해(胡亥)는 좌우의 신하(臣下)들을 둘러 보았다.
그러자 간신 조고(趙高)가 나서며 "폐하(陛下) 이것은 사슴이 아니라 분명 말(馬)입니다. 제가 말이라는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신하들을 향해 "이것이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좌측으로 서시고 이것이 사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측으로 서시오" 하였다. 그러자 분명 사슴인데도 말이라고 우기며 좌측으로 서는 간신배들이 많았고 '이것이 어찌 말이란 말이오? 사람을 속여도 유분수지'하면서 우측으로 서는 소신있는 신하들은 몇명이 안 되었다.
간신 조고(趙高)는 "폐하(陛下) 이것 보십시오. 조정 대신들이 거의다 말이라고 하지 않읍니까? 이것은 분명 말이옵니다." 그러자 2세황제 호해는 "허허 그런가? 그럼 말인가 보지" 하면서 간신 조고의 술책에 넘어가 사슴을 말이라 인정하였다.
그 뒤 간신 조고(趙高)는 우측에 선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며 적폐청산이라는 미명하에 모두 죽여 버렸다. 그러자 궁중(宮中)에는 조고(趙高)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이때 만들어 진 말이 바로 지록위마(指鹿爲馬)이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어쨌든 조고(趙高)는 이 어리석은 호해(胡亥)를 교묘히 조종하여 경쟁자인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 그 밖에 많은 충신(忠臣)들을 죽이고 스스로 승상(丞相)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환관(宦官) 조고(趙高)가 허수아비 황제를 세우고 스스로 승상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여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 했지만 천하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진(秦)나라 곳곳에서 조고 타도의 반란(叛亂)이 일어났고, 도처의 지방관들은 등을 돌렸으며 시황제(始皇帝)가 전국을 통일한 이전인 전국시대처럼 혼란이 거듭됐다. 이때 나타난 영웅호걸이 바로 그 유명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다.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군사가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해 오자 조고(趙高)는 수습책으로 자신이 옹립했던 2세황제 호해(胡亥)를 죽이고 태자였던 부소(扶蘇)의 아들 자영(子孀)을 앞세워 3세 황제(皇帝)로 삼았다(B.C. 207). 그러나 결국 조고(趙高)는 자신이 황제로 세운 자영(子孀)에게 주살(誅殺)당하고, 이로 인해 진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으며 항우를 이긴 유방이 한나라를 재건하게 되었다.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보면, 창업(創業)과 수성(守城))중 수성이 더 어렵다고 하였다. 창업은 난세에 백성의 지지를 얻는 일이기에 별로 어렵지 않으나 수성은 창업 이후 교만하고 방자해져 백성과 괴리되기 십상이므로 더 힘들다 했다.
창업시기에는 혼란하기 때문에 군주의 결단이 절실하고, 수성에는 평온이 절실한 까닭에 국가의 안위와 덕치, 백성의 삶이 윤택해져야 한다. 국가의 안위가 위태롭고 백성이 궁핍하면 민심(民心)을 잃케 된다. 그래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했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믿음과 신의가 없으면 개인이나 국가가 존립하기 어려우므로 신의(信義)를 지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국가가 존립할수 있는 근거는 먼저 경제(經濟)가 활성화 되어 국민이 윤택해져야 하고, 그 다음은 튼튼한 국방(國防)과 안보(安保)로 인해 국민이 안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가지가 무너지면 믿음이 사라지고 법치(法治)가 무너진다. 법치가 무너지면 그 나라는 믿음과 신의가 무너져 존립할수 없게 된다. 그래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라,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가라도 권세는 10년을 넘지 못하고, 아무리 붉고 탐스러운 꽃이라 하여도 열흘을 넘기기 어렵다는 뜻이다. 어느 권력이든 역사와 과학과 법치를 무시하면 정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했다. 특히 이념(理念)에 치우쳐 국가의 정체성마져 뒤흔드는 정권이라면 더욱 버티기 힘들다. 어느 나라나 최우선 과제는 감히 넘볼수 없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백성은 물, 임금은 배라는 뜻인데,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깊이 새겨들을 말이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중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로는 단연 진시황제가 지목된다. 중국 진(秦)나라의 제31대 왕인 영정(嬴政)은 자신의 나이 39세에 어지러웠던 중국 천하를 통일시키고 스스로 자신의 칭호를 황제로 고쳐 부르게 하여 우리에게는 진시황제(秦始皇帝)로 더 유명하다.
영정은 조(趙)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진나라의 공자 영자초(훗날 장양왕)와 부인 조희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전국시대의 거상 여불위의 애첩이었다. 수완과 안목이 남달리 뛰어났던 여불위는 진나라의 왕위계승권이 있던 영자초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고 심지어는 자신의 여인인 조희마저 바쳤던 것이다.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 사기(史記)여불위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조희는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영자초의 아내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후 영자초는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온다. 이때 소양왕(진나라, 제28대)은 이미 나이가 많았고, 태자 안국군(효문왕, 진나라 제29대)의 정실부인인 화양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여불위가 영자초를 화양부인의 양자로 들여보냈다. 훗날 영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진나라, 30대)이 되었다. 그런 공로로 여불위는 진나라 승상의 자리에 오른다. 여불위의 계획대로 영정은 곧 태자에 책봉된다. 그러나 3년 뒤에 장양왕이 죽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왕에 즉위하였다.
