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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이세황제(二世皇帝, 기원전 229년∼기원전 207년)
중국 진(秦)나라의 제2대 황제이자 중국 역사상 두 번째 황제이며, 최초로 시해당한 황제이다. 시황제의 열여덟 번째 아들로, 그의 치세에 진나라는 망국으로 치닫게 된다.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은데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의하면 호해가 등극할 때의 나이가 12세였다고 하고, ❮진시황 본기(秦始皇本紀)❯에는 2세 황제 원년에 그의 나이가 21세였다고 되어 있다. ❮진시황 본기❯의 내용에 따라서 역산하면 출생연도를 기원전 229년으로 추정한다.
야사에선 호해를 낳았다고 알려진 궁녀가, 형가가 시황제를 암살하려 할 때 시황제를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호해는 시황제의 18번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제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에게는 천하의 모사꾼 조고(趙高)가 있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순행에 나서면서 호해와 조고도 동행했는데 진시황이 사구에 이르렀을 때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죽고 말았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진시황은 장남인 부소가 제위를 계승하도록 유언했으나 조고가 승상 이사(李斯)와 짜고 진시황의 유서를 날조해 호해에게 제위를 계승하게 하는 것으로 조작하고 부소와 몽염에게는 자결하라는 명을 위조했다고 한다.(沙丘政變) 문제는 ‘과연 ❮사기(史記)❯의 기록대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소위 독자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당시 세간의 인식이 호해의 등극을 곱지 않게 바라봤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한편으로 진시황이 말년으로 갈수록 의심병이 더해졌고, 판단력도 흐려져서 호해에게 제위를 승계하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는 호해와 이사가 조고에게 설득되어서 이러한 날조에 동참했음을 설명하며, 그들의 대화를 전하고 있다. 처음 호해와 이사는 죽은 시황제의 어마어마한 권위 탓인지, 아니면 그들이 받은 교육과 학문,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정변이 실패했을 때의 위험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서 조작과 황위 찬탈을 거부했다. 특히 단순한 무뇌아로 인식되는 호해는 적어도 이때만큼은 진 제국의 법령과 시황제의 지시, 그리고 형 부소의 계승 정당성 등을 거론하며 조고의 설득을 두 번 넘게 거절하나, 조고는 여러 궤변으로 호해를 녹이며 결국 설득하게 된다. 사실 허망한 자살로 인해 최후를 맞기는 했으나, 부소는 실제로도 진 제국 전반에서 최소한의 인망은 얻고 있었고, 그를 수호하는 장군 몽염 또한 정복 전쟁 당시부터 맹활약했던 부친 몽오와 더불어 여러 차례 전공을 올린 장수였다. 거기에 그들이 있었던 장성에는 이민족 방어를 위한 강력한 군세가 있었으므로 최소한 한 번 정도는 도박을 해 볼만 했으나, 부소가 거짓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자살함으로서 진 제국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쨌든 호해는 가장 걸림돌이라 할 수 있는 형 부소와 명장 몽염, 우승상 풍거질(馮去疾), 대장군 풍겁(馮劫) 등을 제거했으며 자신의 제위를 위협할 만한 형제와 누이 20여 명도 숙청하고 제위에 오르게 된다. 진시황릉의 배장갱 중에는 사람이 묻힌 무덤도 여러 곳 발굴되었는데 무덤의 부장품이나 관은 호화로웠으나 막상 묻힌 유골은 나이도 젊고 건강 상태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혀 있거나 사지가 토막나는 등 잔혹한 처형을 당한 상태였다. 이는 호해가 죽인 그의 형제, 자매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때 누이 10명은 가장 잔혹하게 사지를 찢어죽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진시황릉 발굴 때 발견된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팔다리가 인위적으로 절단되어 나란히 포개져서 묻힌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 ❮사기(史記)❯에 묘사된 잔혹한 기록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특히 ❮사기(史記)❯ ❮이사 열전❯에 보면 호해의 형제 중 유일하게 공자 고(公子 高)는 먼저 죽음을 청했기 때문에 호해가 은혜를 베풀어 자살을 허락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이 배장갱(陪葬坑) 중 딱 남자 유골 1구만 외상이 없이 멀쩡한 상태여서 이것이 공자 고의 유해라고 추정되고 있다.
