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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열국(周遊列國)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다는 뜻으로, 중국 춘추시대에 공자(孔子)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정치적 이상을 펴기 위하여 힘쓴 일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이다.
周 : 두루 주(口/5)
遊 : 놀 유(辶/9)
列 : 벌릴 렬(刂/4)
國 : 나라 국(囗/8)
공자는 56세에 노(魯)나라에서 실각한 뒤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이끌고 노나라를 떠났다. 이후 13년 동안 공자는 제(齊)· 송(宋)· 위(衛)· 진(陳)· 채(蔡)· 조(曹) 등의 여러 나라를 주유하였다. 그러는 동안 광(匡) 땅에서는 포악한 양호(陽虎)로 오인되어 억류당하기도 하였고, 양식이 떨어져 고생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공자는 여러 나라의 제후를 만나 인정(仁政)을 펴도록 유세하면서, 벼슬을 구하여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보고자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BC 484년 69세에 노나라로 다시 돌아왔다. 주유열국은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는 말 속에는 별 소득도 없이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는 것을 풍자하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다.
주유천하(周遊天下)는 천하를 두루 다닌다는 뜻으로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경험하는 행위를 이른다. 두루 여러 곳을 돌아다닌다는 뜻의 주유(周遊)와 한 나라 또는 여러 나라, 온 세상을 뜻하는 천하(天下)가 합쳐진 말이다.
천하를 두루 다닌다는 뜻인 주유천하는 별다른 의미 없이 유람하고 기행하면서 많은 장소와 사람, 문화와 역사를 경험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특정 인물이나 나라에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 곳곳을 방문한다는 의미도 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각기 자신의 사상과 이론을 알리고 설득하러 다닌 행위를 가리키는 유세(遊說)라는 말이 이와 같은 맥락이다. 주유열국(周遊列國)과 비슷한 말이다.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주유(周遊)다. 큰 부담없이 꼭 해야 한다는 목적없이 놀러 다닌다면 늘어진 팔자겠다. 온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으면 주유천하(周遊天下)이다.
동생인 세종(世宗)에 왕위를 물려주려 서민으로 가장하고 세상을 돌아다닌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풍자시의 대가 김삿갓(金笠/ 김립)이 돈의 기능을 절묘하게 노래한 것에도 등장한다. "천하를 두루 돌아다녀도 누구나 너를 환영하고(周遊天下皆歡迎/ 주유천하개환영), 나라도 가문도 흥하게 하니 너의 힘이 가볍지 않도다(興國興家勢不輕/ 흥국흥가세불경)."
목적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 말고 여러 나라(列國)를 돌아다니게 되면 별 소득 없이 떠돈 것은 공자(孔子)에게서 나온 성어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대학자이자 사상가인 공자는 자신이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현실 정치에 접목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모국 노(魯)나라에서 미관말직을 지내다 56세가 되어 형벌을 관장하는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상인들은 폭리를 취하지 않고 남의 물건이 땅에 떨어져도 줍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나라가 안정됐다. 노(魯)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웃나라에서 군주에게 뇌물을 주고 공자를 퇴진시켰다. 실망한 공자는 제자들을 이끌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있는 나라를 찾기 위해 13년 동안이나 헤맸다.
공자의 주유는 순탄하지 못했다. 공자가 초(楚)나라에 초빙되어 갈 때 진(陳)과 채(蔡)나라의 대부들이 길목을 막고 사람들을 풀어 포위했다. 자신들이 행했던 병폐들이 드러나 위험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식량이 떨어지고 따르는 사람이 병에 들기도 한 진채지액(陳蔡之厄)의 봉변이다. 정(鄭)나라에선 제자들과 길이 어긋나 모두 공자를 찾아 나섰는데 한 사람이 초췌한 모습을 보고 '상가의 개(喪家之狗)'라고 표현하는 수모도 당했다.
공자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노나라로 다시 돌아와 후진 교육에 힘쓰게 됐다. 원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주유는 공자도 실패할 정도로 어렵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똑똑하고 지식이 풍부하여도 자신이 뜻하는 바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지혜가 있어야 하며 모든 일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능력에 가장 중요한 운이 따라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주유열국(周遊列國)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다는 뜻으로, 이리저리 소득 없이 돌아만 다닌다는 말이다. 중국 춘추시대에 공자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정치적 이상을 펴기 위하여 힘쓴 일에서 비롯된 성어이다.
노(魯)나라 사람 공자(孔子)는 젊어서 창고 관리나 짐승을 지키는 일 등의 낮은 일을 하다가 나이 50에 비로소 현재(縣宰) 벼슬을 하고, 후에 잠시 노나라의 재상 대리를 했다. 57세에 실각한 뒤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이끌고 노나라를 떠났다.
이후 13년 동안 공자는 제(齊), 송(宋), 위(衛), 진(陳), 채(蔡), 조(曹) 등 여러 나라를 주유하였으나, 그의 주유는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광(匡) 땅에서는 포악한 양호(陽虎)로 오인되어 억류당하기도 하였고(▶ 광인기여여하(匡人其如予何) 참조), 양식이 떨어져 고생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공자는 70여 명의 제후들을 만나 인정(仁政)을 펴도록 유세하면서 벼슬을 구하여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BC484년 69세에 노나라로 다시 돌아왔다. 주유열국(周遊列國)은 여기서 유래하였으며, 별 소득도 없이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는 것을 풍자하는 의미가 있다.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주유(周遊)다. 큰 부담 없이, 꼭 해야 한다는 목적 없이 놀러 다닌다면 늘어진 팔자겠다. 온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으면 주유천하(周遊天下)다. 동생인 세종(世宗)에 왕위를 물려주려 서민으로 가장하고 세상을 돌아다닌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풍자시의 대가 김삿갓 김립(金笠)이 돈의 기능을 절묘하게 노래한 것에도 등장한다. "천하를 두루 돌아다녀도 누구나 너를 환영하고, 나라도 가문도 흥하게 하니 너의 힘이 가볍지 않도다(周遊天下皆歡迎, 興國興家勢不輕)."
목적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 말고 여러 나라(列國)를 돌아다니게 되면 별 소득 없이 떠돈 것은 맞지만 공자(孔子)에게서 나온 성어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대학자이자 사상가인 공자는 자신이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현실정치에 접목하기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모국 노(魯)나라에서 미관말직을 지내다 56세가 되어 형벌을 관장하는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상인들은 폭리를 취하지 않고 남의 물건이 땅에 떨어져도 줍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나라가 안정됐다. 노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웃 나라에서 군주에게 뇌물을 주고 공자를 퇴진시켰다. 실망한 공자는 제자들을 이끌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있는 나라를 찾기 위해 13년 동안이나 헤맸다.
공자의 주유는 순탄하지 못했다. 공자가 초(楚)나라에 초빙되어 갈 때 진(陳)과 蔡(채)나라의 대부들이 길목을 막고 사람들을 풀어 포위했다. 자신들이 행했던 병폐들이 드러나 위험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식량이 떨어지고 따르는 사람이 병에 들기도 한 진채지액(陳蔡之厄)의 봉변이다.
정(鄭)나라에선 제자들과 길이 어긋나 모두 공자를 찾아 나섰는데 한 사람이 추췌한 모습을 보고 '상가의 개(喪家之狗)'라고 표현하는 수모도 당했다. 공자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노나라로 다시 돌아와 후진 교육에 힘쓰게 됐다.
원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주유는 공자도 실패할 정도로 어렵다. 단지 구경만을 위한, 머리를 식히기 위한 여행은 즐겁다. 무전여행이나 해외여행이 늘어난 오늘에도 거창한 목적으로 나간다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공자적위(孔子適衛)의 본말과 그 행정(行程)의 재구성
Ⅰ 緖: 孔子의 周遊列國
Ⅱ 孔子適衛의 원인과 목적
Ⅲ 行程의 전제조건: 대우·경비·도로
Ⅳ 行程의 재구성: 수단·규모·휴대품·거리·기간
Ⅴ 結: 孔子適衛의 의의
국문초록(한글로 논문의 전체적인 개요를 짧게 요약 정리하는 것)
주유(周遊)의 행정(行程)은 당시의 사회, 정치, 역사 등의 여러 요인이 조합되어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의 행정(行程)을 재구성하는 데는 직접적으로는 그의 정치 역정, 나아가서는 그가 추구했던 이념이나 교육사상 등을 이해하고 추론함에 매우 중요한 기초 자료적 의미가 있다.
