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완도 신지 송촌 지석영 | '백성=근본'…仁術濟民 꽃피우다
천연두 치료와 한글사용 등 주력
위생 예방의학서 '신학신설' 집필
당시 집터엔 시누대만이 생생히… | 입력시간 : 2008. 01.23. 00:00 |
include "/home/jnilbo/public_html/banner_include.php3"; ?> | 송촌이 5년여 동안 머문 신지도 송곡리 집터에는 새 집이 지어져 당시의 삶을 짐작케만 할 뿐이다. 송촌의 집 모퉁이에 자리잡은 시누대들은 지금도 바람따라 흔들리고 있다.(왼쪽 위) 송촌의 집 마당에서 바라본 바다.(오른쪽 위) |
| 온 마을을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듯 연신 흰 거품을 토해내고 있는 바다는 차가웠다. 수줍게 푸른 속살을 내밀고 있는 시누대는 때이른 추위에 솨르륵 솨르륵, 시린 이를 맞닥뜨리며 잔뜩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움츠리고 감출수록 시누대는 되레 자꾸만 일어서고 있었다. 자신도 자신을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시누대는 자꾸 고개부터 숙였다. 해풍의 객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녀석들은 무엇을 그리 급히 찾는 것인지 마을 어귀며, 집안 곳곳을 불풍나게 헤집어 놓더니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겠는지 애먼 시누대 잎사귀만 요란하게 흔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괜히 제 스스로가 무안해진 바다는 금방이라도 저만치 뒤로 물러날 태세였지만 객쩍은 해풍의 심술이 덜미를 잡는 탓에 처얼썩 처얼썩, 섬 귀퉁이만 긁적여댈 뿐이었다.
완도 신지도 송곡마을 북쪽 산 중턱에 위치한 집 마당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ㆍ1855~1935)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잊어서는 안됐지만 간절한 것도 아니었다. 천연두로 인해 피어보지도 못한 소중한 생명을 내놓아야 했던 어린 조카의 마지막 모습-. 그 어린 것이 희미해져 가는 호흡을 붙잡으며 감당하기 힘든 삶의 끈을 이어가느라 오죽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가슴부터 미어졌다. 조카의 죽음은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스며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스며있음으로써 일체를 이루고, 조카가 원하는 것도 자신을 통해 그냥 배어나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조카는 스며있으면서 기억되기를 원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바람이 닿지 않는다고 느낀 것인지 무시로 송촌의 가슴을 흔들며 일어나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게 만들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어린 조카의 죽음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계기로 천연두 예방법을 적극적으로 찾게 됐고, 2살배기 처남에게 우두접종을 실시해 성공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제 보다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접종법을 내놓고 이를 널리 보급하는데 애써야 했지만 유배인이라는 현실은 항상 '마음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해풍의 심술에서 놓인 바다가 멀찌감치 길을 비켜설 때 쯤이 돼서야 송촌은 방으로 들어가 붓을 잡았다. '마음의 반'이라도 서두르고 서둘러야 채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송촌의 아버지 지익룡은 서울 종로구에서 한방약국을 운영했다. 지익룡은 일찍부터 중국을 드나드는 역관을 통해 서양 의학자료를 접했고, 송촌 역시 의학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됐다. 고종 13년(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정부는 그해 6월 김기수를 수신사로 임명해 사절단 일행 75명을 일본에 보냈는데 이 일행 중에 송촌의 스승인 박영선이 있었다. 의무담당 서기로 동행한 박영선은 송촌이 평소부터 우두법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종두귀감(種痘龜鑑)'이란 책을 구입해 송촌에게 주었다.
하지만 송촌은 서양 의학에 기초지식이 없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고, 실험할 수 있는 두균(痘菌)도 얻을 수 없었다. 1879년 부산에 와 있는 일본인들 사이에 우두가 시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송촌은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갔고, 일본 해군이 부산에 세운 '제생의원(濟生醫院)'의 마쓰마에 원장으로부터 서양의학의 기초지식과 종두법을 익힌 후, 1880년 서울 자신의 집에 종두장을 설치, 많은 어린이에게 종두를 실시했다. 그는 이어 1880년 5월 김홍집 일행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할 때 동행해 두묘 제조법과 저장법, 어린 송아지의 사육법, 두장(痘醬) 채취법 등을 습득한 후 귀국했다. 종두장에서 보다 많은 어린이들에게 우두를 접종하던 송촌은 1887년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것을 한탄하며 조세 등 국정의 잘못에 대한 11개조에 달하는 상소를 했다가 조정의 미움을 받아 신지도로 유배됐다.
