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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과 질서를 따라
고전 14:26-40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고전 14:26-40 / [교회 안에서의 질서] 나의 형제들이여, 이제 내 이야기를 종합해 봅시다.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 어떤 사람은 찬미하고 어떤 사람은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지식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방언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교회 전체에 유익을 가져와야 하고 주님 안에서 성장하는 데 유익해야만 합니다. 27) 방언은 두세 사람만이 모여서 하되 한 번에 한 사람씩 말하고 다른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통역해야 합니다. 28) 만일 통역할 사람이 그 자리에 없을 때는 소리 내어 방언하지 말고 조용히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십시오. 29-30) 예언하는 은사를 받은 이들도 한번에 두세 사람이 예언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동안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들으십시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예언하고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주님의 말씀이나 생각을 받게 되면 먼저 말하던 사람은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31) 이렇게 해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한 사람씩 차례로 말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배우고 격려와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32) 하나님께 말씀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힘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33) 하나님은 무질서나 혼란을 싫어하고 조화를 기뻐하십니다. 34)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 늘그러하듯 여자는 교회의 집회에서 조용히 하십시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35) 만일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물으십시오. 여자가 교회의 집회에서 의견을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36) 여기에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 고린도 신도들만 받아서 전할 수 있는 독점물인 줄 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37)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나 그 밖에 성령께서 주신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우선 내가 말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8) 그러나 그래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무지한 상태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습니다. 39) 그러므로 내 믿음의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말씀을 명료하게 설교할 수 있는 예언자가 되도록 간절히 원하십시오. 그리고 방언을 하는 것을 나쁜 것이라고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40) 다만 모든 것을 질서대로 적절하게 하십시오.
방언도 예언도 덕을 세우며 또한 품위와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덕을 세우며 질서를 세우라(26-33) 본 단락에서의 찬송시는 구약의 시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초대교회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들이 부르는 영적인 찬송이었습니다(엡 5:19; 골 3;16). 사실 초대교회는 영적인 규정들이 갖추어지던 시기였기에 혼돈과 무질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33). 그래서 각각의 찬송시와 가르치는 말씀과 계시와 방언 그리고 통역함이 넘쳐났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이러한 은사들과 찬송들이 넘쳤기에 영적인 혼동과 혼란도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교회 안에서의 영적인 질서를 바로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방언과 통역함과 예언함에 있어서 그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예언을 분별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통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귀신들린 것과 같은 무아지경의 상태를 용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요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질서를 세워 예배를 하며 덕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34-40)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당시의 상황과 구약 성경에 비추어 교회의 질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본질적으로 남자와 동등한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고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 질서상 남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모인 집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 3장 16절의 말씀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를 잘못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교회의 모든 집회나 모임에서 여자의 침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고린도 교회의 상황상, 공식 집회에서 발언하는 것을 금지한 것일 뿐입니다. 성도들은 예언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영적 및 공적인 질서를 해치지 않는 이상 방언을 금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 부분을 “요약해서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전할 때는 진심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사람들이 기도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가타부타 말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의 바르고 사려 깊게 하십시오.”라고 해석했습니다.
적용: 성경은 남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남을 재단하지 말고, 자신을 재단하는데 사용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남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기 원하시며, 다른 사람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존귀하게 여기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 보내주신 존재입니다. 잘못을 지적하고 부족한 부분을 들춰내며 소외시키기보다, 사랑으로 감싸주며 존귀하게 여겨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예수의 향기를 드러내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숨지 않으시는 하나님
고전 14장 26절 / 김영준목사(기쁜소식교회)
1992년에 제작된 바라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설명이 없이 이미지와 배경음악만으로 세상을 묘사한 영화입니다. 여러 나라, 여러 문화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그중에는 여러 종교의식도 포함됩니다. 불교 · 이슬람 · 힌두교 · 카돌릭 · 동방정교의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승려가 종을 울리는 모습을 담았고, 이슬람은 메카의 순례자들이 카바([Kabah, 이슬람교의 성전]라는 곳을 맴도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힌두교는 순례자들이 갠지스 강에 모이는 장면을 담았고, 가톨릭은 성베드로 대성당의 내부 모습을 찍었습니다. 그리도 동방정교는 촛불을 키고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 유일하게 제외된 종교가 바로 개신교입니다. 개신교의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만합니다. 왜냐하면 개신교에는 미학적으로 볼게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이미지를 별로 의존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이미지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보는데 첫째는 상징, 둘째는 미술, 셋째는 성례전입니다. 이 세 종류의 이미지는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상징 · 미술 ·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첫째로 상징물이 별로 없습니다. 만약 도둑이 우리 예배당에 들어왔다면 훔칠만한 것은 악기밖에 없습니다. 금촛대라든가 금십자가라든가 이런 비싼 기구들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어떤 특별한 의복이나 장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가 사용하는 특별한 의복은 성가대 가운뿐입니다. 성가대가 그냥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있는 것보다는 가운을 입고 있는 것이 더 단정해 보인다고 보기 때문에. 그리고 제가 가운을 입는 이유는 보기 좋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가운보다 더 보기 좋은 옷이 등장하면 당장 그것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가운에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얼마 있으면 세탁소에 맡겨야 됩니다. 하나님은 상징물 뒤에 숨지 않으십니다. 교회의 상징물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성지순례도 하나의 상징이에요. 왜 우리교회가 단체 성지순례를 가지 않느냐? 하나님이 특별히 예루살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장소, 특별한 나라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고 어디서든지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분입니다.
둘째로 기독교는 미술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사원의 천장화를 포함해서 많은 성화를 그렸지만 그의 미술이 인류 문화발전에 공헌하였을지언정 신앙적인 발전에는 기여한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오게 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과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데 뭣 하러 간접적인 미술을 통하여 하나님을 느끼려하겠습니까. 성 베드로 사원의 내부를 보면 아름다워요. 하나의 예술작품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에 개혁교회 예배당은 상자 곽과 같았습니다. 그 속에 의자와 강대상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 이외에는 필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은 영적인 방법이지 인간의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기독교는 성례전을 많이 의존하지 않습니다. 성례전이란 상징적인 예식을 뜻합니다. 예컨대 세례식도 하나의 상징적인 예식입니다. 사람에게 물을 뿌리는 행위가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지 그 사람에게 물을 아무리 뿌린다고 해서 그 자체로써 그 영혼이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례식이라는 예식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변화를 실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원래 가톨릭교회에는 일곱 개의 성례전이 있었습니다. 세례 · 성찬 · 견진 · 종부성사 고· 해성사 · 혼인 · 신품성사 이렇게 일곱 개의 예식이 있었는데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일곱 개를 두 개로 줄였습니다. 세례식과 성찬식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윌리암 부스의 구세군은 그 두 개마저도 없애버렸습니다. 구세군에는 아예 성례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형식적인 예식보다는 본질에 더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 하나님의 말씀을 예식보다도 더 나은 방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상징물 뒤에 숨어 계시지 않고 미술 뒤에 숨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은 예식 뒤에 숨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더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니라’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하셨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원하면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예수님이 그대로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엄하고 예수님은 자유로운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예수님은 용서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용서하신다면 하나님도 용서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이 엄하시다면 하나님도 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계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고 승천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단 말이냐. 물론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록돼 있지만 예수께서는 승천하신 후에 누구를 보내주셨습니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내가 아버지에게 구하겠으니 그가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보혜사라는 말은 돕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위로자라는 말입니다. helper, comforter. ‘내가 너희에게 또 다른 comforter - 보혜사를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이 보혜사가 바로 성령이에요. 우리는 세 분의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에요. 한 분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다만 한 분의 하나님이 세 분의 인격체로 당신을 계시하셨습니다. three in one, one God in three persons. 삼위일체의 신비에요. 한 분의 하나님이 세 분의 인격체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런데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고 성자 예수님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성령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 많고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말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성령에 대해서 기록한 책들이 적습니다. 신학에서 성령론이 차지하는 부분이 가장 적어요. 그러나 성령은 우리와 가장 가까이에 계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에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미 성령의 도움을 받은 결과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도록 도우시고 그러므로 성령 충만할수록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되고 성령과 가까워질수록 예수님과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과 예수님도 나눠지지 않았어요. 성령이 당신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고 성령은 예수님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체험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더 절실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보혜사가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성령은 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시고 당신의 교회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의 도움을 우리가 기대하고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더 분명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사람의 말이냐? 둘 다에요. 성경은 사람의 말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왜 사람의 말이냐? 사람들이 기록했기 때문이에요. 그럼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냐? 하나님의 성령이 감동된 사람들이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평가 절하된 문학작품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에 인쇄된 이 글씨는 글씨에요. 그러나 이 글씨를 읽는 중에 하나님의 신비한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음성이 성경 속에서 우리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고 경건하게 읽느냐. 지식을 얻기 위한 게 아니에요. 의무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의무적으로 읽으려는 사람은 성경의 능력을 모르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성경말씀을 읽는 중에 그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와 닿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와 닿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와 닿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많이 읽어본 말씀입니다. 이미 잘 아는 말씀이지만 다시 읽는 도중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어떤 구절이 우리 마음에 강력하게 마음에 와 닿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어떤 새로운 의미가 그 안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은 세상의 다른 어떤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삼국지가 위대한 작품이라고 하지만 삼국지를 읽는 중에 그런 식으로 와 닿는 구절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만큼은 그것이 구약이든 신약이든 어린이 성경이든 외국어든 간에 그것을 읽는 중에 우리 마음에 와 닿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고 내가 이 구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상륙할 때 성경책 한 권을 들고 간 것이 족하다는 그런 개신교적인 메시지가 그 소설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 말은 비록 무인도지만 성경책 한 권만 있으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 또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 이외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컨대 꿈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려고 하는 것 그것은 위험하고 무익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꾸는 대부분의 꿈은 개꿈입니다. 자기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추하고 적나라한 심리상태를 보여줄 뿐 거기에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령과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당신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 이외의 방법은 일관성이 없고 신뢰할 수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목사님, 제가 다 알고 있는데 그런 경험을 저는 자주 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묻고자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하여 오늘 본문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 When you gather together’ 왜 그리스도인들은 모이기에 힘써야 되느냐. 모일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여야 됩니다.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일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교회의 정의가 무엇이냐.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너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일 때에 내가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고 하셨어요.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만이 모이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신비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모일 때에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이냐.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이 마지막 문장을 의역하면 모든 것은 너희에게 덕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 은사는 성도들을 돕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믿음을 돕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귀합니다. 그러므로 은사 자체를 받을 것을 염려하지 말고 모이면 됩니다. 모이면 하나님이 이러한 은사를 베푸십니다. 왜요?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기 위하여. 여기 이 현상 중에는 우리에게 덜 익숙한 것이 있지요. 찬송시 이건 익숙하고 가르치는 말씀도 익숙한데 계시 · 방언 · 통역함은 생소하게 생각될 수 있지만 이 모든 것도 주님이 우리를 돕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기대해야 됩니다. 우리가 모일 때.
그런데 사도바울이 ‘우리가 모일 때’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가 모일 때’라고 했어요. 그 말은 사도바울이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어야 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영적인 거장이 같이 끼어 있어야 되는 게 아니에요.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이 끼여 있어야 그 모임에 이러한 역사가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니고 사도바울은 여기에 있고 고린도교인들은 저기에 있는데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가 모일 때’, 그 사람들이 누구냐, 처음 믿은 사람이냐, 오래 믿은 사람이냐,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냐, 이것을 하나님이 따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VIP가 있고 덜 중요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족합니다.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주님께서 다양한 은사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숨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뜻과 성품을 계시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경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분명히 알려 주셨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질서를 지키는 성도
고전 14:26-33 / 송기성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여행을 함께 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한인 수백 명이 브라질 단체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관광 소감을 나누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그 중 한 사람이 아주 뼈 있는 말을 했습니다. “제발 질서 좀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질서는 하나님의 제1법칙이라” 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고전14:33) 라고 하였으며,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 (고전14:40)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질서있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에게 창조의 질서를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우주를 뜻하는 그리스어 코스모스는 ‘질서’와 ‘조화’를 뜻합니다. 우주는 질서 속에 조화를 이룹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아담 이래 사람들은 질서를 잘 지키지 않습니다. 질서를 지키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죄를 짓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질서를 지키지 않았던 것처럼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성도들이 질서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들은 질서를 잘 지키고 있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질서의 하나님은 질서를 지키는 성도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1. 질서를 지키는 성도는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합니다.