공자는 주유열국(周遊列國)하는 동안 부단히 군주 및 권력자들을 설득했고, 동시에 현실적 목표를 이루어내기 위해서 현실 권력을 얻고자 했다. 이러한 목표가 위(衛)나라에 머문 기간 내지 전체 주유(周遊) 기간 동안 제대로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공자시대를 역사로 학습하고 이해하는 후세들에게, 무수히 겪고 마주치거나 혹은 앞으로 다가오는 과제를 대하는 데 있어 마땅한 자세와 적절한 교훈을 제시했다는 철학적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춘추전국(春秋戰國) 시기로 말해지는 동주(東周)시대는 다사다난하였다. 정국의 변화가 극심했던 탓에 종법제(宗法制)가 동요(動搖)하였고, 겸병전쟁(兼倂戰爭)이 부단히 확대되었으며, 한편으론 사학(私學)이 흥기(興起)하였고 계급관계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사(士)계층이 출현하였다.
사(士)계층은 종법관계의 속박을 거의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하며 주인(主人)과 예속관계가 없었다. 이때 출현한 가장 주목할 사(士)는 사방을 떠도는 유사(游士; 游說之士)와 무리를 모아 강학(講學)하는 문사(文士; 文人學士)이다. 문사(文士)의 출현은 사학(私學)의 흥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춘추전국 시기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대표인물은 모두 이러한 문사(文士)이다.
춘추전국 이래 사(士)는 유가화(儒家化) 혹은 관료화(官僚化)한 독서인(讀書人)을 지칭한다. 무리를 모아 강학(講學)하는 것은 당시 문사(文士)를 배양하고 문사집단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경로였다. 공자는 노(魯)나라에서 취도강학(聚徒講學)하였는데, 제자가 3천이고 그 가운데 수준 높은 이가 72人이었다 한다. 공자는 바로 유사(游士)와 문사(文士)의 접점에 있거나 혹은 겸직했던 인물이라 하겠다.
뛰어난 능력으로 명성이 높았던 공자는 노(魯)나라 정공(定公)에게 발탁되어 중도주관(中都主管), 사공(司空), 대사구(大司寇) 등의 벼슬을 하였다. 관리로 일하던 시기에 이미 자신의 포부와 재능을 한껏 발휘했다. 사법과 교육의 발전 및 삼환(三桓)을 물리치는 일 등에 노력을 다했으며, 비록 그 효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더라도 그의 정치적 견해는 빛을 발했다.
이후 공자는 노(魯)나라의 군신들과 정치적 견해가 맞지 않아, 55세가 되던 해에 관직을 내려놓고 노(魯)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하기 시작했다. 14년 동안 위(衛), 진(陳), 조(曹), 송(宋), 정(鄭), 채(蔡) 여섯 제후국을 돌아다녔다. 그리곤 68세에 위(衛)나라를 떠나 다시 노(魯)나라로 돌아왔다.
공자가 주유열국한 목적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전도(傳道)이다. 공자는 자신의 학설을 전파하고 확산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둘째, 구사(求仕)이다. 자신의 이상을 전파하고 확산하기 위해선 관직, 즉 권력을 가져야 했던 것이다. 셋째, 학습(學習)이다. 천하라는 세상을 체험하고 파악하고자 하였다. 공자가 관직에 있으면서도 공부해야 함을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글은 공자의 주유열국 가운데 하나인 적위(適衛)를 예로 하여 당시 주유(周遊)의 행정(行程)을 재구성 해보고자 한다. 행정(行程)이라는 이면사(裏面史)는 당시의 사회, 정치, 역사 등의 여러 요인이 조합되어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행정을 재구성하는 데는 직접적으로는 그의 정치 역정, 나아가서는 그가 추구했던 이념이나 교육사상 등을 이해하고 추론함에 매우 중요한 기초 자료적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적위(適衛)를 논하기 앞서 먼저 공자가 왜 노(魯)나라를 떠나게 되었는지를 따지는 것도 논의의 순서상 의미가 있다. 그가 노(魯)나라를 떠나게 된 데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종법제(宗法制)에 충실했던 노(魯)나라는 관직과 봉록(封祿)을 세습하는 이른바 세경세록(世卿世祿)의 제도와 친친(親親)관념이 매우 확고했는데, 공자는 물론 그 제자들도 대부분 이성(異姓)이었기에 공자와 그의 사학(私學)은 노(魯)나라의 체제 안에 들어가기가 여의치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 공자가 제시한 인(仁)의 사상 내지 애인(愛人) 관념도 대체로 이러한 사회의 실상에 대한 반발 내지 호소의 산물이거나 혹은 그러한 체제와 융합할 수 없게 만든 결정적 이유였다고 생각된다.
둘째, 노(魯)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로서 공자는 국가와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세 귀족의 도읍, 즉 계손씨(季孫氏)의 비읍(費邑), 숙손씨(叔孫氏)의 후읍(郈邑), 맹손씨(孟孫氏)의 성읍(成邑)을 허물었는데, 이것이 세경세록(世卿世祿)에 의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귀족들과 충돌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요인들이 공자로 하여금 노(魯)나라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눈을 돌리게 한 핵심적 요인이라 하겠다.
한편, 공자가 노(魯)나라를 떠나 주유(周遊)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각국이 국력 강화를 위해 경쟁적으로 현인책사(賢人策士)를 초빙하는 상황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예(例)를 들어보자. 기원전 651년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제후를 규구(葵丘)로 불러모아 회맹(會盟)을 행했다. 이를 '규구(葵丘)의 회(會)'라고 하는데, 춘추시대의 회맹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이때의 맹약 내용이 <맹자>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제2조: 현인을 존경하며, 재능있는 사람을 키우며, 우수한 사람을 빛나게 한다. 제3조: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멀리서 온 사람이나 여행자에게 마음을 쓴다. 여기서 보듯, 노(魯)나라를 떠나서도 다른 나라에서 얼마든지 예우를 받으며 자신의 경륜을 펼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그러한 환경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공자는 늦은 나이에도 과감히 주유(周遊)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주유(周遊)에 나섰던 14년 간 공자는 위(衛), 조(曹), 송(宋), 정(鄭), 진(陳), 채(蔡) 등의 국가에 머물렀는데, 그 중 유독 위(衛)나라는 가장 처음 들렀을 뿐 아니라 여러 번 거쳤고, 게다가 전후 근 10년 동안 머물렀다. 따라서 그의 주유열국(周遊列國)의 주요한 활동은 사실상 위(衛)나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공자의 위(衛)나라에 대한 기대와 의지가 지대했던 까닭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노(魯)나라와 위(衛)나라는 모두 은(殷)의 문화와 전통 및 풍속 내지 정치와 제도 등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둘째, 위(衛)나라에는 노(魯)나라에서 얻기 어렵거나 이룰 수 없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기회와 여지가 있었다.
먼저 첫 번째 내용을 보자. 위(衛)나라는 원래 주(周)의 일족(一族)이었던 강숙(康叔)이 봉건 받은 나라로, 은(殷)의 옛 땅을 받았기 때문에 하남성 조가(朝歌) 부근에 수도를 두고 있던 중요한 나라였다. 좌전(左傳)에 의하면, 강숙(康叔)이 분봉받은 땅은 무부(武父)의 남쪽으로부터 정(鄭)나라 포전(圃田)의 북쪽 경계까지로 되어있다.
무부(武父)는 현재 하북성 대명현(大名縣)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이고, 포전(圃田)은 현재 하남성 중모현(中牟縣)의 서북지역이라 한다. 안양(安陽)에서 하남성 급현(汲縣) 일대에 걸친 은(殷)의 옛 영지가 바로 위(衛)나라의 영토였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위(衛)나라 또한 노(魯)나라와 마찬가지로 은(殷)의 구지(舊地)이다.
나아가 노(魯)나라와 위(衛)나라는 모두 주천자(周天子)의 동성(同姓; 姬姓)국인 점, 두 나라는 모두 상(商)나라 때 도읍이 세워진 곳이기에 은민(殷民)이 아주 많다는 점, 두 나라는 모두 상족(商族)의 풍속과 주(周)나라의 법령을 따르는 등 국가정책이 같다는 점, 두 나라는 모두 동성불혼(同姓不婚)이라는 혼인풍속을 공유한다는 점, 두 나라는 모두 서주(西周)의 종법제와 분봉제를 따른다는 점 등 상동(相同)하는 점이 많았다.
