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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전한(前漢) 태조고황제(太祖 高皇帝, 기원전 247년∼195년)
중국의 통일왕조인 한나라의 초대 황제이자 중국 역사상 4번째로 황제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쓴 인물로 이름은 유방(劉邦)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제후나 귀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피지배층에서 황제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진(秦)나라 말기의 대혼란에서 세력을 일으켜, 초한대전에서 숙적 항우(項羽)를 제압하고 천하를 차지했다.
이후 각지의 반란을 평정하고 이성왕(異姓王)들을 숙청하여 대제국 한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특히 한(漢)족, 하나의 중국과 같은 오늘날까지 엄존하고 있는 중국의 국가적 문화 정체성을 만들어낸 왕조의 창시자로서 중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황제는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완벽히 하나로 묶어내는 것에는 실패했고, 한고제는 이를 이뤄냈다. 또한 이후 중국에 분열기가 찾아왔어도 그때마다 통일 국가의 대의명분을 제공해줬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 혹은 한족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헌원황제(軒轅皇帝)로 대표되는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있고 역사적 실증으로만 따져도 상나라 등 한나라 보다 이전의 시대가 있지만, 한고제가 창설한 한나라가 후세에 통일된 중국과 중화문명의 큰 기반을 제공하고,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한족(漢族)이라고 칭하는 것만 봐도 충분히 중시조라 부를 만한 사람이다.
워낙 파격적인 행동이 많고 질기게 살아남고 버틴 타입이라 인물에 대한 호불호가 꽤 극단적으로 갈리는 탓에 이를 배경으로 하는 초한지 소설 등에서는 라이벌인 항우나 부하인 한신 등에 비해 인기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지만, 최후의 승자로서 가지는 역사적 입지와 비중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로 한고조(漢高祖)라는 표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정식 표현은 아니다. 유방의 묘호는 태조이며 시호는 고황제다. 다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고조라는 표현이 나와서 그것이 유방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로 굳어진 것. 정확히 말하자면 고조는 시호인 고황제의 존칭인 것이다. 다만 이 고조(高祖)라는 표현이 한고제 본인을 칭하는 상징적인 칭호를 넘어, 후대 왕조의 창건자들에게도 붙는 묘호가 된 것은 고제의 영향이 컸다고도 할 수 있다.
유방은 패현(沛縣)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원래는 송나라 땅이었으나 유방이 태어나기 3∼40여년 전인 기원전 286년 송나라가 망하면서 초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부친은 태공(太公)이었고 어머니는 유온(劉媼)이었는데 태공이나 온은 남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호칭에 지나지 않았다고 사기집해(史記集解)나 사기색은(史記索隱) 등의 주석서에서 일관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유태공과 유온을 현대어로 풀이하자면 그저 유씨댁 어르신, 유씨댁 안주인 정도의 의미로 유방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찾을 수가 없다.
사실 이는 부모뿐만 아니라 유방 본인도 마찬가지인데, 사기나 한서(漢書)에서는 아예 유방(劉邦)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대목이 없다. 그저 성이 유씨이고 자(字)가 계(季)라고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유방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후한의 학자 순열(荀悅)의 한기(漢紀)에서부터인데, 후세 학자들이 ❮사기(史記)❯, ❮한서(漢書)❯에 주석하면서 한 인용으로, 발굴된 유물 자료들로써 대체로 옳다고 간주한다. 물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설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유방이 어렸을 당시에는 유계라는 호칭으로 통하다가, 즉위한 후 유방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초한전쟁을 모르는 현재의 대다수 사람들마저 유방과 항우라는 유명한 이름을 아는 실정과 달리 유방 본인에게 ‘방’이라는 이름은 일생 동안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본인으로서도 착 감기지 않는 이름이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런데 유방의 형제를 살펴보면 이 이름이 형제간의 서열, 순서를 간편하게 나타내는 백중숙계(伯仲叔季)를 붙여서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방의 형들로 , 유백(劉伯)과, 유중(劉仲)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유계(劉季)’라는 호칭이 어째서 생겼는지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유방은 본래 개별적인 이름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고, 그저 ‘유씨네 막내’정도로 통용될 수 있는 유계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둘째 형 유중은 유희(劉喜)라는 휘가 알려져 있고, 이복동생 유교(劉交)는 유(游)라는 자가 따로 있었기에 모든 사람의 휘가 불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백중숙계가 대충 지은 이름 같아 보이지만 그게 정식 자나 이름인 예가 꽤 있어 그 유계라는 이름이 개별적인 이름일 가능성은 다분하다. 더욱이 유교가 유학자로, 특히 시경에 능한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집안사람들 중에 이름이 아예 없는 인물이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기도 하고.