고린도교회에는 다양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는’ (고전14:34)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의 예배의식은 찬송시와 말씀의 가르침과 계시와 방언과 통역 그리고 예언 등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에 질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전14:26) 고 하였습니다. 이는 질서를 지킴으로 ‘모든 것을 교회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Everything must be of help to the church.) 는 것입니다. 이를 환언하면 직분을 받은 사람들 중에 그리고 은사를 받은 사람들 중에 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고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교회의 덕을 세우고, 교회에 도움이 되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아주 구체적으로 목회 지침을 정해주었습니다. 만일 누가 방언을 말하려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그 밖에 다른 사람이 통역을 해야 하고, 만일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오직 자기와 하나님께만 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전14:27,28). 그 이유를 그는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기 (고전14:5) 때문이며,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방언의 은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않겠느냐?” (고전14:23) 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 (고전14:5) 고 했으며,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14:18)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14:19)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직분과 은사를 주신 것은 모든 것을 교회의 덕을 세우며, 교회에 도움이 되도록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은사를 주신 것은 다 질서를 지킴으로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고, 교회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제주한라대 1학년 김선웅 군의 이야기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를 비롯해서 누나와 형 등 2남1녀와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래 전에 장기 기증을 서약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아홉 살 때 뇌사 상태로 오래 누워있다가 장기 기증을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를 일찍 잃은 그는 부끄러움을 잘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늘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2018년10월23일 새벽3시에 그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손수레를 끌고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가는 어느 할머니를 보고 선뜻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손수레를 밀며 할머니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과속 차량에 치여 뇌사 상태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할머니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열아홉 살 청년 김선웅 군,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기증한 장기들은 7명의 환자들에게 새 새명을 주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할머니의 손수레를 밀어주는 행동으로 실천되었으며, 장기들을 기증하여 생명을 살리는 헌신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의 누나 김보미(30)씨는 “동생을 잃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면서도 “나중에 뉴스를 통해 동생이 할머니 수레를 미는 모습을 보고 가족들이 위안을 받았고 지금은 회복되고 있다” 고 말했습니다. LG는 김선웅군에게 의인상을 수여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롬15:2)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4:11-12) 라며 이웃과 교회에 덕을 세울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직분과 은사를 다양하게 주신 것은 이웃을 기쁘게 하여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함이며,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 덕을 세우는 사람은 이웃을 기쁘게 하며 교회에 도움이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질서를 지킴으로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직분과 은사를 맡겨 주신 주님께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Well done, you good and faithful servant! 마25:21,23) 라는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질서를 지키는 성도는 모든 것을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무질서는 방언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예언하는 사람들로부터도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언하는 자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질서 있게 예언해야 하고,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전14:29-33). 이를 환언하면 직분을 받은 사람들 중에 그리고 은사를 받은 사람들 중에 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 화평의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불화를 초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질서를 세우고, 모든 것을 화평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아주 실제적으로 신앙지침을 정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화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질서의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질서의 하나님을 믿고 화평의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질서를 지킬 것이며 화평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누가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화평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불화와 갈등을 유발하며 화평의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릴 것입니다. 문제는 직분을 받은 사람들과 은사를 받은 사람들 중에 솔선수범을 하기는 커녕 질서를 지키지 않고 도리어 불화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고전14:37) 라며 엄중하게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은사를 주신 것은 다 질서를 지킴으로 모든 것을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 하고 화평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의 선발 투수인 클레이튼 커쇼 (Clayton Kershaw) 의 이야기입니다. 1988년 음악가인 아버지와 그래픽 디자이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야구선수로 성공해 그가 열 살 때 이혼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연습에 매진해 명실상부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로 성장했습니다. 올스타 상을 7번 수상했으며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Cy Young Award)을 3번 받은 그는 그의 신앙과 선행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아프리카 잠비아의 고아원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선교헌금을 모으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기에서 스트라이크아웃을 한 번 잡을 때마다 500달러를 선교헌금으로 냅니다. 그리하면 다저스 구단이 100달러를 후원금으로 내고, 커쇼 팬클럽에서도 100달러를 후원해 줍니다. 그래서 그가 한 번 스트라이크아웃을 잡을 때마다 700달러의 선교헌금이 잠비아의 고아원으로 송금되는 겁니다.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해에는 받은 상금까지 더해져 36만6000달러의 선교헌금이 전달되었습니다. 그의 크리스천 팬들은 그에게 ‘주님의 선발투수’ 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21세기 최고 투수’ 라는 찬사를 듣는 클레이튼 커쇼, 그는 “기독교 신앙은 나의 재능과 성공이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모든 선물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선한 청지기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면서 “천국으로 이르는 진정한 길은 예수다. 우린 단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상과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용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다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1:20) 고 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어지는 복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질서를 지킴으로 모든 것을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프랑스 속담에 “질서는 모든 아름다움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질서의 하나님은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질서, 자연질서, 위계질서, 사회질서, 법질서, 교통질서, 보행질서, 무역질서 등등, 질서를 지키면 평화롭습니다. 질서를 지키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질서를 지키는 성도는 덕을 세웁니다. 그리고 질서를 지키는 성도는 화평을 이룹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질서를 잘 지킴으로써 모든 것에 덕을 세우고 화평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질서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웃을 기쁘게 하는 질서의 성도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초대 교회에서는 예배를 어떻게 드렸을까?
최일환목사 / 고린도전서 14:26-33
◆ 초대 교회 예배 상황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초대 교회에서는 어떻게 예배를 드렸을까?
찬송시가 있었다. 오늘날의 예배에서 찬송이 있으니 별반 차이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찬송가가 주어지고, 앞에서 사회자가 인도하는 그런 스타일은 아닐 것이다. 다 아는 찬양은 함께 불렀겠지만, 어느 것은 개인이 부르거나 찬송시를 읊조리면, 나머지가 주님을 묵상하면서 아멘으로 응답했을 것이다.
가르치는 말씀이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강단에서 외치는 말씀과 같다. 진리의 말씀을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으면 어디에서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계시도 있었다. 계시란, 하나님의 비밀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보기가 어렵다. 소위 직통 계시는 교회사에서 볼 때, 초기 교회에서만 유용했지만,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 문제를 일으켰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계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계시된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 능력이 필요하다. 신학에서는 이러한 것을 ‘조명(illumination)’이라고 부른다. 이것도 성령의 역사다.
당시 교회에서는 방언과 통역이 있었다. 성경은 대중 앞에서 방언을 하려면, 반드시 통역이 동반되어야 함을 요구한다. 통역이 없으면 잠잠할 것을 요구한다. 통역이 없으면 잠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방언이 전도용이 아님이 너무나 분명하다. 언어가 다른 족속에게 전도하기 위해 방언이 주어졌다면 통역이 왜 필요하겠는가?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말까지는 우리나라 신앙의 부흥 시대였다. 1969년도는 내가 중학교 1학년 시절이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어느 가정집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주님을 만났다. 그 기도회에 참석하는 순간,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느끼자, 나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기도가 시작되자,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나는 여지없이 깨졌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가 느껴지자, 눈물, 콧물 흘리면서 회개하는데, 갑자기 내 입에서 방언이 나왔다. 그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기도가 끝났을 때, 내게 세상은 이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다! 교회에서 들었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말씀들이 모조리 사실이다! 오, 나는 그 감격스러웠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기도회 말미에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위해 기도를 요청했다. 그때 기도회를 인도하던 분이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있는지를 묻자, 중1에 불과했던 내가 용감하게 나섰다. 그리고 방언으로 기도했다. 그러자 즉시 어떤 사람이 통역하기 시작했다. 기도가 끝나자, 그 사람은 자신을 대신하여 기도한 내용이 너무나 자신의 상황에 적합하다고 고백했다.
◆ 성령의 인도하심의 예배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초대 교회 때는 오늘날처럼 사회자가 앞에서 인도하는 식의 예배가 아니었다. 사회자가 ‘이번에는 김 형제님이 찬송시를 읊조리겠습니다. 그다음에 박 형제님이 방언으로 기도하시면, 이 형제님이 통역해 주십시오.’하는 식으로 이끌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런 식이었다면 ‘분별할 것’(29절)이나, ‘잠잠할지니라’(30절) 라고, 요구할 이유가 없다.
초대교회의 예배 방식은 각 사람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찬송하고, 기도하며, 예언을 하고, 말씀을 선포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예배였던 만큼 질서를 위해서 스스로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중국 지하 교회에서 이런 식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보았다. 누가 ‘예수 사랑하심은’을 부르면 모두가 따라서 부른다. 또 다른 사람이 갑자기 하나님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그러면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서 기도한다. 그리고 어떤 형제가 말씀을 읽으면, 모두가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아멘으로 응답한다. 수십 명이 모였는데, 모두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오늘날 예배는 사회자가 모든 것을 인도하는 방식이라면, 초대교회에서는 모두가 예배자가 되어서 함께 예배를 이끌어가는 방식이었다. 두 방식이 각각 장단점이 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일반예배는 사회자 방식으로, 성찬 예배는 전체 참여식으로 드린다.
그런데 전체 참여식 예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자칫 잘못하면 아주 미묘한 경쟁심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기도를 했는데, 다른 형제가 그와 반대되는 기도를 했다. 말씀도 마찬가지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면 잘 조화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이럴 때 어떡해야 하는가?
결코 경쟁하면 안 된다. 그저 남은 형제, 자매들이 분별할 수 있도록 맡겨야 한다(29). 형제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분별하도록 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32)라는 말씀은 예언하는 자들이 다른 예언자에 의해서 제재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언하는 자들이 스스로 제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언하는 것은 성령님의 말씀하심을 그대로 전하는 것인데, 어떻게 자신이 성령님을 제재한단 말인가?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 여기에 영적인 교훈이 있다. 아무리 성령께서 하신 말씀일지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선포하는 것은 예언자에게 맡기셨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단순한 스피커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역자로 인정하여(고전 3:9), 그들이 어느 시간, 어느 상황에서 말해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재량권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즉 예배 시의 질서는 각 성도가 스스로 통제해야 할 일이다.
여기에서 악한 영과 성령을 분별하기도 한다. 악한 영은 자기가 지배하는 자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 강제로 지배하며 억지로 강요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사역자를 동역자로 여기시어 존중하시고, 조절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로운 동역자답게 모임이 질서 있고 화평하게 잘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33절) 아멘.
방언의 은사
고전14장 26절 ~ 30절 / 김남수목사
오순절이 지난 후에 우리들이 계속해서 사도 행전을 공부하는 중에 사도 행전에 나오는 성령 충만한 사건, 그 사건마다 우리가 평소에 자주 듣지 않고 쓰지 않는 단어들이 나오게 됩니다.
방언이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는데, 어떤 분에게는 매우 생소하고, 어떤 분에게는 대단히 거북스러운 단어 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확실하게 사도 행전에 나오는 성령과 연관된 방언이라는 은사가 계속해서 나오고, 고린도 전후서, 그리고 신,구약에 방언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오늘 저희들이 다시 한 번 검토하므로, 방언은 무슨 은사이며, 방언은 왜 받아야 되며, 방언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며, 성령과 방언의 관계는 어떻고, 또 성령과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중요한 교리적인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선, 성령과 구원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방언과 구원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한다면, 한국의 오순절 성령역사가 처음 시작 될 때, 많은 분들이,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 방언을 하는 것은 구원과 직접적 연관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은 것이고, 성령을 받아야 구원을 받은 것이니까 성령을 받지 못하면 방언을 하지 못하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구원 받지 못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어서 다시 검토되고, 바로 잡아 져서 성령과 방언, 방언과 구원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성경적 해석이라고 알게 된 것 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은사를 받으므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언이나, 예언이나, 어떠한 은사가 구원의 표시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순서가 정해져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고 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겨서 믿게 됩니다. 사도 행전 19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윗 지방을 돌아, 에베소에 와서 12명 정도 되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았습니까? 물었더니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당신들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우리는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적이 없다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하니까, 저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 후에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서 안수를 받으니, 저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는 말씀, 그리고 방언을 했다는 말씀이 사도 행전1 9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 순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고, 믿은 후에 믿은 증거로 세례를 받고, 세례 받은 후에 성령 충만 받고, 성령 충만 받은 후에 방언의 은사가 따라 왔다는 이런 순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 믿겠다고 결정하신 후에, 교회 생활을 하시고, 말씀도 들으시고, 기도 하시면서 세례를 받고, 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 충만 받으시고 성령의 은사를 받으셔서 신앙 생활이 날마다 발전해 나가는 그런 순서와 경험을 가지셨을 겁니다.
여러분! 어떤 분은 그걸 하루에 다 경험하는 분도 봤습니다. 그 날 예수 믿고 세례 받고, 성령 세례 받고 방언하는 사람도 봤습니다. 이것은 예외이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그 다음에 성령 충만 받고 난 후에 은사가 따라 오는 것은 성경적인 순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의 집에서도 그랬습니다. 고넬료의 집이 좀 특별합니다. 가이사랴에 있는 이탈리아 군대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경건하고 기도하고, 구제와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라는 사람을 욥바에 가서 불러오라고 해서 그를 데려다가 말씀을 듣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듣는 순간에 믿음을 동시에 가질 뿐 아니라, 동시에 성령이 세례를 주시고, 성령 충만 받으면서 저들이 방언의 은사도 동시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임했다는 기록이 나온 것입니다.
이 시간과 과정은 좀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구원 받은 후에 성령 충만함의 능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보니까 놀랍게도 예루살렘에서도 저들이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으니 잘 믿었고, 믿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하고 저들이 다 예수님을 믿었지만, 성령이 저들에게 임하시는 경험을 사도 행전 2장에 가서야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된 것이고,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니까 방언의 은사도 따라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우리가 예수만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한 걸음 더 나아 가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신앙적인, 성경적인 순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만 갖고 신앙 생활 하는 것도 좋지만, 그 위에 성령의 능력을 옷 입듯이 경험하고 성령 충만 받는 것이 신앙의 축복인 줄 믿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고 해서 이 사람이 성령 충만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으로 우리 안에 와 계시지만 아직 육신도 살아 있고, 아직 혼도 자아가 깨어 있지 않아서 교만, 고집, 자아 이런 자기 중심적인 혼이 살아 있기 때문에 옛사람과 구습을 좇는 습관적 육신적 행위를 따라 가게 됩니다.