또한 공자 스스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정치는 형제와 같다"는 말을 했을 뿐 아니라, 여러 나라를 유력하면서 여의치 않을 때는 항상 위(衛)나라로 돌아 갔던 사실을 보더라도 위(衛)나라에 대해서는 깊은 친밀감을 가졌던 것이다.
또한 위(衛)나라에는 공자의 든든한 제자인 자로(子路)의 처형(妻兄), 안탁추(顔濁鄒)가 대부(大夫)로 있었고, 처음 위(衛)나라에 도착해서도 그의 집에 기거했다. 그의 제자 자공(子貢)도 위(衛)나라 사람이다. 이러한 점들은 공자가 위(衛)나라에 거주하는데 있어서 심리적 안정과 생활의 편리를 보장해 주었으리라 추정된다.
노(魯)나라와 위(衛)나라가 모두 상(商)의 전통과 핏줄을 계승하였다는 점은 공자에게 매우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공자는 서주(西周) 뿐 아니라 상(商)의 문화까지 전승하려는 생각을 가진 점으로 보아 같은 문화전통을 가졌을 뿐 아니라 동일한 도량형 체계까지 가진 위(衛)나라에 심정적인 동질감과 친밀감을 가졌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어 두 번째 내용을 보자. 노(魯)나라와 위(衛)나라는 모두 주천자(周天子)와 동성(同姓) 국가이긴 하지만, 노(魯)나라가 좀 더 폐쇄적으로 동성(同姓) 위주의 세경세록제(世卿世祿制)를 유지하여 독점적 권력을 유지한 반면 위(衛)나라는 일찌기 적인(狄人)의 침략을 많이 당했을 때 이성(異姓)과 공동으로 방어했던 전력(前歷)이 있어 이성(異姓)의 세력을 허락하고 이성(異姓)이 국가 요직을 맡게 하며 그들이 스스로 무장하는 것 또한 허용하였다.
위(衛)나라에서 가장 유력한 이성(異姓)은 석씨(石氏)와 공씨(孔氏)였다. 따라서 노(魯)나라에서 이성(異姓)이었던, 그리고 재능만큼은 출중했던 공자에게 위(衛)나라가 가장 나은 기회의 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위(衛)나라를 택한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노(魯)나라보다는 위(衛)나라에 거처하는 편이 공자가 정치적 지위를 담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컸다는 데 있다.
또한 공자시대 위(衛)나라의 상황은 공자가 위(衛)나라에 거처하는데 매우 우호적인 조건이었다. 당시 위(衛)나라는 정치 군사적으로 안정 되었으며, 경제적으로 비교적 부유했고, 현자(賢者)들도 많았으며, 널리 현사(賢士)들을 초빙하던 때였다.
공자의 주유열국(周遊列國), 혹은 최소한 적위(適衛)라는 행정(行程)에는 여러가지 전제조건을 살펴봐야 한다. 시기로 보아도 지금으로부터 물경 2,500여 년 전의 행정(行程)이며, 게다가 그것은 조촐하거나 짧은 시간의 나들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적위(適衛)라는 행정(行程)이 가능했으려면 일정한 물적 조건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경비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도로상황이다.
어느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많은 인원이 장시간 이동함에는 많은 경비가 소요됐을 것이 분명하다. 공자는 그러한 경비의 지출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먼저 공자의 재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衛)나라로 가기 전까지 공자는 노(魯)나라의 관직에 있었다. 그간 공자가 거친 지위와 대우들을 보자. 35세: 季氏와 孟氏의 중간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았다. 50세: 중도(中都)의 재(宰)에서 사공(司空)이 되었고, 다시 사공에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51세: 재상(宰相)의 일을 임시로 보았다. 56세: 대사구(大司寇)로부터 재상(宰相)의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노(魯)나라에서 대략 6년 이상 대사구(大司寇)의 신분이었다.
중국 고대 관리(官吏)의 봉록(俸祿)은 주로 토지(土地), 실물(實物), 전폐(錢幣) 등의 형식으로 지급되었다. 상주(商周) 시기는 관직과 작위가 일치하였던 시기로, 이때의 봉록은 토지의 형식이었고 이는 세습되었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기 말(末)에는 관리의 봉록이 주로 실물로 지급되었다.
당시는 주대(周代)의 봉건제, 즉 작위와 봉록의 세습제가 무너지고, 각 제후국은 쟁패(爭霸)를 위해 유능한 현사(賢士)를 선발하여 임용하였는데, 선발된 관리들은 고용의 방식으로 임용되었고, 그들은 맡은 바 직분의 고하(高下)에 따라 차등의 실물<粟>을 봉록으로 지급받았다.
예컨대 공자는 노(魯)나라의 대사구(大司寇)로 임명되었을 때 년봉으로 粟 6萬을 받았고, 나중에 위(衛)나라에 갔을 때에도 같은 6萬의 粟을 연봉으로 받았다. 여기서 먼저 粟(속)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살펴보자. 사전적으로 粟은 다음 두 가지를 지칭한다. 첫째, 黍(메기장), 稷(차기장), 粱(기장), 秫(차조)의 총칭이다. 둘째, 脫穀하지 않은 곡식의 범칭이다. 또는 粟은 黍(메기장), 稷(차기장)의 낟알이거나 혹은 양식의 총칭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낟알에서 겉겨를 벗겨내지 않은 걸 粟(속)이라 하고, 겉겨를 벗겨낸 것은 米(미)라 하는데, 중국의 경우 米가 북방에선 대개 粟米(속미; 좁쌀)를 말하고 남방에선 대개 稻米(도미; 쌀)를 가리킨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하면, 공자는 양자강 이북에 살았으므로 그가 봉급으로 받은 粟은 탈곡하지 않은 좁쌀 유형의 여러 양곡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粟六萬(속육만)에서 六萬의 단위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당(唐)나라의 장수절(張守節)에 의하면, 공자가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서 봉록으로 받았던 粟六萬의 단위는 斗(두)이며, 粟 6萬斗는 당(唐)나라의 기준으로 2천석이다. 당(唐)나라의 1石은 60升(승)이고, 이는 좁쌀 45kg을 담을 수 있는 용량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받은 6萬斗는 지금으로 치면 90톤에 해당한다.
주례(周禮)에, 한 사람의 성인이 한 달에 4鬴(부)의 좁쌀을 소비하면 대식(大食)이고, 3鬴의 좁쌀을 소비하면 중식(中食)이며, 2鬴의 좁쌀을 소비하면 소식(小食)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鬴(부)는 釜와 통하며, 주대(周代)에 1釜(부)는 64升(승)이다. 당시 1升(승)은 대략 187.6ml이니, 1釜(부)는 지금의 12升(승)에 상당하며 좁쌀 9kg 정도를 담을 수 있는 분량이다. 주(周)나라 때 중간 정도의 식사량을 가진 성인이 매월 평균 3釜, 즉 27kg의 좁쌀을 소비한다면 하루에는 0.9kg의 식량을 필요로 한다는 얘기다. 이러한 양은 현대인의 식사량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공자가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서 1년에 90톤의 좁쌀을 받았을 때, 이는 대략 280人이 1년을 먹을 수 있는 양이며, 한 사람이 소비한다면 대략 280년을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이러한 계산으로 보면, 노(魯)나라에서의 대사구(大司寇) 시절 년봉이 粟六萬이었고 위(衛)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의 년봉을 계속해서 받았으니, 공자가 축적한 재산 및 당시 현직에 의한 수입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자는 본인의 재력 이외에도 제자들의 경비보조를 행정(行程) 여비에 충당했다.
크게 부유한 제자로 알려진 자공(子貢)은 기원전 520년에 태어났으니 공자(孔子)가 기원전 479년 위(衛)나라로 처음 주유(周遊)를 떠났을 때는 불과 23세였다. 당시엔 아직 무역업을 하기 전이라 공자의 행정(行程)에 재정적으로 기여한 바는 없다고 봐야한다.
