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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거(2)
고전 15:1-11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 설 교 >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라
고전15장 09절 ~ 10절 / 오창우목사
1. 은혜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여러분, 한가지 여쭈어 보겠습니다. `은혜 받으십시오.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면 기분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그리고 은혜라는 것이 어떤 뜻이기에 좋습니까? 그 은혜라는 말이 어떤 뜻이기에 인사 나누고 좋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은혜 받으세요. 은혜 받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데, 우리가 이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은혜 받는다는 말은 헬라여로 "카리스"입니다. "카리스"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기쁘다, 감사하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뜻 가운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으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 받으세요`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멘` 하면 사랑 받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유독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은혜 얘기를 많이 하는데, 이 은혜는 기독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랑하고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보면 예수님이 어려서 자랐던 그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할 때 그 `사랑스러워 가시는 것`이 "카리스"고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분명히 모르면서도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고, 듣기만 해도 기쁜 것은 거기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 잘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것이 너무나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벤후퍼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테네시주에 주지사를 두 번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두 번을 했다, 주지사가 됐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그럴 수도 있다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벤후퍼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기적적인 일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아기입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 있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조롱을 받고 또 어른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자랐겠습니까? 열등의식, 많은 상처를 받고 이 아이가 자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이렇게 자라면서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자라면서 필요한 것들을 부모가 다 공급해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부모 있는 아이들은 얼굴이 다릅니다. 훤합니다. 그것도 부잣집 아이들은 더 훤합니다. 잘 안먹는 것 같아도 그냥 늘 훤합니다. 왜냐하면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믿는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늘 돌아오는 것은 조롱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크고 있었는데, 이 아이가 12살이 되던 해에 그 마을의 교회에 한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소문에 들으니까 굉장히 좋은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차별하지 않고,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질 받을까봐 한번도 교회에 가지 못했던 이 아이가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일찍 갔다 사람들 만나는데 무서워서 일부러 늦게 갔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고 나면 축도할 때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만 빠져 나오는 시간을 잊어버렸습니다. 설교 듣다가 너무나 은혜를 받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같이 섞여서 나오는데, 역시나 사람들이 `야, 너 아버지도 없는 애구나` 하고 말은 안하지만 경원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 긴장감 속에 이 아이가 나오는데, 목사님이 이 아이를 불러 세웠습니다. "애, 넌 뉘 집 아들이냐?" 하니까, 옆에 이 아이를 다 알고 있던 동네 사람들은 긴장이 된 것입니다. `저 아이는 아버지가 없는데, 뉘 집 아들이냐니? 저 어떻게 얘기하지?`
그런데 이 목사님이 계속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야, 너 생긴 것 보니까 뉘 집 아들인 지 알겠다" 하니까 사람들이 더 어색해졌습니다. `이거 어떻게 하나? 목사님이 몰라도 대단히 모르시는 모양이다`
그런데 목사님이 계속해서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 내가 네 얼굴을 보니까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네 아버지는 하나님이야." 그러니까 이 아이가 평소에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당황해서 뛰어나갔습니다. 자기는 그것이 부끄러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뛰어가는 아이를 향해서 또 얘기를 하는 겁니다. "애야, 너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너는 휼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큰 소리로 이 아이에게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라서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지사가 된 이 사람에게 당신이 어떻게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이렇게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난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불행한 아이였습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놀림과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상처받고 자랐습니다. 그 때 나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12살이 되던 해 우리 마을의 목사님이 나에게 하는 말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네 아버지는 하나님이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테네시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불행한 손가락질 받던 어린아이지만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네 아버지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그는 성공의 길을 향해서 나갈 수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얘기를 보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식들 교육 잘 시킨다고 합니다. 남들이 학원을 몇 개씩 보내니까 우리 아이들은 더 보내야 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고 있는 우리 인생의 성공의 비결은 과외 몇 개를 시키느냐, 학원을 몇 개 보내느냐, 공부를 몇 시까지 시키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가 되야 되고 그것을 가르쳐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읽어보십시오. 아니 중간만 읽어봐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다 잘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그 나이 75세였습니다. 75년 동안 살아온 인생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상 숭배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결혼해서도 자식 하나 없는 무자식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네가 나만 따라오면 너는 잘될 수 있다"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고 자기를 사랑하시는 음성을 듣고 떠났을 때 그의 인생이 싹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일생동안 하나님의 사랑만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특별히 공부를 더한 것도 없습니다. 누가 도와준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의 조상이 될 뿐만아니라 우리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잘 참고 견디고 양보해서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사랑 받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든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또 그의 아들 요셉은 어땠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도 하나님의 사랑만 찾고 있는 것입니다. 모함을 받아서 감옥의 죄수가 되어도 하나님의 사랑만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를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자굴 속에서도 살려주시고 그 땅에서 위대한 총리도 세우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을 높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성공의 법칙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생 승리의 길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신분고하, 지식의 유무를 막론하고 다 성공하고 다 잘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잘된다 하는 것도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승리하게 하는 길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배운 지식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도함 받을 때에 백 배, 천 배의 결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세상의 성공의 법칙은 무엇입니까? 내가 잘 돼서 승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얘기합니다. 실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생존경쟁을 얘기합니다. 너 죽고 내가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실력을 키우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두 젊은이가 카드빚 때문에 6명이나 죽였습니다. 그의 생각에 돈 버는 일은 무슨 일이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이들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교육개발원에서 통계를 냈는데, 전국에 남녀 3,300명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 질문만 소개합니다. 첫째는 정직하게 살면 손해를 보는가? 학력별로 구분을 했습니다. 대졸자의 77%, 고졸자의 73.3%, 중졸자의 67.7%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되는가? 대졸자의 71.7%, 고졸자의 74.5%, 중졸자의 68%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젊은이들의 생각입니다. 대학을 졸업했건 중학교를 졸업했건 지식이 많든 적든 이들의 생각 속에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내가 출세해야 되고 돈만 벌면 안되는 것이 다 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그들의 생각이란 말입니다. 모든 여러분 문제 해결의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고생 둘이서 친구를 팔아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어떻게 했냐하면, 3일 동안 자취방을 빌려서, 수면제를 먹이고, 벗은 사진을 찍고, 협박을 하고, 화장을 시켜서 직업소개소에 500만원에 팔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그만 이 아이가 도망을 쳐서 이 아이들이 붙잡혔어요.
그래서 그 이유가 뭔가 했더니, 그 이유가 참 한심해요. 그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우리랑 친하게 지내다가 다른 아이랑 친하게 지내서 혼좀 내주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아주 불량학생이 아니에요. 아주 평범한 학생이 이런 일을 저질렀어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늘 이 시대는 사랑이란 것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놀아도 다 혼자 놉니다. 놀이터에 가도 애들이 없습니다. 그냥 컴퓨터, 비디오, 놀이동산이라고 가도 다 혼자 타는 겁니다. 돈이 있어야 타는 겁니다. 돈 없이 타는 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인자를 한자로 쓰면서 막대기 두 개를 걸쳐 쓰는걸 사람인자라 그랬는데, 이제 사람인자를 막대기 두 개로 쓰는 게 아니고 요렇게 써야할 것 같습니다. 그냥 혼자밖에 없습니다. 다 개인입니다. 너 죽고 나 살자, 이것만 가르칩니다.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세상은 너무 운명을 얘기합니다. 타고난 운명,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성격대로 산다 그럽니다. 사주팔자가 그렇게 중요하고, 이제는 컴퓨터까지 동원해서 사주팔자를 봅니다. 그것이 자기 운명을 좌우한다는 겁니다. 자기 성격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성격 급한 사람, 성격 느린 사람, 성경은 그런 것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격이 변해서, 물론 우리 성격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품이 변하면 잘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성품이 뭡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으면, 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법칙을 따라가면 절대 잘 살수 없어요. 다 망하는 것입니다. 서로 죽고 죽이다가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아 잘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여러분 요한복음 3장 16절 한번 펴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을 읽고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먼저 사랑이 없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기 전에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그 순간 뿐아니라 우리 삶 자체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부모가 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 살고 있는 겁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느냐 했더니 죄인을 사랑한다 그랬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죄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인을 절대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죄를 보면 들추어내서 감옥에 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죄인도 사랑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가리켜서 은혜다 그러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죄인이 사랑 받는 것이 없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 모르면 그리스도인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랬습니다. 예수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사랑 받는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는 개가 있습니다. 얼마나 집을 잘 지키는지 `집 보라` 그러면 아무 소리 안하고 집을 잘 봅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오면 짖어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 애들은 집 좀 보라고 하면 신경질 냅니다. `내가 얼마나 바쁜데 그러냐`고, 아이들이 좀 크니까 부모 말 안 듣습니다. 자기 생각해로 하려고 합니다.
나는 우리 집 개 때문에 밤잠을 설쳐본 일은 없습니다. 말 잘 들으니까, 그러나 우리 아이들 때문에는 밤잠을 설쳐본 일이 꽤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개보다 우리 애들을 더 사랑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쩌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것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부심 속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이 있고, 그런 감격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같이 지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다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찾아가셔서 하신 말씀이 `나 너 사랑한다. 너 나 사랑하냐?` 그 사랑 때문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이들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깨우치심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을 했고, 그 십자가 밑에서 도망을 갔지만은 `우리는 사랑 받는 자다` 하는 확신이 있으니까 그들 속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칭찬을 받습니다.
