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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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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동영상 스크랩 일본인마저 울린 45분짜리 `안중근` 영상
heavens 추천 2 조회 559 14.06.14 10:0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일본인마저 울린 45분짜리 '안중근' 영상

안중근 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 26일 도쿄서 첫 안중근 추도식 열어

 

안중근 '장군'의 104주기 추도식이 일본에서 비밀리에, 하지만 공개적으로 열렸다.

나는 엉겁결에 안중근 추도식 홍보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책임이 막중해졌다. 우선 많이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무서웠다.

얼마나 많이 봤던가. 나는 지난 8년 동안 매년 8월 15일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일어났던 충돌을 생생하게 경험해왔다. '도쿄에서 처음 열리는 안중근 추도식'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폭력이 난무하는 충돌을 먼저 떠올렸다.

 

 

 

안중근 추도식을 도쿄에서 열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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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6일 도쿄 한국YMCA 지하 강당에서 열린 안중근 장군 104주기 추도식
ⓒ 박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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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미완성 걸작 '동양평화론'은 충돌을 원치 않는다. 안중근, 그는 어디까지나 중국과 조선과 일본의 운명공동체를 꿈꿨던 이상론자이면서 또한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한국과 일본 모두 공부가 부족하다. 한국에서는 그를 침략주의 야욕에 불타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민족의 영웅으로만, 일본에서는 초대 총리대신을 암살한 테러리스트로만 받아들인다.

둘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컸다. 때문에 외부에, 이를 테면 일본 매스컴에 추도식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리는 순간 충돌은 쉽사리 짐작됐다.

아마도 2월 중순이었을 게다. 안중근 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아래 청년아카데미) 정광일 대표의 "안중근 장군 추도식을 도쿄에서 열자"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이 사람 제정신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즈음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정기국회에서 "안중근은 당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을 살해해 사형을 받은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테러리스트라는 말만 들어가 있지 않을 뿐, 저 표현에는 안중근에 대한 아베의 인식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그 어느 때보다 걱정되는 지금, 안중근 추도식을 도쿄 한복판에서 연다는 것은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걸 전제로 한 행위나 다름 없었다.

그때 정 대표가 한 말은 무척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여는 것이다. 안중근 정신은 일본인들까지 감화 시킬 정도로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는 진정한 동양의 평화를 꿈꾼 성인이다. 지금 한국·중국·일본의 상황을 봐라. 지금이야말로 안중근 정신을 되새겨 한중일 삼국이 주도하는 동양평화를 논해야 할 시기다."

그러면서 정 대표는 45분짜리 동영상을 소개했다. 그 동영상은 1995년 7월 일본 공중파에서 방영된 '슬픈 테러리스트의 진실'이었다. 이 방송을 본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전율을 느꼈다.

"이 동영상 내용이 일본 교과서에 실려야"



'20년 전의 일본 방송국은 이 정도로 대단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이 방송을 추도식이라는 이름을 빌려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영상의 내용은 엄청났다. 지금까지 관성적으로 안중근 '의사'라 불렀던 내가 '장군'으로 부르게 된 것도 전적으로 이 방송 덕분이었으니까.

동영상을 본 뒤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고, 그 눈물의 의미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하나 둘씩 사람들이 모였고 알게 모르게, 그러니까 '비밀리에' 모든 준비가 진행됐다. 불필요한 충돌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14년 3월 26일 도쿄 한국YMCA 지하 강당에서 안중근 장군 순국 104주기 기념 추도식이 100여 명의 총련계·민단계·뉴커머·일본인 전부를 아우르는 가운데 개최됐다.

식순은 간단했다. 개인 묵념과 '슬픈 테러리스트의 진실' 상영 그리고 청년아카데미가 제정한 안중근 평화상의 시상 및 저녁식사가 전부였다. 어떻게 보면 초라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도식 준비위원회 사람들은 영상의 힘을 믿었고 그것은 명백히 증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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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6일 도쿄 한국YMCA 지하 강당에서 열린 안중근 104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사람들
ⓒ 박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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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 흐르는 동안 객석에서는 끊임없는 탄성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재일동포나 한국인들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일본인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별다르지 않았다.

추도식에 참석한 다지마 미야코씨는 "추도식이라는 말은 듣지 못하고 좋은 공부가 있다는 말만 듣고 왔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공부가 됐다"라면서 "너무나 가슴 아픈 역사를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교과서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이와사키 겐이치씨는 "이런 내용을 일본 중·고교 교과서에 반드시 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안중근은 재평가돼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벌써부터 2015년 3월 26일이 기다려진다

이런 마음이 통했는지 청년아카데미 정광일 대표는 마지막 인사말을 통해 "안중근 장군이 돌아가신 3월 26일을, 그의 유지를 받들어 '동양평화 기원의 날'로 제정하고 싶다"라고 말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이 박수는 진심이었던 것 같다. 추도식이 끝난 뒤 수많은 참가자들이 사회를 본 내게 이구동성으로 "많은 공부를 했다"라며 "앞으로도 매년 이 행사를 제발 열어 달라"라고 말했으니까.

