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 없는
고요한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부산일보/오늘을 여는 詩』2023.10.10. -
‘익어가는 것’은 원만해지는 것이자 둥글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왜 둥근 형상에 이끌리는가? 그것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 둥근 형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씨앗이나 알도 둥근 형상이고, 별과 아기들도 둥글둥글 원형이다. 하여 익는다는 것은 태어난 그 자리, 곧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발로다. 순환을 통해 더 큰 원의 형상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들이 원의 형상이나 운동을 통해 제 존재의 신비를 뿜어내고 있듯이 익어가는 일로 원을 그려 제 존재의 의미를 풀어내고 싶은 것이다.
늙어가는 것은 무르익는 것이기에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이해인 시인도 그렇게 보고 있다. ‘익어가는 날들’이 ‘행복’할 수 있는 까닭은 우주적 율동에 맞추어 자신의 존재성이 성숙해지고 신의 섭리를 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와 이 세계가 한 몸으로 결합해 충만한 감각으로 돌게 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양식이다. 익음이야말로 이 세계를 사랑하는 일인 것이다. ‘가을’은 그런 사랑의 충전을 맛보게 하는 영혼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