그 칭찬 받는 것이 "카리스"입니다. 은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성령 안에서 충만한 것은 뭐냐 은혜 충만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 받은 것에 감격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그 은혜가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다` 그 사랑가 지고 나가니까 기적도 일으키고 그 사랑 가지고 나가니까 뭐든지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전에는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 몸 내가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이나 따라 다니고 예수님 위해서 목숨 바치겠다고 약속까지 한 사람들이 예수님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자기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하나님의 사랑 받고 은혜를 알고 난 다음에는 이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를 지켜준다고 생각했던 그렇게 간직하려고 했던 재산들을 내놓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을 도와줍니다. 같이 더불어 살자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마음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참 은혜가 있는 사람이다` 라고 칭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얘기하면서 나같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하면서 자기의 부활을 얘기하면서 자기의 받은 은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도저히 은혜 받았다는 얘기를 할 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 부활했는데, 그 부활한 예수님 만난 사람들이 이런 사람 만나고 저런 사람 만나고 게바 만나고 500형제 만나고 나 만났다 그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족을 다는 것입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야고보에게 보이시고 맨 마지막에 만삭되지 못한 나에게도 보이시고 그러더니 거기에 부활을 얘기하다 말고 자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는 무슨 얘기를 하든지 그 얘기를 할 때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은 것, 은혜 받은 것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같이 보겠습니다. 9절, 10절 말씀,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
부활을 얘기하고 이 사람에게 나타나고 저 사람에게 나타나고 나에게 나타났다 그러면 되는데 그 다음에 자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만삭되지 못해서 태어난 자다`,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부족한 자다`, 자기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겸손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 된 것은 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설 수 있으며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은혜를 받은 자의 할 일 두 가지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받는 자도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두 가지를 힘쓰겠다 말합니다.
여러분, 10절 말씀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첫 번째 비결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니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겨라 하는 말입니다.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와서 많은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 죽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이 소식을 듣고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 장소가 미스바 광장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모여 가지고 백성들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 땅에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 있는 적군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그 약속의 땅에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날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우상숭배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귀하게 여기지 않고 헛되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 이것 회개합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가지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드리는대도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는 겁니다. 사람들 마음이 두근 반 세근 반 죽었구나 하는 마음으로 드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하고 회개하고 제사를 드립시다 하고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뢰를 발하셨다` 그래서 블레셋 군대가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칼 한번 쓰지 않고 블레셋 군대를 물리쳐서 승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헛되이 하면,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찾고 그 은혜 앞에 엎드리게 될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적군들을 물리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경은 우리에게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의 손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셨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무엘이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면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무엘이 백성들을 다 불러놓고 돌을 하나 세워놓고 하는 말이 "이 돌의 이름은 에벤에셀이다", 이 "에벤에셀"의 뜻은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마음 속에는 백성들을, 자손들을 가르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돌을 봐라. 하나님이 도우셔서 우리가 이렇게 승리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고 헛되이 버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후손들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공부해라 하는 얘기는 우리가 흔히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공부하라 하는 것과 함께 그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이 아이는 사랑 받는 자입니다. 이 아이는 사랑 받았기 때문에 잘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희망을 심어주는 겁니다.
여러분,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간절한 마음으로 탕자인 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기도의 근거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내가 정성을 백날 드리겠습니다. 내가 정성을 천날 드리겠습니다. 내 공력을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들이 지금은 저렇게 나쁘지만 우리 아들이 옛날에는 성품이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봐 주십시오" 그런 말도 안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했던 근거는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까지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내 아들도 사랑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이 아들이 돌아오게 된 것이라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성수해라, 십일조생활해라, 감사해라, 성경 봐라, 이런 얘기하면 무슨 기복신앙을 가르친다 얘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에 근거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이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으면서 축복 속에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가 되려면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두 번째 비결은 더 많이 수고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많이 수고하자 해놓고 그 다음에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여러분, 은혜 받으려면 더 많이 수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수고하라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해야할 수고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오늘 우리가 해야될 첫 번째 수고는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판에 올라온 글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느 회사에서 사원을 뽑는 입사시험을 치뤘다고 합니다. 여러 시험을 다하고 면접을 하기에 앞서서 묻는 시험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시험문제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비가 막 내리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자동차를 내려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보니까 세 사람이 거기에 서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사람은 아파서 다 죽어가는 할머니, 자기가 병들어 수술 받을 때 자기를 살려준 의사선생님 그리고 평소에 그리던 이상형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 자동차에는 한 사람밖에는 태우지 못한다면 당신은 누구를 태우겠습니까?"
할머니를 태우면 사랑이 많다 그럴 것이고, 의사선생님을 태우면 은혜에 보답한다 할 것이고, 이상형을 태우면 자기의 꿈이 실현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태우겠습니까?
수백 명의 수험생 가운데 뽑힌 사람의 답은 이것입니다. 자동차를 가지고 버스 정류장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내려서 의사선생님에게 `저는 선생님에게 수술 받아서 죽을 고비에서 산 사람입니다. 참 감사합니다. 그러니 여기에 계시지 말고 차에 타십시오.` 의사선생님을 차에 태우는 겁니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에게 차 열쇠를 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의사선생님에게 `여기 할머니가 다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이 할머니를 태우고 가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차는 자네 것이 아닌가? 이 폭풍우에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괜찮습니다. 가십시오.` 그리고 자기는 이상형의 상대와 함께 우산을 쓰고 비바람 속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생각을 할 때에 내 것은 버리지 않고 남으면 하겠다 합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는 겁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는 큰 교회건물, 중요합니다. 성장해서 수만 명이 모이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건물도 중요하고 많은 교인이 모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의 백성을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지난 금요일날 여전도회 연합수련회 때 오셔서 말씀 전해주신 이철수 목사님이 은퇴하신 노교수를 만났답니다. 이 교수님 말씀이 "목사님, 교회가 건물이 큰 것 불만입니다. 교인들의 삶이 불만입니다." 두 가지를 얘기하셨답니다. 우리들은 대단히 귀하게 생각하는 건물을 세상 사람들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은퇴한 교수님의 부인이 권사님이고 자녀들이 집사님들이라는 겁니다. 누가 이 분의 신앙의 길, 예수 믿는 길을 막았겠습니까? 물론 그 자신의 어리석음도 있지만, 이 말씀 속에는 우리들이 회개해야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수고를 하되,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 이것에 최선을 다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많이 수고했지만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하는 이 말은 보면서 저는 우리들의 가정을 보았습니다.
며느리가 하는 말이 사람들이 음식 맛있다고 칭찬을 하니까 며느리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거 제가 했나요? 어머니가 다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대뜸 "그럼 내가 다 했지"가 아니라 "무슨 말이에요. 나는 옆에서 조금 도와주기만 했지, 우리 며느리가 다 한 겁니다" 그러면 그 얘기를 듣는 분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그런 가정에 고부 갈등이 있을 수가 없고, 그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자식은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부모는 자식이 잘 커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러면 이 부모 자식간에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되면 자기가 잘 나서 잘 됐다 그러고 못 되면 조상탓 한다더니, 우리가 못 되면 하나님께 나 왜 이렇게 만드냐 그러고 잘 되면 자기 잘나서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은혜 받는 자가 아닙니다. 은혜 받으려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애쓰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 묻는지 우리는 그렇게 얘기해야 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늘 생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줄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를 작곡하고 난 다음에 그는 고백하기를 "애국가는 내가 작곡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인데 하나님이 나에게 영감을 주셔서 이것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우리 백성들에게 전했을 뿐입니다."