여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생각이 육신을 좇을 때는 육신적인 생각으로 빠지게 되고, 성령의 생각을 하게 되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날마다 영과 육이 싸운다, 네 속에 영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이 싸우고, 네 속의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네 안에서 날마다 싸워서 둘 중에 하나가 이기면 그리로 좇아 행동하게 되는데, 육신의 일을 좇아 가면 육신의 일을, 성령을 좇으면 성령의 일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해 지지 않습니다. 예수 믿었다고 해서 천사가 되어 날아 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날마다 내적인 갈등과 전투를 통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훈련을 받게 되는데, 내적 갈등과의 싸움이 심각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 6개월 정도 잘 다니시다가 안 나옵니다. 알아 보니, 전에 가끔 노름을 하러 다녔는데, 다시 노름을 시작한 것입니다. 생각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주님 뜻대로 살기로 결심을 하고, 주님 앞에서 나와 믿음으로 살고, 성령이 충만 해지면 육신은 저절로 영을 좇아 가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이 그렇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지면 생각과 육신이 일치 되어 육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한 분께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니고, 모든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날마다 경험하는 영과 육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령이 충만해서 우리의 생각을 성령께서 사로 잡고, 성령께 우리의 생각을 충만하게 순종시킬 때, 그 다음에 육신은 자연히 따라 가게 됩니다.
세 사람이 있을 때 한 사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유는 그 한 사람이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한 쪽이 유리해 지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되면 한 사람을 반드시 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혼이 영과 육 사이에서 항상 중간에 있다 이쪽,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우리가 방황을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영과 육과 혼이 있기 때문에, 영이 어디로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혼이 어디로 붙느냐에 따라서 사람 자신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결정이 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성령 충만 받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오시면 생각의 변화가 일어 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육신의 생각이 없어지게 되고, 성령께 순종할 생각이 오게 됩니다. 그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건전지를 살 때, 일회용을 살 때가 있습니다.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다시 사용 하고 싶어도 비어 있고 껍데기만 있습니다. 어떤 건전지는 충전용이라 해서 전기로 충전을 해 언제든지 사용 할 수 있는 건전지가 있습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이 늘 우리에게 충만하게 충전시켜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생각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주관 해 주시는 힘인 줄 믿습니다.
어느 분이 제게 와서 노름 때문에 가정과 사업이 파산 할 지경까지 왔다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제가 두 가지 방법을 제안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전기 충격 치료 요법이라는 것을 사용합니다. 노름 생각만 하면 전기로 충격을 줍니다. 그 치료를 받다 보면, 노름 생각으로 전기 충격을 받기 때문에 노름을 그만 두게 된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하고 기도 해서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전기 충격을 받는 방법보다 기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하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 노름도 완전이 다 끊고, 하나님 앞에 돌아 오게 된 줄 믿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생각 속에 더 충만하고, 더 강렬한 능력으로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셔야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노름 이외에 우리가 습관적으로 원치 않고, 육신적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못하는 모든 것이 동일한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 받는 것이 신앙이 승리하는 것이요, 또 성령 충만 받아야 예수 이름으로 날마다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함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니 너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그리고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라, 마음속에서부터 은사를 사모하되,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은사를 사모하라, 신령한 은사와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이 성경의 간곡한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정리를 해 봅니다. 방언은 구원과 관계없다, 성령 충만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중요한 능력이 된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사모함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성령 충만함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할 때, 방언이 따라 오느냐? 이상하게 예루살렘에서도 성령 충만 받았을 때에도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했다고 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서도 성령 충만함을 받자 마자 저들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서도 성령 충만을 받을 때에도 성령 충만함으로 방언이 따라 왔다는 것입니다. 이 방언은 성경과 신앙에서 포함되어야 되고, 강조 되어야 될 중요한 은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 생활 하는데 방언은 특수한 집단, 특수한 교회, 열광적인 광신자들이 하는 그들의 것으로 제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은혜 받을 때 주시는 성령 충만,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주시는 성령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후에 조금씩 조금씩 성령께 우리의 생각도 순종하고, 육신과 혼도 순종합니다. 끝까지 고집 피우고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이 깨뜨려서라도 순종하게 하십니다. 성령께 순종하며 나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함을 받을 때 왜 방언이 따라 오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조금씩 충만해 나아 갈 수 있지만, 영과 육과 혼이 모두 성령 충만에 잠기는 첫 번째 경험을 성령 세례라고, 성경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다 라고 했습니다.
성령 세례는 성령 충만함을 받을 때에 성령의 세례를 최대한 첫 번째 경험이 올 때, 성령이 우리에게 가득 찬 것을 성령 세례라고 말씀하고, 그 때에 방언이 따라 나와서,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나온 은사가 흘러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것도 넘칩니다. 지식도 넘치지만 보이지 않고, 지혜도 넘치지만 볼 수가 없고 영 분별의 은사는 영적인 것이라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은사도 오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병 고치는 것은 환자가 있어야 알 수 있고, 능력이라는 것도 어떤 사건에 부딪혀야만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여러 가지 은사가 따라 오지만 중요하게 우리에게 직접 믿음의 은사, 이런 것들 보다는 구별의 은사, 방언, 예언, 통역 이런 은사는 우리가 쉽게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온다는 그래서 다른 것도 충만하지만,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방언이고, 방언은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고, 쉽게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따라 왔다는 증거를 우리가 봤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물병에 물이 충만 하지만, 꽉 차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충만하지는 않습니다. 충만이라는 단어는 꽉 찼을 때를 말합니다. 여기서 더하면 넘치게 됩니다. 이런 상태를 성령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위에서 넘쳐 우리 속의 것이 넘쳐 나오게 되고,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데 방언은 보통 소리이기 때문에 우리 귀에 들려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말했다는 것은 성경적이고, 자연적이고, 신앙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당연한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영적 은사이며 온 교회가 이것을 배제하거나 예외 시키거나 제외시켜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의 은사라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립니다.
방언을 우리에게 왜 주셨느냐, 왜 우리에게 필요한가 하면, 성경에 보면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교제하시는 영의 언어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와 우리 속에 있는 영의 언어이기 때문에 알아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영이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의 언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입술과 혀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과 교제를 하는 영적 언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늘의 언어이고, 영의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우리가 사용해야 될 줄 믿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했다는 성경적인 신앙으로 돌아가야 되고, 이 신앙이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알아 듣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단도 우리의 방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암호를 푸는 방법이 없습니다. 통역의 은사를 받지 않으면 영적 언어를 푸는 암호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전쟁할 때에도 서로 대화하는 것을 보안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암호를 해독하고 나면 소용없어지고, 정보가 누출되어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드릴 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오는 내용을 사단이 들으면 방해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릴 때, 성령이 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마귀가 무슨 내용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꾸 우리 주위에 와서 귀를 기울이지만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영으로 통하는 관계가 되니까 마귀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영의 언어 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 주시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주께서 원하신다고 성경에 있습니다. 그 동안 방언의 은사를 받으신 분들은 계속해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고, 하나님께 기도 드릴 때 방언으로 하십시오. 물론 교회 안에서 방언으로 떠들면 믿지 않는 이들이 보고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하니 조심하라는 것이고, 또 예배 중에 여기 저기서 여러 사람이 일어 나 방언으로 기도하면 소란스럽게 되니 그렇게 하지 말고, 세 사람 이상이 되지 않게 순서대로 하되, 교회를 잘 세우고 예배를 돕고 덕스럽게 하는 질서와 순서를 잘 지키면서 방언을 하고, 방언을 하면 무슨 내용인지 반드시 통역을 하고, 통역을 하는 이가 없으면 잠잠하고, 예언하는 사람이 일어나 예언하다가도 다른 사람의 예언이 있으면 먼저 사람은 앉고 나중 사람이 예언을 하되, 그 모든 질서와 덕을 세우기 위해 이루어 져야 된다 라는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 주셨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고린도, 에베소 교회에서 했던 그리고 고넬료의 가정과 예루살렘 교회가 일찍이 성경대로 방언하고 성령 충만 받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교회도 이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이런 성령 충만한 역사가 계속해서 이어져야 될 줄 믿습니다. 성령 충만 받기를 사모하시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우리의 육신적 욕심과 이 세상적 모든 옛 사람의 구습을 끊고 성령 충만한 영적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살아 계시고 영화로우신 우리 하나님!
성령 충만 주시고, 성령의 권능을 주셔서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사모하게 하시고, 목말라 하게 하시고, 간절하게 기도하여 성령 충만 받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이 오셔야 우리가 능력을 받고, 능력이 와야 우리가 스스로 이길 수 있으며 주님이 원하시는 세계가 이루어 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질서있는 예배
고전14장 26절 ~ 33절 / 지용수목사
“악에는 어린이가 되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일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얼마나 구체적인 말씀이고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기 쉬운 말씀입니까? 선악과를 따 먹고 싶을 때, 어떤 유혹을 받을 때는 ‘나는 아기다. 나는 죄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아기다.’라고 해야 됩니다. 그러나 분별하는 일, 지혜로운 일을 행할 때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무풍선이 높이 떠 있는 것은 헬륨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튼튼한 고무풍선이라도 5.4km 상공에 다다르면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풍선이 5.4km 지점에 이르면 터지지만, 특수 장치를 한 풍선은 34.6km까지도 올라갑니다. 거의 90리 높이까지 올라갑니다.
아기는 작은 일을 만나도 견디지 못하고 조그마한 압박을 받아도 웁니다. 그러나 어른은 인내합니다. 우리 모두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분별할 때 장성한 사람답게 잘 분별하여 후회할 일을 하지 않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하는 지혜로운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밤 말씀은 ‘질서 있는 예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큰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심장이 약해서 늘 조심하며 사는 부인이 복권을 한 장 샀는데, 그 복권이 당첨이 되어 200만 불을 받게 되었답니다. 200만 불은 약 24억 원인데 미국에서 200만 불은 아주 큰돈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200만 불을 받게 된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심장이 약한 어머니가 그 일을 알게 된 순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고민을 하다가 신부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신부님이 그 아들에게 “내게 맡기게.”라고 하더니 그 부인을 찾아갔습니다.
“부인, 복권을 사셨습니까?”
“예, 한 장 샀지요.”
“만일 그 복권이 당첨되어 돈을 받게 되면 어디에 사용하시겠습니까?”
“신부님께 드리지요.”
신부님은 그 말을 듣고 기절했습니다. 신부님을 싣고 병원으로 가는 응급차 안에서 부인은 신부님이 깨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참만에 신부님이 깨어났습니다. 신부님이 깨어나자마자 부인이 말했습니다.
“신부님, 그만한 일에 왜 기절까지 하십니까? 농담도 못합니까?”
돈이 구름에 떠 있는 줄 알고 준다고 했지, 정말 줄 수 있을 때는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사람의 깊은 곳에는 이기심이 있다.”
어거스틴도 “사람의 깊은 곳에는 정욕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이기심과 정욕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상대방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하게 되고 상대방의 이익보다는 내 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가페 사랑이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의 이익과 유익만 생각하려고 하셨다면 성탄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처녀 몸에 잉태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며 마구간에서 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애굽으로 피난가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땅에 나신 것도, 애굽에 피난가신 것도, 가난하게 사신 것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도, 무덤에 갇히신 것도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희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에게도 이제는 아가페 사랑이 성령으로 부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항상 아가페 사랑을 적용하며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내게 현금과 수표와 카드가 있을 때 그 중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해서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에로스 사랑도 있고 필레오 사랑도 있고 아가페 사랑도 있지만, 우리는 늘 아가페 사랑을 선택해서 내 유익보다는 상대방의 유익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를 할 때도 나를 세우기보다는 상대방을 세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말을 잘 하면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을 잘못하면 상대방을 아프게 합니다.
잠언 10장 11절에 말씀하십니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에는 독을 머금었으니라』
우리가 의로워서 아가페 사랑의 말을 하면 생명이 전달됩니다. 독한 말, 악한 말을 하면 상대방이 흐려집니다.
부모를 일찍 여읜 오누이가 있었습니다. 오빠가 공부를 잘 하니 여동생이 공장에 나가 오빠를 뒷바라지했습니다. 그러다 돈이 모자라니 몸을 팔아 오빠를 공부시켰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성공한 오빠가 동생을 데리고 멀리 이사가서 믿음 생활을 하며 새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교인 중에서 오누이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촉새가 되어 온 동네와 온 교회가 다 알도록 떠들었습니다.
“저 여 선생이 옛날에 창녀였대.”
그 소문에 충격을 받은 오빠와 여동생이 자살했습니다.
그 교인의 입에서 독이 나간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죽이는 말, 허는 말을 하지 말고 살리는 말을 해야 됩니다.
잠언 16장 24절에 말씀하십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남편들이여, 아내에게 송이꿀 같은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송이꿀 같은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학생은 선생님을 헐지 말고 선생님을 세우는 말, 학교를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회사원은 회사와 경영주를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경영주는 사원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국민은 나라를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교인은 교회를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허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보다는 상대방의 유익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물며 은사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할 때는 방언이든 예언이든 상대방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모든 것이 귀합니다. 예언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언할 것을 예언한 말씀이 구약 성경 요엘서 2장 28절에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셔서 예언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예언을 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성령께서 더 크게 임하셨습니다.