하지만 기원전 489년(이때 자공은 31세)에 자공이 공자의 행정(行程)에 재정적 도움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바, 이후엔 무역업으로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추고 공자의 주유(周遊)를 재정적으로 보조했을 수도 있다. 또 공자를 수행한 제자 중 공량유(公良孺)라는 자가 개인용 수레 다섯 대로 공자를 모셨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공자의 행정 경비 소요에는 당시 노나라 귀족들의 도움도 있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의 기록에 의하면, 노나라 대부 계손(季孫)이 공자에게 1,000종(鍾)의 곡식을 찬조했다 한다. 1鍾은 6斛4斗50)로 계산되니, 1,000鍾은 64,000斗에 해당하며 이는 공자가 노나라 대사구 시절이나 위나라에 가서 받았던 대우인 粟六萬斗와 대등하다. 이 역시 대략 좁쌀 90톤에 해당하는 양이다. 그의 식솔 몇 십 명이 몇 년 간 먹을 식량인 것이다.
다음으로 당시의 도로사정을 살펴보자. 하(夏)에서 서주(西周)까지 39개에 불과하던 도시가 동주(東周)시대에는 428개로 증가했다. 이 많은 도시국가들이 전쟁, 외교, 통상 등 방면에서 얼마나 많은 접촉을 했을지는 능히 짐작이 된다. 춘추시대에는 열국(列國)간에 회맹(會盟)과 전쟁이 빈번했다는 점에서 국가 간 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었음은 자명하다. 대규모 전쟁을 위해서라도 戰車가 다닐 수 있게끔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어야 했다.
예컨대, 국어(國語)에는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동서남북의 사방을 정벌하려고 할 때 각각 어떤 나라로부터 군수 물자를 공급받도록 하는 것이 좋겠는가를 관중(管仲)에게 묻는 대목이 나온다. 관중은 주변의 나라를 열거하며 구체적인 방책을 제시하고, 관중의 말을 따라 제(齊)나라는 사방의 나라들과 친하게 지냈고, 향후 질서가 어지러운 나라들을 무수히 정벌하였다.
당시의 정벌과 전투 정황을 유추해보면 춘추시기의 나라들은 군사와 물자 이동이 충분할 정도의 교통여건이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위 대목에서 군수물자를 공급받을 나라로 관중이 제시한 나라에 남쪽으로 노(魯)나라와 서쪽으로 위(衛)나라가 해당되었다는 사실은 제(齊)나라에 인접한 노(魯)와 위(衛) 두나라 역시 교통은 연결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상(通商)도 주목할 부분이다. 춘추시대의 상업활동은 몇몇 도시와 시장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열국(列國)의 병립과 더불어 형성된 지역문화권의 성립과 소비시장의 형성은 상인의 활동과 상품의 유통범위를 크게 확대시켰다.
이 때문에 도로도 발달했으며, 정비와 보수가 수시로 행해졌고, 교통의 요충지에는 여관도 있었으므로 상인의 원격지 왕래와 각지의 물산교류가 가능케되어 마침내 상인의 활동은 각국의 통치영역을 넘어서 전 중원으로 확대되었다. 춘추시대 상업의 발달도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음을 반추해 볼 수 있는 점이다.
경비를 충당할 재력도 갖췄고 사통팔달의 도로사정도 여건을 충족했다. 행정(行程)의 기본적인 전제는 마련된 셈이다. 이제 적위(適衛)의 행정은 어떤 이동수단을 사용했고, 수행인원을 포함한 이동규모는 어땠으며, 어떤 물품들을 휴대했고, 이동거리와 기간은 어떠했는지 등 구체적으로 그 행정(行程)을 재구성해 보자.
먼저 이동 수단을 보자. 공자 일행은 어떤 이동수단을 이용했을까? 당시 국가간 전쟁은 대개 전거(戰車)에 의해 수행했고 전차의 이동을 위해 도로를 잘 정비했는 만큼, 공자 일행도 거(車)를 이용했음은 자명하다. 차(車)로 이동하는 데는 많은 경비가 소요되나 앞서 보았듯이 경비조달도 문제 없고, 또한 도로사정도 무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탔던 차는 마차(馬車)일까? 아니면 우차(牛車)일까? 고대에 말(馬)은 사람이 타는 것이 아니라 거(車)를 끄는 데 사용됐다. 말은 전국시대 중기 이전까지는 다만 거(車)를 끄는 데만 쓰였다. 사람이 말을 탄 것은 전국시대 중기 이후이다. 이때문에 거마(車馬)는 대개 연용해서 쓰며, 혹은 승마(乘馬)라고도 칭했다.
여기서 승마(乘馬)는 마차를 탐을 의미한다. 거(車)는 사람이 타는 거실(車室)과 바퀴가 있는 탈것을 말한다. 고대의 거(車)는 통상 말이나 소가 끌었으며, 사람이 끄는 거(車)는 따로 연(輦)이라 불렀다. 연(輦)은 진한(秦漢) 이후로 황제가 타는 가마를 일컫게 된다.
춘추시대 이전 거(車)의 용도와 명칭은 운수(運輸; 田車), 탑승(乘車), 전투(兵車)로 분류할 수 있다. 병거(兵車)는 또한 치거(馳車), 경거(輕車), 혁거(革車)로 불렸으며, 운수화물을 담당하는 전거(田車)는 중거(重車), 대거(大車), 우거(牛車)로 불렸다. 따라서 화물을 운송하는 거(車)는 우거(牛車)이고, 사람이 타는 차, 즉 승거(乘車)는 마차(馬車)임을 알 수 있다.
병거(兵車) 즉 전차(戰車)는 말 네 필이 끌고 덮개가 없다. 승거(乘車)는 단원(單轅)도 있고 쌍원(雙轅)도 있으며, 말 한 필이 끄는 것과 말 두 필이 끄는 것이 있고, 일반적으로 덮개가 있다. 대거(大車) 즉 우거(牛車)는 통상 소 한 마리가 끌었다. 대거(大車)는 단거리 수송용이고, 장거리 운송용은 치거(輜車)이다.
치거는 장거리 행군이나 여행에 필요한 식량과 마초(馬草), 야영, 천막, 의복, 무기 등을 실어 나르며, 바람이나 비로부터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해 장막이 둘러처 있기에 밤에 일꾼들이 그 안에서 누워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공자가 적위(適衛)할 때는 장거리여행이므로 치거(輜車)가 짐을 날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공자가 탔던 수레가 우거(牛車)가 아닌 마차(馬車)였다는 점은 여러 전적(典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노(魯)나라 남궁경숙(南宮敬叔)이 공자와 주(周)나라로 가 노자(老子)에게 예(禮)를 물으러 가고자 했을 때, 노(魯)나라 군주는 공자에게 수레와 말 두필을 내주었다는 기사가 사기(史記)에 나온다. 노(魯)나라 군주가 교통 편의를 위해 마차(馬車)를 제공했다는 것인데, 마차로 이동하는 것이 당시 실황임을 말해준다. 공자 역시 나중에 주유할 때 마차를 이용했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또 논어(論語)에는 당시 이동수단의 상황과 공자의 형편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자화(子華; 公西赤의 字)가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 염자(冉子)가 자화의 모친을 위하여 곡식을 청하자, 공자가 말했다. "釜(6斗4升)만큼 주어라." 더 주기를 청하자 공자가 말했다. "庾(16斗)만큼 주어라." 염자가 곡식 五秉(1秉은 160斗)을주니, 공자가 말했다. "공서적(公西赤)이 제(齊)나라에 갈 때 살진 말이 끄는 마차를 타며 가벼운 갖옷을 입었는데, 군자는 급한 사람은 도와주고 넉넉한 사람을 더 부유하게 해주진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여기서 이 글의 논지와 관련해 알 수 있는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 공자는 재산 관리를 할 정도의 재력을 갖췄다. 둘째, 당시 식량의 총칭이 粟이다. 셋째, 먼 거리를 이동할 때는 마차를 탔다.
한편, 논어의 다른 기사에 '공자가 위나라로 갈 때 염유가 복(僕)의 역할을 했다'는 대목이 있다. 복(僕)은 노역(勞役)을 제공하는 자이다. 복(僕)은 집에 있을 때는 주인에게 노역을 하고 밖에 나가서는 주인의 마차(馬車)를 몬다. 따라서 염유복(冉有僕)의 의미는 '염유가 마차를 몰았다' 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공자가 적위(適衛)의 행정에 마차를 타고 갔음이 확인된다.
