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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심판이 아니라 구원!>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이 오늘따라 왜 이리 크고 은혜롭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지 않은 인생길 돌아보면 어찌 그리 굽이굽이 수치스런 죄와 타락과 방황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이런 나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엄청나게 큰 보속과 무시무시한 처벌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이런 제 생각은 사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있던 하느님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우상 숭배 앞에 크게 진노하시며 벌주시는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이 그리도 두려웠습니다.
정해진 율법 조항에 의거해서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나 악행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시는 징벌의 하느님 얼굴을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내내 입에 달고 다니신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
뜻밖에도 이 땅에 강림하신 메시아는 심판자나 처벌자의 모습이 아니라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로 더없이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여행길의 절친한 동반자로,
끝도 없이 기다리고 용서하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심판하실 권한을 주신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권한은 전혀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용서와 자비, 희생과 사랑의 실천을 통한 인류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분을 향해 기쁜 얼굴로 다가서는 이들에게는 모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
끝끝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그분의 가르침을 멀리 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빛을 등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단죄와 심판의 도마 위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 때문이라는 사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도 제 삶 안에 길게 드리워진 짙은 죄의 뿌리를 슬픈 얼굴로 바라봅니다.
밥 먹듯이 지어온 숱한 죄와 과오 속에 살아온 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죄질이나 죄 값은 뒷전이신 예수님,
오직 우리들의 해방, 구원,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이 지극하신 자비의 예수님 때문에
오늘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서야겠습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모두 구원될 것입니다.
우리 죄가 크지만 하느님 자비는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단죄하고 속박하지 않는 한
결국 우리는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볼 수 있어야 믿을 수 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입니다.
그러니까 달리 표현하면 언성을 높이셨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오늘 왜 언성을 높이셨을까요?
아마 사람들이 당신을 좀체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제발 좀 믿어달라고 호소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이나 “나를 믿는 사람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는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저를 믿을 분이 얼마나 될까요?
저와 같이 살고 있는 형제들 중에 저를 믿는 형제는 얼마나 될까요?
아마 거의 없을 것이고 가까이 살수록 믿는 사람은 더 없을 겁니다.
왜?
믿을 수 없는 숱한 저의 약함과 거짓과 허위를 봤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못 믿을 사람은 저뿐이 아닐 것입니다.
저만 특히 약하고, 거짓되고, 허위에 가득한 게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다 도둑놈 같고 그래서 믿을 놈 하나 없다고 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믿을 놈 하나도 없습니다.
더욱이 하느님처럼 믿을만한 사람을 찾는다면 믿을 사람 하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면,
그 사람 개인만 놓고 보면 믿을 수 없고 그 사람을 보내신 하느님을 봐야 믿을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 사람이 단독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내셨기에 나와 함께 있고,
그래서 그와 나 모두 하느님 안에, 하느님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있는 그를 보고,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을 볼 때 믿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보고 믿는 것인데, 이 말은 보고 나서야 믿는다기보다는 보기에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분을 믿는 거라고 말씀하신 다음,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 너머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그 사람을 믿을 수 있고,
인성 너머 신성을 볼 수 있어야 주님도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을 보고서 보내신 분을 보고, 보내신 분을 믿기에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믿는다면
이제 주님을 보내신 분의 뜻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둠 속에 머물지 않음이요, 빛 속에 머묾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어둠이란 무엇이고, 어둠 속에 머물지 않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종종 세상 돌아가는 것에 깜깜하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때의 깜깜함, 어둠은 모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것은 조금 몰라도 됩니다.
그것을 모른다고 비구원 상태인 것은 아닙니다.
나는 왜 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세상에는 악과 고통이 있으며, 불행이 있는지,
이런 것들을 모르는 것이 진짜 비구원입니다.
이를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무명(無明)의 상태에 있는 것인데,
무명을 깨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구원이며,
동녘에 어둠을 깨고 빛이 솟아오르듯 어둠 속 무명 상태의 우리에게 빛으로 오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 형제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스포츠 세계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고 합니다.
“스타는 감독으로 성공하기 어렵다.”