계시든 찬송이든 하나님의 은사는 다 귀한 것입니다. 그 귀한 것을 허는데 사용하면 되겠습니까? 은사는 덕을 세우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낮에도 말씀드렸듯이, 고린도 교회에는 사도 바울이 지나간 후에 목사님이 계시지 않아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배에는 선장 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선장이 없어도 문제가 되고, 많아도 문제가 됩니다. 교회에도 교회를 책임질 한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편안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책임자가 없으니 교인들끼리 모여서 “찬송합시다.”하면 찬송하고, “방언합시다.”하면 방언을 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 질서가 없었습니다. 방언을 했으면 얼마 후에는 그치고 다른 것을 해야 하는데, 끝까지 방언만 하니 예언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아서 “방언하는 사람만 최고냐? 예언하는 우리는 뭐냐?”하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계시가 내려오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21장 8절에서 9절을 보면, 빌립에게 네 딸이 있는데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0절, 11절에는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가 유대에서 내려와 바울의 허리띠로 자기 수족을 매고는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허리띠의 주인을 이같이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라 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자마자 유대인들에게 구속당하여 이방인에게 넘겨졌습니다.
처녀들도 예언하고 아가보도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주신 이런 하늘의 일들을 잘못 사용하여 한쪽에서는 찬송을 하고 한쪽에서는 방언을 하고 또 한쪽에서는 예언을 하니 교회가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와서 그것을 보면 “이 사람들이 미쳤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을 하든, 예언을 하든, 방언을 하든, 통역을 하든, 계시를 하든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방의 덕을 세우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은사를 사용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 사도 바울이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려면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도 질서 있게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방언을 할 때는 두 사람이 해라. 혹 더 해야 될 경우에도 세 사람을 넘지 말라. 그리고 순서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을 해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즘의 공중 대표기도라 볼 수 있습니다. 공중 대표기도 같은 방언을 할 때 통역을 해야 사람들이 ‘아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역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어떤 기도를 드리는지 알 수 없으니 ‘아멘’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방언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집에서만, 골방에서만 방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방언 기도는 혼자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 통역은 조심해야 합니다. 통역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이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언 통역은 아주 조심스럽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에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활용해야 되니, 방언을 하되 두 사람이나 세 사람만 순서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하고,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질서가 있고, 방언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와서 “야! 희한한 일이다. 이 사람들이 하늘의 말을 하는구나. 통역도 하는구나. 아, 이런 뜻이구나.”하게 되어 그들에게는 증거가 되고,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는 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두세 사람만 예언하고 다른 사람들은 분변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안수 집사님들이 많지만 예배 시간에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대표로 기도하듯이, 예언하는 사람이 많아도 두세 사람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예언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분변하라고 했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의 은사를, 예언의 사명을 오늘날에는 목회자들에게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일반 교우들보다 조금 더 하나님 가까이에서 살고, 조금 더 경건하게 사는 줄로 믿습니다. 사회 도덕이 아무리 높다 해도 교인의 도덕을 따를 수가 없고, 교인의 도덕이 아무리 높다 해도 목회자의 도덕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목사님들을 만납니다. 그렇지 못한 분들도 가끔 계시지만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얼마나 거룩하고 경건한지 모릅니다. 오늘의 나실인이 되어 하나님 가까이에서 삽니다. 먹고 마실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성경을 많이 연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시대, 이 상황에 들려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위해 기도하고 고민하며 그 말씀을 받아서 증거합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강단에서 하는 설교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목회자의 의견이나 생각이 들어갈 수 있으니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 준비를 할 때 많은 주석과 목사님들의 설교집을 읽어봅니다. 이천 년 전, 천 년 전, 오백 년 전의 하나님의 종들이 써 놓은 책들도 읽어봅니다. 제가 성경을 읽고 엎드려 기도하고 받은 말씀이지만, 제가 받은 말씀이 정말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틀림없는지 보는 것입니다.
본문 32절에, 예언하는 자들이 예언하는 자들의 제재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영이 제재를 받습니다. 우리의 영이 때로는 맑지 않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독불장군처럼 설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겸손히 조심해서 설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 맞나?’하고 다른 주석도 보아야 흠없는 말씀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언하는 자는 예언하는 자의 제재를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느 장로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장로님이 많은 돈이 필요해서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제게 돈 좀 주세요. 제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새벽,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야, 네가 돈이 필요한 것을 내가 안다. 내일 새벽 기도 시간에 새벽 기도하러 오지 말고 삽과 괭이를 가지고 네 동네에 있는 산에 올라가 기다리고 있어라. 해가 떠오르거든 해에게 열 번 절하고 네가 서 있는 곳의 땅의 파라. 석 자를 파면 항아리가 나올 것이다. 그 항아리 안에 금 은 보화가 가득할 것이니 팔아서 써라.”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겠습니까? 이것은 마귀의 속임입니다. ‘새벽기도 하지 말라. 태양에게 절하라.’라는 말이 어찌 하나님의 음성이겠습니까? 일반 교인들도 다 알 수 있는 일인데, 그 장로님은 금 은 보화가 가득한 항아리라는 말에 정신을 잃어 새벽기도도 하지 않고 산으로 가서 들은 말대로 태양을 향해 열 번이나 절하고 땅을 팠답니다. 석 자를 파도 항아리가 나오지 않으니 하루종일 팠답니다. 그래서 손이 다 부르텄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이 아니라 마귀가 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태양보고 절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예언도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해도 여러분이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이 집사님일 때 이웃 교회의 집회에 참석했답니다. 그 집회를 인도하는 강사님이 반드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는 사람은 일어나라고 해서 우리 권사님이 일어났답니다. 그때 우리 권사님이 결혼한 지 오래 되었는데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권사님이 길을 가다 배가 부른 사람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내 배는 언제 부를까?’하며 한참 서서 바라보았다고 할 때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권사님에게 강사님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서 사실대로 이야기했더니 그 소원을 이루려면 삼백만 원을 헌금하고 사십일간 그 교회에 와서 새벽기도를 하라고 하더랍니다.
우리 권사님이 생각해 보니 무언가 잘못된 것 같더랍니다. 헌금을 하려면 본 교회에 해야지, 왜 그 교회에 하라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 교회에 가지 않고 우리 교회에만 나왔는데, 그 후로 아들 둘을 낳고 잘 살고 계십니다. 권사님이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광고하지 않는 집회에는 가지 않는 것이 안전한 줄로 믿습니다.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언할 때도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언하는 사람도 자기 생각을 넣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예언하시는 그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을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에게 계시가 임하면 예언하던 사람은 빨리 마무리를 해서 계시가 임한 사람이 계시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본문 당시와 같은 계시를 거의 주지 않으시지만, 그 때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아서 계시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계시를 받아서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십니다.”라고 하면 빨리 그 사람에게 순서를 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질서가 있어야 하고 서로 세워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어떤 사람에게 계시하시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예언하던 사람이 계속 예언하면 계시 받은 사람은 상처를 받고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질서가 있고 서로 겸손히 남을 세워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든, 통역을 하든, 예언을 하든, 계시를 하든, 무엇을 하든 질서 있게 예배를 드려서 덕을 세우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예배에는 순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순서에 너무 매여 있어도 안 됩니다. 때로는 찬송가를 한 절 더 부를 수도 있고 반복해서 부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뜨겁게 역사하실 때는 찬송가를 한 번 부르는 것보다 반복해서 부를 때 성령 충만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구의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입니다. 마지막 시간에 그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내가 이제 살아도 주 위해 살고 내가 이제 죽어도 주 위해 죽네」라는 찬송을 모두 일어서서 함께 부르게 하셨는데, 일곱 번인가 불렀습니다. 그때 제 가슴이 불같이 뜨거워졌습니다. 교우들의 얼굴도 발개졌습니다. 성령 충만해져서 ‘나는 주님만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결단하는 교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그때 은혜가 얼마나 강하게 임했는지, 지금도 그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순서가 있어야 하지만 때로는 약간의 융통성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생각해야 되기 때문에 찬송을 할 때도 절제해야 되고 공중기도를 할 때도 3분을 넘으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목사님들은 대표 기도를 오래 하지 못하게 합니다.
디엘 무디는 집회 때에 프랭크라는 사람이 기도를 오래 하니 마이크를 잡고 “여러분, 프랭크 형제는 계속 기도하게 하고 우리는 찬송합시다.”라고 했답니다. 그때 교회에 처음 나온 한 새신자가 너무 길게 하는 기도에 지겨워서 어쩔 줄 모르다가 디엘 무디가 그렇게 말하니 그 시원함에 반해서 디엘 무디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대표 기도를 할 때는 기도를 기록해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를 기록해서 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수천 명, 수만 명, 수많은 사람을 대표해서 하는 기도를 그냥 해서 되겠습니까?
설교하는 분도 시간을 정해 놓고 해야 합니다. 만일 오늘 저녁 설교를 7시간 동안 해 보십시오. 집에서 쫓겨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질서 있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뿐 아니라 모든 생활에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시어 사람들을 백 명씩 오십 명씩 앉게 하십니다. 그래야 떡을 질서 있게 쉽게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녁에 우리가 성찬식을 할 때도 분배위원들이 한 줄씩 맡아 나누니 질서 정연합니다. 만일 줄을 맡아 놓지 않으면 서로 우왕좌왕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 하루를 살아갈 때도 그냥 살면 할 일은 많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도한 후 그날 해야 될 일을 종이에 기록하고 중요한 것부터 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해야 될 일이지만 그날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생활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잠을 자지 않으면서까지 하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잠을 자지 않으면 죽습니다.
김 모씨는 명문대학을 나와서 벤츠 기업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꿈은 10년 내에 철탑산업훈장을 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뛰고 뛰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매일 밤, 바이어들을 대접하기 위해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걸다시피 뛰고 뛰니 사원들도 같이 뛰었습니다. 그는 꿈대로 10년 만에 철탑산업훈장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 쓰러졌는데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만에 성공했지만 그날 죽었습니다.
인생을 질서 없이 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생명을 파괴하면서까지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간도 질서 있게, 일도 질서 있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젊은 정신과 의사가 환자들과 상담하다 보면 얼마나 피곤한지 엘리베이터에서도 언제나 벽에 기대어 있곤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서너 배나 더 많은 환자들을 대하는 선배 의사는 언제나 생생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선배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보시는 환자의 절반도 안 되는 환자를 보는데도 지쳐서 쓰러질 것 같은데 선생님은 그렇게 많은 환자들을 대하시면서도 어찌 그리 생생하십니까?”
“누가 그 이야기를 다 듣나?”
환자들이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는 뜻입니다.
좋지 않은 예화일 수도 있지만, 내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죽여가면서까지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도구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교구 클리멘트는 말했습니다.
“재물은 구두와 같다.”
구두가 크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발에 맞아야 좋은 것입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알맞아야 그 재물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배도 질서 있게, 사업도 질서 있게, 공부도 질서 있게, 부부 생활도 질서 있게, 모든 생활을 질서 있게 할 때 자기도 살고, 가족도 살고, 교회도 살고, 사회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질서의 지혜가 여러분과 제게 있기를 원합니다.