유방의 출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방의 어머니인 유온이 연못가 근처에서 쉬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신(神)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치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했는데, 근처에 있던 태공이 그 모습을 보자 유온의 배 위쪽에 교룡(蛟龍)이 떠있었고, 유온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 사람이 유방이었다.
유방은 외모에 대해서도 융준용안(隆準龍眼), 용안미수염(容顔美鬚髥)과 같은 식으로 용과 연결이 자주 되는 편인데 공룡상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전설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유방의 외모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넒어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 수염이 아주 그럴 듯해서 멋있었다고 한다. 또한 왼쪽 넓적다리에는 72개의 반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반점의 숫자야 ‘비범한 인물’에 대한 묘사에서 자주 나오는 특징 중에 하나고, 용의 얼굴을 닮았다지만 사람 얼굴을 보고 연상시키는 동물이야 모두 다른 법이니 일단 알 수 있는 사실은 콧날이 높으며 이마는 넒고 수염이 꽤 멋있었다는 정도다.
그리고 좀 뒤의 이야기지만, 유방은 정장(亭長)의 벼슬을 하고 나서부터는 자기 밑의 부하를 설[薛, 산동선 등현(縢縣)] 땅으로 보내 죽피관[竹皮冠, 대나무 껍질로 만든 관(冠)]을 만들어 오게 하여 외출 할 때는 무조건 이를 쓰고 다녔는데, 허세를 위한 용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훗날 황제가 되고 나서도 이 죽피관은 계속 착용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체로 유방의 초상화에서는 넒은 이마, 콧날, 죽피관이 강조되는 편이다.
고제 유방의 출신지는 패현(丰县)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유방은 자신이 태어난 곳은 위나라이고, 나중에 패현으로 이주한 것이라고 했다. 패현 일대는 수시로 소속된 국가가 변하던 지역이었고, 오랜 기간 송나라의 영토였다가 유방이 활동할 시기에는 초나라의 영토였다. 위나라나 제나라의 영토였던 적도 있었다.
젊은 시절의 그는 변변찮은 일도 하지 않는 동네 백수였다. 사기 고조 본기에는 대놓고 유방이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통일 중화제국의 창업 군주에 대한 묘사로서는 이례적으로 적나라하다. 돈도 못 벌면서 틈만 나면 술판을 벌이는 난봉꾼이었다는 이야기. 게다가 연구자 중에는 유방과 번쾌 등 패현 출신 동향 그룹들을 일컬어 ‘의협 세계에 살았다’라고도 서술하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 좋아 의협이지 동네 건달 무리였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소하(패현 서기)와 조참(감옥 간수) 정도가 학문이나 지위가 좀 있는 편이었고 개장수(번쾌), 장례식 나팔수(주발), 마부(하후영) 등 나머지는 한미한 출신이었다. 노관은 아예 무직 백수로 기록돼 있다. 싸움은 끝내주게 했으나 행정적 실무 능력이라고는 눈 씻고 찾을 수 없었다고 하겠다. 유방은 또 베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했다고 하는데, 본인이 가진 건 없더라도 한 턱 낼 때는 화끈하게 내는 남자들의 행동과 비슷한 듯 보인다.
훗날 유방이 황제가 되고 나서 아버지인 태공에게 “저보고는 생업도 못 꾸리고 작은 형처럼 노력도 안 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보면 어떻습니까?”라고 농담하면서 부친의 장수를 기원한 일이 있었는데, 이를 보면 당시의 유방이 집에서도 천덕꾸러기 같은 처지였음을 알 수 있다. 어른이 되어서 놀고먹는 것만 해도 부끄러운 짓인데, 얼마 안 되는 집안 가산까지 탕진해가며 동네 친구들을 모아 건달 놀이나 하고, 툭하면 싸움박질에, 칼 갖고 똥폼 잡다가 실수로 사고를 쳐 관아에 잡혀가는 등, 그 동네의 사고란 사고는 죄다 치고 다녔으니까. 살인사건 등에 연루되어서 지명수배 되는 일도 숱했다고 한다. 그래서 젊을 적 유방이 동네 한량들하고 밥먹겠다고 집에 오면 큰형수가 국솥을 박박 긁으면서 “내줄 건 밥풀떼기 하나, 국물 한 술도 없다.”라고 갈구며 내쫒기 일쑤였다.