안중근 장군은 물론 한일간의 근현대사에 관심조차 없었다는 젊은 여성 유학생의 감상도 인상적이었다.

"(내가) 이런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놀라웠다.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추도식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올려다본 밤하늘은 놀랍도록 청아했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내년에는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해야 겠다고. 안중근 장군, 당신이 마지막까지 그 어떠한 두려움 없이 당당했던 것처럼.

내년 3월 26일 '동아시아의 평화'를 기원하는 이들은 이 자리에 다시 모일 것이다. 1년 후 오늘이 벌써부터 들뜨고 설렌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73627&PAGE_CD=N0004&CMPT_CD=E0018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 자녀 분들에 대한 질문입니다!

 

며칠전에 서세원 감독이 만든 유오성 주연의 영화 '도마 안중근' 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마지막에 안중근 의사 아드님이 독이 든 카라멜을 먹고

쓰러지고 자막이 올라오는데

'안중근의 아들 9살에 죽다' 라고 나오더군요.

 

그리고 백범일지를 읽어보니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 이 이토 히로부미의

후손을 찾아 부친의 죄를 빌고 조선 총독의 아들임을 자처했다고 해서

김구 선생님이 분개해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너무 궁금하여 안중근 의사 자서전을 구입하여 읽어보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김아려 여사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고 하시는데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질문 들어갑니다.

 

1. 안준생은 정말로 부친의 죄를 빌고 조선 총독의 아들임을 자처했는지?

 

2. 1번 질문이 사실이라면 그 후 안준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3. 안중근의 아들 중 한 명이 정말 9살에 독살당했습니까?

 

4. 안중근 의사의 자녀 2남 중 안준생이 장남입니까 차남입니까?

 

5. 만약 아드님이 독살당했다면 안준생은 왜 독살당하지 않았을까요?

 

6. 2남 1녀 중 따님은 누구이며, 그 후 어떻게 살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요?

 

이상 질문 마칩니다.

자세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 자녀 분들의 삶

 

1. 안준생은 정말로 부친의 죄를 빌고 조선 총독의 아들임을 자처했는지?

이또 히로부미의 사망 30주기가 되는 1939년10월에 분기찌는 미나미 총독 시대의 조선에 건너갔다. 서울에서
그는 「우연히」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安俊生)을 만났다. 그들은 남산 박문사에서 「함께」 안중근·이또 두 사람의 혼백을 화해시키는 공양을 했다는 거다. 분기찌는 「안준생 군이 상해에서 왔는데 안중근의 위패를 갖고 박문사에 참례, 추선공양(追善供養‥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것)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초청, 만나게 되었다」고 썼다.   경성일보는 이 에피소드를 절묘한 선전 자료로 이용하고 있다. 10월 17일치 경성일보는 「아버지가 범한 죄 때문에 고투의 30년을 보냈던 안준생 군이 생애의 원망(願望)이었던 이또 공에의 사과를 토로한 지금 홍대(鴻大)한 성은에 감읍하면서……은수(恩讐)를 초월한 자식끼리 서로 손을 잡고 과거를 청산, 국가를 위한 봉사를 맹세했다」고 썼다. 이튿날의 경성일보는 두 사람의 교환공양 장면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불단을 향해 왼쪽엔 『공안중근영위(空安重根靈位)』라고 쓰여진 위패, 그 옆에는 이또 공의 사진이 서로 이야기를 하듯 놓여져 있었다. 남작(분기찌)과 안준생은 독경 속에서 다만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었다. 남작은 안중근씨의 영령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분향하는 것이었다. 안준생씨는 감격의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었다…」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의 보도 자세로 미루어 보아 이 공양 기사를 어느 정도 믿어야 할지는 의문스럽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이또 도시오씨가 두 소책자를 보여 준 뜻일 것이다.

하지만 안준생은 아버지 안중근의 행동에 대해서 일본을 돌아다니며 사죄를 빌었고 미나미 지로(南次郞)  당시 조선 총독(재임기간 1936~1942년)을 양아버지라 불렀다.

 


2. 1번 질문이 사실이라면 그 후 안준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준생은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상하이에서 마약밀매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후 홍콩에서 살다가 6ㆍ25 전쟁 중인 1951년 1월에 부산으로 피란 중 안준생은 병을 얻어 정말(丁抹ㆍ덴마크의 음역어) 병원선에 입원 치료를 하다가 1952년 11월 18일 45세를 일기로 병원선에서 별세하였다. 부산시 초량 4동 뒷산에 안장하였다가 포천의 천주교 공원묘지에 1971년 5월 12일 이장하였다.