물론 스타로 이름을 알렸던 사람이 감독으로도 성공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명감독의 경우는 대부분이 선수 시절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스타일을 선수들이 따르도록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의 스타일이란 무엇일까요?
정말로 잘했던 예전의 자기 모습인 것이지요.
실력이 뛰어난 사람의 경우는 그 방법을 잘 따라오겠지만, 평범하거나 또 그보다 못한 사람의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하면서 좌절하고 포기하게 되지요.
하지만 선수 시절에 주목받지 못했던 감독은
선수 개개인에 맞는 방법을 찾기 때문에 감독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맞추느냐, 아니면 상대방에게 맞추느냐에 따라 명감독과 형편없는 감독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맡은 선수들의 역량을 키워줄 수도 또 반대로 억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 사랑하며 잘 살기를 원하시지요.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떨어트리고 대신 특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 살아남아서 이 세상을 더욱 더 발전시키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능력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이 세상을 잘 살고 있으며, 죄가 있든 없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차별하고,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제외하면서 판단하고 단죄할까요?
이 모습이 분명 주님의 모습은 아닌데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심판하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심판만 하려고 합니다.
이 모습이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의 믿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의 모습은 아닐까요?
결국 이 모습은 스스로를 단죄하게 되어, 먼 훗날 하느님의 판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내가 기준이 아닌 ‘너’에 기준을 둘 때입니다.
그리고 ‘나’에서 벗어나 내 이웃을 향한 마음이 가득할 때,
그 마음을 통해 구원을 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마치 향수를 뿌리는 일과 같다.
이때 당신에게도 몇 방울 묻는다.’
우리 모두가 좋은 향기를 품는, 즉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 품는 거룩한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겠습니다.
- 인천교구 / 안식년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혼자 하는 것이 가장 안 좋다>
1800년대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의뢰하는 것도 의뢰 받는 것도 철저하게 배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어느 친구와 사냥을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친구가 수렁에 빠져 “살려 달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친구의 몸이 서서히 수렁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본 비스마르크는 달려가서 그의 머리에다가 총구를 겨냥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자네를 건지려고 내 손을 내밀었다가는 나까지 빠져 죽을 것이네.
그렇다고 그냥 두게 되면 무한한 고생을 하겠는데, 이는 친구의 도리가 아닐 터이니, 자네의 고생을 덜어 주겠네.
저승에 가서도 네 우정을 잊지 말게나.”
비스마르크는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본 그 친구는 너무도 당황하고 괘씸하게 생각한 나머지 사력을 다해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다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친구는 그 늪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화를 내며 항의를 하는 친구에게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총은 자네의 머리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자네의 생각이었네.”
비스마르크의 친구는 수렁에서 빠져나온 것은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에 혼자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데일 카네기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현실에서는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도록 창조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서로 돕고 보완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상처를 받는 이유가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면 고통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상처주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처받지 않을 준비가 된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사라지고 나면 자신 혼자 남을 것입니다.
아무도 상처주지 않겠지만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상처를 감당할지라도 주위에 협조자가 있는 것이 낫습니까?
그러면 상처받는 것을 견디는 편이 혼자가 되는 것보다 항상 낫다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교회에게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고 이르십니다.
당신이 직접 따로 세워도 되지만 ‘교회를 통하여’ 두 사람을 세웁니다.
이는 하느님께서도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위해 심장이 꿰뚫려야 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힘들더라도 ‘함께’ 할 협조자가 있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 따로 세우시지 않고 바르나바와 사울, 둘을 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둘씩 짝지어서 보내셨습니다.
절대 혼자 무엇을 하려고 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의해 함께 하도록 선택된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마음은 어때야 했을까요?
아무리 함께 지내는 것이 쉽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맺어주셨으니 이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믿고 끝까지 함께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내 인생이 얼마나 많은 동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파트너로 인해 상처받는 것보다 파트너 때문에 도움을 받는 것이 항상 더 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리옷 유다까지도 당신 파트너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이 누가 되었건 혼자보다는 함께 하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나는 사랑이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으로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기에 구원의 도구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 받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구원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언제나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묶인 매듭을 풀어주십니다.