그 당시 유방은 가진 건 쥐뿔도 없었지만 패기는 실로 남달라서, 왕온(王媼)과 무부(武負)라는 사람들의 술집에서 매일매일 외상술을 얻어마시고 졸리면 아무데서나 널부러져 잠을 잤다. 유방이 술 퍼마시고 잠을 자면 그 몸 위에 용(龍)의 기운이 서리고 술집에서 매상이 몇 배가 더 나가서 술집에서는 외상 장부를 찢어 외상값을 없애버렸다고 하는데, 용의 기운이 서렸다는 기록은 유방이 술집에 가면 분위기를 주도하여 매상이 더 올랐다는 식으로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술집 주인 입장에선 아무리 외상이나 퍼먹고 툭하면 아무데서나 드러누워 자는 인간이라 해도 그 인간 덕분에 평소보다 매출이 눈에 띄게 올랐다면 마냥 미워하진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생계를 스스로 해결하진 못했지만, 사실은 그저 무능하고 무력한 놀고먹는 게으름벵이였던 것은 아니고, 당시엔 거의 귀족들의 소양이었던 검술과 학문에서 벼슬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던 것을 보면 ‘사나이 장부로 태어났으면 사대부들처럼 가오 있게 책도 좀 읽고, 칼도 휘두르고, 벼슬 한자리 꿰차고, 전쟁도 해보고, 부하들과 미녀들도 거느려보고 살아야지, 시골구석에 틀어박혀 밭 갈고 나무 패는 게 웬말이냐!’라는 마인드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咸陽)에서 요역(賦役)을 하고 있었는데, 시황제(秦始皇)의 위풍당당한 행차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오호라! 대장부라면 실로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
당시 유방이 사수의 정장이 되어 무리들을 여산으로 압송하게 되었는데 유방은 도중에 자신과 면식이 있었던 일부 무리들을 풀어주었다. 이에 무리들은 감사 표시로 술 두 병, 사슴 뱃살, 소간 각 하나씩을 고조에게 선물하였다고 한다. 유방은 그래도 떠나지 않고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들을 함께 (앞서 받은) 술과 음식을 먹은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 훗날 유방은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아침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상식관은 언제나 이 두 가지 구운 고기, 술 두 병씩을 함께 마련하였다고 한다. 황제가 되어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았지만 어려운 시절의 그 맛은 잊을 수 없었던 듯하다. 이렇듯 하는 일도 없는 백수였던 유방은 사수정(泗水亭)의 장(長)이라는 벼슬자리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오해하는 부분이 소하(蕭何)가 자리를 추천하여 만들어주었다는 것인데, 유방이 소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시험을 쳐서 획득한 자리다. 정장이라는 이름의 벼슬을 얻었다고 해도 현대 한국과 비교해 말하면 동대장이나 파출소장 정도이지만, 워낙 유방의 패기가 대단해서 현청(군청) 관아의 모든 관리들을 아랫사람처럼 같잖게 여겼다고 한다.
이때 유방은 따로 만나던 조(曹)씨라는 여자가 있었다. 다만 둘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른 사이는 아니었는데, 조씨는 이 관계에서 훗날 제도혜왕(齊悼惠王)이 되는 유비(劉肥)를 낳았다. 조씨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이 거의 없어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마 나중에 소개할 유방의 정처 여치보다 먼저 관계를 맺지 않았을까 싶다. 조씨가 낳은 유비의 둘째아들 성양경왕 유장이 기원전 200년생인데 여치의 장남인 혜제 유영은 기원전 210년생으로 단순히 유비가 혜제의 형일 뿐만 아니라 나이차이도 상당히 났을 것이며, 따라서 여치와 결혼하기도 전에 유비를 낳았으리라고 추론해도 많이 무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끝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어느 날 선보(單父) 출신인 여공(呂公)이라는 인물이 패현으로 이주하는 일이 생겼다. 본래 거주하던 곳에서 원수를 피해 도망쳐 온 것인데, 이 사람이 패현의 현령과 안면이 있어 손님으로 지내다가 아예 모든 가족을 이끌고 이주하여 집들이를 하던 참에, 현령이 돌봐주는 거물이니 패현의 여러 호걸들이나 관리들도 이 여공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잔치에 와서 하례금(축의금)을 바쳤는데, 이 사람들의 숫자가 꽤 되어 현에서 서기로 일하던 소하가 나서 하례금을 걷는 일을 맡게 되었다. 소하는 사례금의 액수가 천 전(錢) 미만인 사람들은 대청 아랫 자리에 앉게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땡전 한 푼 없던 유방이 나타났다. 유방은 돈도 없었지만 당당하게 하례금 일만 전이라 쓰고 들어왔다. 이것을 본 여공이 깜짝 놀라 직접 나와서 유방을 맞이했는데, 본래 관상을 즐겨 보던 여공이 한번 유방을 보고서는 그에게서 꽤 그럴 듯한 면모를 감지했는지, 유방을 극진히 대접하며 귀빈석에 앉게 했다. 소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이렇게 빈정거렸다고 한다.