남녀가 함께 섬기는 교회
고전14장 26절 ~ 40절 / 이수영목사
오늘은 우리 교단총회가 여전도회주일로 지키기로 정한 주일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교회 안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하여 갖고있는 편견과 그릇된 우월주의를 상기시키고, 교회 안에 고착된 남존여비사상과 제도적 불평등을 타파하며, 대부분의 교회에서 교인의 ⅔를 차지하고있는 여성들이 그 수에 상응하는 역할을 각 교회 안에서 보다 더 잘 담당할 수 있도록 의식을 일깨우기 위함이라고 생각됩니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도적 역할과 남녀의 대등한 책임분담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 이론적 근거로서 제시하는 성경구절들 중에서 주되고 결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구절의 하나가 오늘 본문말씀 34-35절의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여전도회주일로 지키는 오늘 그런 구절을 본문으로 삼을 것이 무어냐고 생각하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말씀이 결코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도적 역할과 남녀의 대등한 책임분담을 반대하는 이들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말씀이 아님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들을 그렇게 피상적이고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글은 사도 바울이 특정한 지역교회에서 특정한 시기에 발생한 특정한 상황에 구체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급박한 목회적 동기에서 특정한 대상에게 써보낸 것임을 유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말을 해야 했던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그 바로 앞 구절인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힘주어 말한 것으로 보아 무질서와 불화로 요약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상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내용이 보여주는 대로 당시 고린도교회는 방언을 위시한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무분별한 발언으로 인해 매우 시끄러웠고 분란이 일어나 교회의 덕이 무너지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여성들이 많이 있었고, 그 여성들이 제각기 받은 방언·예언을 무분별하게 말하게 되자 고린도교회의 무질서와 불화는 한층 더 심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어찌됐든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었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해야 할 것은 모두가 그들이 받은 바 은사들을 "교회의 덕 세움"이라는 상위가치에 복속시키고 자제함으로써 교회 내의 질서와 화평을 회복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14장 안에서만도 수차례 "교회의 덕 세우기"를 반복하여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4-5절에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했고,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했으며, 26절에서는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같은 고린도전서 14장 안에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절제와 질서를 강조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를 들면 19절에서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한 것이나, 27절에서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한 것이나, 29-31절에서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한 것이나, 40절에서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고린도교회의 교인 모두가 자제하고 매사를 적당히 하며 언제나 질서를 지킴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우라는 일반적 명령의 한 부분으로서 주어졌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실상 14장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여성들을 향해서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한 것임을 보아야 합니다. 28절의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한 말이나, 30절의 "만일 곁에 앉아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30) 한 말은 교회의 덕과 질서와 화평을 위해서는 누구든지 필요할 때에는 잠잠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고린도교회라는 특정한 공동체가 특정한 시기에 처했던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특정한 처방이었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여자는 무조건 교회에서는 일절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명령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의 "여자는" 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여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시도 때도 없이 자제할 줄 모르고 떠들면서 교회의 덕과 질서와 화평을 깨뜨리던 여자들"을 지칭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오직 복종할 것이요" 한 말도 남자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복종하라 한 것입니다.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대하여 제기되는 반론을 알고 있습니다. 그 반론인즉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기록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해야 할 상황적 메시지뿐 아니라 동시에 모든 시대에 걸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영원히 변치않는 보편적 메시지를 지니고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매 구절의 의미를 오늘날 우리와는 상관없는 과거 특정 시대의 특정 대상만을 위한 것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성경해석의 오류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문제는 과연 무엇이 옛날에나 오늘 우리를 향해서나 앞으로도 각 성경구절이 지니는 보편적 메시지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이 우리가 문법적으로 이해하는 그대로 무조건 언제 어디서나 영원한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반해, 저는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젊은이든 그 누구든 아무리 할 말이 있고 말할 능력이 있더라도, 또 말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라도, 교회의 덕과 유익을 위해 필요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 말씀이 지닌 영원하고 보편적인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느 시대 어느 교회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나 지켜야 할 그 말씀의 진정한 교훈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따라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결코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도적 역할과 남녀의 대등한 책임분담을 반대하기 위한 근거로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을 해석 없이 문자 그대로 모든 일과 모든 상황에 적용하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같은 고린도전서 11장 5절 말씀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고 함으로써 여인들이 교회에서 기도도 하고 예언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는 여인들이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머리에 쓴 것을 벗는 것을 금하고 있지, 기도나 예언을 하도록 입을 열고 말하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여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 중 여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 모든 여자는 언제 어디서도 교회 안에서 책임있는 직분을 맡을 수 없다는 논거나 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왜 예수님께서 가장 가깝게 3년간 숙식 등 동고동락의 삶 전체를 같이 할 제자들을 남자들로만 택하셨는가 하는 이유를 성경의 증거 자체로 분명히 알기 전에는 그런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오늘날 같이 남녀평등화가 많이 이루어지고 개방적인 시대의 사회라 할지라도 만일 예수님이 열두 제자 중에 여자를 포함시켜 동숙식의 삶을 산다면 온갖 오해와 비판의 대상이 될 터인데, 그 옛날 시대에 그러한 오해를 자초할 어리석은 선택을 하실 리가 있었겠는가?" 반문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남자들만으로 열두 제자를 택하신 것은 그가 사셨던 시대와 사회의 관습과 사조에 적응하시는 지혜의 문제이지, 영원한 그의 나라 일을 위한 남녀의 차별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전체 속에서 남성위주의 사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어 오시고 인간세계의 상황을 활용하시면서 그의 뜻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적 선택의 지혜로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의 계시를 인간들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때 그때의 남성 위주의 인간 세계의 현실에 적응하심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인간세계의 현실에 적응하셨다는 사실이 이 모든 인간세계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시고 정당화하시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크나큰 과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인간을 그가 원하시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하루 아침에가 아니라 꾸준히 변화시켜 가시며, 그 동안은 인간의 모든 상황을 활용하시는 자유를 가지신 분입니다. 비록 그 인간의 현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는 폐하여질 그것을 잠정적으로 그의 일에 활용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남녀가 하나님께서 은혜 속에 주신 복된 구별은 있으나 아무런 존재적 차등은 없는 하나님의 같은 피조물이며 하나님나라의 동등한 식구요 일꾼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사역에 있어서 뿐 아니라 인간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남녀의 성차별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 구별하시지 않는 모든 인간적 성차별은 폐하여 질 것입니다. 다만 죄된 인간과 세상일지라도 사랑하시고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세계의 온갖 잘못들을 일시에 다 멸하지 않으시고 그의 깊고 비밀한 섭리를 따라 때로는 일시적으로 내버려두시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남성중심의 하나님사역은 이러한 하나님의 잠정적 지혜로 볼 것이며, 영원한 의지로 볼 것이 아닙니다. 성차별의 궁극적 폐기가 하나님나라에 속한 진리라면, 그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향해 사는 변화와 갱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남성위주의 사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 속에 여성들을 동참시키시고 중요하게 들어 쓰신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그 역사, 그리고 예수님을 통한 인류구원사역의 전개 속에서 중요한 대목마다 숱한 여성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전 과정 속에 언제나 여성들이 함께했음을 우리는 봅니다. 자기의 몸을 내어놓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한 이는 여인이었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이도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네 명의 여인이 그 십자가 곁에 서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뵌 이도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승천 후에 복음의 전파와 확산을 위한 사도들의 사역에도 어김없이 여성들의 협력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두아디라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는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습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숱하게 많은 여인들을 자신의 귀한 동역자들로 천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여성동역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훌륭한 선생들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행18:26에 따르면 브리스길라는 이미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행18:24)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가르친 여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4:2-3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권하며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행21:8-9에 따르면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네 딸은 모두 예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딛2:3에서는 나이든 여성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 자신이 갈3:28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말한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이것이 어디서나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남자와 여자", 이것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에 앞서며 또 그 말의 참 의미를 밝히는 상위개념인 것입니다.
지금은 여성이 사람으로 온전히 취급받지 못하며 여성이 공개적인 자리에 나타나거나 발언하는 것이 수치로 여겨지던 유대나 헬라의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새 시대에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남녀가 함께 대등하게 교회를 섬기며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껏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도적 역할과 남녀의 대등한 책임분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여성들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에 대한 선입관·편견·불신을 보다 일찍 말끔히 해소시킬 수 있을 만큼 지혜와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결집하며 증명해내지 못한 과오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책임은 남성들에게 있습니다. 신앙적 안목에서보다는 인습적이고 세상적인 안목으로 문제를 취급하고 처리해 왔으며 여성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 천년과 새 세기를 맞은 우리는 이제 진정 남녀가 함께 섬기는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이라고 믿습니다.
질서는 아름답습니다
고전14장 26절 ~ 40절 / 김상수목사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질서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질서가 있는 것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되면 기러기가 날아가는데 맨 앞에 인도하는 새가 있고, 양쪽으로 줄을 지어 질서있게 날아가는데 참 아름답다고 느끼게 됩니다. 질서는 참 아름답습니다.
질서가 무엇입니까?
질서는 있어야할 곳에 모든 사물들이 제 자리에 있는 것, 자기자리를 지키고 제 구실을 다할 때에 질서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예쁜 그림액자를 아무데나 걸어둔다고 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꼭 있어야할 자리에 있어야합니다. 꽃병도 제 자리가 있어서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눈이 여기 있어야 하는데 다른데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각각의 위치에 있는 것이 질서입니다.
밥알은 밥그릇 속에 있을 때는 참 아름답지만 밥알이 옷에 있으면 제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보기 흉하듯 세상의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 만물을 만드실 때에 모든 것이 질서있게 제 자리에 있도록 밤과 낮을 만드시고, 달과 해를 만드시고, 해가 뜨면 지게 하시고,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게 하시고, 인생은 흙으로 나서 흙으로 돌아가고, 생명은 싹이 나면 반드시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 질서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봄에 씨를 심어야 하는데 그때 장마비가 오면 다 씻겨 내려가서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또한 여름에 모를 심었을 때에 가랑비가 오면 안 됩니다. 그래서 봄에는 가랑비로, 여름에는 장마비가 오는 이 질서 속에서 우리가 풍요롭고, 복되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질서가 있는 곳에는 힘이 있으며, 평안함이 있고, 풍요함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제는 이 질서가 파괴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연이 자꾸 파괴되고 있습니다. 가정의 윤리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뉴스를 보니 뉴스의 초점이 ‘스와핑’이었는데 이 말은 일부 특수부분의 말이기도 하지지만 부부를 서로 교환해서 교제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정이 파괴, 문란, 마침내 파멸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질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칼 힐터는 사람에게는 3가지의 질서가 있다고 했는데 첫째 힘, 둘째 법, 셋째 사랑의 질서가 있다고 했습니다.
힘은 수명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데모하는 분들은 오래 하지 못합니다. 며칠가지 못합니다. 법은 너무나 냉정해서 사람이 살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수 있는 법은 사랑의 질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과 사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왜 진정한 평안과 평화가 없고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질서가 무너질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을 때 우리 마음속에 어려운 혼란이 옵니다. 인간관계가 무너졌을 때에도 혼란이 옵니다.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에 오셔서 예배시간 눈물도 흘리고, 은혜도 받고 하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줄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질서가 바로 섰을 때에 나에게 주어지는 평안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이 질서가 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질서가 서고 평안할 때에 우리가 행복하고 복을 받고 힘이 있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 제가 말씀드렸듯이 지상의 교회가 이상은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도 파당의 문제가 있었는데 바울파, 아볼로파, 또한 음행과 소송문제가 있었으며, 재물에 대한 문제, 또 은사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방언의 은사 문제 때문에 혼란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언의 은사를 하고, 어떤 사람은 방언의 은사를 또 어떤 사람은 통역의 은사를 받아서 자기 것을 자랑하고 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도바울이 이것들에 대해서 질서있게 정리하려고 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인데 교회를 설명할 때에 몸으로 비교합니다.
이 몸이 무엇을 하려고 하면 머리가 명령을 내리면 손이나 발이 움직여서 서로 협력해서 일을 하는 것과 같이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 주장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므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저희 교회가 이제 23년이 되었고, 교육관도 완공하고 직분자도 새롭게 세웠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그 교회에 걸 맞는 질서가 요구되어집니다. 어떤 분은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옛날 개척교회 때 이야기를 합니다. 또 재정을 사용하려고 하면 옛날에는 안 그랬다고들 합니다.
여러분, 저는 그런 분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이 몸이 커지면 옷도 커져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내가 옛날 가난하게 살다가 부자가 되었으면 이제는 부자답게 사는 것이 질서입니다. 우리 교회도 거기에 걸 맞는 질서가 있어야합니다.
교회생활의 질서에 대해서 이 시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사랑의 법으로 서로 교제하고 봉사하는 곳이기 때문에 어느 곳 보다 질서가 요구되어집니다. 질서는 아름답고 편안하게 해줍니다. 질서는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아름답게 보이게 해 줍니다. 여기 있는 목사가 제 위치를 잘 지킬 때는 제 마음이 편안하고 여러분이 볼 때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면 먼저 여기 있는 제가 불편하고 여러분에게도 아름답게 보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질서는 교회에서 너무 중요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목사와 성도의 관계입니다.
1)목사님을 존중할 때 은혜를 받습니다.
목사님을 통해서 은혜를 받도록 좋은 관계를 갖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목사님의 지도를 따르고, 목사님을 통해서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목사님을 잘 모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목사님을 청빙할 때 신문광고를 냅니다. 그러면 많은 분들이 이력서를 보내면 당회에서 추려냅니다. 공부를 많이 했고, 또 어떻고 해서 또한 설교를 시켜봅니다. 이렇게 해서 선발하는데 이것은 상품을 고르는 것과 같습니다. 인격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격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부목사님을 청빙할 때 특별한 분야 때문에 광고를 냈는데 한번도 저는 설교를 시켜보고 청빙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목사님과 여러분들 모두 인격적인 관계가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도 그만두면 새 목사님이 오셔야할 때가 반드시 있는데 절대로 광고내고, 시험치듯이 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 목사님이 영적인 분이고, 인격적인 분이라면 평소에 잘 눈여겨보시고 그분을 정중히 모시는 것이 청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모셔 와서 그 목사님을 섬겨야 은혜를 받고 섬겨야 바른 관계가 될줄 믿습니다.
2) 목사님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최근 서초동 사랑의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했는데 수 천명이 모인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 장로님들을 몇 분 알아서 듣게 되었는데 새로 목사님이 오셔서 새벽기도를 수 천명 나온다는 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닙니다. 새 목사님이 오셨을 때에 교인들이 새 목사님의 신임을 물었을 때에 98%로 찬성해서 모셔왔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새벽기도회에 나오자 다 따라 나온 것입니다. 숯불을 모으면 불이 잘 탑니다. 전 성도가 마음을 하나로 묶으면 성령의 폭발적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잘 타던 숯불도 흩어버리면 꺼지고 맙니다.
우리 교회도 지난 금요일 임직자들이 식당에서 모였을 때에 느끼는 영적인 분위기가 우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새벽기도회를 하는데 못한다고 하는 분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 되는 곳에 질서가 있습니다.
월드컵 4강, 88올림픽 4강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가 있었습니까? 우리의 힘이 아니라 전 국민이 한 마음이 되어 응원했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교회도 하나 될 때에 큰 역사가 있습니다.
3)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켜야합니다.
구역장을 맡기면 구역을 잘 돌아보고, 집사직분을 맡기면 집사로서 그 일을 잘하고, 각부서를 맡기면 그 일을 잘 하실 때에 편안합니다. 그 일을 맡겼는데 잘 하지 못하면 첫째는 본인이 편안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볼 때에도 아름답지 못해 결국은 교회를 떠나게 되고 본인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자기의 본분을 잘 지킬 때에 내가 살고 교회가 잘 되는 줄 믿기 바랍니다.