안준생에게는 1남2녀가 있었는데,부인인 정옥녀 여사가 “조국이 통일되면 돌아오겠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은 1950년대 후반. 외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의사가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정옥녀 여사가 고국에 돌아온 것은 1987년. 한국 생활 중 간암 선고를 받고 보훈병원에서 투병하다 1991년에 사망했다. 외아들 웅호씨는 현재도 미국에서 의사로 있다. 외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외과 권위자로 활동했다. 최근 뇌출혈로 쓰러져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전해졌다.

 

3. 안중근의 아들 중 한 명이 정말 9살에 독살당했습니까?

의문의 죽음으로 독살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집안의 장남인 안중근이 사망하자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된 둘째 안정근(定根)은 어머니, 형의 유족, 자신의 가족, 공근의 가족, 여동생 성녀 등 권속 모두를 이끌고 망명을 선택한다. 러시아 연해주로 들어간 유가족은 1919년 중국 상하이로 옮겨갈 때까지 10년간 러시아에서 산다. 러시아 연해주 생활 중 일제의 추적으로 1911년 여름 안 의사의 장남인 안분도는 병(일제의 밀정에게 독살 당했다는 설도 있음)으로 12세에 세상을 뜬다.
 

4. 안중근 의사의 자녀 2남 중 안준생이 장남입니까 차남입니까?

 차남입니다. 장남은 안분도, 차남은 안준생, 장녀 안현생

 

5. 만약 아드님이 독살당했다면 안준생은 왜 독살당하지 않았을까요?

3번의 사건 이후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안중근 의사의 가족을 상하이로 이주시켜서 독살 당하지 않았습니다.

 

6. 2남 1녀 중 따님은 누구이며, 그 후 어떻게 살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요?

안중근의 맏딸 안현생은 상하이에서 황일청과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살았다. 1958년 주부생활이라는 잡지에 따르면 안현생은 중풍을 앓고 있으며 가톨릭 신자였다.  본명은 安 테레사라고 하며, 금년(1958년)에 쉰 일곱이 된 여사는 슬하에 딸 둘이 있을 뿐이다. 현재는 큰딸과 함께 살고 있다. 북아현동의 집은 본래 적산(敵産) 집이었는데 불하(拂下) 중이라고 한다. 따님 안현생은 수유리 애국지사 묘역에 있습니다.

 

[관련글]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13683&logId=288754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2&aid=0000060669&

http://blog.daum.net/donggook95/13121340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55787060&qb=7JWI7KSR6re87J6Q64W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1&pid=RznWUU5Y7tosstgeuvNssssssss-470790&sid=UzPtXXJvLBoAABTRBQY

 

안중근 의사는 순흥안씨 참판공파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형제는 첫째 안중근, 둘째 안정근, 셋째 안공근  딸 안성녀가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아시다시피 하얼빈 의거로 돌아가셨고, 이후 정근, 공근 두 형제는

 

형을 본받아 독립운동에 투신,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정근 씨는 중국 상해에서 별세 하시고, 안공근  씨는 중국 중경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생전에 부인 김아려와의 사이에서 첫째 안분도, 둘째 안준생, 셋째 안현생

 

이렇게 3명의 자식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 분도는 안중근 의사 사후 어린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일본 순사가 독살했다고도 합니다.)

 

둘째 준생씨는 아들 안웅호, 딸 안선호, 안연호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모진 고생을 하던 준생씨는 해방 후 귀국 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시던 중 44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십니다.

 

이에 아들 웅호씨는 18세의 나이로 수출입에 관련한 일에 종사를 하며 어머니를 봉양하던

 

중 1952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센프란시스코에서 누이들을 만나고,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시애틀대학과 캘리포니아 대학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 그 후 하너먼 대학 교수가 되어 현재 저명한 심장전문의로 활동 중이 십니다.

 

그의 어머니 정옥녀씨는 한국에 오래도록 사시다 잠시 미국에 자녀들과 함께 사셨지만

 

다시금 영구 귀국하셔서 사시 던 중 1992년 9월에 83세의 나이로 작고 하셨다고 합니다.

출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역사박사학위 논문 <안중근연구>- 백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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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4.06.14 10:11

    첫댓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왜곡하고 민족을 분열시키며 한국인들의 자랑스러운 기개와 정신들을 말살시키려는
    뉴라이트등의 마귀들의 일꾼들의 모임인 프리메이슨 집단들이 세뇌시키는 민족 말살정책을 옹호하는 무리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정신문화와 유산들을 알리고자 본 대한민국의 참된 역사의 발자취등을 담은 게시물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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