"유계라는 작자는 본래 큰소리만 잘 치지 일을 이루는 건 드뭅니다."
정체가 들통나서 망신당하기 전에 적당히 눈치봐서 조용히 가라는 말이었지만, 유방은 그런 이야기는 다 무시해버리고 계속 귀빈석에 앉았다. 앉아있는 것도 일인데, 태도가 너무 당당하고 사양하는 기색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술자리가 끝날 무렵이 되자, 여공은 슬쩍 유방을 자리에 남겨놓더니 자신의 딸인 훗날의 여후(呂后)를 “데려가서 청소나 하는 첩으로 삼으라.”면서 주었다. 이에 여공의 부인이 “아니, 현령이 딸을 달라 할 때도 내키지 않았는데, 저런 거렁뱅이에게 딸을 주다니요?”하고 노발대발했지만, 여공은 “아녀자가 무슨 일을 알아!”하면서 무시하고 기어코 딸을 유방에게 주고 말았다.
그렇게 여후와 결혼한 유방은 훗날의 혜제(惠帝) 유영(劉盈)과 노원공주(魯元公主) 등의 자식을 얻었다. 유방과 조씨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당초에 둘이 제대로 살림을 차리고 산것도 아니라서 그리 문제는 없었거나 혹은 유방이 유력자인 여공과 관계를 맺기 위해 조씨와의 인연을 정리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후가 아이들을 데리고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중 어떤 노인이 물을 좀 달라고 부탁했고 여후가 물을 주자 노인은 여후의 관상을 보더니 “부인은 천하의 귀인이 되실 겁니다.” 고 대답했다. 여후가 두 아이의 관상도 봐달라고 부탁을 하자, 노인은 혜제를 보고는 “부인이 귀하게 되는 것은 이 사내아이 때문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노원 공주의 관상도 칭찬을 한 노인이 자리를 떠나자, 마침 사랑채에서 나온 유방에게 여후가 이 말을 전하자 유방은 노인을 찾아가 자신의 관상도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이런 대답을 했다.
“조금 전의 부인과 아이들이 모두 당신의 상을 닮았습니다. 당신의 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귀합니다.”
이에 유방은 감사하면서 “혹시 그 말대로 된다면, 은덕을 잊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유방이 어느 정도 세력자가 되고 난 후에는 노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이때 진나라의 여산(驪山)에서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고통스럽게 노역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정장이었던 유방은 패현의 죄수들을 호송해서 여산으로 끌고 가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현시창의 상황이었던 여산에 끌려가고 싶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기에 죄수들은 하나, 둘씩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여산에 도착할 즈음이면 모두 도망치고 한명도 남지 않을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책임자인 유방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유방은 아예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속 편하게 술을 진탕 마시고는, 밤이 되자 “가고 싶은 대로 가라. 나도 도망칠 테니까.”라고 말하면서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무리 중 10명 정도가 유방을 따르기를 원했다. 유방은 그들과 술을 더 마신 후, 한밤중에 이동을 하면서 먼저 사람을 보내 앞길을 살펴보게 했다. 앞서가던 사람은 이내 돌아오더니 “앞에 큰 뱀이 길을 막고 있으니 되돌아가는 게 좋다.”고 권했다. 그러자 유방은 술김에 “장사가 길을 가는데 그깟 뱀이 뭐라고!”라며 소리치고 앞으로 가더니 칼로 뱀을 베어서 죽여 버렸다. 그런 다음 몇 리를 더 가다가 기어코 술에 취해서 그대로 뻗어버렸다.
유방을 따르던 사람들이 이를 쫓아서 와보자, 뱀이 죽은 자리에서 한명의 노파가 통곡하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노파는 “어떤 사람이 내 아들을 죽여서 그렇다.”고 대답했고, 자신의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인데, 뱀으로 변해 있다가 방금 적제(赤帝)에게 참살 당했다고 이야기 했다. 사람들이 노인네가 헛소리를 한다고 여겨 두들겨 패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할 때, 노파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술에서 깬 유방은 그 이야기를 듣자 비범한 이야기라고 여겨 내심 좋아하게 되었고, 따르던 사람들도 유방이 뭔가 특이한 인물이라고 여겨서 더욱 그를 경외하게 되었다.
그 무렵 진시황제는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여기며 동쪽으로 순행해 그 기운을 억누르려 했는데, 여러가지 묘한 일도 있고 해서 스스로 특이한 사람이 아닐까 여긴 유방은 “혹시 나 잡으려고 그런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서 망탕산의 연못가 근처 암석 사이에 은둔하면서 몸을 피했다.
