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파타야 해변에 운동하러 나갔다. 아주 재미있고 남다른 두 독일인을 만났다. 이들도 턱걸이와 푸시업을 하는 등 운동 애호가들이었다. 60대 중반의 건장한 체격이 전형적인 바이킹 후예였다. 특히, 한 사람이 입고 있는 셔츠에 새겨진 글과 그림이 내 눈길을 끌었다. ‘NO PAIN, NO GAIN’ 그런데 나를 더 놀라게 한 건 내가 먼저 말을 건 게 아니라 그들이 거의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는 것.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한국말을 하시는군요. 내가 한국인인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나도 엉겁결에 한국어로 답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줄곧 영어를 썼다. 알고 봤더니 그들도 은퇴자로서 장기 체류자였다. 친구로 보였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당신들은 내가 한국인이란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한국에 관한 뉴스를 많이 보고, 그러다 보니 한국 드라마와 영화도 보게 됐고, 한국인들 얼굴이 익숙해진 겁니다.” 다시 물었다. “한국인과 일본인과 중국인을 구분할 수 있어요?”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어요. 한국인은 눈빛 등 표정이 달라요. 특히 미소를 짓거나 웃을 때 확실히 달라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한국인의 눈빛, 표정, 미소는 내가 생각해도 다른 것 같아요. 아마 한국인 특유의 솔직한 감정표출, 즉 감정을 감추지 못해서 그래요.” 그들도 내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질문을 했다.
“한국말을 좀 배우고 싶은데 너무 어렵습니다. 존칭어와 호칭이 너무 많고 복잡해요.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물론 영어에도 없는 말이거든요.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비법이 있어요. 아주 쉬워요. 딱 두 단어만 알면 돼요. 상대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호칭으로 “~님”자를 붙이면 무난하고, 존칭어로는 말끝에 “~요”자만 붙이면 됩니다. 한번 시도해 보세요. 어떤 한국인이든 좋아할 겁니다. 왜냐면 한국인들은 외국인이 반말을 하지 않는 한 다 이쁘게 봐 주거든요. ~‘님’자와 ~‘요’자만 기억해 두면 돼요.” 영어로 말하자면, ‘Please와 Excuse me만 잘 쓰면 되는 것과 같아요.
[예:부모님, 어머님, 형님, 누님, 아우님, 선생님, 선배님, 사장님, 회장님, 대통령님, 감독님, 기사님 등. 마시고 싶어요, 먹고 싶어요, 좋아요, 싫어요, 피곤해요, 기분이 좋아요, 사랑해요, 오세요, 가세요, 가고 싶어요, 사고 싶어요, 만나고 싶어요,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국이 좋아요…등.]
알고 봤더니 그들은 이미 한국을 다녀온 친구들로부터 한국어의 존칭어와 호칭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포기했다는 말을 들었다. 백번 이해하고도 남았다. 한때 내가 근무했던 직장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봤으니까. 가르치기도 배우기도 제일 어려운 게 존칭어였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너무 많아서 생략함. 단, 한국인은 애든 어른이든 특히 외국인이 반말을 하지 않는 한, 한국어에 대한 공포증(恐怖症)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들의 또 다른 측면은 바로 나이에 대한 것. 대체로 서구인들은 나이를 한국인만큼 중요시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내 나이를 물었다. 내 나이를 말했더니 특히 ‘NO PAIN, NO GAIN’ 셔츠를 입은 친구가 바로 정색(正色)을 하면서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자기보다 일곱 살이 많다는 것이다. 내 나이를 물은 것도 그렇지만 내 나이를 안 뒤 보인 그들의 태도는 이미 한국전통과 문화에 익숙한 듯했다. 헤어질 때도 고개를 숙이는 한국식 인사를 했다.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아니다. 오늘날 大韓民國은 옛날과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다시 옛날로 되돌아간다면 본척만척, 먼저 말을 붙여도 싸늘한 눈길로 내려다볼 것이다.
아무튼, 살다 보니 꿈에도 생각지 못한, 분에 넘치는 호사(好事)를 누린다. 그것도 외국에서. 성공한 大韓民國이 없다면 천만의 만만의 말씀이다. 이처럼 나의 가치와 존재감을 높여주고 행복과 보람을 주는 이런 멋진 나라에 감사하지 않으면 대체 무엇에 감사하란 말인가. 이는 대화를 통해 얻는 값진 선물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세계인들과 대화를 나눠보라고. 그러면 절대로 대한민국을 미워하고 욕하고 망하길 바라지 않게 될 것이며, 오히려 꼭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다짐과 함께 태극기를 자랑스럽고 힘차게 흔들게 될 것이라고. (*의지만 있으면 되는 시대다.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나는 헤어지기 전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어려운 시기(1964~1977)에 우리를 도와준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1964년 박정희 대통령과 정상회담)과 서독 국민의 온정을 잊지 않고 있다고. 당시 약 2만여 명의 광부와 간호사가 파독(派獨)되었고, 그분들이 고국에 송금한 피와 땀의 외화(外貨)가 오늘날 성공한 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됐다는 것. 이를 잊지 않는 뜻에서 당국은 그분들이 대한민국에 재정착할 수 있도록 경상남도 남해에 아름답게 꾸며놓은 독일마을이 있음을 소개했다.
내 말이 끝나자 그들이 말을 이었다. “우리도 당시에 있었던 감동적 장면을 본 적이 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의 광부들과 간호사들 앞에서 연설할 때 두 나라의 대통령과 영부인이 눈시울을 적셨지요. 정말 보기 드문 장면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눈물을 머금고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에게 약속한 것이 있어요. 물론 그 약속은 다 이뤄졌습니다.” 그들은 그 약속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나는 그 약속 내용을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절대로 여러분처럼 나라가 가난해 타국에 나와서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2만 명 이상의 20대 남녀가 간호사로 광부로 독일로 간 것은 달러를 벌기 위해서였다. 오늘날은 다르다. 한국의 수많은 20대 남녀는 독일은 물론 전 세계로 달려나간다. 국제 사회의 리더가 되기 위해서다. 둘 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애국 행위이다. 1인당 개인소득 100달러도 안 된 나라에서 40,000달러를 향해 달리고 있는 세계 유일의 대한민국을 이끄는 동력이다. 이 같은 기적의 나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지도자를 뽑았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망하는 것도 같은 논리이다.
(*참고: 1974~5년, 당시 동교동에 소재한 해외인력사무실 건물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백 명의 파독 광부 지원자들로 붐볐다. 그중 내 군대 동기도 한 명 있었다. 그때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늘날은 정반대이다. 한국에서 돈을 벌려고 오는 지원자들이 이른 아침부터 자국(自國)에 소재한 한국 대사관과 영사관 앞에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을 서 있다. 마닐라 등 동남아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나의 이야기 소재는 언제나처럼 세계인과의 대화에서다. 두 독일인에게 고마운 이유이다. 외국인들과 만나 대화를 나눠보면 볼수록 재확인되는 것은, 국가 지도자 한 명의 애국심과 올바른 사상과 이념 그리고 용기와 정직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온 국민의 운명(運命)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 독일의 히틀러처럼 한순간에 뒤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