너무 이른 나이에 보위에 오른 영정은 직접 정치를 할 수는 없었기에 승상 여불위가 섭정을 하였다. 여불위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으며, 심지어는 과거 자신의 첩실이었던 모후(母后) 조희와 다시 각별한 사이로 지낸다. 이 같은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웠던 여불위는 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으로 꾸며 조희의 처소로 보냈다.
여불위가 뜻한 바대로 노애와 조희 사이에 두 명의 아들이 생긴다. 이에 조희와 노애는 영정의 눈을 피해 수도인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 영정은 모반을 일으킨 노애를 능지처참하며 노애의 두 아들마저 모두 죽이고, 어머니인 조희를 감금시킨다. 그리고는 이런 엄청난 일들을 꾸민 여불위를 자결하게 만든다.
영정은 새로운 승상 이사를 옆에 두고 친정을 시작한다. 진나라의 모든 군사를 총동원하여 중국 대륙의 통일작업을 시작했다. 가장 쇠약했던 한나라를 필두로 위나라, 초나라,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BC 221년, 마침내 거대한 중국 대륙을 통일시킨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는 주왕조 때의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인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어느 날,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의 잔치에서 박사인 순우월이, "현행 군주제도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로 개체(改替)할 것을 진언했다.
이에 시황제가 여러 대신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한 가부를 묻자 군현제를 주장했던 승상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런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과 복서와 종수(농업)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진시황제가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焚書)'라고 한다.
또한 진시황제는 불로장수(不老長壽)의 신선술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 특히 노생과 후생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는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진시황제의 부덕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몹시 진노했다.
노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폐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었다. 시황제는 그들을 모두 생매장(生埋葬)시켰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坑儒)'라고 한다.
진시황제의 수하에는 조고(趙高)라는 환관이 있었는데, 환관(宦官) 조고는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고사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주인공이다. 지록위마란,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함을 이르는 말로 조고가 자신의 권세를 시험하여 보고자 황제 호해에게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서 남을 속이려는 짓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부친이 죄를 범하는 바람에 조고의 어머니는 관노(官奴)가 되었다. 이일로 인해 그는 노예라는 미천한 신분으로 출생했다. 하는 수 없이 조고는 어려서 거세를 하고 궁으로 들어가 궁의 허드렛일을 도맡아하는 신분 낮은 환관이 되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였다. 덕분에 복잡하고 까다로운 궁중예법을 몸소 익혀 나라의 법률에 정통하였고, 그런 그의 영명함이 진시황제의 눈에 들어 제법 높은 관직을 맡아보게 되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에도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비위를 맞추고 머리를 조아리는 등 온갖 수모와 치욕을 다 참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조고는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세상의 권력을 움켜쥐고 자신을 천대했던 귀족문벌 사람들의 무릎을 꿇게 만들고야말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의 복수심은 극에 달했다.
조고는 중국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제를 따라 여행하던 중 시황제가 병사하자, 당시의 승상 이사와 짜고 거짓 조서를 꾸며,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와 명장 몽염을 자결하게 만들었다. 또 시황제의 용렬(庸劣)한 막내아들 호해를 시황제를 이은 2세 황제 자리에 앉혀놓고 자기 마음대로 조종했다.
또한 평소 정사에는 별관심이 없었던 황제 호해에게 참소(讒訴)하여 승상 이사를 죽이고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아 횡포와 만행을 저질렀다. 이사가 죽은 후, 진나라의 권력은 이제 완전하게 조고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조고는 자신의 위세를 과시도 할 겸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내기도 할 겸 겸사겸사 황제 호해에게 사슴 한 마리를 바치면서, "폐하, 천하의 명마를 한 마리 바치오니 부디 거두어 주시오소서"라고 하였다.
호해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조고에게 물었다. "승상, 저건 사슴이 분명한데 어찌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승상 조고는 매우 엄중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건 분명히 말입니다. 폐하께서만 어찌하여 사슴이라고 하십니까?"
호해는 그저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좌우의 대신들에게 모두 물었다.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저것이 말로 보이오?"
대신들은 조고의 눈치를 보다가 대체로 "그렇다!"고 대답하였으나, 더러는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했던 사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였다는 데서 비롯된 고사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유래이다.
진나라의 멸망은 진시황이 죽으면서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조고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장자 1인과 황제 한 명을 죽였으며, 유능한 정치가이자 경세가인 승상 이사를 죽였으며, 진나라의 대들보인 장군 몽염과 몽의 형제를 죽였다. 아울러 진시황의 공자와 공주 30~40여명을 죽였으며 수 십 명에 달하는 대신과 수 백 명이 넘는 그들의 가족을 죽였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백성을 죽였다.