하지만 신지도 유배가 송촌의 종두법에 대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송촌은 종두법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던 섬 주민을 설득해 어린이들에게 접종을 실시하기도 하고, 관련 연구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갔다. 이로 인해 한 때는 마을 사람들이 송촌을 기피하기도 했다. 산에 매논 멀쩡한 소 엉덩이를 칼로 째 고름을 빼는 바람에 "소를 죽인다"며 도망치는 일이 자주 있었는가 하면 어린이들에게 쇠고름을 놓는다고 하여 동네 아이들이 슬금슬금 피해다니기도 할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 우두종법이 최초로 도입된 것은 정조 때 실학자들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에 종두변증설(種痘辨證設)이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자신이 천연두 예방에 관해 습득한 효과와 경험을 기초로 하여 우두 접종법의 발명 경위, 효과, 접종 방법 등을 적은 '마괴회통'을 저술했을 정도이다. 또 이종인이 영남에서 끈질기게 종두를 보급시켰으며, 1817년 '시종통편'이라는 천연두 치료법을 저술하여 송촌에 의한 우두종법이 도입되기까지 전국적으로 널리 인두종법은 시행되고 있었다. 인두종법이란 천연두균을 환자로부터 직접 채취해 코를 통해 흡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직접적으로 종두를 널리 보급한 주인공은 역시 송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종두에 관한 업적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송촌은 천연두의 예방ㆍ치료는 물론 한글의 보급에도 애썼다. 그는 조선의 선비와 백성이 어려운 한자를 쓰기에 신학문이 일반 백성에게 전파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쉬운 우리 글인 한글의 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주시경과 함께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한 사람도 송촌이었다.
그는 1891년 유배지에서 위생에 관한 예방의학서 '신학신설'을 한글로 완성했다.
신학신설은 총론부터 일광, 열(온도), 공기, 물, 음식, 운동 등을 나누어 건강과 위생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이다. 송촌은 신학신설을 쓴 목적에 대해 "우리 나라 사람은 평소에 위생과 질병 예방에 노력하지 않고 병이 난 후에 의사에게 맡긴다. 따라서 평소에 위생과 질병예방에 힘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 방법을 누구나 알기 쉽도록 이 책을 쓴다"고 밝혔다. 현재 송촌이 5년간 머물렀던 송곡리에는 당시의 집이 없어진데다 유적도 거의 없어 숨결을 느낄 수 없다. 마당 한 켠의 시누대와 바다의 기세가 송촌의 빈 자리를 대신 채워줄 뿐이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바람의 소리, 바다의 소리, 섬의 소리가 하나가 되었을 때 쯤일까. 시누대를 주시하다 보면 문득 느낄 수 있다. 바람에 누워 섬이 되고 송촌이 된 시누대가 기억하기도 전, 제가 먼저 와서 가슴에 곱게 스며드는 것을-.