그런데 여후가 유방을 만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는 그가 어디에 숨어있든 항상 귀신같이 그를 찾아내었다. 이에 유방이 신기해서 어떻게 찾았느냐고 물어보자, 여후는 “당신이 머무는 곳 위에는 항상 운기(雲氣)가 서려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패현의 많은 자제들은 더욱 유방을 대단히 여겨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유방이 숨어 다닐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 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ㆍ오광의 난이 발발 했고, 진승 등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패현의 현령 역시 그런 분위기는 느끼고 있었고,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먼저 반란에 동참해야 하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자신은 진나라 관리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 같으니, 마침 숨어 지내던 유방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면 적절하다고 여겨 번쾌(樊噲)를 불러 유방을 돌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정작 유방이 돌아올 때가 되자, 마음이 또 바뀐 현령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유방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 유방과 친해보이던 소하와 조참(曹參)을 죽여 버리려고 했다. 느닷없이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된 소하와 조참은 부리나케 성벽을 넘어 도망쳐서 유방에게 붙어버렸다. 유방이 “현령 그놈을 잡아 죽여야 패현이 무사하다.”는 내용의 글을 적어 성 내로 화살을 쏘아 보내자, 성 내에서 반응이 일어나 현령을 때려죽이고 성문을 열게 된다.
일단 반란이 일어나고 나자, 이제 사람들을 이끌 주모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유방에게 이 일을 부탁했다. 유방은 거부하고 소하와 조참이 더 어울리지 않느냐 내뺐지만, 소하와 조참의 거듭된 만류와 설득으로 포기하고 현령 자리를 받아들인다.
일설에 따르면 유방은 그저 거부하는 척을 했을 뿐이라고 한다. 내심 좋으면서도 몇 번 사양하다가 수락했다는 것. 한편 사기에 적혀 있기로는, 소하나 조참이 생각했을 때 유방의 지지도가 높아 굳이 대세를 거스를 이유도 없는데다가, 만약 반란이 실패했을 경우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한사코 유방에게 양보했다는 이야기. 정확한 진실이야 알 수 없지만, 오랜 도피 생활에 지친 유방에게는 갑자기 현령이 되어달라는 부탁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기에 거부한 것일 수 있다. 소하와 조참 역시 모두를 이끌 우두머리로는 유방이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하여 추대한 것일 수 있다. 하여간 유방은 그렇게 해서 패현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패현을 다스리는 자라는 뜻에서 패공(沛公)으로 불리게 된다.
추대된 유방은 패현의 관청에서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짐승을 죽여 피를 북에 바르고 깃발을 모두 붉은색으로 했다. 이에 소하와 조참, 번쾌 등과 젊은 관리들이 패현의 젊은이 2∼3,000명을 모았고, 호릉(胡陵)과 방여(方輿)을 공격한 후 다시 돌아와 풍읍(豊邑)을 지켰다.
이렇게 유방이 거병을 한 기원전 208년, 천하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장초군의 장수 주장(周章)은 수십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 수도 함양에서 불과 50km 정도 떨어진 위치까지 진군했으나, 진나라 최후의 명장인 장한(章邯)이 대반격을 가하자 여지없이 분쇄되었다. 또한 장초의 장수들은 각각 연나라(燕), 조나라(趙), 위나라(魏) 등을 세워 독립하였고 또한 제나라(齊) 역시 전(田) 씨 형제들이 거병하여 나라를 세웠다. 또한 오나라 땅에서는 항량(項梁)이 봉기하고 있었다.
그 무렵, 진나라의 사천군감(泗川郡監) 평(平)이 반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풍읍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유방은 이틀 후 출진하여 그들을 쳐부셨다. 이제 수비가 아니라 공세에 나서기로 결정한 유방은 옹치(雍齒)에게 풍읍의 수비를 맡기고는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설현으로 진격, 사수군을 지키는 장(壯)을 격파했다. 장은 도망쳤지만 유방군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은 이를 추격하여 장을 잡아 죽였다. 이후 유방은 군대를 돌려 항보(亢父)를 거쳐 방여(方輿)에 이르기까지 진군했다.
그런데 이 무렵 장초의 진승은 수하의 장수 주불(周巿)을 시켜 위나라 땅을 공격하게 하려고 했는데, 주불은 이에 풍읍에 사자를 보내 “풍읍은 본래 위나라가 천도한 곳이었으니 항복해라. 항복하면 후로 삼아 맡기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모두 도륙할 것이다.”라고 협박을 했다.
헌데 당시 유방은 밖으로 나가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에, 이 연략을 받은 사람은 옹치였다. 본래부터 유방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옹치는 이에 넘어가 훌라당 풍읍을 바쳐버렸고, 이 소식을 듣고 놀란 유방이 귀환해 풍읍을 공격했지만 함락할 수가 없었다. 결국 병이 난 유방은 일단 패현으로 물러났다.
