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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연사랑난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송골매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관한 자료를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미국인 저널리스트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에 나오는 약산 김원봉에 대한 묘사입니다. 『아리랑』은 웨일스가 1936년 중국 옌안에서 만난 조선인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산의 구술을 기록한 책입니다. 김산은 김원봉에 대해 “기미년(1919년) 이후 친일파와 일본 관헌,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최대의 공겁의 대상이었고, 나와 같은 20대 전후의 젊은이들에게는 조국 해방의 상징적 존재였다”며 높게 평가했습니다.
김산 [중앙포토]
반면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4000㎞를 걸어 중경 임시정부까지 찾아갔던 장준하의 『돌베개』등에서는 전혀 다른 면모가 드러납니다.
“김원봉은 열심히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 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 그 효과가 아주 큰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광복군과 임정에 대해서 백해무익한 처사였다. 안타까운 일이었다…김원봉 일파에서는 (세력을 넓히기 위해) 미인계까지 쓰고 나섰다. 그 추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그들에 대한 우리들의 실망과 불신도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이렇듯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한 청년에게서 '조국 해방의 상징'에서부터 ‘임시정부 훼방꾼’까지 극단의 평가가 오간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미국 전략첩보대(OSS) 대원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시기의 장준하(오른쪽)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제1기가 1920년대 의열단 활동이라면 제2기는 1935년 조선혁명당 창당과 산하 군사기구인 조선의용대 발족입니다. 그런데 이중 김원봉의 전성기를 꼽으라면 의열단의 리더로 이름을 날린 1920년대입니다.
1920년 3월 곽재기ㆍ이성우 등 16명이 참가한 밀양 폭탄 사건을 시작으로 1924년 1월 일본 도쿄 황거(皇居) 입구의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 투척까지 4년간 8건의 테러로 존재감을 각인시켰습니다.
하지만 테러로는 일본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체계적인 조직화 작업에 나섭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정작 정식 군대를 양성한 이때부터 그의 활동상은 되려 약화됩니다.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조승우)
그것은 조선의용대가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에 편입됐는데 전투부대가 아닌 선전대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즉,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선전 활동이나 포로 심문, 기관지 발행 등의 활동을 맡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딱히 전과를 찾기가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단적으로 조선의용대의 대표적 활약으로 꼽는 1941년 ‘호가장 전투’를 들 수 있습니다. 반일 선전 활동을 하던 20여 명의 대원이 호가장이라는 마을에서 묵던 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4명의 대원이 전사하고 대장 김세광이 총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독립무장운동의 암흑기로 불리는 1930년대에 이들의 항일의지와 활동상을 분명 높게 평가해야 합니다. 하지만 전투의 성과만 따져본다면 1920년대 김좌진이 이끈 청산리 전투 등에 비해 미약하다는 점 또한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영향인지 해방 후인 1947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박태원은 『약산과 의열단』이라는 책을 내 김원봉을
백범 김구 [중앙포토]
약산 김원봉 [중앙포토]
여운형 [중앙포토]
남로당의 영수였던 박헌영 [중앙포토]
1945년 12월 서울 운동장에서의 임시정부 환국 봉영식 석상에서 이승만(왼쪽)과 김구(오른쪽)
북한 김일성 당시 내각 수상이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모습.[연합뉴스]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 펑더화이(왼쪽)가 마오쩌둥(오른쪽)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다. [중앙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