야사에 의하면 진시황이 불로장생초(不老長生草)를 찾으라 보낸 수많은 종자들 중 한 명이 신선을 만나 불로초를 부탁하자 그 신선은 ❮천록비결(天簏秘訣)❯이라는 책을 건네주고 그 글귀를 해독하면 불로초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으리라고 했다. 종자가 진시황에게 책을 바친 후 수많은 학자들이 달라붙어 해독했지만 “진나라를 망하게 할 것은 호(胡)다.”라는 한마디만을 해석해낼 수 있을 뿐이었다. 시황제는 이를 듣고는 ‘胡’를 오랑캐라는 뜻 그대로 해석하여 북방의 흉노 등으로 생각해 만리장성을 축조하게 했으나 실상은 막내아들 호해를 일컫는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이미지가 여러모로 좋지는 않았던 듯하다.
진시황이 6국을 병합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 진 제국이 출현하긴 했으나 시황제의 급속한 중앙 집권 정책과 과도한 토목 공사는 6국 백성들의 큰 불만을 샀다. 이런 가운데 즉위한 호해는 자신을 황위로 올린 모사꾼 조고에게 휘둘리면서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진나라의 정세는 급속도로 어지러워졌다.
호해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등극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고, 정통성에도 논란이 있어서였는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측면에서 진시황 대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그대로 이어갔다. 시황제의 거대한 능침인 여산릉의 공사를 계속하는 한편, 시황제 대에도 완공되지 않았던 아방궁과 만리장성의 공사도 이어갔다. 문제는 이런 토목 공사가 지속되면서 백성들의 불만도 커져갔다는 점으로 이를 잘 알고 있던 승상 이사가 호해에게 아방궁 건립의 중단과 조세 부담 완화를 주청했다. 그러나 조고의 농간으로 호해는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진시황의 치세를 이끌었던 공신 이사는 결국 숙청되고 만다. 이들이 제거되면서 조고의 권력은 커졌고, 호해는 그에게 모든 국사를 맡겨버리며, 자신은 유흥에 빠져들었다.
결국 진나라의 과도한 조세와 부역 및 급속한 중앙 집권 정책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진승ㆍ오광의 난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이 난은 장한에 의해 겨우 제압되었으나 문제는 진승ㆍ오광의 난으로 진나라에 저항하는 봉기의 불이 당겨져서 각지에 반란이 속출했다.
일단 즉위한 이듬해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전국시대 국가인 위(衛)의 군주를 폐하여 중국을 완전히 통일했으나 불과 몇 개월도 안 되어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호해의 거듭된 실정으로 통일제국은 금세 분열되었고, 유방, 항우 등의 세력들이 일어나 이들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향해 진격해 들어오면서 진나라는 초유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조고가 중간에서 보고를 차단한 탓에 호해는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조고의 모함에 제거당할 위기에 처한 장한이 항우에게 투항해 버리면서 더 이상 진나라를 지킬 힘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유방의 군대가 함양 남쪽 무관에 이르게 되자 결국 조고는 호해에게 모든 것을 들키게 됨을 우려한 나머지, 사위인 염악과 함께 모반을 도모했다. 일부 기록에선 조고가 유방과 밀약을 맺을 의도로 호해를 죽였거나, 혹은 유방 쪽에서 일부러 조고를 충동질한 다음 시치미를 뗀 듯한 정황도 있다.
조고를 비롯한 대소신료들이 죄다 죽음이 두려워 입을 다문 결과, 결국 호해는 함양에 반란군이 입성하는 시점이 되어서야 돌아가는 상황을 깨닫게 된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는 호해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호해 :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짐에게 미리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 말이냐?”
시종 : “말씀드렸다면 살아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도 지금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겠지요.”
염악이 군대를 이끌고 황궁을 포위한 후 호해에게 자결할 것을 강요하여 결국 호해가 자결을 하면서 4년여의 치세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호해가 죽는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호해 : “살려주시오. 황제가 아닌 한 지역의 왕으로서 조용히 살겠소.”