그는 정치권력의 제일 꼭대기에 올라 한 일이라고는 사람을 죽인 일 뿐이었다. 오로지 비천한 신분의 굴욕과 열등감을 복수하기 위하여 그는 희대의 살인광으로 역사에 등재되는 인물이 되었다.
어느 날, 호해는 낭중령(郞中令)으로 승진된 조고를 불러 말했다. "현명한 군주는 정사를 대신에게 맡기고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유념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구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 많은 공자와 대신들이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공자들은 대부분 황제 폐하의 형장(兄長)들입니다. 대신들도 선황의 유조 때문에 복종을 하고 있을 뿐 내심으로는 따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틀림없이 변고가 발생할 것입니다. 더욱이 몽염 장군이 죽었지만 몽의 장군은 변방에서 병마를 거느리고 있어 항시 불안한 정세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지금 폐하께서는 편안하게 즐거움만 추구하고 계십니까?"
황제 호해는 갑자기 두려움에 온 몸을 떨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조고가 시원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단지 법률을 더욱 엄하게 바꾸고, 형벌을 가혹하게 다스리며, 죄인에게는 연좌제를 실시하여 화근을 아예 뿌리 채 뽑아 버리면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조정의 일에 공자(公子)들을 멀리하게 만들고, 선제(先帝)의 대신들은 서서히 하나씩 제거하고, 가세가 빈궁한 사람들을 등용하면 그들은 성은에 감격하여 폐하께 충성을 다 바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하는 안정을 찾게 되고 폐하께서는 오로지 즐거움만 찾으실 수 있습니다."
호해는 조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업무를 조고에게 맡겼다. 이날 이후 함양성은 조고에 의해 도살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상금을 타기 위하여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공자들과 대신들의 죄상을 내궁부에 고발하였다. 조고는 고발을 접수하면 곧바로 체포하여 하옥시키고 가혹하게 고문을 하여 없는 죄상도 스스로 불게 만들었다.
이때 몽의 장군을 비롯하여 수십 명에 해당하는 선황제의 대신들과 호해의 12명 형제들이 피살되었고, 연루되어 함께 피살된 사람들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더욱 공포스럽고 끔찍한 일은 10명의 공주들이 죄명도 모른 채 동시에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거열형은 여섯 대의 수레에 각각 사지와 목과 몸통을 묶고 말을 힘차게 몰아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잔혹한 형벌이었다. 조고는 고귀한 신분의 공주들이 동시에 목이 땅에 떨어지고, 하늘하늘한 몸통이 네 쪽으로 갈라져 하늘에 선홍색의 피를 뿌리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생리적인 결함과 오랜 억압으로 조성된 야수(野獸)보다 더한 잔인성과 동물적 포악성이 한데 어우러져 그의 가슴에 극도의 만족감과 쾌락을 안겨주었다.
법령은 날이 갈수록 가혹해져 갔고, 형벌은 더욱 끔직해졌다. 여러 대신들은 점점 위기의 벼랑에 몰려 전전긍긍 하였고, 백성들의 시신은 산처럼 쌓여갔다.
2세 황제 호해는 조고가 정적을 제거하는 동안에 토목공사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진시황이 조성하려다 미완으로 남겨둔 아방궁의 공사를 넓고 화려하게 다시 수축하기 시작하였고, 노역(奴役)으로 수만 명의 백성을 징발하였다.
백성들은 생존을 위하여 가래나 삽을 어깨에 메고 산으로 도망가 초적(草賊)이 되었다. 진승과 오광이라는 사람은 대택향에서 대나무창을 높이 들고 봉기를 하였고, 뒤이어 옛 6국의 귀족후예들도 여기저기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반진(反秦)의 봉화는 벌판을 태우는 불처럼 사방에서 일어나 진나라의 운명을 풍전등화로 만들었다.
조고는 개인적인 은원(恩怨)으로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기 때문에, 원한에 쌓인 대신들이 직접 호해에게 자신의 죄상을 폭로하는 주청을 하지 못하도록 호해에게 협박조로 권고하였다. "폐하! 천자(天子)가 늘 대신과 얼굴을 맞대면 고귀함이 드러나지 않는 법입니다. 하물며 폐하는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대신들의 비판 쉽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천자의 권위와 신명(神明)을 드러내는 방법이 아니옵니다. 폐하께서는 심궁(深宮)으로 물러나 편안하게 계시옵고, 조정의 잡다한 사무는 소신과 법령에 익숙한 시종들이 맡아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하면 천하의 사람들은 폐하를 현명한 군주라고 칭송을 할 것입니다."
조고의 말은 호해의 생각에 꼭 들어맞았다. 호해는 모든 정사를 조고에게 맡기고 궁중 깊숙이 몸을 감추고 주색에 심취하였다. 조고는 지위만 환관이었지 사실상 임금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였다.