성도간의 관계도 서로 존중해주며, 젊은이들은 서로를 잘 존중해주기 바랍니다. 교회는 손과 발이 잘 맞는 것처럼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젊은이들은 어른들을 존중하기 바랍니다. 또 교회 안에서 직분의 서열도 중요합니다. 이번에 같이 안수 집사가 되었다고 너하고 나와 같다고 한다든지, 권사님이 되었다고 이제 같은 권사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서열이 있습니다. 나보다 먼저 된 자들을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을 잘 할 때에 교회가 잘되고 편안할 줄 압니다. 또한 많은 일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둘째는 가정의 질서를 잘 지켜야합니다.
아버지의 자리와 어머니의 자리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자리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경제원리가 지배하는 원리로 돈 많이 버는 가장은 힘이 있고, 돈을 잘 벌지 못하면 힘이 없는 가장으로 살고 있습니다. 요즈음 30대 중반이 되면 평균적으로 실직을 하는 가장들이 많다고 합니다.
가정에 돌아가면 고개 숙인 아버지가 있습니다. 특히 부인들은 남편들이 사업에 혹시 실패를 했다든지 실직을 하면 이렇게 못난 남편을 만났냐고 하지 말고, 성경의 원리대로 남자를 돕는 배필이 되십시오. “내가 남자를 돕는 배필을 만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변할 수없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에 제 옆에 있어주었던 때 가장 귀하고 감사했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좌절하고 힘이 빠질 때가 있는데 제 이내가 “당신 용기를 갖고 겁낼 것 하나도 없다”라고 하면 얼마나 힘이 나고 좋은지 모릅니다.
가정으로 돌아가셔서 남편들이 힘을 잃었을 때에 부인들은 남편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시고 자존심을 꺾지 말기 바랍니다. 어려울 때에 더욱 자존심을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밖에서 실패하고 돌아와도 가정에서는 힘을 잃지 않도록 자존심을 세워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으로 만드신 것은 바꿀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성 대결을 한다고 하는데 남녀평등도 모자라서 성대결을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특수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 질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가정에서 질서를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특히 형제들이 있는 가정은 형님이 조금 부족해도 가정이 잘되려면 형으로 대우를 잘 해야합니다. 때로는 형이 볼품없이 돈도 잘 못 벌고 부족해도 가정에서는 형 만한 동생이 없습니다. 형이 부족해도 형으로 받들어줄 때에 가정의 질서가 서고 편안할 줄 믿습니다.
셋째는 국가에 질서가 있어야합니다.
나라의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지도자의 통치권에 순종하는 것이 원리입니다. 선거할 때에 내가 찍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이라고 해도 선거가 끝나면 당선된 분을 잘 존중할 수 있어야합니다. 대통령을 세워놓고 그 분을 비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로마서 13장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에게 굴복하고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아니함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리는 것이니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을 그에게 맡기셨으니 그에게 순복하고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은 이상국가론에서 “이 땅 위에 이상적인 나라를 세워야 하는데 그 이상적인 나라는 정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정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저마다 제 자리에서 자기 할 일을 잘 하고 남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벌써 고대 사회에서 이렇게 말한 것은 보통 수준이 아닙니다. 그래서 질서와 조화는 정의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지금의 대통령을 잘 받들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원리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입니다.
넷째는 환경의 질서를 잘 지켜야합니다.
독일의 담스타트에 슐링크라는 분은 수도원을 경영하는데 2백 명이 공동체 생활로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농사를 지을 때 농약을 쳐서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너희들만 먹어야 하겠느냐 벌레도, 새들도 먹어야지"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다음부터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지었을 때에 벌레가 많이 생기고 새들이 그 벌레를 잡아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매마른 땅에 샘물이 솟아나는 기적과 같이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환경을 잘 지켜야 합니다.
미국의 철학자 죤 듀이가 “문명은 질서다”라고 했습니다. 문명이 높을수록 질서 있고, 문명인의 자격은 청결과 정돈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위의 환경을 잘 살펴보면 얼마나 정돈이 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 사무실에 와 보면 얼마나 정돈되어 있는지 이 말하는데 부끄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돈이 잘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마음의 질서가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수할 때에 부부가 가끔 싸우는데 치약을 어떻게 하는지, 중간부터 짜는지 끝에부터 짜는지 저는 끝에서부터 짜 올라가는 스타일인데 어떤 분은 중간에서부터 짜 올라가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것이 하나의 우리 모습입니다.
제가 독일 갔을 때에 놀라운 것은 시골마을인데도 마을 하수구 개천에 물이 얼마나 맑은지 몰랐습니다. 이렇게 되려면 얼마나 고도의 환경보호와 질서를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이제 교육관을 지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주변이 정말 청결하고 공원처럼 깨끗해야합니다. 이제부터 이 일에 기관들이 동원되어 주시고, 여러분이 이 모든 일에 함께 협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내 동네도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내가 서 있는 곳이 아름다울 때에 나도 복을 받고 내 주위가 복을 받게 됩니다.
어떤 분이 20년 정도 수석을 수집했는데 그 가운데는 지리산에서 수석을 수집하러 갔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져 냇가로 떨어질 뻔 했는데 한 돌에 걸려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 돌을 유심히 보니 보통이 아니어서 이것을 파서 집에 가지고 와서 작품을 만들어 집을 꾸몄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교수인 친구에게 자랑을 했는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여보게 나는 이 돌이 본래 있던 자리에 있어야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네. 그 돌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자네는 죽었을 것이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서 있는 위치에 있어야 편안하고 많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교회에서의 위치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을 잘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아름답게 제 위치를 잘 지키고 있는지 이 시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치인이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이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사회가 불안합니다. 성도는 교회에서의 자기 위치를 잘 지켜서 자기 위치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며 나도 잘되고 복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두가 품위 있고 질서 있는 교회
고전14장 34-40절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의 34-35절 말씀은 여성들에게 상당히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도적 역할과 남녀의 대등한 책임분담을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을 정당화시켜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글은 사도 바울이 특정한 지역교회에서 특정한 시기에 발생한 특정한 상황에 대응하려는 목회적 동기에서 특정한 대상에게 써 보낸 것임을 유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글을 써야 했던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그 바로 앞 구절인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 힘주어 말한 것으로 보아 무질서와 불화로 요약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상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내용이 보여주는 대로 당시 고린도교회는 방언을 위시한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무분별하고 질서 없는 발언으로 인해 매우 시끄러웠고 분란이 일어나 교회의 덕이 무너지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여성들이 많이 있었고, 그 여성들이 제각기 받은 방언과 예언을 무분별하게 말하게 되자 고린도교회의 무질서와 불화는 한층 더 심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어찌됐든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었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해야 할 것은 모두가 그들이 받은 바 은사들을 “교회의 덕 세움”이라는 상위가치에 복속시키고 자제함으로써 교회 내의 질서와 화평을 회복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14장 안에서만도 수차례 “교회의 덕 세우기”를 반복하여 권면한 것입니다. 4-5절에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했고,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했으며, 26절에서는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했습니다.
또한 같은 고린도전서 14장 안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절제와 질서를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19절에 보면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합니다. 절제를 강조한 것입니다. 27절에서는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라 합니다. 절제와 질서를 강조한 것입니다. 또 29-31절에서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합니다. 역시 절제와 질서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40절에서는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고린도교회의 교인 모두가 자제하고 매사를 적당히 하며 언제나 질서를 지킴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우라는 일반적 명령의 한 부분으로서 주어졌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실상 14장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여성들을 향해서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한 것임을 보아야 합니다. 28절에서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한 말이나, 30절에서 “만일 곁에 앉아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한 말은 교회의 덕과 질서와 화평을 위해서는 누구든지 필요할 때에는 잠잠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고린도교회라는 특정한 공동체가 특정한 시기에 처했던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특정한 처방이었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여자는 무조건 교회에서는 일절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명령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자는” 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여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바울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시도 때도 없이 자제할 줄 모르고 떠들면서 교회의 덕과 질서와 화평을 깨뜨리던 여자들”을 지칭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젊은이든 그 누구든 아무리 할 말이 있고 말할 능력이 있더라도, 또 말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라도, 교회의 덕과 유익을 위해 필요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어느 시대 어느 교회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나 지켜야 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결코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도적 역할과 남녀의 대등한 책임분담을 반대하기 위한 근거로서 사용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만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만고불변의 진리로서 고집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같은 고전11:5의 말씀과 충돌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고 함으로써 여인들이 교회에서 기도도 하고 예언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는 여인들이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머리에 쓴 것을 벗는 것을 금하고 있지, 입을 열어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 자체를 금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성령께서 강하게 충만하게 임하신 오순절 때 다른 모든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리 높여 설교하며 선지자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행2:14-18).
사도 바울은 본문 34절에서 “여자는 ... 오직 복종할 것이라” 했습니다. 고린도의 문화는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남성들과 맞서는 것이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된 여성들 가운데는 공중예배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방언도 하고 통역도 하며 예언도 하게 되다 보니 신앙에 관한 질문도 남성들에게 자유롭게 할 권리가 있다고 여긴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공식적인 신앙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관해 궁금한 것들을 예배 중에 자주 질문하는 일이 생겨서 예배의 진행에 방해가 되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성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를 그런 식으로 예배 중에 행사하려 하지 말고 궁금한 것들은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묻고 답을 들음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기를 권면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 “여자는 오직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본문 35절에서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한 말도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 그 자체가 무조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여자가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도 될 것을 교회에서 예배 중에 질문을 하거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이 흡족하지 않다고 반론하거나 논쟁을 함으로써 예배의 진행에 방해가 된다면 그 일로 그 여자의 남편을 부끄럽게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여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여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 모든 여자는 모든 시대에 교회 안에서 책임 있는 직분을 맡을 수 없다는 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가장 가깝게 3년간 숙식을 함께 할 제자들을 남자들로만 택하셨는가 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같이 남녀평등화가 상대적으로 많이 이루어지고 개방적인 시대의 사회라 할지라도 만일 예수님이 열두 제자 중에 여자를 포함시켜 숙식을 함께 하는 삶을 살게 하신다면 온갖 오해와 비판의 대상이 될 터인데, 그 옛날 시대에 그러한 오해를 자초할 위험한 선택을 하실 리가 있었겠는가?” 반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남자들만으로 열두 제자를 택하신 것은 그가 사셨던 시대와 사회의 관습과 사조에 적응하시는 지혜의 문제이지, 영원한 그의 나라 일을 위한 남녀의 차별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전체 속에서 남성위주의 사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어 오시고 인간세계의 상황을 활용하시면서 그의 뜻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적 선택의 지혜로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계시를 인간들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때그때의 남성 위주의 인간 세계의 현실에 스스로 적응하신 결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인간세계의 현실에 적응하셨다는 사실이 이 모든 인간세계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시고 정당화하시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크나큰 과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인간을 그가 원하시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하루아침에가 아니라 꾸준히 변화시켜 가시며, 그 동안은 인간의 모든 상황을 활용하시는 자유를 가지신 분입니다. 비록 그 인간의 현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는 폐하여질 그것을 잠정적으로 그의 일에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하나님께서 은혜 속에 주신 복된 구별은 있으나 아무런 존재적 우열의 차등은 없으며 남녀는 모두 하나님나라의 동등한 식구이고 일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사역에 있어서 뿐 아니라 인간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남녀의 차별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질서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성경 안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남성중심의 하나님사역은 하나님의 잠정적 지혜로 볼 것이며, 영원한 의지로 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 구별하시지 않는 모든 인간적 차별은 폐하여 질 것입니다. 성차별의 궁극적 폐기가 하나님나라에 속한 진리라면, 우리는 그 진리를 따라 사는 변화와 갱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남성위주의 사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 속에 여성들을 동참시키시고 중요하게 들어 쓰신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그 역사, 그리고 예수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구원사역의 전개 속에서 중요한 대목마다 숱한 여성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몸을 하나님의 뜻에 내어맡김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시도록 한 이는 여인이었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이도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다 멀리 달아났지만 끝까지 그의 십자가 곁을 지킨 이들은 네 명의 여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뵌 이도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에 복음의 전파와 확산을 위한 사도들의 사역에도 어김없이 여성들의 협력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두아디라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는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많은 여인들을 자신의 귀한 동역자들로 천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여성동역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훌륭한 선생들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행18:26에 따르면 브리스길라는 이미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행18:24)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가르친 여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4:2-3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권하며 그들을 가리켜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행21:8-9에 따르면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네 딸은 모두 예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딛2:3에서는 나이든 여성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 자신이 갈3:28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말한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이것이 어디서나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남자와 여자”, 이것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에 앞서며 또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주는 상위개념인 것입니다.