하이든이라고 유명한 작곡가가 천지창조를 만들고 난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위해한 작곡가에게 박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손을 흔들면서 "아닙니다.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다." 이것이 우리들이 해야될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더 많이 수고해야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 우리의 가정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이렇게 가르치면 우리의 자녀들이 절대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많은 것을 가르쳐도 하나님의 사랑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하여 오늘 주신 말씀대로 은혜를 귀하게 여기고, 더 많이 수고하되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축복으로 함께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은혜 받는 자로 이 한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라
고전15장 09절 ~ 10절 / 오창우목사
1. 은혜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여러분, 한가지 여쭈어 보겠습니다. `은혜 받으십시오.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면 기분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그리고 은혜라는 것이 어떤 뜻이기에 좋습니까? 그 은혜라는 말이 어떤 뜻이기에 인사 나누고 좋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은혜 받으세요. 은혜 받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데, 우리가 이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은혜 받는다는 말은 헬라여로 "카리스"입니다. "카리스"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기쁘다, 감사하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뜻 가운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으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 받으세요`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멘` 하면 사랑 받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유독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은혜 얘기를 많이 하는데, 이 은혜는 기독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랑하고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보면 예수님이 어려서 자랐던 그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할 때 그 `사랑스러워 가시는 것`이 "카리스"고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분명히 모르면서도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고, 듣기만 해도 기쁜 것은 거기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 잘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것이 너무나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벤후퍼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테네시주에 주지사를 두 번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두 번을 했다, 주지사가 됐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그럴 수도 있다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벤후퍼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기적적인 일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아기입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 있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조롱을 받고 또 어른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자랐겠습니까? 열등의식, 많은 상처를 받고 이 아이가 자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이렇게 자라면서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자라면서 필요한 것들을 부모가 다 공급해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부모 있는 아이들은 얼굴이 다릅니다. 훤합니다. 그것도 부잣집 아이들은 더 훤합니다. 잘 안먹는 것 같아도 그냥 늘 훤합니다. 왜냐하면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믿는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늘 돌아오는 것은 조롱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크고 있었는데, 이 아이가 12살이 되던 해에 그 마을의 교회에 한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소문에 들으니까 굉장히 좋은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차별하지 않고,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질 받을까봐 한번도 교회에 가지 못했던 이 아이가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일찍 갔다 사람들 만나는데 무서워서 일부러 늦게 갔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고 나면 축도할 때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만 빠져 나오는 시간을 잊어버렸습니다. 설교 듣다가 너무나 은혜를 받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같이 섞여서 나오는데, 역시나 사람들이 `야, 너 아버지도 없는 애구나` 하고 말은 안하지만 경원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 긴장감 속에 이 아이가 나오는데, 목사님이 이 아이를 불러 세웠습니다. "애, 넌 뉘 집 아들이냐?" 하니까, 옆에 이 아이를 다 알고 있던 동네 사람들은 긴장이 된 것입니다. `저 아이는 아버지가 없는데, 뉘 집 아들이냐니? 저 어떻게 얘기하지?`
그런데 이 목사님이 계속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야, 너 생긴 것 보니까 뉘 집 아들인 지 알겠다" 하니까 사람들이 더 어색해졌습니다. `이거 어떻게 하나? 목사님이 몰라도 대단히 모르시는 모양이다`
그런데 목사님이 계속해서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 내가 네 얼굴을 보니까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네 아버지는 하나님이야." 그러니까 이 아이가 평소에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당황해서 뛰어나갔습니다. 자기는 그것이 부끄러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뛰어가는 아이를 향해서 또 얘기를 하는 겁니다. "애야, 너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너는 휼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큰 소리로 이 아이에게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라서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지사가 된 이 사람에게 당신이 어떻게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이렇게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난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불행한 아이였습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놀림과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상처받고 자랐습니다. 그 때 나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12살이 되던 해 우리 마을의 목사님이 나에게 하는 말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네 아버지는 하나님이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테네시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불행한 손가락질 받던 어린아이지만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네 아버지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그는 성공의 길을 향해서 나갈 수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얘기를 보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식들 교육 잘 시킨다고 합니다. 남들이 학원을 몇 개씩 보내니까 우리 아이들은 더 보내야 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고 있는 우리 인생의 성공의 비결은 과외 몇 개를 시키느냐, 학원을 몇 개 보내느냐, 공부를 몇 시까지 시키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가 되야 되고 그것을 가르쳐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읽어보십시오. 아니 중간만 읽어봐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다 잘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그 나이 75세였습니다. 75년 동안 살아온 인생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상 숭배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결혼해서도 자식 하나 없는 무자식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네가 나만 따라오면 너는 잘될 수 있다"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고 자기를 사랑하시는 음성을 듣고 떠났을 때 그의 인생이 싹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일생동안 하나님의 사랑만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특별히 공부를 더한 것도 없습니다. 누가 도와준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의 조상이 될 뿐만아니라 우리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잘 참고 견디고 양보해서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사랑 받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든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또 그의 아들 요셉은 어땠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도 하나님의 사랑만 찾고 있는 것입니다. 모함을 받아서 감옥의 죄수가 되어도 하나님의 사랑만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를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자굴 속에서도 살려주시고 그 땅에서 위대한 총리도 세우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을 높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성공의 법칙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생 승리의 길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신분고하, 지식의 유무를 막론하고 다 성공하고 다 잘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잘된다 하는 것도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승리하게 하는 길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배운 지식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도함 받을 때에 백 배, 천 배의 결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세상의 성공의 법칙은 무엇입니까? 내가 잘 돼서 승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얘기합니다. 실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생존경쟁을 얘기합니다. 너 죽고 내가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실력을 키우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두 젊은이가 카드빚 때문에 6명이나 죽였습니다. 그의 생각에 돈 버는 일은 무슨 일이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이들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교육개발원에서 통계를 냈는데, 전국에 남녀 3,300명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 질문만 소개합니다. 첫째는 정직하게 살면 손해를 보는가? 학력별로 구분을 했습니다. 대졸자의 77%, 고졸자의 73.3%, 중졸자의 67.7%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되는가? 대졸자의 71.7%, 고졸자의 74.5%, 중졸자의 68%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젊은이들의 생각입니다. 대학을 졸업했건 중학교를 졸업했건 지식이 많든 적든 이들의 생각 속에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내가 출세해야 되고 돈만 벌면 안되는 것이 다 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그들의 생각이란 말입니다. 모든 여러분 문제 해결의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고생 둘이서 친구를 팔아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어떻게 했냐하면, 3일 동안 자취방을 빌려서, 수면제를 먹이고, 벗은 사진을 찍고, 협박을 하고, 화장을 시켜서 직업소개소에 500만원에 팔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그만 이 아이가 도망을 쳐서 이 아이들이 붙잡혔어요.
그래서 그 이유가 뭔가 했더니, 그 이유가 참 한심해요. 그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우리랑 친하게 지내다가 다른 아이랑 친하게 지내서 혼좀 내주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아주 불량학생이 아니에요. 아주 평범한 학생이 이런 일을 저질렀어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늘 이 시대는 사랑이란 것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놀아도 다 혼자 놉니다. 놀이터에 가도 애들이 없습니다. 그냥 컴퓨터, 비디오, 놀이동산이라고 가도 다 혼자 타는 겁니다. 돈이 있어야 타는 겁니다. 돈 없이 타는 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인자를 한자로 쓰면서 막대기 두 개를 걸쳐 쓰는걸 사람인자라 그랬는데, 이제 사람인자를 막대기 두 개로 쓰는 게 아니고 요렇게 써야할 것 같습니다. 그냥 혼자밖에 없습니다. 다 개인입니다. 너 죽고 나 살자, 이것만 가르칩니다.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세상은 너무 운명을 얘기합니다. 타고난 운명,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성격대로 산다 그럽니다. 사주팔자가 그렇게 중요하고, 이제는 컴퓨터까지 동원해서 사주팔자를 봅니다. 그것이 자기 운명을 좌우한다는 겁니다. 자기 성격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성격 급한 사람, 성격 느린 사람, 성경은 그런 것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격이 변해서, 물론 우리 성격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품이 변하면 잘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성품이 뭡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으면, 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법칙을 따라가면 절대 잘 살수 없어요. 다 망하는 것입니다. 서로 죽고 죽이다가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아 잘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여러분 요한복음 3장 16절 한번 펴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을 읽고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먼저 사랑이 없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기 전에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그 순간 뿐아니라 우리 삶 자체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부모가 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 살고 있는 겁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느냐 했더니 죄인을 사랑한다 그랬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죄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인을 절대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죄를 보면 들추어내서 감옥에 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죄인도 사랑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가리켜서 은혜다 그러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죄인이 사랑 받는 것이 없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 모르면 그리스도인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랬습니다. 예수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사랑 받는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는 개가 있습니다. 얼마나 집을 잘 지키는지 `집 보라` 그러면 아무 소리 안하고 집을 잘 봅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오면 짖어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 애들은 집 좀 보라고 하면 신경질 냅니다. `내가 얼마나 바쁜데 그러냐`고, 아이들이 좀 크니까 부모 말 안 듣습니다. 자기 생각해로 하려고 합니다.
나는 우리 집 개 때문에 밤잠을 설쳐본 일은 없습니다. 말 잘 들으니까, 그러나 우리 아이들 때문에는 밤잠을 설쳐본 일이 꽤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개보다 우리 애들을 더 사랑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쩌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것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부심 속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이 있고, 그런 감격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같이 지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다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찾아가셔서 하신 말씀이 `나 너 사랑한다. 너 나 사랑하냐?` 그 사랑 때문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이들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깨우치심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을 했고, 그 십자가 밑에서 도망을 갔지만은 `우리는 사랑 받는 자다` 하는 확신이 있으니까 그들 속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칭찬을 받습니다.
그 칭찬 받는 것이 "카리스"입니다. 은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성령 안에서 충만한 것은 뭐냐 은혜 충만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 받은 것에 감격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그 은혜가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다` 그 사랑가 지고 나가니까 기적도 일으키고 그 사랑 가지고 나가니까 뭐든지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전에는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 몸 내가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이나 따라 다니고 예수님 위해서 목숨 바치겠다고 약속까지 한 사람들이 예수님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자기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하나님의 사랑 받고 은혜를 알고 난 다음에는 이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를 지켜준다고 생각했던 그렇게 간직하려고 했던 재산들을 내놓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을 도와줍니다. 같이 더불어 살자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마음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참 은혜가 있는 사람이다` 라고 칭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얘기하면서 나같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하면서 자기의 부활을 얘기하면서 자기의 받은 은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도저히 은혜 받았다는 얘기를 할 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 부활했는데, 그 부활한 예수님 만난 사람들이 이런 사람 만나고 저런 사람 만나고 게바 만나고 500형제 만나고 나 만났다 그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족을 다는 것입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야고보에게 보이시고 맨 마지막에 만삭되지 못한 나에게도 보이시고 그러더니 거기에 부활을 얘기하다 말고 자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는 무슨 얘기를 하든지 그 얘기를 할 때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은 것, 은혜 받은 것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같이 보겠습니다. 9절, 10절 말씀,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
부활을 얘기하고 이 사람에게 나타나고 저 사람에게 나타나고 나에게 나타났다 그러면 되는데 그 다음에 자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만삭되지 못해서 태어난 자다`,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부족한 자다`, 자기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겸손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 된 것은 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설 수 있으며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은혜를 받은 자의 할 일 두 가지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받는 자도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두 가지를 힘쓰겠다 말합니다.