염악 : “안 되오.”
호해 : “그럼 일개 공으로서 살겠소.”
염악 : “안 되오.”
호해 : “그럼 일개 후로서 살겠소.”
염악 : “안 되오.”
호해 : “그럼 변경 산골에서 백성으로 살겠소.”
염악 : “안 되오.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오.”
포기하고 자결을 했는지, 끝까지 거부를 하다가 살해당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호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호해는 염악의 강요에 자살했다고 사마천이 표현했으니 그도 호해를 그리 좋게 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렇게 영호해는 자신의 아버지 진시황이 ‘황제’ 칭호를 만들고 그 지위를 이어받자마자 중국 역사상 최초로 시해당한 황제가 되었다.
호해는 진시황이라는 절대적인 카리스마의 군주가 퇴장한 후 진나라가 유지되느냐 마느냐의 중대한 시점에 즉위한 황제였으나 능력이 없었기에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차남이나 삼남도 아닌 열여덟 번째 아들이자 적자도 아니었으면서 변방에 중책으로 가있던 태자 부소를 자살시키는 등 전혀 정통성이 있는 즉위도 아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도 얻지 못했을 것이며, 게다가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시황제의 엄혹한 정책을 더 밀어붙인 탓에 결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진나라 멸망의 결정타를 날리게 된다.
물론 조고에게 너무 의지했고 실상을 몰랐기 때문에 그랬다는 어느 정도의 옹호는 할 수 있겠으나, 결과적으론 조고를 제어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에게 국사를 모조리 내맡겼으니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은 없어 보인다.
진나라의 멸망 이후 역사를 되짚어 보면 영호해의 행보는 더 답이 없는데, 비록 시황제 사후 4년 만에 진나라는 망했지만, 진나라의 중심부인 관중 지역은 진나라 멸망 후에도 1,000년 넘게 번영하며 한나라나 당나라 등 그 지역을 수도로 삼은 통일 왕조들에게 풍부한 경제력과 높은 생산력을 통해 수백년간 엄청난 국력을 실어주었다. 당장 유방부터가 항우를 이길 수 있게 해준 근간이 관중 지역의 생산력이었다. 더불어 당시 진나라는 영성 황족들에 대한 지지가 강했는데, 당장 호해를 죽인 조고조차 자기가 제위에 못 오르고 진시황의 후손을 즉위시켜야 했을 정도로 관중 지역 주민들의 진 황실에 대한 충성도는 상당히 강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진나라가 통일 왕조는 유지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함곡관 서쪽 전국시대 때의 진나라 영토는 유지할 여력이 충분히 있었고, 조금만 장기전으로 끌었어도 구심점이 남은 진나라가 다른 반진 연합군보다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유리한 상황에서도 호해는 폭정으로 단 4년 만에 수도 함양이 함락되게 만들어 버렸다.
당장에 진승ㆍ오광의 난으로 망할 것만 같던 진나라가 명장 장한이 여산의 죄수들을 긁어모아 반란 토벌에 나서자 진승이고 뭐고 다 갈아버렸다. 함곡관 동쪽으로는 통제력을 상실해 사실상 전국시대의 진나라 수준으로 축소된 상황에서도 구 6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다 평정해버릴 듯한 저력을 보인 게 진나라였다. 그런데 호해는 그걸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말아먹었으니 암군이 아닐 수가 없다.
❍ 사구정변(沙丘政變)
장자 부소(扶蘇)에게 함양으로 돌아와 자신의 장례를 거행하고 황제의 자리를 이으라는 내용이 조서(詔書)를 봉했으나 사자에게 미처 건네주기 전에 진시황이 죽었기 때문에 국서와 옥새는 모두 조고의 수중에 있었다. 그때 진시황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20여 명의 아들 중 유일하게 호종한 호해, 승상 이사, 조고 및 그 밖에 진시황이 총애하던 내시 등을 포함해서 5-6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군신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황제는 도성 밖으로 출행 나와서 죽고 그때까지 정식으로 태자를 정하지 않았음으로 진시황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졌다. 시황의 시신을 온거(輼車)에 안치한 채로 백관들에게는 정사를 상주케 하고 내시들에게는 평상시처럼 식사를 온량거 속으로 올리도록 했다. 내시들은 재빨리 온량거 속으로 들어가 대신들이 상주하는 정사를 결제했다.