고해성사가 심판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다시는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과거를 치유시켜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워 줍니다.
그럼에도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 무지의 어둠, 불신의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을 비추는 빛으로써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에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안 하고는 우리의 자유 의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마땅히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물러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요한 12,35)
그러므로 빛이 우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로 굳건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언제든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생명을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심판을 원치 않으시고 사랑을 원하셨다면
우리도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도 어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한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30)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것은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하느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하느님을 보려면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냥 '내가 바로 하느님이다.' 라고 선언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복잡한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아마도 이것은 삼위일체와 관련된 표현일 것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지만, 아버지와 아드님으로 분명히 구분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라는 신앙고백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꿔서 복음서에 기록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요한 1,1)
라는 신앙고백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8)이라는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이 끝부분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설명하고 고백하는 내용이 기본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뒤의 14장에 다시 나옵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14,8-9)
이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2,46)
'빛'은 생명을 뜻하고, '어둠'은 죽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어둠 속에 머무르는 것은 영원히 멸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복음서 머리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4)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요한 1,9)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
(요한 12,35-36)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이라는 말은
원래는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신 시간을 뜻하는 말이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 죽은 다음에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 앞에서 받게 되는 심판을 죽은 뒤의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심판은 이미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요한 12,47-48)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는 것이고,
그 구원을 거부하면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는 그 선택이 바로 심판입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그를 심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사는지, 아니면 안 받아들이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지,
지금의 선택과 삶 자체가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날'은 언제인지 모르는 먼 훗날에 닥치는 날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어서 지금도 진행 중인 날이고, 언젠가 마무리되고 완성되는 날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날은 '지금'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자신의 선택을 최종적으로 확인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내용이 지금 당장에는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죽으면 그만이다." 라고 생각하고, 지금 당장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싶은 대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죽어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이 있고, 지금의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 또 다른 인생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인생이란, 죽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면
지금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말씀을 들어 바라보는 사랑의 눈길>
요즈음처럼 바쁜 세상에서는 서로의 얼굴을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은 드물고 어렵다.
어쩌다 머리 모양이 바뀐다든가, 색다른 화장품을 쓴다든가, 옷차림이 바뀐 경우가 아니라면 얼굴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헤아리지를 못한다.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이 멀어져 자신에게로만 가까이 가서 머물러버리는 생활이 되어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면 굳어 있고 어두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웃을만하지도 않은 사소한 일에도 미소를 짓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기쁨을 주는 밝은 얼굴의 사람도 있다.
그 차이는 왜 그럴까?
그 누구도 불행하고 슬프게 살고 싶지는 않겠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어둠 속에 자신을 맡겨버리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밝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이 그에 대한 열쇠를 준다.
곧 살아가는 모습이 어두운 까닭은 하느님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말씀하시면서 ‘보는 것’을 다시 거듭 언급하시는 까닭은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시다.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것이 이를 암시해 준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나의 영혼 상태를 반영하는 얼굴이 어둡고 굳어지는 까닭은 마음의 어둠 때문인데,
이 어둠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듣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소리와 기준을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이나 사고방식, 불평불만, 부정적인 사고방식, 냉소적인 태도, 완고한 마음으로 꽉 차 있는 마음자리에는 말씀은 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듣는다는 뜻이다.
이는 빈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의 약함과 죄스런 모습과 가난한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여전히 서성대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마음에서부터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자신을 말씀에 맡기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시도록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우리의 완고한 마음, 닫힌 마음 때문에 실직해버리신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다.
이제 그분의 말씀이 나의 삶을 마음대로 다루도록 맡김으로써 영혼의 어두움은 차츰 걷히게 될 것이다.
말씀에 내 자신을 맡기지 않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 단죄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저 듣기만 하고 내맡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분과 눈길을 맞추고 그분을 느끼고 이끌어주시는 대로 손발을 움직이는 바로 이것이 신앙이다.
이렇게 우리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얼굴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교 성소는 ‘기쁨’이다.