여러분, 10절 말씀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첫 번째 비결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니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겨라 하는 말입니다.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와서 많은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 죽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이 소식을 듣고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 장소가 미스바 광장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모여 가지고 백성들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 땅에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 있는 적군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그 약속의 땅에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날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우상숭배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귀하게 여기지 않고 헛되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 이것 회개합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가지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드리는대도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는 겁니다. 사람들 마음이 두근 반 세근 반 죽었구나 하는 마음으로 드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하고 회개하고 제사를 드립시다 하고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뢰를 발하셨다` 그래서 블레셋 군대가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칼 한번 쓰지 않고 블레셋 군대를 물리쳐서 승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헛되이 하면,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찾고 그 은혜 앞에 엎드리게 될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적군들을 물리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경은 우리에게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의 손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셨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무엘이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면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무엘이 백성들을 다 불러놓고 돌을 하나 세워놓고 하는 말이 "이 돌의 이름은 에벤에셀이다", 이 "에벤에셀"의 뜻은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마음 속에는 백성들을, 자손들을 가르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돌을 봐라. 하나님이 도우셔서 우리가 이렇게 승리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고 헛되이 버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후손들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공부해라 하는 얘기는 우리가 흔히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공부하라 하는 것과 함께 그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이 아이는 사랑 받는 자입니다. 이 아이는 사랑 받았기 때문에 잘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희망을 심어주는 겁니다.
여러분,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간절한 마음으로 탕자인 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기도의 근거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내가 정성을 백날 드리겠습니다. 내가 정성을 천날 드리겠습니다. 내 공력을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들이 지금은 저렇게 나쁘지만 우리 아들이 옛날에는 성품이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봐 주십시오" 그런 말도 안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했던 근거는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까지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내 아들도 사랑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이 아들이 돌아오게 된 것이라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성수해라, 십일조생활해라, 감사해라, 성경 봐라, 이런 얘기하면 무슨 기복신앙을 가르친다 얘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에 근거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이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으면서 축복 속에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가 되려면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두 번째 비결은 더 많이 수고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많이 수고하자 해놓고 그 다음에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여러분, 은혜 받으려면 더 많이 수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수고하라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해야할 수고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오늘 우리가 해야될 첫 번째 수고는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판에 올라온 글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느 회사에서 사원을 뽑는 입사시험을 치뤘다고 합니다. 여러 시험을 다하고 면접을 하기에 앞서서 묻는 시험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시험문제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비가 막 내리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자동차를 내려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보니까 세 사람이 거기에 서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사람은 아파서 다 죽어가는 할머니, 자기가 병들어 수술 받을 때 자기를 살려준 의사선생님 그리고 평소에 그리던 이상형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 자동차에는 한 사람밖에는 태우지 못한다면 당신은 누구를 태우겠습니까?"
할머니를 태우면 사랑이 많다 그럴 것이고, 의사선생님을 태우면 은혜에 보답한다 할 것이고, 이상형을 태우면 자기의 꿈이 실현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태우겠습니까?
수백 명의 수험생 가운데 뽑힌 사람의 답은 이것입니다. 자동차를 가지고 버스 정류장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내려서 의사선생님에게 `저는 선생님에게 수술 받아서 죽을 고비에서 산 사람입니다. 참 감사합니다. 그러니 여기에 계시지 말고 차에 타십시오.` 의사선생님을 차에 태우는 겁니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에게 차 열쇠를 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의사선생님에게 `여기 할머니가 다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이 할머니를 태우고 가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차는 자네 것이 아닌가? 이 폭풍우에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괜찮습니다. 가십시오.` 그리고 자기는 이상형의 상대와 함께 우산을 쓰고 비바람 속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생각을 할 때에 내 것은 버리지 않고 남으면 하겠다 합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는 겁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는 큰 교회건물, 중요합니다. 성장해서 수만 명이 모이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건물도 중요하고 많은 교인이 모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의 백성을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지난 금요일날 여전도회 연합수련회 때 오셔서 말씀 전해주신 이철수 목사님이 은퇴하신 노교수를 만났답니다. 이 교수님 말씀이 "목사님, 교회가 건물이 큰 것 불만입니다. 교인들의 삶이 불만입니다." 두 가지를 얘기하셨답니다. 우리들은 대단히 귀하게 생각하는 건물을 세상 사람들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은퇴한 교수님의 부인이 권사님이고 자녀들이 집사님들이라는 겁니다. 누가 이 분의 신앙의 길, 예수 믿는 길을 막았겠습니까? 물론 그 자신의 어리석음도 있지만, 이 말씀 속에는 우리들이 회개해야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수고를 하되,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 이것에 최선을 다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많이 수고했지만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하는 이 말은 보면서 저는 우리들의 가정을 보았습니다.
며느리가 하는 말이 사람들이 음식 맛있다고 칭찬을 하니까 며느리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거 제가 했나요? 어머니가 다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대뜸 "그럼 내가 다 했지"가 아니라 "무슨 말이에요. 나는 옆에서 조금 도와주기만 했지, 우리 며느리가 다 한 겁니다" 그러면 그 얘기를 듣는 분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그런 가정에 고부 갈등이 있을 수가 없고, 그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자식은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부모는 자식이 잘 커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러면 이 부모 자식간에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되면 자기가 잘 나서 잘 됐다 그러고 못 되면 조상탓 한다더니, 우리가 못 되면 하나님께 나 왜 이렇게 만드냐 그러고 잘 되면 자기 잘나서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은혜 받는 자가 아닙니다. 은혜 받으려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애쓰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 묻는지 우리는 그렇게 얘기해야 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늘 생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줄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를 작곡하고 난 다음에 그는 고백하기를 "애국가는 내가 작곡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인데 하나님이 나에게 영감을 주셔서 이것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우리 백성들에게 전했을 뿐입니다."
하이든이라고 유명한 작곡가가 천지창조를 만들고 난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위해한 작곡가에게 박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손을 흔들면서 "아닙니다.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다." 이것이 우리들이 해야될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더 많이 수고해야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 우리의 가정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이렇게 가르치면 우리의 자녀들이 절대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많은 것을 가르쳐도 하나님의 사랑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하여 오늘 주신 말씀대로 은혜를 귀하게 여기고, 더 많이 수고하되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축복으로 함께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은혜 받는 자로 이 한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
임덕순목사 / 고전 15: 1–10
아담 이래로 모든 인간은 죽음을 무서워하며 죽음아래 굴복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누가 죽인다고 하면 손을 번쩍 들고 꼼짝 못했고,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다고 하면 모든 사람이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된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은 육체로 사시는 동안에 병든 자를 고쳐주셨고, 죽은 가족 때문에 너무 절망하는 사람을 보시면 죽은 사람을 살려주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고 처참하게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고, 그 말을 듣고 절망하는 제자들에게 그러나 내가 죽고 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던 대로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신 뒤에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놀랍고 신기한 최대의 뉴스입니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다시 사셨네 (160)
그런데 부활이라는 진리는 교회가 오랜 세월 세상에 알려줬어도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구약성경은 천 수 백 년 전부터 예언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목격한 사람들이 오 백 명도 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 때문에 놀라 도망쳐서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는 계기가 되었고, 박해가 무서워서 숨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그들이 목숨을 걸고 전도하러 가서 예수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구주라고 전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는 많고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 한사람에서 그치는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인류의 부활의 신호탄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전15:16에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법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시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20절에서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선포하여, 신자들의 부활이 뒤를 이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승천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행1:에 보면 부활하여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던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본래 그분이 계셨던 하나님의 우편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분의 승천은 또한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고 하시는 재림 사건의 보증이 되었으며, 그분이 재림하시는 날 인류 전체가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단독적이고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여 천국의 영생을 얻게 하려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적인 사건의 일환이었습니다.
본문 51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우리도 변화하리라.” 우리 모두가 믿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엄중한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만 아니라, 당신을 믿는 사람들도 부활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6:54에 분명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확실히 약속 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과학자들이 복제 양, 복제 돼지, 복제 늑대를 만들어서 화제가 되었는데, 멀지 않아서 인간도 복제 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인간의 정자나 세포를 냉동하였다가 먼 나중에 해동시켜서 옛날의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머리가 참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머리 좋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아십니까? 그분의 대단하심을 전능이라고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인간을 부활하게 하는 일이나, 천국을 준비하시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부활이란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영혼만 어디에서 살아남는 것을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땅에 묻혀서 썩어버리거나 불태워졌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부활하는 몸은 지금 이 몸과 똑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과 영 달라진 몸입니다.
몸은 생명을 담는 도구로서, 그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물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는 물속에 적응하는 몸으로 되어있고, 하늘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는 하늘에서 살아가기 적합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영혼은 지금의 이 몸에 담겨 있는데, 이 몸은 땅에서 음식을 먹고 물과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기에 적합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몸은 약하기도 하지만 죄에 취약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약한 몸이고 욕된 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몸으로는 거룩하고 영원한 천국에서 살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합당한 새 몸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부활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부활하는 몸은 이 세상에 맞춘 것이 아니라 천국에 맞춘, 거룩하고 신령한 몸이 됩니다.