'…/바람의 유혹에 흔들리면서/의지와는 다르게 자꾸만,/흔들리는 自畵像의 시누대는/…/이 봄 날의 순풍에도 마냥 흔들리는/마음 여린 시누대는 섬이 되고 싶다/…/태풍이 일고 굉음이 고막을 찢어도/홀로, 움직이지 않는 섬./섬이 되고 싶다./격랑의 파도가 회오리 치는/바다 한 가운데 서도 미동도 하지 않는/섬이고 싶다. 그런, 섬이고 싶다.'(윤순정 작 '춤 추는 시누대 숲' 중에서). 김만선 기자 mskim@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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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남대 완도문화원 부원장
"신지도를 역사의 교육장으로"
송촌 지석영이 천연두를 연구할 당시 조선에서도 천연두는 한 번 걸린 사람에게는 두 번 다시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많은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었고, 여러 가지 예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천연두 예방법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방법이었는지 다음 몇가지 예방법을 보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장묘법-환자의 환부 고름을 솜에 묻혀 콧구멍에 넣는 방법 △한묘법-환부의 딱지를 떼어 그 가루를 은으로 만든 관이나 거위 깃털로 만든 관에 넣고 코로 들이마시게 하는 방법 △수묘법-환부 딱지가루를 물에 녹인 다음 솜에 적셔 콧구멍에 넣는 방법 △인두법-환부에서 고름을 채취하여 대상자의 피부에 상처를 내고 발라주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천연두 환자에게서 직접 채취한 천연두 균은 소에서 채취한 균보다 훨씬 독성이 강해 실제로 천연두에 감염되어 죽을 위험이 컸고 전염성도 강했다.
이러한 사실을 연구와 관찰, 경험으로 알고 있던 송촌은 1879년 나이 25세때 부산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생의원으로 가서 2개월동안 종두법을 배운다. 거기서 송촌은 두묘를 만들어낼 원액과 종두침을 구해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에 충주의 처가에 들러 2살된 처남에게 우리 민족 최초의 우두접종을 한다.
이는 그가 천연두 예방에 관하여 얼마나 큰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짐작케 하는 단면이다.
그의 장인은 송촌에게“자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위험한 독약을 어린 처남에게 주사하겠다는 말인가.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게"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며 꾸짖었다. 그러나 결국 장인은 송촌이 평소 사리에 어긋난 말이나 행동을 한 적이 없었고 신학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승낙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송촌이 어린 처남에게 우두시술을 하고 3일이 지나자 처남에게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훗날 송촌은 이 때의 감격을 "나의 평생을 두고 볼 때 28세에 과거에 급제했을 때, 귀양살이에서 풀려났을 때와 같이 기쁨이 컸다"고 했다
그런데 송촌은 민족사에 남긴 수많은 공훈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라는 오명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대구 감영 판관으로 일본군을 도와 동학농민군의 토벌에 앞장섰고 1909년 일본의 조선침략 선봉장인 이토오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쓰러지자 이토오 히로부미의 죽음을 추도하는 모임에서 추도사를 읽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서 송촌은 '한국 과학문화재단'이 추진한 '과학기술자 명예의 전당'의 등재에도 거부당했으며, 부산시의 '부산을 빛낸 인물' 선정에서도 탈락되었다고 한다.
이는 민족사관에 배치되는 일로서 송촌에게는 아쉬운 오점을 남겼다는 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더 이상의 친일행각은 계속되지 않는다. 송촌은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발표되자 주위의 청을 뿌리치고 대한의원에서 물러나 다시는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이는 다른 친일파와 차별되는 점이다. 한일합방 후 1935년 죽을 때까지 일본 군국주의자에 협력한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친일 개화당과의 관계, 동학농민군과의 관계, 이토오 히로부미 추도사와 관련하여 송촌 자신의 뜻이 담긴 어떤 기록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아무튼 송촌은 의학뿐 아니라 '중맥설'이라는 밀농사에 관한 책을 지어 보급하고 백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서 주시경선생과 함께 노력했으며, 1908년에는 '국문연구소' 소장직을 맡는 등 의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송촌이 신지도에 유배 온 사건은 실로 당시 종두에 관한 인식이 안돼 있어서 신지도 주민들에게는 두려움의 사건이었다. 소의 고름을 아이들에게 주사한다는 일이 과연 얼마나 두려움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리하여 어린 아이들은 물론 주민들은 송촌을 만나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기까지 했다.
그러나 송촌의 애정 어린 노력과 설득으로 주민들의 호응을 받게 되고 그리하여 많은 이곳 아이들은 임상실험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송촌이 그간 연구한 이론을 실전에 옮겨 종두법의 완성을 이루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곳 신지도 유배지를 복원하고 그 기념비를 세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천연두, 전쟁과 환경오염이 근절되지 않는 한 이 지구상에서 언제 재 발현될지 모르는 천연두에 대한 범국민적 인식의 산 교육장이 돼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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