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덕동 관음사를 찾아보다.
절이 대도시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다. 절이라면 으레 산 속에 있는 절을 생각하게 되어서일까. 대학을 다닐 때 토요일이면 수업이 끝나고 시내의 중심지인 중앙통과 동성로로 걸어갔다. 우리 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붉은 벽돌집이다. 마당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했고, 일주일 내내 수업 때문에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다가 토요일 오후면 해방감을 느낀다. 대구 백화점 앞에 이르면 생기가 넘쳐나고, 활기찬 분위기가 우리의 기분도 바꾸어 주었다.
시내로 나가는 이 길은 관음사 앞으로 지나친다. 나는 예전에 이 길을 걸으면서 보았던 관음사가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때의 느낌은 절집이긴 하나 일반의 절집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뜰안에 있던 아름드리 나무가 유난히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렇다고 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져 본 일도 없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10여 년 전에 장모님이 돌아가시자 이 절에서 49재를 지냈다. 그때의 주지 스님도 8순이 가까운 노 스님이셨다. 지금은 92세라고 하였다. 이 절의 보살님의 말씀이 큰 스님은 송광사에서 법명을 받고 60년 대에 이 절에 오셨다고 한다. 스님의 삶의 역사는 바로 이 절의 역사와 같은 역사이다. 그러니까 이 절은 조계종 사찰로서 전라도 송광사의 말사이다.
스님은 이속을 찾는 세속의 일에는 관심이 워낙 없으시어서 사세가 예전보다 못 하다고 했다. 불교 학생회라도 조직하여 운영하는 일은 다음 세대의 불자를 양성하는 것이라며 건의 했으나 스님은 일언지하에 불허했다고 했다. 절에서는 불심만 닦으면 되지 세속의 욕심을 가지고 와서야 되겠느냐가 이유였다고 했다. 사세를 키우는 일이 불교의 본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선지, 예전에 학교에 다닐 때 보았던 절은 제법 윤기가 흘렀다고 느껴졌는데, 지금은 왠지 퇴락하였다는 생각이다. 아하, 절 마당에 고사한 나무 때문일까. 절문 양 옆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서 있었어 절 마당을 뒤덮고 있었는데, 옛 그 나무인가? 나무도 세월을 이기지 못해 숨길이 끊겼나 보다. 가지가 싹아져 내렸고, 고사한 둥치는 말라비틀어져 볼 품 없는 나무 기둥으로만 보인다.
금년에는 장인-장모님의 제사를 이 절에서 모시기로 하였다. 큰 스님도 거동이 불편하시어서 손자뻘 되는 젊은 스님이 예불을 주재하셨다. 염불과 목탁 소리에 맞추어 앉았다. 일어서고, 다시 엎드려 절을 올리려니 몸이 예전처럼 부드럽지가 않다. 몇 년만 지나면 나도 장모님이 떠나갈 실 때의 나이가 되겠구나.
이 절의 큰 스님이신 원명(元明)스님은 년세가 아흔 둘이어서 휠체어로 거둥하신다. 나는 큰 스님이 걸어오신 승려의 길이 불교역사와도 관계가 있으리라 싶어 어려움 말씀을 얻었다.
1. 예전에는 스님이 되려면 어떤 길이 있었습니까?
대한불교 조계종에 단일계단이 형성되기 전에는 각 단위 사찰별로 스님께 출가를 하고 거기서 행자 생활을 하면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행자생활을 보통 일 년 정도 했는데 길게는 몇 년씩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중이 되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은사스님께서 사미계를 주시면 구족계는 큰절에 모여서 한꺼번에 받고 비구가 되었습니다.
2. 큰스님께서는 어떻게 하여 스님이 되셨습니까?
어릴 때 속가 집이 김천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는데 속가 어머니께서 지극히 기도하고 절에 열심히 다니셨으며 저의 은사이신 구산스님께서 김천 청암사 수도 암에 사시면서 서울 다녀오시는 길에 속가 집에 가끔 들리셨는데 그때 스님을 뵙고 스님을 따라 수도 암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습니다.그 당시 속가 집에는 여러 스님들이 다녀 가시곤 했지요.
3. 스님은 어느 절로 출가 하셨고, 어떤 길을 밟아서 스님이 되었습니까?
은사스님을 따라 김천 청암사 수도 암으로 출가 하였고 수도 암에서의 생활은 대중스님들의 가르침을 받아 가마솥에 불도 지피고 밥도 짓고 천수경, 반야심경 등 경도 외우기 시작했지요. 먹을 것이 없는 때라 무를 푹 삶아 간장을 넣어 중간 토막은 어른스님 드리고 꼬마 중인 나는 무 꽁지만 먹어도 꿀맛 이였든 시절이 있었지요.