물속에서 살아가던 장구벌레에게는 하늘을 날며 살아가게 하려고 ‘잠자리’라는 새 몸을 주십니다. 땅 속에서 살아가던 굼벵이 에게는 하늘을 날아가며 살게 하려고 ‘매미’라는 새 몸을 주십니다. 이 신비한 현상은 잠자리나 매미의 능력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솜씨이고 그분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에게도 새로운 환경을 주시고 거기에서 살아갈 새 몸도 주신다면,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 창조한 인간, 하나님을 닮은 인간에게는 그보다 더 멋지고 훌륭한 새 몸과 더 멋지고 훌륭한 새 환경을 준비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주님은 요14: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데, 가서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약속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처소 천국을 약속하신 것이 틀림없다면, 그 나라에서 살아갈 새 몸을 주신다는 약속도 또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우리의 몸의 부활도 믿어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새 몸으로 부활하여 주님이 준비해 놓으신 우리의 천국 집으로 갑니다. 거기서 우리는 영원토록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영원히 건강하고 만족스럽게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부터 확고부동하게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시던 금요일 새벽에, 베드로는 죽음이 두려워서 계집종 앞에서 ‘나는 예수를 절대로 모른다. 나는 정말로 예수와 상관없다’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는 변화되었습니다. 죽을까봐서 계집종 앞에서도 벌벌 떨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그는 하나님이 분명하고, 그분이 약속하신대로 내 몸도 부활 하겠구나’ 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부활한다면 죽는 것도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예수 잔당을 처단하려고 서슬이 시퍼런 유대인들 앞에 나가서 “너희가 죽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그는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으니 그를 믿으라.”고 전도 하며 평생을 살다가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음으로 목숨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주님이 왕이 되시면 한 자리 차지하려는 속된 생각으로 살았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일보다 급하고 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전도하다가 생애와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모두 부활을 목격하고 믿은 뒤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자신의 부활을 믿고 난 다음에 생명을 주님께 맡겨버린 사람들에 의해서 기독교 복음은 세상에 전파되었고, 오늘 우리도 이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정리해 보아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진짜 신자로서 사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철저히 계획적이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서 거친 환경을 이기지 못하는 아담 하와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실 때, 너희 죄악을 가려주고 하나님의 심판을 가려줄 희생자를 보내주겠다. 그가 너희들을 대신하여 이 짐승처럼 죽어서 너희 죄를 가려주고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줄 의의 옷을 입혀 주리라고 암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천년전 인물인 다윗왕은 그 메시야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처절한 죽음을 죽으실 것이며, 그때 그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여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실 것이라고 시22편에서 예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분에게 담당시켰기 때문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이사야 53장에서 예언하였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대신 죽는 어린양으로 메시야의 역할을 예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과, 그를 믿는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서 영광으로 이끌겠다는 계획은 인간이 타락할 때부터 하나님이 세워두셨던 치밀한 계획이었고, 그래서 예수의 죽음에는 부활과 영광으로 가는 길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기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그저 “예수님이 좋은 일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셨구나.”하는 정도의 인식으로는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가 무기력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발적이고 계획적으로 죽으셨는데, 그 계획이란 바로 죄인인 나를 구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었고, 그가 당하신 고통과 생명 값을 나의 구원을 위해서 지불하려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분이 맞고 찢기신 것은 나의 죄 대신에 벌을 받으심이었고, 그분이 죄인이 되심으로 우리가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피를 다 흘리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의 언약을 맺어 주려는 것이었고, 그분이 아픔을 당한 것은 우리 영과 육의 치료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조롱받으심으로 우리가 감히 하나님 앞에 가서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그분이 버림받고 외로워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에서 잠시나마 끊어지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연결시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이렇게 우리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는데 첫째는 아름다운 세상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와, 맑고 높은 하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를 가장 사랑한다고 할 것이고, 젊은 남녀는 애인이라고 할 것이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를 사랑하는 그 사랑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들에게도 사랑할 대상을 주셨다는 것은 대단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로 인해서 인격과 삶이 망가진 채로 절망을 안고 사는 우리를 회복시켜 주려고 당신의 아들 예수님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부활의 새 몸과 천국이라는 새 환경까지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귀한 축복을 받는 단 하나의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의 죽으심을 바로 알고 믿어 그 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따라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완성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뜻인데,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옛날 예수 모를 때처럼 살지 않고 새로운 사람으로서 살아간다. 세상적인 애착을 죽이고,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서 새로운 목적을 가진 사람으로 살겠다고 나서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시기 전까지, 십자가란 반역죄를 저지른 죄인이 당하는 사형도구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이후에는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자기가 외면하여도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자원하여 짊어지는 고난을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남이 버린 고아를 기르기 위해서 평생을 헌신하는 입양부모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일수 있고, 남의 나라에 복음을 주고 사랑을 주고 참된 생명을 찾아주기 위해서 자신의 안일과 생명을 바치는 선교사들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모른 체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궂은일을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담당하는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남의 형벌을 자기 등에 지고 가셨듯이 나도 그렇게 살겠다고 나선 사람이라면, 자기 목숨 유지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죽을까봐 두려워서 떠는 사람도 아니라, 사는 날 동안 의로운 일을 위해서 주님과 함께 목숨 내놓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잘 살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죽으려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죽고 말 목숨인데, 죽든 살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답게 살자. 어차피 죽을 이 생명을 주님께 바쳐버리고, 하나님이 주실 영원한 생명을 받자.”고 하는 대단한 사람이요, 이 사람이야 말로 진짜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세상에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담대한 사람으로 살게 되고, 누구도 이 사람이 가는 선한 길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껴도 결국은 죽고 말 생명을 어떻게 사용해야 가장 값지게 사용할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대신하여, 주님처럼 살다가 주님처럼 죽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부활과 영생을 수여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부활이 예정되어 있었듯이, 그리스도를 따라서 생명 바쳐 사는 사람에게도 부활과 영생의 선물이 역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진짜 기독교인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부터 진짜 신자로 사는 사람들이 됩시다.
(143장)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몸을 바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삶을 말하는데, 예수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목숨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오로지 주님이 하시던 일에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삶과 죽음이 별 차이가 없습니다.
빌 1장23절에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자신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사용할 곳을 찾아서, 그 일에 생명을 걸겠다고 다짐하고 헌신하는 삶이 몸을 바치는 것이고, 이것이 참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기 안일만 생각하는 삶을 죽음을 재촉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는 필수 과정이고, 죽음을 잘 죽어야만 영생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누에는 아주 작은 알에서 깨어나 썰어준 뽕잎을 먹으며 자라는데 넉 잠을 자고 난 뒤에는 입으로 실을 뱉어 고치를 지으며 몸이 쪼그라집니다. 꼬치를 흔들면 데그락데그락소리가 납니다. 누에의 한 살이가 끝난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 그 누에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꼬치에서 구멍을 뚫고 나방이 되어 나옵니다. 누에에게 꼬치를 짓는 일은 필수 과정이듯, 사람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내세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나 꼬치를 짓지 못하는 누에도 있습니다. 꼬치를 짓지 못한 누에는 나방으로 사는 다음 삶이 없고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죽는 것은 꼬치를 짓는 것과 같아서 부활과 영생의 미래로 이어지지만, 믿지 않고 죽는 사람은 미래가 없습니다. 그것으로 끝이고 엄중한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 구원얻은 성도는 자신의 목숨과 사는 문제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주님이 맡기신 일을 위해서 값있는 삶을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빌1:29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였고, 고전 7:22에는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자유인입니다. 미신이나 죄의 형벌이나, 죽음에서도 해방 받은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죄 짐을 대신 져주신 것처럼, 나도 주님과 이웃들을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된 것처럼 봉사하고 헌신하며 사는 것이 진짜 신자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가장 차원 높은 기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군지도 모르고 아무데나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기도는 최하급이요, 하나님을 알기는 하지만 자기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만 매달리는 기도는 중급 기도이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내 삶을 드리겠으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알려달라고 간구하는 기도가 최상급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참된 신자와 항상 동행하시며 그의 생활 속에서 당신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가 영생에 이르도록 평생 책임져 보호하시며, 그가 하는 일을 통하여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고 당신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십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넘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갑시다. 어차피 죽을 생명은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복음과 사랑을 주는 일에 생명을 바쳐 살다가 부활과 영생을 얻는 진짜 신자가 됩시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 중에 한 명도 이 영광스런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서로 돌보면서, 우리 모두가 이번 부활절을 계기로 새롭게 되어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성도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은혜 아니면
길승민목사 / 학원로교회 / 고전 15:1-11
아주 재미있게 쓰여진 글을 하나 보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뜨끔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당신의 훌륭한 조력자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가장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당신이 하는 대로 따라가기도 하지만 당신 행동의 90%가 나에 의해 좌우되기도 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몇 번 보고 나면 나는 자동적으로 그 일을 해냅니다. 나는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사람들에게는 ‘하인’이지만 실패하는 이들에게는 ‘주인’이 됩니다. 나는 인공지능 기계처럼 정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계는 아닙니다. 나를 당신의 이익 혹은 실패를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훈련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나를 훈련시키십시오. 만일 이를 가볍게 여긴다면 난 당신을 파멸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부전교회 박성규목사님 글 참조)
답은 바로 습관(習慣 习惯)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글 아닙니까? 특별히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몇 번 보고 나면 나는 자동적으로 그 일을 해냅니다.”라는 부분에서 오싹함 마저 느꼈습니다. 이글을 읽으며 뜨끔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습관 하나 마음먹은 대로 고치지 못하는 저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느꼈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습관은 바로 죄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초반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19년의 복역기간이 끝나고 가석방이 된 장발장이 오갈 데가 없는 중에 가톨릭 사제의 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따뜻한 하룻밤 잠자리까지 제공받습니다. 너무나도 황송하고 고마운 일이죠. 그런데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은촛대를 훔쳐서 그 집을 도망칩니다. 드디어 자기를 인간답게 대접해주는 한 사람을 만났음에도 은촛대를 훔치는 파렴치한이 된 것입니다. 이런 걸 보면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해도 몸에 찌든 악한 습관을 극복하기가 이렇게도 어렵구나 싶습니다.