비천한 신분에서 출발하여 고귀한 신분의 대신들 사이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압박감과 열등감이 심하다. 때문에 그들은 권세를 얻으면 오랫동안 눌렸던 원한과 비굴감과 열등감이 보복행위로 변질되기가 십상이고, 유혈을 오락으로 즐기는 잔인한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천하의 군웅(群雄)이 쳐들어와 진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자, BC 209년 2세 황제마저 모살(謀殺)하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옹립하여 진왕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곧 자영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3족도 함께 처벌되었다. 자영은 재위 46일 만에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는 통일이후 3대 15년 만에 멸망하고, 뒤이어 쳐들어온 항우에게 잡혀 죽었다.
대저 그릇이 작은 권력자는 항시 두려움에 눌려서 큰일을 이룰 수가 없다. 또한 개인적인 한(恨)과 야욕이 강한 사람은 천하의 대세를 엉망으로 만든다. 진정한 권력자는 인내와 관용과 이해가 풍부해야 한다.
도량이 부족한 조고는 최고의 권력자가 되자 강대한 통일왕조를 뿌리 채 흔들었다. 황제를 죽이고, 왕자, 공주, 승상, 장군은 물론이고 숱한 공신과 귀족을 살상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고, 타인의 약점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기지를 올바른 방향에 사용하였다면 현상(賢相)이 되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그는 정치권력의 제일 꼭대기에 올라 한 일이라고는 사람을 죽인 일 뿐이었다. 오로지 비천한 신분의 굴욕과 열등감을 복수하기 위하여 그는 희대의 살인광으로 역사에 등재되는 인물이 되었다.
지록위마(指鹿爲馬)와 진나라의 멸망
진나라 왕 영정은 가을 바람이 낙엽을 쓸어가는 세찬 기세로 한(韓), 조(趙), 위(魏), 초(楚), 연(燕), 제(齊) 여섯 나라를 차례로 멸하면서 기원전 221년에 춘추 전국의 5백년 간의 혼란한 국면을 매듭짓고, 중국 역사상 첫 번째의 통일된 대제국을 건립하고는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하였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산동성 일대를 순시하였다. 그를 수행한 사람은 승상인 이사(李斯)와 그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 호해(胡亥), 그리고 어가를 관리하는 환관인 조고(趙高) 등이 있었다. 그들이 산동 평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삼복더위였는데 진시황은 그만 더위를 먹어 병석에 눕게 되었고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지금의 하북성 평향 동쪽인 사구로 가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진시황은 큰아들 부소(扶蘇)에게 황위를 계승할 것을 유언하였으나, 사자를 보내 그 유언을 전할 사이도 없이 그만 사구 평태(平台)에서 진시황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결국 더위를 먹은 것이 발단이 되어 병사하고 말았다.
조고는 유서를 봉하고 깊이 감추어 두고 사자를 보내지 않았다. 승상인 이사는 황제가 궁 밖에서 붕어하였기 때문에 여러 아들들이 천하를 다툴 것을 염려하였다. 또한 백성들이 이 기회를 틈타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진시황의 죽음을 비밀에 부친 채 급히 수도인 함양(咸陽)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어가의 책임을 맡고 있던 환관 조고는 사람됨이 간사하고 음험한 자로 일찍이 호해에게 법률을 가르친 적이 있었으므로 호해의 선생님인 셈이었다. 그는 호해가 황위를 계승하기를 원하였다.그래서 호해에게 황위를 뺏어오도록 부추기면서 두 사람은 한통속이 되었다. 그들은 또 승상 이사도 끌어들였다.
이사는 몹시 재능이 있는 자로 그는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하는 사업에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는 조고와 호해의 음모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호해 일당이 자신을 해할 것을 두려워하여 결국에는 호해와 조고와 한통속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몰래 진시황의 유서를 없애버리고 큰아들 부소와 북흉노를 토벌한 유명한 몽염 장군에게 자살하라는 유언을 날조하여서 사자를 보내었다.
부소는 조고 일당이 위조한 유언을 받고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해 보지도 않은 채, 한바탕 통곡하고 난 후에 정말로 자살하고 말았다. 몽염은 자살하려 하지 않자 조고가 파견한 사자는 그를 붙잡아 감옥에 넣은 후에 억지로 독약을 먹여 죽였다. 사자가 돌아가 보고를 하자 호해, 조고, 이사는 기뻐하면서 급히 함양으로 돌아가 진시황이 붕어했다는 소식을 공포하고 호해를 옹립하여 즉위하게 하니 이 사람이 바로 진나라의 이세(二世) 황제다.