공자가 마차(馬車)를 이용했음을 알려주는 간접적인 예도 있다. 공자가 주유 중 위(衛)나라에 갈 때 그간 단골로 이용했던 여관 주인의 상(喪)을 맞았는데, 이 때 공자는 자신의 마차(馬車)를 끌던 네 필의 말 가운데 한 필을 부의(賻儀)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나라 간 이동시 여관을 이용했다. 공자는 말 한 필을 부의(賻儀)할만큼의 친교가 있을 정도로 자주 이용했다. 둘째, 공자가 타고 다닌 마차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였다. 고대의 마차는 일반적으로 말 두 필이 끄는 거(車)이나, 말 세 필과 네 필이 끄는 거(車)도 있었다 하니, 공자가 탄 말 네 필이 끄는 마차(馬車)는 상당한 고관급 규모임을 알 수 있다. 그밖에 전해지는 도상자료에 의해서도 공자가 마차를 이용했음이 확인된다.
한편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에는 공자가 우거(牛車)를 타는 그림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오류라 할 것이다. 특히 그림에서는 사람이 말을 직접 타는 묘사까지 있는데, 당시 상황에 대한 왜곡이 상당하다 아니 할 수 없다.
다음으론 수행 인원을 포함한 이동 규모를 알아보자. 공자의 주유는 일시적인 여행이 아니라 기약없는 여정이었기에, 그는 가족을 동반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공자의 부인 기관씨(亓官氏)는 주유(周遊)를 끝내고 노(魯)나라로 돌아오기 1년 전 위(衛)나라에서 졸했고,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는 노(魯)나라로 돌아온 다음 해에 49세로 졸했다. 그리고 공자의 손자 공급(孔伋; 字가 子思)은 공리(孔鯉)가 죽은 그 해에 노(魯)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렇다면 공자가 주유(周遊)할 때 함께 했던 일가는 공자, 부인 기관씨, 아들 공리, 공리의 처 등 네 식구로 추정된다. 그밖에 제자 여럿, 일부 제자의 가족, 하인 및 인부 등이 행정(行程)의 구성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공자의 14년 주유(周遊) 기간 동안 함께한 제자, 안로(顏路), 안회(顔回), 자공(子貢), 자로(子路), 염구(冉求), 공서화(公西華), 재여(宰予), 자장(子張), 공량유(公良孺), 안각(顔刻) 등과 그의 일부 가족, 그리고 그들의 수행원까지 감안하면 행정(行程) 규모는 작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자는 '子適衛(자적위), 冉有僕(염유복)(論語 子路)'의 내용에서 보듯 승거(乘車)가 분명하고, 자공이나 공량유 같은 제자들 역시 승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안회는 마차가 없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제자의 마차에 동승했을 것이다.
공자가 한 때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의 대부(大夫)들에 의해 들판에서 포위된 적이 있었다. 이 때 공자는 가고자 했던 초(楚)나라로 가지 못하고 식량도 떨어졌으며 시종하는 자들이 병들어 잘 일어서지도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시종하는 자들을 대동했으며 식량 및 기타 물품도 운반해 가지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00명이 한 단위가 되는 전거(戰車)의 규모에 75명의 병사 뿐 아니라 25명의 밥짓는 이, 의복 수선하는 이, 말을 관리하는 이, 나무하고 물긷는 이 등이 3명당 1명꼴로 수행했음을 볼 때, 척박한 변경을 가로지르는 공자의 행정에도 역시 같은 양상의 적지 않은 필수 인력이 동행했을 것이다.
공자의 가족, 제자 및 그들의 가족, 그리고 그들을 수행할 시종들을 대략 30명 정도로 가정했을 때 인부들은 10명 정도가 동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공자 행정의 규모는 인원 40명, 마차(馬車) 7대(공자 및 그 가족 2대, 제자 및 그 가족 5대), 우거 3대(이사물품 1대, 식량 1대, 취사도구 등 기타 물품 1대)로 추정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공자의 행정엔 어떤 물품들을 휴대하고 이동했을까? 일상적인 이사물품에 더해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가지고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들은 대략 의류, 침구류 등 생활용품과 식량, 취사도구, 마차 부품, 무기, 화폐 등 여행용품이라 상정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화폐이다. 거처를 옮기는 것이기에 재산을 모두 정리해 가지고 갔을 것이나, 녹봉으로 받았던 그 많은 좁쌀을 모두 현물로 가지고 갔을 수는 없다. 무게와 부피가 상당하기 때문에 이동경비에 무리를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물은 위(衛)나라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화폐로 바꾸어 휴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춘추시대 후기부터 상업활동이 발흥(勃興)했는데, 상업이 점점 확대되자 이에 조응(照應)하여 화폐도 동시에 발전했다. 춘추 후기엔 이미 동주(銅鑄) 화폐가 출현했다. 춘추시대엔 각국이 자기나라의 주조화폐를 사용했으며 모양은 같지 않았다. 화폐제의 다양화는 교환이 빈번했음을 반영한다.
서주(西周) 말기부터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동전이 삽, 칼, 고리 모양을 하게 되는데, 이는 원래 제사와 전쟁에 사용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상업적 가치를 갖게 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현상이다. 춘추전국시대 각지에 유통됐던 화폐는 도(刀), 포(布), 전(錢), 금(金)이었는데, 그 중 포(布)가 유통됐던 지역은 황하(黃河) 중간지대로서 위(衛), 정(鄭), 진(晉), 송(宋) 등 상업교환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여기서 포(布)는 포필(布疋)이 아니라 포폐(布幣), 즉 산형(鏟形)의 동(銅)으로 주조(鑄造)한 농기구 중 하나인 박(鎛)의 형상을 한 화폐이다. 다만 논어에는 마(馬), 거(車), 속(粟), 경구(輕裘) 등으로 재력을 보여주는 곳은 있지만 화(貨)에는 간단한 개인 생활도구만을 휴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폐(幣)로 재력을 나타내는 사례는 없다. 당시는 실물교환 위주였으며 화폐교환은 그 다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보다 약간 후대에 자공은 크게 부(富)를 쌓았는데, 그를 묘사할 때의 기록에는 이제 화폐(貨幣)로 재부(財富)를 묘사하고 있다. 이로써 볼 때, 공자 당시엔 물론 실물 위주였지만 실물과 화폐 모두 태환(兌換)의 도구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공자가 휴대한 재산은 어떤 종류였을까? 공자가 자기 재산으로서의 그 많은 식량을 모두 가지고 다녔을 수는 없지만, 적위(適衛) 당시 공자가 재물인 속(粟)을 모두 화폐로 교환하여 휴대했다고도 볼 수는 없다. 일정 부분은 실물을 휴대했다고 봐야한다.
당시 화폐는 세 종류이다. 첫째, 포폐(布幣), 동패(銅貝), 도폐(刀幣), 원전(圓錢) 등의 동폐(銅幣)와 둘째, 포필(布疋)와 셋째, 황금(黃金)이다. 그런데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취속백(取束帛)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걸로 봐서 당시 공자가 휴대했던 화폐의 한 종류는 포필(布疋)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당시 각국을 넘나들면서 상거래를 했던 상인들은 화폐의 발행처를 가리지 않고 함께 사용했다는 점에서, 공자의 일행은 휴대하기 간편하고 태환(兌換)에도 문제가 없던 화폐도 다량 휴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화폐의 종류는, 앞서 보았듯이, 위(衛)나라에서는 유통되었던 포폐(布幣)였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만국(萬國)에서 재물로서의 가치가 있는 곡식으로서의 속(粟) 또한 일부 가지고 다녔을 것으로 짐작된다. 행정(行程) 도중에 식량으로도 쓰일 수 있는 등 다목적 효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 종합해 보면, 공자가 휴대했던 재산의 내용물은 실물로서의 속(粟)과 포필(布疋), 그리고 화폐로서의 포폐(布幣) 등 세 가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적위(適衛) 행정(行程)의 이동거리와 기간을 살펴보자. 공자적위(孔子適衛)의 여정은, 노나라의 곡부(曲阜)에서 출발하여 위(衛)나라의 제구(帝丘)까지 가는 길이다. 곡부(曲阜)는 그대로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曲阜市)이고, 제구(帝丘)는 지금의 하남성 화현(滑현)이다. 이 두 지점을 이동하는 데엔 대략 245km이며 도보로 50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공자 일행은 마차(馬車; 공자 등), 우거(牛車; 물품 적재), 도보(하인과 인부)라는 세 종류의 이동방식이 함께 움직였다. 여기서 가장 늦는 것은 우거(牛車)였을 것이니, 행렬 자체는 소의 걸음에 속도를 맞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소의 작업속도는 부리는 사람과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대체로 논을 갈 때의 속도는 0.5m/sec, 달구지를 끌 때와 걸어갈 때는 0.8~1m/sec정도이다. 도보 속도를 계산하면 1.36m/sec에 해당한다. 소걸음보다 빠른 편이다. 하지만 이동시 사람의 걸음 속도와 마차(馬車)의 속도는 어쩔 수 없이 우거(牛車)의 속도에 맞춰야 한다.