옹치와 풍읍의 배반에 원통하고 분한 유방은 마침 동양(東陽) 출신 사람인 영군(寧君)과 진가(秦嘉)가 경구(景駒)라는 사람을 임시왕으로 삼아 유(留)에 있다는 사실을 듣자 경구를 만나 의탁하여 군사를 빌렸고 다시 풍읍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무렵이 장한이 진승의 세력을 완전히 격파해버리고 있던 참이었다. 장한의 부장이었던 사마이(司馬夷)는 북쪽으로 초나라 땅을 평정하고 상현(相縣)을 도륙하며, 탕(碭)에 이르렀다. 이에 유방은 영군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소(蕭)로 진군하여 전투를 벌였지만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아 일단 유 땅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했다. 그 후 재차 공격을 감행, 3일간의 싸움 끝에 사마이에게 함락된 탕성을 재함락하고 탕성의 장정을 거두어 대략 5,000명 가량의 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유방은 이 부대를 가지고 하읍(下邑)을 함락시키고 풍읍 부근에 주둔했다. 그리고 이때 경구에게 의탁하려고 찾아왔던 장량과 대면하게 되는데, 장량은 자신의 계책을 척척 알아듣는 유방에게 흥미를 느껴서 경구에게 가지 않고 그대로 유방 옆에 눌러앉았고 유방도 장량을 눈여겨보고 수시로 자문을 구했다. 다만 이 당시 장량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조국인 한(韓)나라 부흥이었기에 정식으로 유방의 신하가 될 수는 없었다보니 높지 않은 구장 벼슬로 구색만 맞추었다. 직책을 아예 안 줄 수는 없고, 떠날 때도 서로 부담 느낄 필요가 없도록 하는 조치였을 것이다.
이때 유방의 지상 과제는 물론 풍읍의 옹치를 박살내는 일이겠지만, 유독 풍읍 점령만은 잘 풀리지 않았다. 탕이나 하읍 등은 수월하게 함락시켰고, 진승이 박살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위나라 측도 풍읍을 지원할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부하들이 하나같이 풍패 출신인 유방으로선 이들에게 고향 이웃들을 도륙하도록 명령하기는 곤란했던 점이 문제가 되었을 듯하다. 그런 와중 봉기군 중 최강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항량이 경구를 죽이고 설(薛) 땅에 주둔하자 기회라고 여긴 유방은 직접 100여 명의 기병만 거느리고 항량을 방문했다. 유방과 이야기를 나눈 항량은 5,000여 명의 병사와 오대부(五大夫)에 해당하는 장수 10여 명을 빌려주었고 유방은 이를 바탕으로 다시 풍읍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옹치는 위나라로 도주했다.
이로부터 한 달 뒤, 양성(襄城)을 함락하고 대학살을 자행한 항우는 항량의 본군으로 귀환하였고, 이에 맞추어 항량이 각지를 공격하고 있는 장수들을 소집하였기에 유방도 돌아갔다. 진승이 살해된 것이 확실해졌기에 항량은 이에 맞추어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새로운 초 회왕으로 추대하고 초나라를 다시 부활시켰다.
그 무렵 진나라의 장한은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제나라를 공격 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항량은 곧바로 동아로 진군하여 장한을 물리쳤다. 유방 또한 항보에서 진군을 격파한 뒤 조참과 함께 북상하여 이 전투에 참가했으며, 장한이 패주하자 항량은 별동대를 조직하여 항우와 유방에게 이를 이끌게 하고 장한을 추격하게 했다. 성양(城陽)을 함락하고 성 내의 사람들을 학살한 별동대는 이윽고 복양(濮陽)으로 진군하면서 저항하는 장한 군을 재차 격파하고, 다시 성에 공격을 가해 복양을 점령했다. 그러나 추격이 정도(定陶)에 이르렀을 즈음엔 장한도 군세를 수습하여 쉽지 않았고, 장한은 서서히 후퇴하면서 시간을 끄는 한편으로 진나라 본국에 추가적인 군사를 요청했고, 호해(胡亥)는 승낙하였다. 이러는 와중에 항량은 갑자기 눈앞의 장한은 내버려두고 유방과 항우를 서쪽으로 파견해서 곁에서 떼어놓았다. 유방과 항우는 옹구(雍丘)에 이르러 진군을 격파하고, 진나라의 재상 이사(李斯)의 아들 이유(李由)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별동대는 외황(外黃)을 향해 진군했다.