이런 비슷한 사례가 최근에 있었습니다. 대도 조세형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청년들은 모르겠지만 조세형씨가 대도(大盜) 즉, 큰 도둑이라고 불렸던 이유가 있습니다. 1970-80년대에 당시 권력층의 부잣집만 골라 털어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던 서민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감옥에 수감된 후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기독교신앙을 갖게 되었고 심지어 출소 후에는 목사까지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지난 봄 81세의 나이에 대도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더군다나 회심한 그리스도인이자 목사직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도 사소한 절도를 저지르다 붙잡혀서 16번째로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말이 대도(大盜)지 그는 도둑이었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습관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한낱 잡범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장발장과 조세형은 둘 다 도둑이었고, 감옥 생활을 오래한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우리와는 다르지 않은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도 악한 습관이 있고, 얼마든지 상황과 조건이 되면 ‘들키지 않은 죄인에서 들킨 죄인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습관의 무서움을 끄집어 낸 이유가 있습니다. 습관만큼 우리에게 큰 절망감을 안겨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죄는 사실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습관은 여간해서 극복하기 어렵고, 습관 때문에 하나님을 반복해서 실망시켜드리고 있으며, 면목 없는 인간 실존의 나약함을 가장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래 더는 용서받지 못할거야. 나는 가능성이 없어. 끝이야’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이런 똑같은 감정과 자괴감을 가지고 있었던 성경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우리가 알기로 사도 바울은 온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걸까요?
본 론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의 여러 서신서를 썼으며, 예수님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체계를 세워서 이신칭의라는 기독교의 진리를 로마서에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가 되어, 당시 세계관에서 땅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절대로 씻을 수 없는 원죄 같은 송구함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한 사실입니다. 어떻게 핍박했는지 행9:1-2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또한 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는 장면에서 바울은 스데반이 마땅히 처형당해야 한다며 증인을 자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7:57-8:1)
바울은 수많은 제자들을 투옥시키거나 즉결 심판으로 죽였고, 스데반이라는 걸출한 기독교변증가이자 초대교회의 지도자마저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비록 주님이 자신을 용서하셨고, 사명을 주셔서 복음전도자가 되었지만 자기 손에 죽은 자의 피가 철철 흐르는 고통이 불쑥불쑥 떠올랐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겸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겸손의 마음을 담아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0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고백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 은혜 받은 사람은 약함을 자랑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약한 것을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표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후12:9에서 사도바울은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소위 ‘육체의 가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안질 혹은 간질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육신의 질병이 있으니 먼 거리를 걷고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또 하나님 입장에서 보아도 비효율적인 일이니 고쳐달라고 바울은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절한 하나님의 응답이 방금 읽은 고후12:9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의 반응을 보면, 거절당한 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자 바울은 기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입으로 약한 것을 자랑한다며 선언을 한 것입니다. 약함을 자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관해서 베드로의 이야기는 더 와 닿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초대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최고의 존경을 받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베드로의 무지함, 게으름, 다혈질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그날 밤의 일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음이 다 바닥이 나서 디베랴 바닷가에 고기 잡으러 가버린 불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여러분이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이 있는데, 성경이 실제로 기록된 시점은 예수님은 이 땅에 안계시고,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수장 노릇을 할 때였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하고, 회람용 서신서가 각 교회마다 전달될 그 당시는, 베드로는 보기에 따라서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베드로에 대해 기록을 하는데 숨기고 싶은 과거를 용기 있게 만천하에 까발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베드로에 대해 전혀 여과 없이 그의 과오와 적극적인 범죄까지 낱낱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이런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살아 있는 날 동안 곳곳을 다니며 최선을 다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십자가의 사랑을 전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김없이 스스로 고백하게 되는 이야기, “저는 그날밤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사랑의 마음을 담아 말씀하셨을 때 딴 생각하느라 아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님은 디베랴 바다에서 물고기 잡는 저를 찾아와서 사랑으로 다 용서하시고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분 앞에 나를 낮추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자기의 치부를 다 드러내니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 역시 베드로의 약함을 다 써놓은 것입니다.
바울도 그렇고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목에 힘을 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간증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자신의 약함을 통해 더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최고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우리의 약함을 숨기지 말고 인정하고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 주님이 일하시도록 삶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② 은혜 받은 사람은 사명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 부분에서 바울의 어조는 굉장히 상기되어 있고 가슴이 뜨거운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은 보기에 따라 교만한 표현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그래도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이 복음을 완전하게 전할 수 있으며, 내가 너희에게 확실하게 알게 하겠다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굳게, 헛되이, 먼저’ 등 아주 강조된 표현들을 남발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느냐 그러니 너희도 그 복음 위에 확고하게 서 있으라고 말하고 있는겁니다.
바울이 이렇게 강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가 복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를 누린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에 전하는 서신서의 어조가 이미 다릅니다. 은혜를 누리고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회복을 누리는 사람은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리게 되어있습니다. 바울은 그 열정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간증에 그치지 않고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가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진정성 있게 전했더니 진정성 있게 믿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즉, 너희도 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 자신을 만나 주신 이후로, 다메섹의 제자 아나니아로부터, 아라비아의 공동체에서,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서, 그리고 나중에 자기가 선교사로 파송 받은 안디옥교회와 그곳의 목회자 바나바로부터 전해들은 복음과 하나님나라의 비전은 사도, 즉 보냄 받은 자라는 정체성과 사명을 흔들림없이 견지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결 론
바울은 사명자였고, 헌신자였고, 땅끝까지 달려갔던 복음전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받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은혜는 곧 우리의 정체성이고,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은혜를 받고 누려야 합니다. 매일 밥을 먹듯이, 매일 물을 마시듯이, 매일 사람 사이에서 공급받고 안정감을 누리듯이 우리는 은혜를 사모해야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런 은혜의 필요성을 이렇게 소리쳐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영화를 보려면 영화관을 가야하고, 책을 보려면 서점을 가야하듯이 은혜를 얻으려면 은혜가 공급되는 곳을 가야합니다. 은혜의 보좌가 머무르는 곳, 교회, 예배의 자리, 나의 사명지. 그 어느 곳이든, 하나님의 눈이 머무르는 그곳에서 은혜를 누리시고, 은혜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부활의 예수님
김승환목사 / 고전 15:1~11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그 순간에 그 분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태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순간에도 그 광경을 목도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었던 것처럼 첫 부활의 순간도 그러했습니다. 바위를 깍아 만든 돌무덤 속은 칠 흙 같이 어두웠습니다. 주님은 그 속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신비스럽게 그 분에게 역사하는 순간에 주님은 사망권세를 물리치시고 칠 흙 같은 어둠 속에서 광명한 빛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이 다른 신앙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기독교는 육체의 부활을 믿는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처럼 윤회를 말하지 않습니다. 헬라 철학처럼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만이 영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육체의 부활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믿음은 성도들의 신앙을 날마다 새롭게 해주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말할 때, 그리스도인을 말할 때 부활 신앙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부활은 복음의 핵심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이 왜 소중합니까? 왜 주일이 안식일을 대체할 만큼 중요한 날이 된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히 예수님 한 분의 부활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장차 모든 믿는 사람의 부활을 예고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에 모든 믿는 자들이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본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복음의 핵심이지만 예수님의 부활 소식도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는 십자가 죽음은 절반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이는 절반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것이 나머지 절반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함께 전해질 때 그것은 완전한 복음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완전한 복음을 받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후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날 밤새 기도하셨고, 잡히신 후에 많은 매질을 당했고(39대, Passion of Christ),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셔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곳에서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질을 한 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뜨거운 태양 아래 벌거벗고 상처 입은 몸으로 여섯 시간(아침 9시 오후 3시)을 매달려 있었습니다. 더욱이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이 죽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 창 날을 통해 피와 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향품과 함께 세마포에 싸서 돌무덤에 안치했습니다. 공기도 잘 통하지 않는 돌무덤 속에서 예수님의 시신은 72시간 동안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죽지 않고 기절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기적인 셈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이런 극심한 고통과 환경 속에서 죽지 않고 기절한 채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시는 이 놀라운 장면을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이 묻혀 있던 무덤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 입구를 가로 막고 있던 돌문이 옮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서는 깜짝 놀라 급히 제자들에게 달려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녀의 말을 듣고 급히 달음질 해서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동굴 속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몸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고 그 분의 몸을 감싸고 있었던 세마포가 돌 위에 놓여 있고, 그 분의 머리를 쌋던 수건은 따로 쌌던 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시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보여주는 간접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보여주는 보다 직접적인 증거는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을 나열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증인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가 있습니다. 5절에 게바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게바는 사도 베드로의 다른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헬라어, 게바는 아람어 입니다. 똑 같이 반석이라는 뜻입니다.[시몬은 갈대라는 뜻]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기 전에 먼저 베드로에게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4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베드로 혼자에게 먼저 나타나신 사건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내용은 복음서에는 기재되지 않았지만 제자들을 통해 전승되어 온 내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하신 주님은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던 베드로를 만나신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내 양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낙심한 베드로를 새롭게 회복시키고 그가 자신이 받은 사명을 다시 감당토록 해 주신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장차 우리에게 새로운 부활의 소망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 속에서 새로운 비전과 사명을 주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새로운 사명감으로 주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는 과거와 달리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땅에서의 자신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께서 맡겨 주신 양들을 돌보다가 순교를 당합니다. 지금 그의 시신은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새로운 사명감으로 주의 일을 열심으로 감당하고 지금은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의 소망을 가진 채 잠들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난 여러분들도 베드로와 같이 주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발견하시고 새롭게 그 사명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 뿐만 아니라 야고보에게도 보이셨다고 합니다. 여기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말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최소 6명 이상의 혈육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5절에 예수님의 혈육으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리고 그의 누이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혈육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는 그 분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에 대해 못 마땅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야고보와 유다는 나중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초대교회의 큰 일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게 된 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던 야고보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남은 인생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야고보 사도처럼 놀라운 삶의 변화를 보일 수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도 야고보 사도와 같은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변에 예수님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분들에 대해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족 중 불신자들이 있으면 그들에게 인내를 가지고 전도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들 중에 하나님이 야고보처럼 귀하게 사용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에게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열심으로 따르던 자였지만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죄에 대해 낙심해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어부의 생활을 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로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해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 보다 더 좋지 않았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잡아다가 대제사장 앞으로 끌고 오는 그런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에서 자신을 가리켜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라고 했습니다.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어두운 과거를 지니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그 삶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는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아끼지 않고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비록 그가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예수 안에서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사명자로서 자신의 남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베드로나 야고보나 바울의 삶은 그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무엇이 이 세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았을까요?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 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진리 그 차제 이기 때문입니다. 참 생명은 참 생명을 낳습니다. 살아있는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씨앗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새로운 생명을 낳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그 분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도마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19) 아멘! 아멘! 우리는 주님을 보지 못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고 그 분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러시면 여러분은 모두 복된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면 주님의 생명의 씨앗이 여러분 안에 뿌려진 것입니다.