노스님이신 효봉스님을 뵈러 송광사에 은사스님을 따라 갔다가 효봉 스님께서 호통을 치시며 때 거리도 없는 절에 입 하나가 얼마나 무서운데 저런 놈을 데리고 왔다고 야단을 치셨어요.그래도 은사스님은 나를 송광사에 두고 가시고 그때부터 콧물 눈물 흘리면서 여름이면 땀에져려 옷이 찢어지고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은 가마솥에 밥을 짓고 열심히 살다가보니 효봉스님께서 보시고 중 생활 잘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하시며 찢어진 옷을 직접 꿰매 주셨습니다. 그 후 송광사에서 노스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효봉스님이 해인사 가야총림 방장으로 추대되어 해인사로 떠나시게 되어 저도 따라서 해인사에 갔고 거기서 구족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4. 스님이 출가할 당시의 승려 생활이 어떠하였으며, 그때와 비교하여 지금은 어떠합니까?
예전에는 스님 생활이 따로 없었어요.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같이 채마밭 일구고 사중에서 배려 해주면 공부라도 할 수 있고
내 한입 건사하기가 속가나 절집이나 다들 힘들어서 지금 하고는 아주 다른 시절에 살았죠.
대중이 함께 모여서 살고, 그 대중의 힘으로 공부도 하고 중노릇도 익히는 그런 시절이었고,
지금은 다들 나이가 들어서 출가해서 절집으로 들어오니 자신의 생각과 생활 습관이 버려지지 않아요.
우리는 어려서 절에 들어와서 어른들이 시키는 데로 하고 살았는데 요즘 젊은 수좌들은 머리는 좋지만 수행을 이론으로 받아 들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5. 관음사 주지 스님으로는 언제 오셨으며, 예전의 신도와 요즘의 신도는 차이점이 있습니까?
관음사 주지로는 1967년 6월 달에 신도님들의 요청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관음사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일본사람들이 떠나고 적산가옥으로 남아 있던 사찰이니 뭐 남아 있는게 있었겠습니까. 예전 신도님들은 참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절에 다니셨어요.
팔공산 갓바위를 밤에 기도 하러 올라가는 신도님들이 쌀을 한말 머리에 이고 가다가 너무 힘들어서 쉴 때도 머리에서 내려놓지를 않았어요. 이고 가던 쌀이 바닥에 닿으면 올라가던 산길을 다시 내려와서 깨끗하고 좋은 공양미로 다시 이고 가는 정성으로 기도하고 절에 다녔어요.
그런데 요즘 신도들은 다들 계산적이라서 내가 이만큼 공양 올리고 기도 하는데 왜 그만큼의 가피는 없는지 계산합니다.
어떤 기도를 하면 더 큰 영험을 얻을지를 계산해요.
그건 참다운 종교생활이라고 할 수 없지요.
6. 요즘의 젊은 스님은 예전과 비교하여 어떠합니까?
요즘 젊은 스님들은 다 개인주의입니다.
대중이 어울려서 같이 공부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수행해야 하는데 어릴 때부터 혼자 자라서 출가해서 수행자가 되어서도 혼자 삽니다.
참으로 마음으로 홀로 서 있는 것과 개인주의는 다릅니다.
人天의 스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 다스리는 법도 몰라서 어떻게 스승 노릇을 할려고 하는지, 물론 모든 수행자들이 부족하고 완성되지 못했기에 수행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예전에 부처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어른 스님들께 순종하며 살던 우리세대와 지금의 젊은 스님들은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스님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첫댓글 멋진 인터뷰입니다.
스님의 인생과 철학을 느끼게 됩니다.
문인에 대한 인터뷰는 그의 문학에 대한 이해도 높여주지만
뒷날 사료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게 느껴집니다.
회장님께서 제 글을 읽어주시고, 멋진 댓글도 달아주시니 힘이 납니다.
지난번의 배를 묶어둔 바위 전설은 제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져보면 신화학이 적용되는 이런 전설이 아주 많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산의 산신을 찾아보고 있는데, 우리의 본래 산신은 여신이라는 확신이 굳어갑니다.
이 선생님의 이 작품을 읽으니 "세상이 변하면서 인심도 변해갔다"고 한 어느 작가의 말이 문득 생각납니다.
어쩌겠습니까, 다 시대의 흐름인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