또 그 당시는 아무래도 길이 지금처럼 평탄하지 않았을 터니, 도로 사정을 감안하여 소가 달구지를 끌거나 걸어갈 때의 속도를 평균보다 느린 0.5m/sec 정도로 가정한다면, 245km를 가는 데엔 최소 136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러나 또한 사람이든 우마(牛馬)든 쉬지 않고 갈 수는 없을 터이니, 일행이 하루에 8시간 정도 이동했다면 노(魯)나라를 떠나 위(衛)나라까지 가는데 산술적으로 최소 17일은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여기에 현장 도로상황, 날씨상황, 사람이나 우마(牛馬)의 건강상황, 마차(馬車)나 우거(牛車)의 고장수리 상황 등 여러 변수를 고려하면, 실제 행정(行程) 기간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역참(驛站)이라는 요소를 하나 더 고려해야 한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古代)에 사람들의 왕래나 공문(公文)의 전달 및 정보의 소통 등은 주로 국가가 설치한 역참에 의존했다.
역참은 주요 교통선상의 일정 거리마다 설치한 관사(館舍)이다. 이러한 관사는 공문을 전달하거나 상업활동 등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차량, 마필(馬匹)의 교환 등의 일을 담당했다. 이러한 역참이 점점이 연결되어 사람과 정보를 먼 곳까지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춘추전국시기 역참의 명칭은 사(舍)로 불렸는데, 사(舍)는 30里 즉 12km마다 설치되었기에 또한 사(舍)는 거리의 명칭이기도 했다. 도로를 오가는 사람을 위한 관사(館舍)가 있었음이 국어(國語)에 여러 군데 보인다.
또한 관사의 설치는 매우 구체적인 규정에 따라 시행되었다. 십리(十里)마다 여(廬)가 있고, 삼십리(三十里)마다 숙(宿)이 있으며, 오십리(五十里)마다 시(市)가 있다. 숙(宿)에는 노실(路室)이 있고, 시(市)에는 후관(候館)이 있다. 십리마다 여(廬)가 있는데, 여(廬)에서는 음식(飮食)을 제공했다.
여(廬)에서는 식사만 하고 잠을 자려면 숙(宿)에 가야 했으므로, 하루에 적어도 30里 즉 12km를 이동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보(牛步)의 속도로 6.7시간을 쉼 없이 가야 하므로, 쉬는 시간 등 어느 정도 여유를 감안해서 대략 하루 도보 이동을 기준으로 한 숙소 설치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곡부(曲阜)를 떠나 제구(帝丘)까지 245km를 하루 12km씩 이동했을 경우 대략 20일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4km마다 음식을 먹을수 있는 여(廬), 즉 휴게소가 있으므로 음식 준비를 위한 식량이나 도구는 완전히 구비해 다니지 않아도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비상시 사용할 식량과 취사도구, 의복수선, 차량 수리도구 등을 적재하여 가지고 다녔을 것이며, 또한 그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는 인원 등이 종자(從者)로 수행했으리라 생각된다.
충분한 경제적 역량과 훌륭한 도로사정 등 양호한 내외적 조건 아래, 공자는 부인 기관씨(氏), 아들 공리(孔鯉), 공리의 처 등 식구와 안로(顏路), 안회(顔回), 자공(子貢), 자로(子路), 염구(冉求), 공서화(公西華), 재여(宰予), 자장(子張), 공량유(公良孺), 안각(顔刻) 등 제자들 및 그들의 일부 가족 약 30명 정도, 그리고 취사, 의복수선, 차량 수리, 기타 사역 등을 담당한 하인 및 인부 등 약 10명 정도 등 대략 총 40명의 인원이 마차(馬車) 7대에 나눠 타거나, 의류, 침구류 등 생활용품과 식량, 취사도구, 마차 부품, 무기, 속(粟)과 포필(布疋)과 포폐(布幣)의 세 가지 화폐 등 물품을 우거(牛車) 3대에 나눠 싣고 끌거나 일부는 따라 걸으며, 노(魯)나라의 곡부(曲阜)에서 출발하여 위(衛)나라의 제구(帝丘)까지 245km를 4km마다 여(廬)에서 음식을 먹고 하루 12km씩 이동하여 숙(宿)에서 잠을 잔 후 대략 20일이 걸려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이것이 공자 일행의 적위(適衛) 행정(行程)이다.
역사는 이러한 행정(行程)들의 총합을 주유(周遊)라 말한다. 그 주유는, 그 세세 구간으로서의 행정은, 고난의 여정이었을까? 혹독한 시련이었을까? 이제까지 살펴본 적위 행정을 보건대, 그렇진 않았을 것 같다. 달콤한 삶이 있는데도 쓰라린 고행(苦行)을 택했던 것이 일단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자의 주유는 막다른 선택이었다. 게다가 살펴본 대로 공자의 행정은 호화롭지 못했을지언정 전혀 궁핍하거나 처절하진 않았음이 확실하다. 물론 고통이냐 행복이냐의 느낌은 공자의 몫이고, 그 확실함의 단정은 필자의 몫이긴 하다. 하지만 이상의 미시적 관점과는 별도로 공자의 주유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시각은 분명 존재한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공자는 주유하는 동안 구사(求仕)와 행도(行道) 방면에서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일단 위(衛)나라에 머무는 기간 동안 공자 본인은 노(魯)나라에서와 같은 대우로 자문만 했지 실제 관직을 맡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여러 많은 직책을 맡았다. 그러는 과정 중 공문(孔門)의 이상과 정책방안 및 도덕이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위(衛)나라에 체류했을 때 및 다른 나라를 주유(周遊)할 때는 공자의 제자들, 특히 정치에 주력한 제자들에게 아주 관건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이때의 공자는 비교적 여유가 많았기 때문에 제자들과의 교류도 많아졌고, 또한 유력(遊歷)하는 기간 동안 실제 사건이나 경험 등 견문이 많아져 교육적인 효과도 아주 좋았다. 이 때 공자를 수행했던 제자들은 공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의 추천에 의해 차례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춘추시기 공자의 현실적 정체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치가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자이다. 정치를 통해서든 교육을 통해서든, 그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이다. 이 목표 또한 현실에서 구현해야할 당면 과제이다.
당시 공자에게 이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방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군주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설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현실 권력을 가져 목표를 실현하는 것이다. 공자는 주유열국(周遊列國)하는 동안 부단히 군주 및 권력자들을 설득했고, 동시에 현실적 목표를 이루어내기 위해서 현실 권력을 얻고자 했다. 이것이 스스로도 현실권력, 즉 관직에 오르고자 했던 이유이고, 나아가 제자들도 벼슬을 함으로써 이상을 구현할 수 있게끔 유도하고 권유했던 동기이다.
이러한 목표가 위(衛)나라에 머문 기간 내지 전체 주유 기간 동안 제대로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공자 시대를 역사로 학습하고 이해하는 후세들에게, 무수히 겪고 마주치거나 혹은 앞으로 다가오는 과제를 대하는 데 있어 마땅한 자세와 적절한 교훈을 제시했다는 철학적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또한 현실에서 패배자였던 공자를 역사적으로는 승리자로 만든 연유이기도 하다.