지금은 여성이 사람으로 온전히 취급받지 못하며 남성과 같은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공개적인 자리에 나타나거나 발언하는 것이 수치로 여겨지던 유대나 헬라의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이 대통령이 된 세상입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새 시대에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성에 대한 선입관이나 편견을 버리고 남녀가 함께 대등하게 교회를 섬기며 일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아직껏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도적 역할과 남녀의 대등한 책임분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여성들 자신의 책임은 없는지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여성에 대한 선입관이나 편견이나 불신을 말끔히 해소시킬 수 있을 만큼 지혜와 능력을 충분히 결집하고 발휘하며 증명해내는 데 보다 적극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정책의 입안이나 실천의 과정에서 당당하게 선도적인 의견이나 설득력 있는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고 매사에 여성 몫의 너그러운 할애나 특별 배려만 호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절제되었지만 부족함이 없는 언어로 정확하고 적절하게 발언하며 거기에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을 더하여 회중의 공감을 이끌어냄으로써 교회 안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총회가 여전도회주일로 지키기로 정한 주일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교회 안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편견과 그릇된 우월주의를 상기시키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교인의 ⅔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이 그 수에 상응하는 역할을 보다 더 잘 담당할 수 있도록 의식을 일깨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이 지도적 역할과 남성과의 대등한 책임분담을 하지 못하고 주님 오실 때까지 잠잠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남녀가 함께 사도 바울이 본문 40절에서 쓴 대로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이라 믿고 이를 실천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고전14장 34절 ~ 40절 / 지용수목사
오래 전 중국의 한 왕이 저명한 학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인류역사란 도대체 무엇인지 연구해서 책으로 만들어 오라.”라고 명했습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학자들이 방대한 저서를 만들어 왔는데, 그것은 너무 복잡하고 방대하니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여서 가져 오라고 다시 명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나왔습니다. 왕이 책을 여니 첫 페이지에 괴로울 ‘고(苦)’ 한 자만 기록되어 있고, 뒤 페이지는 전부 백지였습니다. 그것을 본 왕이 “맞아. 인생이란 고통이야. 삶이란 괴로운 것이야.”라고 했답니다.
우리의 삶에 기쁨, 번영, 성공, 승리, 형통함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아픈 일, 시련, 역경, 오해, 누명, 고통, 실패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역경, 고난, 시련이 너무 클 때 사람들은 ‘될 대로 되라.’하며 체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을 스스로 끝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한 인생의 모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 크리스천들은 역경, 시련, 실패, 흑암, 풍랑 등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부딪쳐 나가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특징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은 하루아침에 열 자녀와 재산을 다 잃었어도 굳건히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아들딸이 죽고 재산이 없어진 것이 운명의 장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임을 욥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간섭하시는데,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역경이 우연이겠습니까?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그래서 욥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기 23:10)
욥은 막연하지만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신 후에는 자기가 더 빛나는 정금같이 될 것을 고백했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해하기 어려운 답답함에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뜻을 가지고 이루고 계시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방이 나를 에워싸서 길이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길이 있습니다.
따라 합시다.
“내게는 길이 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주실 때도 홍해를 가르는 길을 먼저 예비하셨습니다.
스펄전 같은 위대한 목회자도 목회하다가 낙심하고 힘들어 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어떤 일로 낙심해 있는 상황에서 한 가정을 심방했는데, 그 집의 소 한 마리가 담 너머로 목을 쳐들고 있었답니다.
“집사님, 저 소가 왜 담 너머로 고래를 내밀고 있지요?”
“사방이 담장으로 막혀 있으니 고개를 쳐들어 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스펄전 목사님이 깨달았답니다.
‘소도 사방이 막히니 담 너머로 하늘과 세상을 바라보는구나. 맞아, 내 주변이 다 막혀 있어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위를 바라볼 수 있구나.’
전쟁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전쟁은 하늘의 전쟁입니다. 인공위성으로 판단해서 부셔버리는 전쟁이 가장 강력한 전쟁입니다.
참으로 귀한 길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어 주시는 길입니다. 홍해 길도 하나님께서 내어 주신 길이요, 요단강을 가르신 것도 하나님께서 내어 주신 길입니다.
설교 시간에 주시는 길도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길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길이 없어도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내가 그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길이 있음을 꿈에서라도 잊지 마시고 길이 막힌 곳에서도 주님과 함께 길을 찾아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한 어려움은 반드시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 내게 아픔이 있고 충격이 있어도 그것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고구마는 호박이나 수박만큼 크답니다. 고구마가 그렇게 큰 비결은 흙을 북돋우면서 호미 뒷면으로 고구마를 툭툭 치기 때문이랍니다. 어린 고구마를 호미로 툭툭 치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어린 고구마가 맞을 때 깜짝 깜짝 놀라서 그렇게 큰답니다. 툭툭 칠 때마다 크기 때문에 수박만하고 또 호박만하게 큰답니다.
사람도 시련이나 역경이 없으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이나 시련, 어려움이 있을 때 긴장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가기 때문에 큰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탄하고 잘 될 때도 감사해야 하고 겸손해야 하지만, 오히려 풍랑과 시련, 역경이 다가올 때 ‘아! 하나님께서 나를 더 잘 되게 하시려고 이 시련을 주시는구나.’하고 정면으로 부딪쳐 이기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이기는 힘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욥이 그 어려운 시련을 이긴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욥기 23장 12절과 13절에 욥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그의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 하시나니』
시편 119편 9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고난이 아무리 겹겹이 다가와도 말씀을 읽고 듣는 자는 그 말씀의 힘으로 반드시 이기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부자 중 한 사람은 록펠러일 것입니다.
그는 부자가 되어서 자기만 잘 먹고 산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많은 헌신을 했고 아름다운 교회를 많이 지은 그는 정말 값지게 산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한 때는 너무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첫사랑의 애인이 가난뱅이인 그를 떠나가기도 했습니다. 또 사업을 하다가 파산 직전에서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모든 것을 이기고 98세까지 장수하며 평안을 누린 것은 말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주일이 되면 항상 40분 전에 교회에 도착하여 예배 시간을 기다렸다가 앞자리에 앉아 말씀을 받고, 날마다 신문보다 성경을 먼저 읽었답니다. 그리고 90세가 넘어 시력이 약해지자 성경을 잘 읽는 사람을 구하여 날마다 성경을 읽게 하고 그것을 들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그 삶을 이겨나갔다고 합니다.
우리도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받을 때 우리 마음에 힘이 솟아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풍랑을 이길 능력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설교 준비를 하면서 마음을 참 많이 썼습니다.
제목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를 하고 나면 여자 분들이 제게 돌을 던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렇게 어려운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성령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오늘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가 말하는 것이 허락된 일이 없으니 율법에 기록된 대로 오직 복종할지니라. 혹 물을 것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어라.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이스크루인데, 보기 흉하다, 아름답지 못하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심하시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시다니. 복종한 하라고 하시다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열을 받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충격은 받아도 열은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들을 때 혹 이해가 되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달라도 ‘아멘’하는 것이 성도의 자세인 줄로 믿습니다.
두 주 전에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그때 참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유아 세례를 베푸는 시간에 한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고 하는데 그 아이가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유아 세례를 베풀 때는 아이의 엄마 아빠가 ‘아멘’을 하는데 그 아이도 ‘아멘’ 했습니다. 이제까지 유아 세례를 베풀면서 아멘 하는 아이는 처음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웃으셨을 것 같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그래, 맞아. 아멘!”하게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 말씀이 충격적이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열을 받거나 항의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7절을 보면,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잘 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설교를 듣고 화를 내며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요한복음 8장 59절에도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건 하나님 말씀이 아닌데 예수가 잘못 전한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돌로 치려하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해답을 요한복음 8장 4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난 마귀의 자녀다. 그래서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가슴이 없다.”
요한복음 8장 47절에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 하시는 것은 복 있는 증거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화가 나고 항의하고 싶다면 그것은 마귀의 자녀가 된 증거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화 있을진저, 독사의 자식들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화를 내고 항의하는 사람은 저주받을 마귀의 자녀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충격적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받아도 항의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힘들어도 묵묵히 순종합니다.
저는 창세기 22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백 세에 얻은 이삭은 그에게 너무 소중한 아이입니다. 저는 아이 셋을 기르면서 자식의 소중함을 알았지만 제 딸이 낳은 손자를 안았을 때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딸이 10일간 저의 집에 와 있을 때 아이가 울면 제가 달려가서 아이를 잠재웠습니다. 아이를 안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아기 잘도 잔다.”라고 하면 아이가 잤습니다. 아이가 잠이 들어도 아이를 내려놓기가 싫었습니다.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잠을 자고 있는데도 마냥 안고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애지중지 했겠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나이 백 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제가 집회 때 만난 분 중에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학교 교장선생님이시고 장로님이신 그분이 아버님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장로님의 아버님이 육십 세 때 장로님이 태어났는데, 아버님이 장로님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학교에 다닐 때까지 날마다 “이리 오너라.”라고 하셔서 팔베개를 해주셨답니다. 팔에 뼈밖에 없으신 아버님이 다 자란 아들에게 팔베개를 해 주시자면 얼마나 아프고 힘이 드셨겠습니까? 그 장로님이 “지금 생각하니 그것이 우리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육십 세에 낳은 아들도 그렇게 사랑스러운데, 백 세에 낳은 아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바쳐라.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바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번제는 양을 칼로 죽여 태우듯이 죽이고 태워서 사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씨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
그런데 어떻게 약속을 깨뜨리신단 말입니까? ‘이삭을 내게 바쳐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바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항의를 할 만한데도 항의하지 않고 충격은 받았지만 “예.”하고 아들, 그리고 사환과 함께 나귀에 장작을 싣고 갔습니다. 3일을 가다보니 한 산이 보였습니다. 그 산이 모리아 산일 것이라는 감을 잡은 아브라함은 사환은 거기에 있게 하고 이삭의 등에 짐을 지웠습니다. 아마 이삭은 그때 짐을 처음 져보았을 것입니다. 큰 부잣집의 아들이니 짐을 지는 일은 생각도 경험도 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이삭의 등에 짐을 지우고 아브라함은 칼과 불을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삭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하나님 앞에 번제할 어린 양은 없네요?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산 정상에 올라가서 장작을 쌓은 후에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애비가 미친 것이 아니다. 너와 네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너를 원하신다. 내가 너를 칼로 찌를 때 네가 도망갈 수도 있으니 너를 묶겠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밧줄로 묶어서 장작 위에 얹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일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항의하지 않고 양을 잡듯이 아들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시어 급히 막으셨습니다.
“아브라함, 아브라함.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라. 네가 네 독자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줄을 내가 알았다.”
바로 그때 아브라함은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번제로 드릴 양을 정말 준비해 놓으셨네.”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 네가 네 독자 이삭도 아끼지 않았으니 나도 네게 아낌없이 큰 복을 주리라.” 할렐루야!
여러분의 자녀가 소중하고, 남편과 아내가 소중하고, 기업이 소중해도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나는 못해요. 나는 하나님 말씀을 믿을 수 없어요. 나는 그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어요.”라고 항의했다면, 하나님의 귀한 축복이 없는 것은 물론 망했을 것입니다. 충격은 받았어도 화내지 않고 순종하니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이치에 맞지 않고 내 생각에 맞지 않고 내 이성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귀하고 복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55장 8절에서 9절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맞든 맞지 않든 우리의 생각보다 높기 때문에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말고 그 뜻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해하지 말고 그 뜻을 잘 분별해야 한다.”
로마서 12장 2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이 세대를 살지만 세대를 따라가면 안 됩니다. 세상 풍조를, 유행을 따라가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이 세상이 혼탁해질수록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오직 복종하라.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아이구, 하나님께서도 너무 하시다. 남자와 여자를 이렇게 차별하시다니.”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잘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일에 일하지 못하게 하셔서 돈을 벌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일에서 자유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에 고생했으니 주일에는 일을 놓고 일에서 자유를 얻어 편히 쉬라는 것입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주일에 함께 모여 가정의 행복을 찾고 온 가족이 손에 손을 잡고 하나님께 나아와 경배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복을 받으라고 주일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되게 하시기 위해 주일을 지키라는 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58장 13절, 14절에 보면, 주일을 지키면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시고 땅의 높은 곳에 올려주시고 야곱의 업으로 길러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일에 일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돈벌이를 막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잘 되게 해 주시기 위한 교훈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씀을 듣고 ‘십일조를 바치지 않아도 이렇게 어려운데 십일조까지 드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하면 안 됩니다.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리면 하나님께서도 그 집과 그 집의 창고를 구별하여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주시어 그 창고를 채워주시고 황충이나 강도나 큰 병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열방이 부러워하는 복된 집이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오해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손해 보게 하시는 것 같지만, 바로 이해하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알게 됩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는 말씀도 오해하면 화를 낼 일이지만, 바로 들으면 복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는데 여자를 먼저 짓지 않으시고 남자를 먼저 지으셨습니다. 토기장이가 큰 그릇도 만들고, 작은 그릇도 만들고, 아름다운 그릇도 만들고, 함부로 쓰는 그릇도 만듭니다. 그런데 작고 못생긴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아니,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어? 왜 나를 아름답게 만들지 않고 못생기게 만들었어? 이건 공평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릇은 토기장이에게 항의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 왜 여자를 먼저 짓지 않으시고 남자를 먼저 지으셨어요?”라고 항의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너는 아내를 사모하고 아내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자에게 “너는 일평생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 합시다.
“남편이 아내를 다스릴지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위계 질서입니다.
그렇다고 남편은 귀하고 여자는 천한 것이 아닙니다. 남자나 여자나 동등한 인격자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질서상 위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보혜사 성령님, 이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이신데, 세 위가 똑같이 동등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높고 낮음이 없이 똑같이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존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께서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의 몸을 입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천해지셨습니까? 오히려 만왕의 왕으로 높임 받게 되셨습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이 아내를 다스릴 때 아내가 낮아 집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을 섬기면 아내는 존귀한 여인, 아름다운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22절에도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반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은 마귀의 사람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3절에도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남편이 어리석고 아내가 유능해도 하나님께서는 남편을 머리로 삼으셨지, 아내를 머리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남편은 아내를 잘 다스리는 남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아내도 존귀한 여자가 됩니다. 손님이 집에 오면 남편이 “어서 오십시오. 여기에 앉으십시오. 여보, 차 한 잔 끓여 오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점심때가 되면 “여보,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네요. 식사 준비 좀 하지요.”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 가정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손님을 맞이하면서 남편에게 “여보, 점심 좀 준비해 주세요.”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남편도 흉하고 아내도 흉합니다.
