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 장신구 이야기(2)
일제 강점기 중기(1920~1929) 한국장신구
이 시기는 일본(식민지 조선을 포함한)의 경기가 좋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모조 금 합금과 모조보석 장신구가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동시에 저렴한 소재의 보급으로 장신구를 즐길 수 있는 계층이 넓어졌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1920년대 즈음해서는 합성 금을 사용한 장신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합성금 광고들은 저렴함과 뛰어난 광택을 장점으로 내걸었습니다. 몇몇 광고에서는 순금보다 가격이 1/10이지만, 뛰어난 광택이 있다고 선전하였습니다.
- 합성금 장신구 광고
유명했던 합성금 상품명인 “레도 합셩금”의 경우 유사품에 주의하라는 경고문도 첨부되었는데, 이를 볼 때 많은 합성금의 인기가 엄청났으며 많은 페이크 제품 또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파격적인 가격, 뛰어난 광택, 금보다 가볍다는 것을 볼 때, 아마도 핀치백(pinch beck)이라 불리는 징크-구리 합금일 것으로 판단되며, 만들기 쉬워 많은 아종이 유통됬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1920년대 제작된 핀치백 보석반지
1920년대 중반에는 (모조) 백색금 장신구들이 큰 유행을 했습니다. 니켈 실버(독일은 으로도 불러지며 구리, 니켈, 징크 3원 합금)계 합금인 프라치노 같은 모조 백금또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백금색 금속들은 주로 다이아몬드와 진주와 같이 사용되었는데, 요즘의 보석-금속 조합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 "프라치노"로 추정되는 모조 백금 합금 특허(US1486407)
- 빈티지 니켈 실버("프라치노"로 추정) 장신구
보석 또한 모조석의 사용이 빈번해졌습니다. 당시 세계적으로 아르데코 스타일의 주얼 리가 유행하면서 합성/모조 보석의 사용빈도가 크게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당시 일본의 경제상황과 맞물리면서 모조, 합성 보석들이 크게 유통되게 됩니다. 모조, 합성보석들은 주로 합성금이나 모조백금 등 저가 금속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마 그 당시도 사용되는 보석과 금속의 격을 따졌던 경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1920년대 모조 다이아몬드 반지 광고
- 합성 루비, 오팔, 다이아몬드, 진주등이 사용된 일본제 장신구
이 시기에는 남성들도 보석 장신구가 유행했었습니다. 남성 장신구인 넥타이핀, 커프 링크(양복 단추) 뿐만 아니라 남성용 반지가 귀금속, 진주,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판매가 되었습니다, 몇몇 광고에서는 “신사용” 다이아몬드 반지라는 점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는 남성이 보석 반지를 착용하는 행위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 1920년대 제작된 남성반지
한편 일본과 조선왕실(당시 일본황실은 조선 왕실을 명목상으로는 존중하였음)의 결혼식에서 서구식 예물을 주고받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황실과 고위층의 결혼식을 언론이 다루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서구식 결혼식과 예물이 민간에도 퍼지게 되었습니다.
영친왕비의 결혼식
- 1920년대에 제작된 까르띠에(Cariter. Co)의 웨딩반지
일제 강점기 후기와 말기의(1930~1945) 한국장신구
30년대 초기에는 세계적인 불경기로 여러 주얼리/시계 제조회사들이 타격을 입었던 시기였습니다. 일본과 조선의 장신구 산업도 매우 큰 침체를 맞게 되었습니다. 장신구의 저가화는 더욱 가속화되어 비교적 저렴한 수정장신구가 광고에 등장하게 됩니다.
- 1930년대 제작된 일제 수정 장신구
한편 도금된 황금제품인 “미학금”이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화학적인 안정성이 뛰어나고, 금의 무게에 버금간다는 것을 강점으로 내걸었는데, 이전의 모조금인 “합성금”의 경우 변색과 중량감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아래의 이미지처럼 디자인적으로는 보석을 강조한 스타일이 유행했는데, 많은 경우가 인조/모조보석을 사용했습니다.
- 미학금 광고(동아일보 1934,7,4)
아래의 이미지처럼 전통장신구들 또한 광고 되었는데 이 시기 까지는 전통장신구 또한 수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러한 광고는 1920년대보다 더욱 줄어들게 되는데, 당시의 암울한 경제적인 상황이 반영된 것 이였습니다.