4월은 부활의 절기입니다. 4월에 아름다운 꽃들이 눈부신 자태를 드러내고, 그 고유한 향기를 토해내듯이 부활하신 예수의 참 생명의 씨앗을 가진 여러분들은 예수 생명의 꽃을 피우시고, 예수 생명의 향기를 풍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향기는 사랑의 향기, 믿음의 향기, 소망의 향기입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곳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향기가 널리 널리 퍼져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수영목사 / 고린도전서15:1-11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 관하여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은 그것을 확실히 믿고 굳게 지키는 사람에게 구원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2절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복음을 확실히 믿고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구원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3-4절에서 쓰기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왜 우리에게 복음 즉 기쁜 소식이며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3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이 죄 때문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영원히 살게 될 것임을 확증해주셨기 때문에 그의 부활 또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 우리를 위해서이고, 바로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라는 이 놀라운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늘 감사하며 세세무궁토록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구원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예수님의 부활도 다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부터 오늘날까지 그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참으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면 그는 사람과 같은 모습은 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진정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죽듯이 그런 죽음을 죽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하나님께로 올라가 버리셨기 때문에 부활하실 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셨다고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가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처럼 죽는 것으로 끝나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죽으셨고 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세 가지 논거를 제시합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장사 지낸 바 되셨다”는 것은 그의 죽음이 진정한 육체적 죽음이었음을 뒷받침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육체적 죽음을 죽으셨으며 그러기에 진정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 사건이며 그의 부활 또한 실제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본문 5-8절에서 진술하기를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많은 증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임을 더 힘 있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백 명 이상의 증인이 있으며 그 중 대다수가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 아직도 살아있다고 말한 것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원하면 얼마든지 그들에게 직접 확인해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역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하며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세 번째 논거는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말할 때나 그의 부활을 말할 때 “성경대로”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본문 3-4절을 다시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훗날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특별히 택하신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고 기록하게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진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과 많은 증인들을 내세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확실한 역사성을 역설한 사도 바울은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또한 증인으로 삼습니다. 자기가 한 말이 다 남들로부터 듣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경험한 바임을 강조합니다.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내 보이시고는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본문 8절) 한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자기가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그로부터 들은 말씀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전한 것이기에 비록 자기가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이긴 하지만 자기가 전한 복음은 다른 큰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꼭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며 따라서 안심하고 믿어야 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마지막 절에서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한 말의 뜻을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복음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밝혀주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8절에서 스스로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말한 그는 이어서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본문 9절) 고백합니다. 복음을 전하며 다닐 자격이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격이 전혀 없음을 아는 그이기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그는 더욱 더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임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말로만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하지 않고 온 몸을 던져 그 어느 사도보다 힘껏 복음전파의 일에 매진한 것입니다. 그의 위대한 고백을 들어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본문 2절에서 우리가 복음을 확실히 믿고 굳게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믿는 것은 아무에게서나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 믿음을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 같이 우리도 모두 아니 그 이상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들임을 고백합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그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용서하셨음을 믿습니다. 이제는 그를 믿기만 하면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부활과 영생의 복락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참으로 복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사실 쉬운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도 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우리 보고 미쳤다고 할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생길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증거나 증명 없이도 “아멘” 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대단한 화술이나 감동적 웅변 없이도 사람들을 설득시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을 받은 증거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증언하는 이들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고백을 날마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헛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처럼 힘껏 복음의 증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그 수고마저도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10절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한 말은 대단히 중요하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그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다 하시니까 나는 할 일이 없다,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힘껏 주의 일을 했습니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이어 또 말하기를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면서 힘껏 수고하고, 자기가 많은 수고를 하고서도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말을 가지고 순환논리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역설이고 믿음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밖에서 보아서는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신비는 그 신비를 품고 그 신비 속에 들어갈 때 풀리는 것입니다.
유럽에 가면 오래된 성당이나 교회 건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건물들이 대부분 겉에서 보면 전체가 벽돌 색깔이고 나머지는 거의 다 시커멓게 보입니다. 건물의 전체적인 윤곽이나 경우에 따라 섬세한 조각장식이 눈에 띌 뿐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가는 순간 밖에서는 안 보이던 것으로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이 있습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강렬한 채색의 스테인글라스 성화들입니다. 교회당 내부 전면이 다 그 스테인글라스 성화로 둘려싸여 있습니다. 믿음이나 교회도 그렇습니다.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믿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 교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믿음과 교회 안에 있는 것과 그 아름다움을 진정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밖에서 비판만 하는 사람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믿음의 위대함과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죽으면 산다
고전15장 01절 ~ 10절 / 임덕순목사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은 너무나 충격적인 뉴스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인류가 내심 바라고 있었던 희망의 뉴스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갈망이 가득한데도 죽음에 막혀 절망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인간은 죽음을 가장 무서워하며 죽음아래 굴복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누가 죽인다고 하면 손을 번쩍 들고 꼼짝 못했고, 병에 걸려서 죽는다고 하면 누구라도 절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된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은 육체로 사시는 동안에 병든 자를 고치시다가 죽은 가족 때문에 너무 절망하는 사람을 보시면 죽은 사람을 살려주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고 처참하게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그 말을 듣고 절망하는 제자들에게 그러나 내가 다시 살아난다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던 대로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전해진 최대의 뉴스입니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다시 사셨네 (160)
그런데 부활이라는 진리는 교회가 오랜 세월 알려줬어도 사람들이 가장 믿지 못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구약성경은 천 수 백년전부터 예언하여 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오 백 명도 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 때문에 놀라 도망쳐서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는 계기가 되었고, 절망하던 그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를 하나님이시오 인간의 구주라고 전도하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부활의 증거는 얼마든지 많고 또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인류의 부활의 시작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전15:16에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법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시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20절에서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선포하여, 신자의 부활이 뒤 따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승천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행1:에 보면 부활하여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던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승천은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시는 재림 사건의 보증이 되었으며, 인류 전체가 겪게 될 최후의 심판은 그분의 재림 날에 일어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단독적이고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여 천국의 영생을 얻게 하려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본문 51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우리도 변화하리라.” 우리 모두가 믿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엄중한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만 아니라 당신을 믿는 자들도 부활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6:54에 분명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확실히 약속 하셨습니다.
요즘 복제 양, 복제 돼지, 복제 늑대를 만들어서 큰 화제가 되고 있는데, 멀지 않아서 인간도 복제 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인간의 정자나 세포를 냉동하였다가 먼 나중에 해동시켜서 옛날의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참 대단합니다. 이런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은 얼마나 크신지 아십니까? 그 전능하신 분에게 우리를 부활하게 하는 일이나, 천국을 준비하시는 일이 문제겠습니까?