자신 또한 진군을 몇 차례 더 물리치면서 계속해서 대승이 이어지자 완전히 교만해진 항량은 동아 전투 후 겨우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장한의 야간을 틈탄 기습에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항우와 유방의 별동대는 외항을 버리고 진류를 공략 중이었지만, 항량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들의 사기가 염려되어 여신(呂臣) 등과 함께 퇴각을 했다. 그 당시 초나라의 기둥이었던 항량을 참살한 장한은 이제 초나라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조나라를 박살내기로 한 것이다.
장한은 한단(邯鄲)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부장 왕리(王離)를 파견해 장이(張耳), 진여(陳餘) 등이 몸을 피한 거록(巨鹿)을 공격 중이었다. 조나라마저 무너지면 진나라의 세력이 다시 천하를 뒤덮을 것이 자명하였기에, 이를 구원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초 회왕은 관중에 먼저 입성하는 자가 그 지역의 왕이 되리라 라는 선언을 한 상태였다. 또한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켜야만 항량의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유방과 함께 서쪽으로 가길 원했지만, 회왕의 주변에 있는 노장들이 항우를 서쪽으로 보내는 일을 꺼려 이 일은 유방이 맡게 되었고, 항우는 송의(宋義)와 함께 북쪽으로 진군해 거록의 진나라군을 격파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유방은 독자적으로 군단을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유방은 강리(杠里)의 진나라 군을 물리치고 서쪽으로 나아가다, 창읍(昌邑)에 이르렀다. 바로 이때 팽월(彭越)을 만나 양 군대는 힘을 합쳐 창읍을 공략했으나, 창읍의 수비가 완강하여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잠시 율현(栗縣)으로 후퇴하였다가 강무후(剛武侯)의 군사 4,000여 명을 빼았아 위나라 장군 황흔(皇欣), 신도(申徒) 무포(武蒲) 등과 함께 창읍을 재차 공격했지만 여전히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 무렵 항우가 거록대전에서 놀랄 만한 승리를 거둔 참이라, 유방은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창읍을 내버려 두고 서쪽으로 진군하며 고양(高陽)을 지나갔다. 바로 이때 역이기(酈食其)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유방은 양다리를 떡 벌리고 마루에 걸터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고 있었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로서는 무례한 행위였는데, 그 모습을 본 역이기는 절을 하지 않고 길게 읍만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족하께서는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유방은 이 말을 듣고 역이기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 비루한 유자 놈아! 지금 천하가 진나라의 폭정으로 고통을 받은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몸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한다고 하느냐?”
그러나 역이기는 기가 꺾이지 않고 말하길,
“무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무도한 진나라를 멸하기 위해서는 장자(長子)를 거만한 태도로 맞이하심은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따지자, 유방은 그 즉시 발씻기를 멈추고 벌떡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역이기를 윗자리에 모셔 조언을 구했다. 유방은 역이기의 조언에 따라 진류(陳留)를 습격해 진나라가 비축한 양식을 얻어 군량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그 후 역상(酈商)을 장수로 삼고 개봉(開封)을 쳤지만 여기도 쉽게 함락이 되지 않자 그대로 서쪽으로 나아가 백마진(白馬津)에서 진나라 장수 양웅(楊熊)을 쳐부수고 이를 추격하여 곡우(曲遇)에서 대파하였다.
이후 유방은 남쪽으로 나아가 영양(穎陽)을 함락시켰고, 장량과 다시 재회하여 그 도움을 바탕으로 환원(轘轅)을 점령하였다.