조고는 사구의 변고 속에서 이세가 된 호해를 황위 자리에 오르게 한 공으로 낭중령(郎中令)으로 승진이 되었고,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기원전 208년 8월 조고는 계교를 써서 이사를 죽이고 자신이 재상의 자리에 앉게 되고 날마다 권세는 커져만 갔다. 그는 직권을 이용하여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모두 죽이니 다른 대신들이 자신의 잘못을 상주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조고는 자신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음을 알고는 한번은 문무백관들 앞에서 자신의 명령을 이들이 듣는지를 검증코자 하였다. 이리하여 조회 시에 사슴 한 필을 헌상케 하고 사슴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폐하, 이 말은 소신이 올리는 명마입니다. 하루에 능히 천리 길을 걸을 수 있고, 밤에는 8백리를 걸을 수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황제는 자신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은 사슴인데 말이라고 하니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그래 웃으면서 "승상이 잘못 보셨구려!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하다니(指鹿爲馬)"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 눈을 크게 뜨고 좌우의 신하들을 살피더니 큰 소리로 말하였다. "이는 말입니다. 폐하 어째서 사슴이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자 어리석은 이세도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용기를 내어 "승상은 말이라고 하고, 나는 사슴이라고 하니 여기에 모인 문무백관들에게 물어봅시다. 이게 사슴인지, 말인지." 문무백관들은 이를 듣고 마음 속으로 안절부절 못하였다. 분명히 사슴이지만 만일 사실대로 말한다면 승상한테 죄를 짓는 것이고, 말이라고 하면 또 황제를 속이는 일이다.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때 조고가 큰 소리로 "여러분은 잘 보시오. 이렇게 몸이 둥글고 다리가 가늘고, 긴 갈귀가 있고, 귀는 뾰족하고, 꼬리는 굵은 것이 말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여러분들은 빨리 말하시오"라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좌우에 있는 신하들은 침묵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조고가 다시 재촉하자 어떤 사람은 조고가 무서워 말이라고 대답하고, 어떤 사람은 곧이곧대로 사슴이라 대답하였다.그 일이 있은 후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신하들을 음모를 만들어 죽여 버렸다. 이후로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고는 다시는 조고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조정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은 조고는 이세에게 깊은 궁궐에 있게 하고, 혼자 황제의 측근에 있으면서 대권을 한 손에 쥐었다. 이때 유방의 군대는 이미 무관(武關)을 정복하고 관동 대부분 지역은 봉기군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조고는 이세가 책임을 추궁할 것을 두려워하여 병을 빙자하여 조회에 출석하지 않고 암암리에 이세인 호해를 죽일 것을 음모하였다. 조고는 그의 아우인 낭중령 조성(趙成)으로 하여금 안에서 내응하도록 하고 적을 수색한다고 속여서 이세가 머물고 잇는 망이궁(望夷宮)으로 병사를 파견하니, 이세는 달아날 길이 없음을 알고는 하는 수 없이 자결하였다. 조고는 이세의 조카인 영을 옹립하고 그 직위를 낮추어 진왕(秦王)이라 칭하였다.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봉기하였고 기원전 206년에 진왕조의 통치는 백성들의 의거로 무너졌다. 206년에는 유방(劉邦)이 관중(關中)으로 진군해 들어오자 진은 멸망하였다.
지록위마(指鹿爲馬)와 이사(李斯)
진시황 영정(嬴政)의 환관 조고(趙高)가 범죄 공모를 목적으로 승상 이사(李斯)에게 던진 질문이다. "유능한 사람은 화(禍)를 복(福)으로 바꿀 수 있다는데, 승상은 이제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위협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그 내용은 역모 그 자체였다.
순행(巡行) 도중 지금의 허베이(河北) 성에서 사망한 진시황의 유지(遺志)를 조작해, 우둔한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자는 것이었다. 만약 강직한 큰아들 부소(扶蘇)가 황제가 되면, 그와 사이가 소원한 이사의 지위도 위태로울 것이라며 말이다.
이사와 공모해 부소를 제거하고 진시황의 우둔한 아들 호해를 2세 황제로 세운 후, 환관 조고는 다시 교묘한 술책을 부려 걸리적거리는 승상 이사까지 제거한다. 드디어 모든 권력을 손에 넣었다. 조고는 호해를 심리적으로 조종하고 자신의 판단력까지 불신하게 만들 목적으로 특별한 이벤트를 하나 연출한다.
궁정에서 '사슴 한 마리를 호해에게 선물하며 말이라고 우겨본다'는 컨셉이었다. 이 이벤트 당일 현장에 동원된 고관대작들은 조고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웠다. 호해가 말이 아니고 '사슴'이라고 부정했지만,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말'이라고 외쳤다.
지록위마(指鹿爲馬)라, '지록(指鹿)'은 '사슴을 가리키다'라는 뜻이다. 뒤의 두 글자 '위마(爲馬)'는 '말이라 칭하다'라는 뜻이다. 이 둘을 합치면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칭한다'가 된다. 이 네 글자는 쿠데타의 이름이기도 하다. 환관 조고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끝내 천하의 모든 권력을 접수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긴 내전(內戰)으로 날이 밝던 전국(戰國)시대를 어렵게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했던 진 제국이 서둘러 망국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악인 조고를 발탁하고 신변에 가까이 둔 이는 바로 진시황이었다. 조고의 위장술이 워낙 뛰어났을까, 말년에 진시황의 사람 보는 눈이 조금 어두워져서였을까.