지금은 맞벌이 시대라 조심스러운 말씀이지만, 성경은 남편이 아내를 다스릴 때 아름답게 보인다고 가르칩니다. 머리가 앞으로 가자고 하면 발이 앞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발이 앞으로 가지 않고 머리에게 뒤로 가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모든 교회는 위계 질서가 있어서 남자가 존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남자들도 여자들을 귀히 여겼습니다. 그렇게 어우러져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남존여비 사상을 갖고 있었던 분은 아닙니다. 바울도 여자를 귀히 여겼습니다. 로마서 16장 1절과 2절을 보면, 겐그레아 교회의 여 성도 뵈뵈를 얼마나 얼마나 칭찬하는지 모릅니다. 3절과 4절에서는 브리스가 부인을 칭찬합니다. 6절을 보면, 교회 일꾼 마리아를 귀히 여깁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1장 5절을 보면, 여자들도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언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교회에서 여자가 잠잠해야 하면 여자는 구역장도 못하고 교사도 못해서 교회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여자 성도들의 봉사로 아름답게 되고 부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고린도 교회 여 성도들이 지나치게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계시를 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여자들에게만 은사를 주신 것처럼 여자들이 교회를 휘어잡아 남자들은 주눅이 들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바울을 통해 “질서가 없어서 안 되겠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질서를 지키라.”라는 말씀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남자는 남자의 위치에서, 여자는 여자의 위치에서 질서를 지킬 때 가정도 복되고 교회도 복되는 것입니다.
여자들도 기도하고 교사로 구역장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도를 넘어서 남자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내도 가정의 소중한 존재이지만 남편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가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빨강 풍선이든, 노란 풍선이든, 파란 풍선이든, 검은 풍선이든 헬륨을 넣으면 둥둥 떠오릅니다.
오늘의 가정이 어려운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남편만 가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내도 가장이 될 수 있고, 남편만 호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내도 호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휴가를 갈 때도 온 가족이 함께 가지 않고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따로 가게 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수가 틀리면 이혼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는 한 몸인데 해서는 안 될 자존심 싸움을 하다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는 이혼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똑같이 자존심 싸움을 하면 결국 이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아내는 남편에게 주께 복종하듯 복종하고, 남편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에베소서 5:25)라는 말씀대로 목숨을 바쳐 아내를 사랑하면 그 가정이 이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목숨을 걸고 아내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절대로 가정이 흔들리지 않을 줄로 저는 확신합니다.
서울 강남에 사는 부부 1000쌍에게 ‘만일 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을 하겠느냐?’라는 설문 조사를 했더니, 70%가 ‘NO’라고 했답니다. 20%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인 우리는 “다시 결혼한다 해도 나는 지금의 나의 아내(남편)와 결혼할 것입니다.”라고 즉시 대답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입니까? 말씀대로 살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위한 TV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에 나온 한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가 어떤 글을 보고 설명하면 할머니가 그 글을 맞추는 게임이 있었답니다. 할아버지가 본 글이 ‘천생연분’이었답니다. 할아버지가 “당신과 나 사이.”라고 하니, 할머니가 “원수.”라고 했답니다. 할아버지가 흥분하여 “그것 말고, 네 글자.”라고 하니, 할머니가 “평생원수.”라고 대답했답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듣고 웃지만,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남편은 목숨을 걸고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자세를 지니면 정말 행복한 가정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그대로 가정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 디즈레일리는 행복한 부부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른 다섯 살에 열 두 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했는데, 30년간 결혼 생활을 한 후에 “나는 30년 간 아내와 생활하면서 아내 때문에 괴로워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내 때문에 날마다 행복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예쁘지도 않았고 로마나 헬라도 잘 모를 정도로 공부도 많이 하지 않은 부인이었답니다. 그런 아내와 함께 사는 그가 왜 그렇게 행복했는지 아십니까? 그의 아내가 그를 왕처럼 섬기고 위로하고 복종했기 때문이랍니다. 그를 그렇게 섬기는 아내를 그도 사랑하고 보호하며 고마워하고 중히 여겼답니다. 그러니 하루도 아픈 날이 없었던 것입니다.
서로 싸우는 부부는 남편이 자기 위치를 떠났던지 아내가 자기 위치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비롭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안 되는 것 같아도, 하나님 말씀이 합당하지 않은 것 같고 이치에 어긋난 것 같아도, 그대로 순종하면 더 잘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한국 교회, 그리고 세계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우리 모두의 가정이 말씀대로 되기를 축원합니다
한 마디 말씀을 더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알았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야. 바울의 개인 의견이야. 이것은 잘못된 것이야.”라고 항의할 사람이 고린도 교회에 있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쐐기를 박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을 통해 못을 박으셨습니다.
“이것은 나의 명령이다. 이 명령에 항의하지 말고 순종해라. 그러면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영적 이방인
고전14장 37절 ~ 40절 / 이규왕목사
어느 누구나 주변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 하나는 불편한 관계의 사람, 또 하나는 전혀 무관한 사람입니다.
한 하나님을 믿고, 한 교회를 출석하는 성도들은 비록 성이 다르고 사는 집이 다를 지라도 성도들은 서로 어떤 관계이어야 할까요?
물론 육신적으로는 남남임에 틀림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하게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은 육신의 가족보다 더 친밀한 영적인 가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서 ‘외인’이라는 말은 낯 설은 외국인이라는 뜻입니다. 또 ‘권속’이란 집에 속한 가족이라는 뜻으로 언제나 친밀한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지만 누구보다 먼저 믿음의 가족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갈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회는 교인들끼리 서로 사랑하지는 못할지언정 분쟁하고 비방하고 갈등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인 고린도 교회가 갖가지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한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마치 외국인을 만난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고 심지어 파벌을 형성하고 분쟁하였습니다.
왜 성령의 갖가지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끼리 마치 이방인처럼 거리를 두고 불신자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이유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1. 방언의 은사
우리가 때로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나라가 다르거나 지방만 달라도 서로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대화를 기피하기 쉽습니다.
이처럼 인간 간에도 대화가 쉽지 않다면 하물며 하나님과 인간과는 어떤 관계이고 얼마나 차이가 날까요?
하나님은 영원하신 창조주로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우리 인간은 정반대로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 아니라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의롭지 못한 죄인들입니다.
과연 그러한 하나님과 인간과 대화가 가능할까요?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며, 설령 가능할지라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과의 대화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인간과의 대화를 시도하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성경 여러 곳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대화를 요청하시는 말씀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요,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응답하실 것을 성경 여러 곳에 약속하였습니다.
(시 17:6)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구약 시대만이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신약 시대에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응답하시겠다고 성경에 약속하고 있습니다.
(요일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예수께서 이를 입증하시듯이 자주 하나님께 기도하셨으며, 또한 항상 기도해야 할 것을 명령하셨으며, 심지어 모범적인 기도문까지 가르쳐 주신 것이 지금 우리가 늘 암송하는 주기도문입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심지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살전 5:16-18)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 중심이지만 누가 진실한 믿음의 사람인가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 주는 증거가 바로 기도입니다.
물론 기도한다고 다 똑같은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응답받는 기도는 죄를 품고 기도하지 말아야 하고 욕심으로 구하지 말아야 하고 중언부언 구하지 말아야 하고 은밀하게 기도해야 할 것을 성경 여러 곳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람은 본래 언어가 하나이었기 때문에 어디서 누구와도 대화가 가능하였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단합하여 바벨탑이라는 거대한 탑을 쌓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더 이상 탑을 쌓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진노가 바로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의사소통을 막으셨기 때문에 바벨탑을 마무리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대화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 11:7-8)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 후 언어가 같은 사람들이 마을과 사회와 국가를 만들고 제각기 살아오는 동안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조상대대로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흩어져 살던 각 나라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행 1:9-11)[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과 약속을 따라 예루살렘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각 사람이 다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말세의 성령을 받았습니다.
물론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어느 사람들에게 임하셨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그 증거로 성령을 받은 각 사람이 지금까지 사용하던 자국어와 전혀 다른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행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의 주제인 방언입니다. 그러나 그 같은 방언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미 약속하신 것입니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의 은사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가 가능함을 보여주시는 증거가 바로 방언의 은사입니다.
2. 고린도 교회와 방언
본래 방언은 하나님과만 통하는 영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통역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방언을 하면서도, 방언을 들어도 그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 안에는 새 신자와 기 신자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공 예배 시간에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공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의아 해 하거나 아주 이상한 종교 집단으로 오해할 소지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으로 기도하면 무슨 기도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방언 기도가 무엇인지 영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볼 때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영락없이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고전 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 결과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동일한 교회를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지만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마치 외국인처럼 느껴지면서 상호간에 소통이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방언은 인간 간의 대화나 소통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한 도구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혼자서 할 것이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공적 예배시간에는 조심해야만 영적 이방인 취급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주신 방언은 각 나라에서 모여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각기 다른 나라의 말로 설교하게 하신 은사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는 사람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하나님과만 대화가 가능한 언어입니다.
[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언어의 장벽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 사람들이 자기 말로 기도할지라도 다 알아들으실 수 있으신 분인데 왜 하나님만이 알아들으실 수 있는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기도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방언 기도는 영은 영으로 통하며, 방언 기도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기도입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미 고전 12 장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가운데 방언의 은사는 방언 통역과 더불어 맨 마지막 은사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일부 성도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을 자랑하기 위해 공적 예배 시간에도 사람들이 듣도록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으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러한 고린도 교회에 성도들에게 방언의 은사도 귀하지만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전 14:1-2)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 이유는 방언의 은사는 개인의 영적 유익을 위해 주시는 은사이지만 예언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그러나 예언의 은사는 마치 점쟁이처럼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에서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인 것처럼, 예언의 은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인 성경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그래서 예언의 은사가 교회의 유익을 주는 은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는 방언의 은사가 필요하지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예언의 은사를 받아야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가 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3. 은사를 주신 이유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체험하게 하시는 목적은 개인의 영적 성장과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의 유익을 주기 위함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개인의 영적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라면 예언의 은사는 철저하게 개인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방언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 영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방언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증진시키는 유익이 있습니다.
예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 은사이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잠잠히 있지 말고 입을 열어 다른 사람에게 그 예언을 전하는 일을 더욱 힘써야 합니다.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이처럼 각기 주시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방언만이 아니라 예언의 은사를 차별하지 말고 사모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고전 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 14: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여기서 ‘사모한다’는 말은 열정적이다 라는 말로 좋은 것을 본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한다는 현재 능동형 동사로 성도들은 예언의 은사를 하나님께 열심히 구하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일사분란한 질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도 역시 하나님의 질서를 잘 유지해야 할 것을 오늘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1) 방언의 질서
정해진 공적 예배 시간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숫자는 두 세명으로 줄이고 순서를 따라 차례대로 하고 반드시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고 통역하는 사람을 시켜 통역하여 다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전 14: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 예언의 질서
예언은 정해진 공예배 시간에 두 번 이상 예언을 하지 말게 하고 반드시 차례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 날과 달리 당시에는 신약이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계시하실 때 특정인을 예언자로 세워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날에는 예언 중에 예언인 성경을 다 읽고 배우는 공부부터 잘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고전 14:31-33]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성령이 주시는 은사는 어느 것 하나도 귀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귀한 은사가 더욱 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 은사를 받았든지 하나님의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어떤 은사를 받았든지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전 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기도는 영적인 호흡으로 필수적인 것이라면 그 기도가 일방적인 독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에 까지 이르는 깊은 기도를 원하거든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설령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낙심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보다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기 위해 열심히 성경을 읽음으로 부분적으로 성경을 보지 말고 총체적으로 성경을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은 다른 사람에게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의 지식은 전해 줄 수 있는지 모르지만 믿음까지 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내가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과 예언의 은사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예언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고전 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그러나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면 교만하지 말고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교회의 덕을 위해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교회의 질서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14: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정작 교회 안에서는 이방인처럼 이상한 사람처럼 취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 중 누가 더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내게 합당한 은사를 주시기를 구하여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성령의 은사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방언의 은사를 유치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되지 말고,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만하거나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영적인 이방인도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간혹 외국인을 만나면 낯선 느낌이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얼굴 모습이나 음식 문화에 차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언어가 다르게 때문에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교회를 다니지만 다른 교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마치 외국인처럼 영적으로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고서도 교회 안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사람이 바로 오늘 설교 제목처럼 성령의 은사를 받은 영적 이방인입니다.
만일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교회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영적으로 교만하여 절제하지 못하고 자기를 앞세우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니라 성령을 거역하는 삶이고, 성령을 근심케 하는 영적 이방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영적으로 바로 서 있는지를 항상 점검하기 위해 성경을 열심히 읽고 성경 말씀에 항상 순종하는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전 14: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고전 14: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우리가 어떤 성령의 은사를 받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겸손한 자세로 교회의 덕을 세우고, 다른 성도들과 화합과 소통을 잘 이루어 영적인 가족이 되어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이유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의 책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