나의 생각, 사고방식, 기준을 버리고 말씀을 마음으로 들으며 말씀에 자신을 맡기고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임으로써 어둠의 그늘을 벗어나도록 하자.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사랑이요 빛이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서로의 얼굴을 사랑으로 바라보도록 하자.
이제는 그간의 속사정, 속마음은 헤아려보지 않고,
내가 죽어 마음으로 경청하는 사랑 없이 겉치레 인사로 ‘얼굴 좋아졌다’고 말하지 말자.
말씀을 듣고 되새겨 그 애정 깊은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자!
- 작은 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삶의 좌표 - 주님과 함께하는 삶>
묵상 중 언뜻 떠오른 주제는 '삶의 좌표'였습니다.
과연 나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의미있는 참 나의 삶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참 복받은 내적 부요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의 좌표'인 교회의 보물들인 무수한 성인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성녀들의 기념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마음이 새롭습니다.
'아, 사람이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우리 삶의 좌표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성인들입니다.
제가 성인성녀들의 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우선 확인하는 것이
생몰(生沒)연대요 성인들이 산 햇수와 제 나이와의 비교입니다.
우선 모든 성인성녀들이 예외없이 '죽었다'는 평범 자명한 사실이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을 통해 내 삶의 좌표를 새로이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기념하는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1380년까지 사셨으니
지금부터 약 630년 전 분이며 산 햇수는 33세 예수님과 똑같습니다.
지상 나이는 33년 짧은 햇수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고 계신 성녀입니다.
성덕의 잣대는 '얼마나'의 산 햇수가 아니라,
'어떻게' 주님과 함께, 주님과 하나되어 살아있는가에 있음을 봅니다.
주님과 함께 하나되어 살 때 비로소 시공을 초월한 지금 여기서 이미 영원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 뒤 안산시 단원구에서 '치유공간 이웃'을 운영하고 있는 정혜신, 이명수 부부의 특강에서 몇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나는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극복이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트라우마는 옛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판이 다 깨진 상처이기 때문에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극복이나 치료가 아니라, 우리는 '이 시간을 통과한다.'라 말합니다.
'치유공간 이웃'에서의 치유의 기본원리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종교 영역에 계신 분들이 현장에서 '엄마' 역할을 해주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삶의 진리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 이 시간을 통과합니다.
바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끊임없이 이 시간을 통과하면서 치유되고 변형되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우리의 엄마 같은 역할을 해 주시는 고마운 분이 주님이신 성령입니다.
오늘 복음과 말씀에서도 이런 진리가 잘 드러납니다.
어제 복음 마지막 구절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10,30).' 였습니다.
아버지께 파견 받아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되어 사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다음 복음 말씀도 이를 분명히 합니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요한 12,49-50)
우리 삶의 좌표 중의 좌표가 이런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파견 받은 우리들 역시
삶의 좌표인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과 하나되어 살 때
비로소 충만한 삶, 영원한 삶, 참 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날마다 여기 지금 이 시간을 통과하며 파스카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독서에서도 주인공은 바르나바와 사울이 아니라 주님의 성령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에 파견 받아 성령과 함께 성령 따라 순종의 삶을 사는 자유인 바르나바와 사울입니다.
사도행전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셀레우키아로 내려간 다음,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성령따라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 때 비로소 행복한 자유인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세상의 빛으로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ㄴ)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사도행전이 이제 전환점을 맞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이제 이방인에 대한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바오로 사도가 제1차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사도행전 후반부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과 마지막에 그가 수인으로서 로마에 도착하는 것까지를 전해 줍니다.
그 선교 활동의 중심에 있는 것은 바오로 사도가 아니라
점점 자라나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사도행전이 바오로 사도의 죽음이나 순교로 마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던 로마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지,
바오로 사도의 전기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 어느 부분에도 바오로 사도가 어디서 어떻게 순교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파견을 받은 사람이 바르나바와 바오로라는 사실보다
그들을 파견하신 분이 성령이시라는 점이 더 중요하게 강조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파견받은 이는 자기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명에 따라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파견을 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이 자기 말로 가득 찬 나머지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올 틈이 없다면,
아울러 자신이 전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한다면,
그는 하느님과는 무관한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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