인간사 선악의 기준은 꽤 모호하다. 그러나 조고는 중국사에서 제 자식을 삶아 바치며 아부하는 역아(易牙), 지옥에서 온 고문관 삭원례(索元禮) 등과 함께 '악인전'에 자주 실린다. 조고는 환관인지라 권력의 틈새에 사냥개처럼 예민한 후각을 지녔고, 특히 교언영색(巧言令色)과 구밀복검(口蜜腹劍)에 능했다.
한편, 승상 이사는 어떤 인물일까. 대체 그는 왜 악인 조고가 파놓은 함정에 매번 그렇게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까. 비록 조고라는 희대의 악인과 노년에 손을 잡았지만, 그는 유능한 행정가였다.
젊은 시절, 그는 우리에게 성악설(性惡說)의 순자(荀子)로 잘 알려진 유교 사상가 순경(荀卿)에게서 덕치주의와 법치주의의 융합 가능성 등 고급 학문을 배웠다. 저술가로 그친 비운의 천재 한비자(韓非子)가 그의 동창생이다.
한번은 영정이 한비자의 법가(法家) 저서에 매료되어 중책을 맡기려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사는 영정과 한비자 사이를 이간질한다. 자신을 친구로 믿고 의지하던 한비자를 완벽하게 기만한다. 한비자가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치밀함도 대단했다. 한비자는 진나라 옥중에서 이사가 건넨 독을 마시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의 술책을 몰랐을 정도였다.
이처럼 능수능란한 가해자가 거꾸로 노년기에는 요실금을 앓는 늙은 환관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하고 피해자로 바뀐다. 수개월에 걸친 집요한 강제 자백 심문과 장난질 능욕과 혹독한 고문까지 당한 후에 큰길에서 허리와 코가 잘리는 그런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반역이라는 큰 누명이었기에 삼족도 멸해졌다.
승상 이사는 중국 역사상 꽤 흥미로운 인물이다. 법가 행정가로 꾸준히 능력을 발휘했다. 천하 통일이라는 성취감도 맛봤다. 진 제국의 '넘버 투'라는 지위에도 오래 머물렀다. 그런데도 가진 것에 대한 집착과 애매한 처신의 인물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 그는 몇 차례 기꺼이 선을 넘고 악의 축(axis of evil)에 다가가 제 몸을 실컷 비볐다. 그 측은한 끝맺음의 단초는 이미 자신 안에 있었다.
▶️ 指(가리킬 지)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旨(지)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旨(지; 신이 사람에게 주는 계시(啓示; 가리키는 일)와 손가락(手)으로 가리킨다는 뜻이 합(合)하여 '가리키다'를 뜻한다. ❷형성문자로 指자는 ‘손가락’이나 '가리키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指자는 手자와 旨(맛있을 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旨자는 수저를 입에 가져다 대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指자는 본래 '손가락'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하지만 후에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고 지시를 내린다는 뜻이 확대되어 '가리키다'나 '지시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指(지)는 손가락을 뜻하는 말로 한자(漢字)의 수사 밑에 쓰여 ①가리키다, 손가락질하다 ②지시(指示)하다, 가리켜 보이다 ③곤두서다, 곧추 서다 ④아름답다, 곱다 ⑤손가락 ⑥발가락 ⑦마음, 뜻,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꼭 집어서 가리킴 또는 잘못을 들추어 냄을 지적(指摘), 어떤 목적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단체의 행동을 통솔하는 것을 지휘(指揮), 분명히 그렇게 가리켜 정하는 것을 지정(指定), 어떤 대상을 가리켜 보이는 것을 지시(指示), 어떤 목적이나 방향에 따라 가르쳐 이끎을 지도(指導),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를 지표(指標), 어떤 수 또는 문자의 오른쪽 위에 부기해 그 승멱을 표시하는 문자 또는 숫자를 지수(指數), 사람이나 사물이 어떠하다고 가리키어 정함을 지목(指目), 지정해 그 쪽으로 향하게 함 또는 그 방향을 지향(指向), 잘못을 꼬집어 나무람 또는 지목하여 비방함을 지탄(指彈), 사람이나 원숭이의 손가락 끝 안쪽에 이루어진 살갗의 무늬 또는 그것을 찍은 흔적을 지문(指紋), 어떤 대상의 사람을 이름을 누구라고 말하여 지적하거나 가리키는 것을 지명(指名), 어떤 대상을 가리켜 부르는 것 또는 그 이름을 지칭(指稱), 달래고 꾀어서 무엇을 하도록 부추김을 지주(指嗾), 말이나 글의 대강의 요지를 대지(大指), 몹시 성낸 모양을 발지(髮指), 손가락을 꼽아 헤아림을 굴지(屈指), 가운데 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사이의 손가락을 약지(藥指), 가운데 손가락을 중지(中指), 엄지 손가락을 무지(拇指), 가운데 손가락이나 엄지 발가락을 장지(長指), 집게 손가락을 두지(頭指),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의 사이에 있는 손가락으로 집게 손가락을 염지(鹽指), 열 손가락을 서로 엇갈리게 바짝 맞추어 잡은 상태를 각지(角指), 새끼손가락이나 새끼 발가락을 계지(季指),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으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어 강압으로 인정하게 됨을 일컫는 말을 지록위마(指鹿爲馬), 손짓하여 부르면 대답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를 일컫는 말을 지호지간(指呼之間), 동쪽을 가리켰다가 또 서쪽을 가리킨다는 뜻으로 말하는 요지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함을 일컫는 말을 지동지서(指東指西), 하늘을 보고 물고기를 쏜다는 뜻으로 사물을 구하는 방법의 그릇됨을 이르는 말을 지천사어(指天射魚), 고기를 잡으려고 하늘을 향해 쏜다는 뜻으로 고기는 물에서 구해야 하는데 하늘에서 구함 곧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함을 이르는 말을 사어지천(射魚指天), 손가락을 가지고 바다의 깊이를 잰다는 뜻으로 양을 헤아릴 줄 모르는 어리석음을 이르는 말을 이지측해(以指測海), 팔과 손가락을 쓴다는 뜻으로 지시나 명령 등을 뜻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을 사비사지(使臂使指) 등에 쓰인다.