조고는 조나라 왕족의 먼 일족이다. 조고의 형제는 모두 환관으로 살았으며 그의 모친은 형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다. 조고의 집안은 여러 대를 거쳐 비천한 신분이었다. 일찍이 조고가 일에 열심이고 옥사에 관한 법에 통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진시황은 그를 발탁하여 중거부령(中車府令)으로 삼았다. 조고는 은밀히 공자 호해를 받들고 형옥에 관한 법을 가르쳤다. 한 번은 조고가 큰 죄를 저지르자 진시황은 몽의(蒙毅)에게 법대로 다스리고 명했다. 몽의가 감히 법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조고의 죄는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여 그의 환적(宦籍)을 폐지해야 한다고 품했다. 시황은 조고가 일을 열심히 했다는 이유를 들어 사면하고 그의 관작을 돌려주었다. 조고가 호해를 황제로 세우려는 마음을 품게 된 이유는 평소에 호해가 시황으로부터 받고 있었던 총애가 첫 번째이고, 옛날 자신을 치죄하여 빠져나갈 수 없도록 죄상을 밝혀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몽의에게 품은 원한을 풀려고 헀던 것이 두 번째였다. 그래서 부소에게 보내는 조서를 갖고 있던 조고가 공자 호해에게 말했다.
“황제께서 붕어하실 때 장자에게만 조서를 남기셨습니다. 만약에 부소가 당도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공자께서는 한 뼘의 땅도 갖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때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호해가 대답했다.
“원래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듣기에 밝은 군주는 신하를 잘 알고, 밝은 어버이는 아들을 잘 안다고 했습니다. 부황께서 운명하실 때 형제들 중 아무도 제후왕에 봉하지 않았는데 제가 어찌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천하의 존망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은 지금 바야흐로 이 고와 승상의 손에 놓여 있으니 공자께서 도모해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남의 신하가 되는 것과 남을 신하로 거느리는 것이나, 남을 다스리는 것과 남으로부터 다스림을 받는 것을 어찌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형을 폐하고 동생을 세우는 일은 의가 아닙니다. 또한 부친의 조서를 받들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또한 효가 아니며, 재능이 천박한 자가 다른 사람이 세운 공을 빼앗는 행위도 역시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세 가지가 모두 덕에 역행하는 일이니 천하가 복종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몸이 위태로워져 사직의 제사가 끊이게 될 겁니다.”
“신은 듣기에 탕임금과 주무왕은 자신들의 군주를 죽였으나 천하는 그들을 의인이라고 칭하고 있지 불충한 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위(衛)나라 군주가 자신의 부군을 살해했으나 위나라는 위군(衛君)의 덕을 사서에 기록했으며 공자는 그 일을 밝혀 불효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큰일을 행하는 자는 작은 일을 돌보지 않으며 큰 덕을 행한 자는 사양하지 않습니다. 시골마을의 각기 독특한 습속을 갖고 있고 백관들의 일은 각기 맡은 바 임무가 있습니다. 고로 작은 것에 집착하다보면 큰 것을 잃어 후에 반드시 해를 입게 됩니다. 의심하여 주저하는 여우는 후에 필히 후회합니다. 일단 마음을 정하여 감행한다면 귀신도 피해가기 때문에 후일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공자께서는 제 말을 따르십시오.”
호해가 탄식하며 말했다.
“오늘 황제가 붕어했음에도 아직 발상도 못해 상례를 끝내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승상에게 요구할 수 있단 말이오?”
“때가 때인 만큼 모의를 성사시키기에 시간이 부족합니다. 양식을 싣고 달려오는 말이 시간을 지체하다가 제 시간에 당도하지 못해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를 두려워할 뿐입니다.”
마침내 자기의 말을 따르겠다고 결심한 호해에게 조고가 말했다.
“승상과 함께 모의하지 않으면 일을 성사시킬 수 없습니다. 청컨대 공자를 위해 신이 승상을 찾아가 상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