- 비녀 장신구 광고
1937년에 이르러 전시체제로 이행 되면서 장신구 산업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특매 형식으로 일부 장신구 광고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사용된 보석들은 루비, 블루 사파이어 등 고가 보석에서부터, 무색 사파이어나 지르콘, 해마타이트등 저가의 보석까지 넓은 스팩트럼을 가졌습니다. 당시의 장신구 광고는 재고처분 목적이 강했을 것 같습니다.
- 장신구 특매 광고
흥미로운 점은 이전과 달리, 손목시계 광고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1930년대 초반부터 서구권에서 현대적인 손목시계가 공급되기 시작한 것과 큰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 파텍필립(patek phillpe. Co)가 제작한 초창기 현대적 손목시계(좌)와 다양한 손목시계 광고(우)
1939년 이후에는 귀금속 제품에 대한 정부차원의 매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전비로 사용할 금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1940년에는 아래의 기사처럼 귀금속 제품의 생산이 완전히 금지되게 됩니다. 진주, 산호, 모조 백금(프라치나, 산 프라피나)만이 장신구 재료로 허용되게 됩니다.
(중략)귀금속, 장신구물도 제조 금지가 되엇다. 이것들을 가격 제한이 잇기로 되어 三개월의 유기간을 지나 十월 七일부터 시장에 나오지 안캐 되리라 한다. 군수 인풀레로 사치품이 만히 팔려 왓으나 이 제한으로써 전시하의 결혼반지도 없어질 형편이다. 결혼용 혼례의상도 퍽 간소하게 될 것이다. 이 제한에서 제외된 것은 악기, 도자기, 칠기 등으로 진주, 수정등 귀석도 제외되엇다.- 동아일보 1940, 7, 8
금과 백금의 유통이 막히고 강제 공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개성에서는 마지막 까지도 장신구가 판매되었으나, 부내애국반을 동해 귀금속류를 회수하기 시작하면서 장신구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맺으며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장신구는 점점 서구화 되었습니다. 1910년 이전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예물/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에는 점점 서구화된 예물, 장신구 착용이 확산되었습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였기에 당시 일본 유행을 따라가는 경향이 강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이 당시 일본에서 부터 서구식 패션이 유행이였기에, 한국도 그 수순을 밟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 1930년대 명동거리(좌)와 미쓰코시 백화점(우, 현재 신세계백화점)
1900년대 ~ 1940년대 동안 장신구에서 엄청난 스타일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2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화려한 기교의 아르누보 풍 장신구가 인기였으나, 1920년대 중반 이후로 아르데코 양식이라 불리는 (당시 기준에서) 파격적인 장신구가 선보여 지게 됩니다.
- (좌) 아르누보 풍의 팬던트(L. Tiffany 작), (우) 아르데코 풍의 펜던트(J. Fouquet 작)
일본과 식민지 조선도 이러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1920년대 이전의 경우 화려한 느낌의 장신구가 광고에 등장하나, 20년대 중반 부터는 장신구들이 비교적 심플한 형태의 장신구가 나타나며 지금의 것과 비교해도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예물의 경우도, 이미 1920~30년대에 요즘과 같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고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편 그 당시도, 귀족들은 까르띠에(Cariter)나 반클리프 아벨(Van Cleef & Arpels)같은 럭셔리 브랜드 제품을, 경제적인 장신구를 원했던 사람들은 종로나 명동거리의 삽을 방문했는지 궁금해 지기도 합니다.
- 당시에도 티파니 박스는 로망이였을까?
한편 이글을 쓰면서 한국의 빈티지 장신구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태원, 종로, 인사동에서 "근대 장신구"를 찾아가며 근대 한국 장신구의 멋을 느낄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글은 아래의 글을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홍지연, 한국 근대 여성 장신구의 수용과 전개, 이화여자대학교 (2006)
- 박은선, 국내 주얼리에 대한 사회적 정서와 주얼리 소비에 관한 연구, 국민대학교 (2011)
- 정유진, 기생 장신구의 미적 특성에 관한 연구 : 조선후기에서 근대를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2008)
- 클레어 필립스, 장신구의 역사, (주)시공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