▶️ 周(두루 주)는 ❶회의문자로 週(주)와 통자(通字)이다. 用(용; 쓰다)과 口(구; 입)의 합자(合字)이다. 본디 뜻은 입을 잘 써서 말을 삼가는 일을 말함이 전(轉)하여, 周密(주밀)의 뜻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周자는 '두루'나 '골고루', '둘레'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周자는 논밭을 그린 상형문자이다. 周자의 갑골문을 보면 田(밭 전)자에 점을 찍어놓은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밭의 둘레를 표현한 것이다. 당시 논밭을 뜻하던 田자가 단순히 밭의 도랑만을 그린 것이었다면 周자는 밭의 둘레를 표현하기 위해 벼가 심겨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었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口(입 구)자가 더해지게 되는데, 이는 '주(周)나라' 처럼 고유명사를 표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지금의 周자는 중국의 고대국가인 주나라'나 '둘레'나 '두르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周(주)는 (1)몇 개의 곡선으로 둘린 평면 도형에 있어서의 그 곡선, 또는 그 곡선의 길이 둘레를 도는 번수를 세는 말 (2)중국의 옛날 왕조. 섬서성(陝西省)에서 일어나, 문왕(文王) 때에 번영했음. 아들인 무왕(武王)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쳐부수고 나라를 세워 호경(鎬京)에 도읍(都邑). 전국에 일족, 공신의 식민 국가를 세워 지배했음. 이른바 주(周)나라의 봉건제도임. 기원전 770년에 만족(蠻族)의 침입을 피하여 동방의 낙읍(洛邑)에 천도했음. 이 천도 이전을 서주(西周), 이후를 동주(東周)라 이름. 기원전 256년에 진(秦)나라에게 망했음.(1100?~256 B.C) (3)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조의 나라 서위(西魏)의 뒤를 이어 우문각(宇文覺)이 세운 왕조 북제(北齊)를 치고 진(陣)나라도 정벌하려 했으나 황제가 죽어, 실권은 새 황제의 황후의 아버지인 양견(楊堅)(수隋나라의 문제文帝)에게 돌아가, 결국 망했음. 북주(北周) (557~581) (4)중국 당(唐)나라의 고종(高宗)의 황후인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세운 나라 남편인 고종이 죽은 후, 아들인 중종(中宗), 예종(睿宗)을 폐위시키고, 왕족, 공신을 죽여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을 시조로 하여 건국한 것임 (5)중국 오대(五代) 마지막 왕조. 시조는 후한(後漢)의 절도사 곽위(郭威)임. 2대의 세종(世宗)은 영명하여, 조세(租稅)의 평균화를 꾀하고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통일 사업을 진행시켜, 명군이라 일컬어졌으나 나이 젊어 죽고, 그 아들 공제(恭帝)가 어려, 3대 9년 만에 조광윤(趙匡胤 : 송宋나라 태조太祖)에게 망함. 후주(後周) (951~960)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두루 ②골고루 ③널리 ④둘레 ⑤모퉁이, 구부러진 곳 ⑥진실(眞實), 참 ⑦주(周)나라 ⑧돌다, 두르다 ⑨두루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⑩둥글게 에워싸다 ⑪끝내다, 온전(穩全)히 다하다 ⑫더할 나위 없다, 지극하다 ⑬친하다, 가까이하다 ⑭구하다, 구제하다, 베풀어 주다 ⑮합당하다, 알맞다 ⑯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라 국(圍)이다. 용례로는 주위의 가장자리를 주변(周邊), 어떤 곳의 바깥을 주위(周圍), 일이 잘 되도록 이리저리 힘을 써서 변통해 주는 일을 주선(周旋), 여러 사람이 어떤 사실을 널리 아는 것을 주지(周知), 1년을 단위로 하여 돌아오는 그날을 세는 단위를 주년(周年), 나이 만 60세를 가리키는 말을 주갑(周甲), 조심성이 두루 미쳐서 빈틈이 없음을 주도(周到), 두루 돌아다니면서 유람하는 것을 주유(周遊), 죽은 뒤 해마다 돌아오는 그 죽은 날의 횟수를 나타내는 말을 주기(周忌), 겉을 둘러 쌈을 주과(周裹), 죄인을 심문할 때 두 발목을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막대기를 끼워 엇비슷이 비트는 형벌을 주리(周牢), 다각형의 둘레의 각을 주각(周角), 썩 다급한 형편에 처하여 있는 사람을 구하여 줌을 주급(周急), 두루 돌아다님을 주력(周歷), 허술한 구석이 없고 매운 찬찬함을 주밀(周密), 빠짐 없이 두루 갖춤을 주비(周備), 두루마기로 우리나라 고유의 웃옷을 주의(周衣),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름을 주장(周章), 빈틈이 전혀 없고 온전함을 주전(周全), 두루 살핌을 주찰(周察), 원의 둘레를 원주(圓周), 주위를 에워쌈을 환주(環周), 주위의 반이나 한 바퀴의 반을 반주(半周), 바깥쪽의 둘레를 외주(外周), 한 바퀴를 돎을 일주(一周), 궁핍한 사람은 도와주고 부자는 보태 주지 않는다는 말을 주급불계부(周急不繼富), 자아와 외계와의 구별을 잊어버린 경지를 말함 또는 사물과 자신이 한 몸이 된 경지를 이르는 말을 장주지몽(莊周之夢), 소인은 사사로움에 치우치므로 특이한 사람만 친할 뿐이지 널리 사귀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비이부주(比以不周), 뭇사람들이 두루 앎을 일컫는 말을 만인주지(萬人周知), 어떤 일을 할 마음이 두루 미친다는 뜻으로 마음의 준비가 두루 미쳐 빈틈이 없음 또는 무슨 일에든지 주의와 준비가 완벽하여 실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용의주도(用意周到), 음악을 잘못 연주하면 주랑이 곧 알아차리고 돌아본다는 뜻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을 고곡주랑(顧曲周郞) 등에 쓰인다.
▶️ 遊(놀 유)는 ❶형성문자로 游(유)의 본자(本字), 逰(유)는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斿(유)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斿(유)는 기가 펄럭이고 있다, 물건이 흐르는 모양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遊자는 '놀다'나 '떠돌다', '여행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遊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斿(깃발 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斿자는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을 그린 㫃(나부낄 언)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것으로 '깃발'이라는 뜻이 있다. 斿자에는 '놀다'라는 뜻도 있는데, 斿자가 마치 깃발 아래에서 어린아이가 놀고 있는 듯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아이가 노는 모습으로 그려진 斿자에 辶자를 결합한 遊자는 '길을 떠나 놀다' 즉 '떠돌다'나 '여행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游(유)는 물위를 흘러가다, 헤엄침, 어슬렁어슬렁 산책하다, 나다니다, 놂 등의 뜻으로, ①놀다 ②즐기다 ③떠돌다 ④여행하다, 유람하다 ⑤사귀다 ⑥배우다, 공부하다 ⑦사관(仕官)하다, 벼슬살이하다 ⑧유세(遊說)하다 ⑨놀이 ⑩유원지(遊園地) ⑪벗, 친구(親舊) ⑫유세(遊說) ⑬까닭, 이유(理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희롱할 희(戱)이다. 용례로는 각처로 돌아 다니며 자기 또는 자기 소속 정당 등의 주장을 설명 또는 선전함을 유세(遊說), 일정한 방법에 의하여 재미있게 노는 운동을 유희(遊戱),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함을 유람(遊覽), 따로 떨어져 있는 것 또는 그 일을 유리(遊離), 타향에 가서 공부함을 유학(遊學), 거처를 정하지 않고 물과 풀을 따라 이주하며 소나 양이나 말 등의 가축을 기르는 일을 유목(遊牧), 흥취 있게 놂을 유흥(遊興), 휴식 삼아 거닒을 유보(遊步), 물 속에서 헤엄치며 놂을 유영(遊泳), 유람차 각처로 다님을 유행(遊行), 운행이나 기능을 쉬고 있음을 유휴(遊休),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를 유금(遊禽), 공중이나 물 위에 떠 다님을 부유(浮遊), 멀리 가서 놂을 원유(遠遊), 물고기가 알을 낳기 위하여서나 또는 계절을 따라 정기적으로 떼지어 헤엄쳐 다니는 일을 회유(回遊), 공부 또는 유람할 목적으로 외국에 여행함을 외유(外遊), 서로 사귀어 왕래함을 교유(交遊), 두루 다니면서 놂을 여유(旅遊), 하는 일 없이 편안하고 한가롭게 잘 지냄을 우유(優遊), 유람을 하며 즐겁게 놂을 오유(娛遊),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제멋대로 놂을 일유(逸遊), 두루 돌아다니면서 유람하는 것을 주유(周遊), 이곳저곳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놂을 경유(經遊), 거문고 소리가 하도 묘하여 물고기마저 떠올라와 듣는다는 뜻으로 재주가 뛰어남을 칭찬하여 이르는 말을 유어출청(遊魚出聽), 먼 곳에 갈 때는 반드시 그 행방을 알려야 한다는 뜻으로 자식은 부모가 생존해 계실 때는 멀리 떠나 있지 말아야 하고, 비록 공부를 위해 떠나 있을지라도 반드시 일정한 곳에 머물러야 함을 이르는 말을 유필유방(遊必有方),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놀고 먹는다는 말을 유수도식(遊手徒食), 하는 일없이 놀고 먹는 백성이라는 말을 유식지민(遊食之民), 하는 일없이 놀면서 입고 먹는다는 말을 유의유식(遊衣遊食), 편안하고 한가롭게 마음대로 즐긴다는 말을 우유자적(優遊自適), 하는 일없이 한가롭게 세월을 보낸다는 말을 우유도일(優遊度日), 고기가 솥 속에서 논다는 뜻으로 목숨이 붙어 있다 할지라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을 비유하는 말을 어유부중(魚遊釜中), 느긋하고 침착하여 서둘지 않는다는 말을 우유불박(優遊不迫), 촛불을 들고 밤에 논다는 뜻으로 경치가 좋을즈음 낮에 놀던 흥이 미진해서 밤중까지 놂을 이르는 말을 병촉야유(秉燭夜遊) 등에 쓰인다.