그런데 조나라의 별장 사마앙(司馬卬)이 관중으로 진입해 왕이 되고 싶은 마음에 하수를 남하하여 함곡관(函谷關)으로 진입하려고 하자, 유방은 평음(平陰)을 공략하여 나룻터를 끊어버렸다.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 낙양 동쪽에서 전투를 치루었으나 유리하지 못해 양성(陽城)으로 후퇴하여 병력을 추스린 후, 남양현(南陽縣) 동쪽에서 남양 태수 여의(呂齮)를 무찔러 남양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여의는 완성(宛城)으로 도망쳤고, 유방은 여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서쪽으로 진군할 요량이었지만 장량이 “후방에 적을 남기는건 좋지 않다.”고 충고하여 한밤을 틈타 이동하여 완성을 세 방향에서 포위했다. 항복해봤자 학살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절망한 여의는 자살하고자 했으나 진회(陳恢)가 우선 여의를 말린 뒤 성 밖으로 나와 유방에게 “완현의 성은 수십 개가 넘는데 그곳의 관리와 백성들은 항복해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내버려 둔다면 우환이 될 것이며, 싸워서 이기려면 피해가 크고 시간을 낭비하다가 공께서도 관중왕의 약속을 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항복을 받아준다면 다른 성들 또한 앞다투어 당신에게 복종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유방이 이에 응하고 서쪽으로 향하니 과연 성주들이 앞다투어 항복하였다. 개중에는 왕릉(王陵)도 있었다. 유방의 세력은 이 무렵에는 무시 못 할 정도로 강력해져서 그는 파양호 근처에서 할거하는 파군(番君) 오예(吳芮)의 별장 매현(梅鋗)과 함께 석현(析縣)과 역현(酈縣)을 함락시켰다. 이때는 장한이 은허에서 항우에게 항복을 했고, 유방은 더욱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이때 유방은 뜻밖의 인물과 접선을 취한다. 바로 그 악명이 자자한 조고가 유방과 접촉한 것이다. 진시황본기에서는 유방이 조고에게 사사로이 항복을 권유했는데, 이게 호해에게 적발되어 겁을 집어먹은 조고가 호해를 살해했지만 유방이 시치미를 떼면서 조고와의 관계를 끊은 것이고, 고조본기에선 조고가 이미 호해를 죽이고 유방에게 항복을 청했는데 유방이 이것을 속임수라고 여기고 그대로 진군했다고 한다. 아마도 조합해보면 유방, 혹은 장량이 그간 생긴 항복에 관대한 이미지를 이용해 조고를 꼬드겼고, 이에 낚인 조고가 호해를 죽여서 스스로 뒷배를 없애자 악명만 가져올 조고와의 관계를 끊으며 모르쇠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조고를 무시하고 진군한 유방은 무관(武關)을 돌파한 후 남전(藍田)에서 진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이어서 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207년 10월. 마침내 유방의 병사들은 패상(覇上)에 이르렀다. 천하의 그 어떤 제후들보다 가장 먼저 함양 근방에 도달한 것이다.
당시 함양은 황제를 살해하고 복마전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괴물 조고를 자영(子嬰)이 살해한 후였다. 하지만 자영이 세기의 기재도 아니었을뿐더러 조고 옆에서 아첨하던 사람들에게 목숨바쳐 싸울 충성심이 있을 리도 없었다. 장량의 책략 등에 속수무책으로 놀아난 끝에 단 45일의 저항을 끝으로 단념한 자영은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타고 목에는 밧줄을 메고서, 황제의 옥새(玉璽)와 부절(符節)을 봉해 가지고 나와 지도(軹道)로 나와 유방에게 항복했다. 유방의 장수들 중에 자영을 죽여 분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유방은 이를 거절했다.
“처음 회왕이 나를 관중으로 보낸 이유는 원래 내가 관대하고 남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소. 이미 항복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또한 앞일이 상서롭지 않을 것이오.”
이에 자영을 관리에게 맡기고, 본인은 함양에 입성하여 호화로운 진나라의 보물과 여자들을 취해서 신나게 놀려고 하였다. 하지만 번쾌(樊噲)와 장량의 설득으로 결국 그만두고, 진나라의 보물에 일절 손을 대지 않고 군대를 패상에 주둔시켜 함양의 백성들이 민폐를 당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현의 호걸들과 노인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여기 계시는 나이든 어른들께서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 왔습니다. 이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멸족을 당해왔고, 서로 모여 말을 나눈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여 거리에 내던져졌습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제후들은 나와 ‘관중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그곳의 왕이 된다’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대로 나는 마땅히 이곳의 왕이 될 것입니다.”
“이에 나는 여러분들과 ‘살인자는 죽인다, 남을 상하게 힌 자는 처벌한다. 물건을 훔치는 자는 가둔다.’는 내용의 법삼장(法三章)을 약속합니다. 나머지 진나라의 모든 법은 폐지하겠습니다.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예전처럼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부로들을 위해 나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마음대로 당신들을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결코 두려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내가 휘하의 군사들을 패상으로 물리쳐 주둔하는 이유는 제후들이 오기를 기다려 그들과 함께 규약을 제정하기 위함에서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각 현(縣), 진(鎭), 향(鄕), 촌(村) 등에 이 소식을 전하니 진나라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소와 양을 잡고 술을 가져와 대접하려고 했지만, 유방은 이미 가진 음식이 많으니 필요가 없다면서 모두 물렸다. 모든 백성들은 한마음으로 기뻐하였고, 그저 유방이 진나라 왕이 되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어떤 사람이 유방에게 이러한 제안을 했다. 지금 항우가 진격하고 있는데, 서둘러 함곡관을 막아 관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책에 솔깃해진 유방은 이대로 행했지만, 이는 항우의 어그로만 잔뜩 끌게 하는 행위였다. 11월 무렵, 항우는 유방이 함곡관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청나게 분노해 경포(黥布) 등을 시켜 함곡관을 뚫어버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