▶️ 鹿(사슴 록/녹)은 상형문자로 수사슴의 뿔, 머리, 네 발의 모양을 본떴다. 부수(部首)로 되어 사슴에 관한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鹿(록)은 ①사슴 ②제위(帝位)의 비유 ③목적물(目的物) ④곳집(곳간(庫間)으로 지은 집) ⑤산기슭 ⑥거칠다, 조잡(粗雜)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슴의 새로 돋은 연한 뿔을 녹용(鹿茸), 사슴의 뼈를 녹골(鹿骨), 사슴의 뿔을 녹각(鹿角), 사슴의 골수를 녹수(鹿髓), 사슴의 털을 녹모(鹿毛), 사슴의 꼬리를 녹미(鹿尾), 사슴의 혀를 녹설(鹿舌), 사슴의 고기를 녹육(鹿肉), 사슴의 피를 녹혈(鹿血), 사슴 사냥을 녹렵(鹿獵), 사슴의 고기로 끓인 국을 녹탕(鹿湯), 사슴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녹구(鹿裘), 사슴을 기르는 뜰을 녹원(鹿苑), 암사슴의 뱃속에 든 새끼를 녹태(鹿胎), 흰 사슴을 백록(白鹿), 사슴 가운데 큰 종류를 적록(赤鹿), 바다 가운데의 섬에 사는 사슴을 해록(海鹿), 완전히 자라지 않은 중치의 사슴을 중록(中鹿), 돼지와 사슴을 저록(猪鹿), 사슴을 쫓는다는 뜻으로 정권 또는 지위를 얻기 위해 다툼을 이르는 말을 축록(逐鹿),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가라는 뜻으로 승패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녹사수수(鹿死誰手), 주견이 없이 남의 말을 좇아 이리저리 함을 이르는 말을 녹비왈자(鹿皮曰字),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라는 뜻으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어 강압으로 인정하게 됨을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말이라고 우겨댄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기만하고 권세를 휘두름을 이르는 말을 이록위마(以鹿爲馬) 등에 쓰인다.
▶️ 爲(할 위)는 ❶상형문자로 为(위), 為(위)는 통자(通字), 为(위)는 간자(簡字)이다. 원숭이가 발톱을 쳐들고 할퀴려는 모양을 본떴다. 전(轉)하여 하다, 이루다, 만들다, 다스리다의 뜻으로 삼고 다시 전(轉)하여 남을 위하다, 나라를 위하다 따위의 뜻으로 쓴다. ❷회의문자로 爲자는 '~을 하다'나 '~을 위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爲자는 원숭이가 발톱을 쳐들고 할퀴려는 모습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爲자를 보면 본래는 코끼리와 손이 함께 그려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코끼리를 조련시킨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爲자의 본래 의미는 '길들이다'였다. 하지만 후에 코끼리에게 무언가를 하게 시킨다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을 하다'나 '~을 위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爲(위)는 ①하다 ②위하다 ③다스리다 ④되다, 이루어지다 ⑤생각하다 ⑥삼다 ⑦배우다 ⑧가장(假裝)하다 ⑨속하다 ⑩있다 ⑪행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사(徙),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들 거(擧), 옮길 이(移), 다닐 행(行), 구를 전(轉)이 있다. 용례로는 나라를 위함을 위국(爲國),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爲民), 다른 것에 앞서 우선하는 일이라는 위선(爲先), 힘을 다함을 위력(爲力), 첫번을 삼아 시작함을 위시(爲始),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행동함을 위아(爲我), 생업을 삼음 또는 사업을 경영함을 위업(爲業), 사람의 됨됨이를 위인(爲人), 정치를 행함을 위정(爲政), 주되는 것으로 삼는 것을 위주(爲主), 예정임 또는 작정임을 위계(爲計), 진실한 즐거움을 위락(爲樂), 어떤 것을 첫 자리나 으뜸으로 함을 위수(爲首), 기준으로 삼음을 위준(爲準), 나라를 위한 기도를 위축(爲祝), 부모를 위함을 위친(爲親), 나라를 위한 충성스러운 절개를 일컫는 말을 위국충절(爲國忠節), 자식된 도리를 일컫는 말을 위자지도(爲子之道), 조상을 위하는 도리를 일컫는 말을 위선지도(爲先之道),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일컫는 말을 위친지도(爲親之道), 자기를 이롭게 하려다가 