▶️ 列(벌일 렬/열)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선칼도방(刂=刀;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歹(렬)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列자는 '벌이다'나 '진열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列자는 歹(부서진 뼈 알)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歹자는 사람이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列자의 소전을 보면 歹자 위에 水(물 수)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뼈를 물에 씻는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숲에 버려 썩게 한 후에 이를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 그러니까 소전에 있는 水자는 흩어졌던 뼛조각을 모아 물에 씻어 깨끗이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분리하다'라는 뜻을 가진 刀자가 더해진 列자는 분리된 뼛조각을 수습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列자는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뼛조각을 수습해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벌이다'나 '늘어서다', '순서를 매기다', '진열하다'와 같은 뜻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列(렬/열)은 ①벌이다 ②늘어서다 ③줄짓다 ④나란히 서다 ⑤분리(分離)하다 ⑥순서(順序)를 매기다 ⑦진열(陳列)하다 ⑧차례(次例) ⑨등급(等級) ⑩반열(班列: 품계나 신분, 등급의 차례) ⑪석차 ⑫줄길이로 죽 벌이거나 늘여 있는 것 ⑬행렬 ⑭여러,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줄을 지은 모양으로 죽 늘어선 여러 개의 섬을 열도(列島), 천자에게 조공을 하는 작은 나라의 임금을 열후(列侯), 국제적으로 큰 역할을 맡은 강대한 몇몇 나라를 열강(列强), 여러 가지를 들어서 말함을 열거(列擧), 거듭된 여러 세대를 열대(列代), 기전체의 역사로 많은 사람의 전기를 차례로 벌여서 기록한 글을 열전(列傳), 여러 대 임금의 시대를 열조(列朝), 여러 고을을 열군(列郡), 여러 나라를 열방(列邦), 죽 벌여서 적음을 열기(列記), 줄지어 늘어선 기둥을 열주(列柱), 두 눈썹이 나란히 있다는 뜻으로 명백함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열미(列眉), 세 개 이상의 점이 같은 직선 위에 있을 때의 그 직선을 열선(列線), 물건 따위를 보이기 위해 죽 벌려 놓음을 진열(陳列), 무리를 지어 죽 늘어선 행렬을 대열(隊列), 여럿이 벌이어 줄서서 감 또는 그 줄을 행렬(行列), 이가 족 박힌 줄의 생김새를 치열(齒列), 서로 관련이 있거나 유사한 점에서 한 갈래로 이어지는 계통이나 조직을 계열(系列), 따로따로 별러 늘어섬 또는 따로따로 별러 늘어서게 함을 분열(分列), 순서를 좇아 늘어섬을 서열(序列), 친족 집단 안에서 세대 관계를 나타내는 서열을 항렬(行列), 여러 물건들을 평면 위에 죽 벌이어 놓는 것 또는 여러 사실이나 내용을 글이나 말에서 죽 늘어놓는 것을 나열(羅列), 일정한 차례나 간격으로 죽 벌여 놓음을 배열(配列), 신분이나 등급의 차례를 반열(班列), 서로 버티어 늘어섬을 각렬(角列), 글로 적어 벌여 놓음을 여열(臚列), 사격을 위한 포의 배열을 방렬(放列), 나란히 벌여 섬 또는 나란히 벌여 세움을 병렬(竝列), 같은 줄이나 같은 동아리 또는 같은 반열이나 같은 항렬을 동렬(同列), 대등되는 반열 또는 격이 서로 같은 신분 등급의 차례를 등렬(等列), 성좌가 해와 달과 같이 하늘에 넓게 벌려져 있음을 이르는 말을 진수열장(辰宿列張), 근속 연수나 나이가 늘어 감에 따라 지위가 올라가는 일 또는 그 체계를 일컫는 말을 연공서열(年功序列), 바다 가운데 활등처럼 굽은 모양으로 널려 있는 섬의 집합체를 일컫는 말을 호상열도(弧狀列島), 축하하는 뜻으로 여러 사람이 등을 들고 줄을 지어 돌아다니는 일을 일컫는 말을 제등행렬(提燈行列), 명예스러운 벼슬길과 높은 반열이나 명성이 있고 지위가 높음을 이르는 말을 명도현열(名塗顯列) 등에 쓰인다.
▶️ 國(나라 국)은 ❶회의문자로 国(국)은 간자(簡字), 囗(국), 囶(국), 圀(국)은 고자(古字), 囲(국), 围(국)은 동자(同字)이다. 國(국)은 백성들(口)과 땅(一)을 지키기 위해 국경(口)을 에워싸고 적이 침입하지 못하게 했다는 데서 나라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國자는 '나라'나 '국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國자는 囗(에운담 위)자와 或(혹 혹)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或자는 창을 들고 성벽을 경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或자가 '나라'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누가 쳐들어올까 걱정한다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후에 '혹시'나 '만일'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囗자를 더한 國자가 '나라'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國자는 성벽이 두 개나 그려진 형태가 되었다. 참고로 國자는 약자로는 国(나라 국)자를 쓰기도 한다. 그래서 國(국)은 (1)어떤 명사(名詞) 다음에 쓰이어 국가(國家), 나라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나라, 국가(國家) ②서울, 도읍(都邑) ③고향(故鄕) ④고장, 지방(地方) ⑤세상(世上), 세계(世界) ⑥나라를 세우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나라 백성을 국민(國民), 나라의 법적인 호칭을 국가(國家), 나라의 정사를 국정(國政), 나라의 안을 국내(國內), 나라의 군대를 국군(國軍), 나라의 이익을 국익(國益), 나라에서 나라의 보배로 지정한 물체를 국보(國寶), 국민 전체가 쓰는 그 나라의 고유한 말을 국어(國語), 한 나라의 전체를 전국(全國), 자기 나라 밖의 딴 나라를 외국(外國), 양쪽의 두 나라를 양국(兩國), 외국에서 본국으로 돌아감 또는 돌아옴을 귀국(歸國), 국가의 수를 세는 단위를 개국(個國), 조상 적부터 살던 나라를 조국(祖國), 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을 순국(殉國),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애국(愛國),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둘도 없다는 뜻으로 매우 뛰어난 인재를 이르는 말을 국사무쌍(國士無雙), 나라의 수치와 국민의 욕됨을 이르는 말을 국치민욕(國恥民辱), 나라의 급료를 받는 신하를 국록지신(國祿之臣), 나라의 풍속을 순수하고 온화하게 힘을 이르는 말을 국풍순화(國風醇化),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흩어졌으나 오직 산과 강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을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으로 첫눈에 반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을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구하는 방패와 성이란 뜻으로 나라를 구하여 지키는 믿음직한 군인이나 인물을 이르는 말을 구국간성(救國干城), 나라를 망치는 음악이란 뜻으로 저속하고 난잡한 음악을 일컫는 말을 망국지음(亡國之音), 국권피탈을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수치라는 뜻으로 일컫는 말을 경술국치(庚戌國恥), 입술과 이의 관계처럼 이해 관계가 밀접한 나라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순치지국(脣齒之國),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노자가 그린 이상 사회, 이상 국가를 이르는 말을 소국과민(小國寡民), 한 번 돌아보면 나라가 기운다는 뜻으로 뛰어난 미인을 이르는 말을 일고경국(一顧傾國), 사이가 썩 친밀하여 가깝게 지내는 나라 또는 서로 혼인 관계를 맺은 나라를 이르는 말을 형제지국(兄弟之國)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