도리어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위총구작(爲叢驅雀), 치부하려면 자연히 어질지 못한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을 위부불인(爲富不仁), 자연을 거역하여 사의私意를 끼우면 길패함을 이르는 말을 위자패지(爲者敗之), 바퀴도 되고 탄환도 된다는 뜻으로 하늘의 뜻대로 맡겨 둠을 이르는 말을 위륜위탄(爲輪爲彈), 임금은 온 백성의 어버이가 되고 고을의 원은 고을의 어버이가 됨을 이르는 말을 위민부모(爲民父母), 되거나 안 되거나 좌우 간 또는 하든지 아니 하든지를 일컫는 말을 위불위간(爲不爲間), 선을 행함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말을 위선최락(爲善最樂), 어떤 사람을 위해 벼슬자리를 새로이 마련함이나 남을 위해 정성껏 꾀함을 이르는 말을 위인설관(爲人設官), 자손을 위하여 계획을 함 또는 그 계획을 이르는 말을 위자손계(爲子孫計), 가난을 면하지 못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위귀소소(爲鬼所笑), 자기가 정한 법을 자기가 범하여 벌을 당함을 이르는 말을 위법자폐(爲法自弊) 등에 쓰인다.
▶️ 馬(말 마)는 ❶상형문자로 말의 모양으로 머리와 갈기와 꼬리와 네 다리를 본떴다. 개는 무는 것을, 소는 뿔을 강조한 자형(字形)이지만 말의 경우에는 갈기를 강조하고 있다. 부수로 쓰일 때 말과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馬자는 '말'을 그린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馬자를 보면 말의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큰 눈과 갈기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소전으로 넘어오면서 머리와 갈기는 간략화 되었고 해서에서는 다리가 점으로 표기되면서 지금의 馬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말은 고대부터 사냥과 전쟁에 이용되었지만 주로 먼 거리를 달리는 용도로 쓰였다. 그래서 馬자가 부수로 쓰인 글자들은 주로 '(말을)타다'나 '가다', 말의 행위, 동작과 관계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馬(마)는 (1)성(姓)의 하나 (2)말 등의 뜻으로 ①말(말과의 포유류) ②벼슬의 이름 ③산가지(수효를 셈하는 데에 쓰던 막대기) ④큰 것의 비유 ⑤아지랑이 ⑥나라의 이름, 마한(馬韓) ⑦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마구간을 마사(馬舍), 말의 똥을 마분(馬糞), 말을 타는 재주를 마술(馬術), 말이 끄는 수레를 마차(馬車), 말을 부리는 사람을 마부(馬夫), 말을 타고 떼를 지어 다니는 도둑을 마적(馬賊), 말의 몇 마리를 마필(馬匹), 말의 다리를 마각(馬脚), 말을 매어 두거나 놓아 기르는 곳을 마장(馬場), 경마할 때에 파는 투표권을 마권(馬券), 말을 타고 나감으로 선거에 입후보함을 출마(出馬), 수레와 말을 거마(車馬),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애마(愛馬), 타는 말이나 말을 탐을 기마(騎馬), 걸음이 느린 말이나 둔한 말을 노마(駑馬), 걸음이 썩 빠른 말 한마를 준마(駿馬), 말에서 떨어짐을 낙마(落馬), 말이 빨리 달리는 것을 겨룸을 경마(競馬), 말을 탐으로 사람이 말을 타고 여러 가지 동작을 하는 경기를 승마(乘馬), 대나무를 가랑이 사이에 끼워서 말로 삼은 것을 죽마(竹馬), 기차를 말에 비유한 일컬음을 철마(鐵馬), 말의 귀에 동풍이라는 뜻으로 남의 비평이나 의견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흘려 버림을 이르는 말을 마이동풍(馬耳東風), 말의 다리가 드러난다는 뜻으로 숨기려던 정체가 드러남을 이르는 말을 마각노출(馬脚露出), 말의 가죽으로 자기 시체를 싼다는 뜻으로 옛날에는 전사한 장수의 시체는 말가죽으로 쌌으므로 전쟁에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마혁과시(馬革裹屍), 말이나 소에 의복을 입혔다는 뜻으로 학식이 없거나 예의를 모르는 사람을 조롱해 이르는 말을 마우금거(馬牛襟裾), 달리는 말은 말굽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난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발전하고 정진하자는 뜻을 이르는 말을 마부정제(馬不停蹄), 말도 갈아타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예전 것도 좋기는 하지만 새것으로 바꾸어 보는 것도 즐겁다는 말을 마호체승(馬好替乘)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