부활이란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영혼만 어디에서 살아남는 것을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불태워지고 땅에 묻혀 썩었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부활하는 몸은 지금 이 몸과 똑같은 것이 아니라 영 달라집니다.
몸은 생명을 담는 도구로서, 그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물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는 몸이 물속에 적응하도록 되어있고, 하늘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는 하늘에서 살아가기 적합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영혼은 지금 이 몸에 담겨 있는데 이 몸은 땅에서 음식을 먹고 물과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기에 적합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하고 죄 짓는 몸으로는 거룩하고 영원한 천국에서 살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합당한 몸을 새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부활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부활하는 몸은 이 세상에 맞춘 것이 아니라 천국에 맞춘 거룩하고 신령한 몸이 됩니다.
물속에서 살아가던 장구벌레에게는 하늘을 날며 살아가게 하려고 ‘잠자리’라는 새 몸을 주십니다. 땅 속에서 살아가던 굼벵이 에게는 하늘을 날아가며 살게 하려고 ‘매미’ 라는 새 몸을 주십니다. 이 신비한 현상은 잠자리나 매미의 능력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솜씨이고 그분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에게도 새로운 환경에 따른 새 몸을 주신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꽃이고 하나님을 닮은 인간에게는 그보다 더 멋지고 훌륭한 새 몸과 더 멋지고 훌륭한 처소를 준비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주님은 요14: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데, 가서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약속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처소 천국을 약속하신 것이 틀림없다면, 그 나라에서 살아갈 새 몸을 주신다는 약속도 또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우리 자신의 몸의 부활도 믿어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새 몸으로 부활하여 주님이 준비해 놓으신 우리의 천국 집으로 갑니다. 거기서 우리는 영원토록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영원히 건강하고 만족스럽게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부터 확고부동하게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시던 금요일 새벽에, 베드로는 죽음이 두려워서 계집종의 앞에서 나는 예수를 절대로 모른다. 나는 정말로 예수와 상관없다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는 변화되었습니다. 죽을까봐서 계집종 앞에서도 벌벌 떨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그는 하나님이 분명하고 그분이 약속하신대로 나도 부활 하겠구나 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부활한다면 죽는 게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예수 잔당을 처단하려고 서슬이 시퍼런 유대인들 앞에 나가서 “너희가 죽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그는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으니 그를 믿으라.”고 전도 하다가 잡혀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음으로 목숨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주님이 왕이 되시면 한 자리 차지하려는 속된 생각이나 했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일보다 급하고 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전도하다가 생애와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모두 부활을 목격하고 믿은 뒤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자신의 부활을 믿고서 생명을 주님께 맡겨버린 사람들에 의해서 기독교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었고, 오늘 우리도 이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꼭 정리해 보아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반은 무엇인가?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진짜 신자로서 사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반으로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철저히 계획적이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서 거친 환경을 이기지 못하는 아담 하와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실 때, 너희 죄악을 가려주고 하나님의 심판을 가려줄 희생자를 보내주겠다. 그는 너희들을 대신하여 이 짐승처럼 죽어서 너희 죄를 가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줄 의의 옷을 입혀 주리라고 암시하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주님 오시기 천년전 인물인 다윗왕은 그 메시야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처절한 죽음을 죽으실 것이며, 그때 그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여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실 것이라고 시22편에서 예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기 때문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이사야 53장에서 예언하였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주기 위해서 대신 죽는 어린양으로 메시야의 죽으심을 묘사하여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과, 그를 믿는 자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 영광으로 이끌겠다는 계획은 인간이 타락할 때부터 하나님이 세워두셨던 치밀한 계획이었고, 그 죽음에는 부활과 영광으로 가는 길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기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으심입니다.
2.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바로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그저 “예수님이 좋은 일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셨구나.”하는 정도의 인식으로는 신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가 무기력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발적이고 계획적으로 죽으셨는데, 그 계획이란 바로 나를 구원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었고, 그가 당하신 고통의 값과 그가 희생한 생명의 값을 나의 구원을 위해서 주려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분이 죄인이 되심으로 우리가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분이 맞고 찢기신 것은 나의 죄 대신에 벌을 받으심이었습니다. 그분이 모든 피를 다 흘리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의 언약을 맺어 주려는 것이었고, 그분이 아픔을 당한 것은 우리 영과 육의 치료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이사야가 예언한바 있습니다.
그분이 조롱받으심으로 우리가 감히 하나님 앞에 가서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그분이 버림받고 외로워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에서 끊어지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연결시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여러 채널로 우리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믿어야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는데 첫째는 아름다운 세상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와, 맑고 높은 하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를 가장 사랑한다고 할 것이고, 젊은 남녀는 애인이라고 할 것이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를 사랑하는 그 사랑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에게도 사랑할 사람들을 주셨다는 것은 대단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로 인격과 몸과 삶이 망가진 채로 절망 속에서 사는 우리를 회복시켜 주려고 당신의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나라까지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귀한 축복을 받는 단 하나의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의 죽으심을 바로 알고 믿어 그 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따라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완성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뜻인데, 자기 유익을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롬6장에 보면 세례가 무엇인가를 설명하여 주셨는데, 세례란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부활하신 그와 더불어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형벌을 대신 받아 주셔서 나를 구원하신 것에 감격하면서, 나도 이제는 세상적인 애착을 죽이고,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서 새로운 목적을 가진 사람으로 살겠다고 나서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시기 전까지, 십자가란 죄인이 지은 죄 때문에 당하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이후에는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자기가 외면하고 벗어던져도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자원하여 짊어지고 가는 고난을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남이 낳고 버린 고아를 기르기 위해서 평생을 헌신하는 입양부모가 이 시대에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고, 남의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고 사랑을 주고 참된 생명을 찾아주기 위해서 자신의 일생의 안일과 생명을 바쳐버린 선교사들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외면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궂은일을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담당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결심하고 사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 됩니다. 주님이 남의 형벌을 자기 등에 지고 가셨듯이 나도 그렇게 살겠다고 나선 사람이라면, 자기 목숨 유지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죽을까봐 두려워서 떠는 사람도 아니라, 사는 날 동안 사는 것 답게 살려고 목숨 내놓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잘 살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잘 죽으려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죽고 말 목숨인데, 죽든 살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답게 살자. 어차피 죽을 이 생명을 주님께 바쳐버리고, 하나님이 주실 영원한 생명을 받자.”고 하는 대단한 사람이요, 이 사람이야 말로 진짜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의 가치를 아는 사람인데, 아무리 아껴도 결국은 죽고 말 생명을 어떻게 사용해야 가장 값지게 사용할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담대한 사람으로 살게 되고, 어느 누구도 이 사람이 가는 선한 길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따라 가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대신하여 살고, 주님처럼 죽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부활과 영생을 수여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부활이 예정되어 있었듯, 그리스도를 따라서 생명 바쳐 사는 사람에게도 부활과 영생의 선물이 역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진짜 기독교인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진짜 신자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오늘부터 진짜 신자로 사시는 우리들 모두가 됩시다.
(143장)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몸을 바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삶을 말하는데, 예수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목숨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 생명은 어떻게 되어도 아무 상관없다는 태도를 가지고, 오로지 주님이 하시던 일에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삶과 죽음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빌 1장23절에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자신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사용할 곳을 찾아서, 그 선한 일에 생명을 걸겠다고 다짐하고 헌신하는 삶이 몸을 바치는 것이고 이것이 참 신자의 모습입니다.
신자 중에도 죽음을 청하는 자와 죽음을 피하는 자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가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려고 오셨다는 사실을 밝히고 죽음의 길을 스스로 찾아 가고 계실 때, 베드로는 자기 살겠다고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며 맹세했고 주님을 저주하기 까지 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어 전도도 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막상 주님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들은 자기 생명을 지키겠다고 모두 도망쳐 버렸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여서 인류를 살리려고 골몰하는 시간에, 자기 살겠다고 주님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명만 생각하는 삶을 죽음을 재촉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죄지은 인간에게 필수 과정이고,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누에는 넉 잠을 자고 고치가 됩니다. 그 때는 누가 봐도 죽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꼬치에 구멍을 뚫고 나방이 되어 나와, 알을 낳아서 새 생명을 이어갑니다. 누에 에게 꼬치 짓는 일은 필수 과정이듯, 사람에게 죽음은 내세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과 사는 문제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주님이 맡기신 일을 위해서 값있는 삶을 살아야 진짜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빌1:29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였고, 고전 7:22에는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자유인입니다. 미신이나 죄의 형벌이나, 죽음에서도 해방 받은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죄 짐을 대신 져주신 것처럼, 나도 주님과 이웃들을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된 것처럼 봉사하고 헌신하며 사는 것이 진짜 신자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가장 차원 높은 기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군지도 모르고 아무데나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기도는 최하급이요, 하나님을 알기는 하지만 자기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만 매달리는 기도는 중하급 기도이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내 삶을 드리겠으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알려달라고 간구하는 기도가 최상급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과 항상 동행하시며 그의 생활 속에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가 영생에 이르도록 평생 책임져 보호하시며, 그가 하는 일을 통하여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고 당신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십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넘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그렇게 살아봅시다. 어차피 죽을 생명은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복음과 사랑을 주는 일에 생명을 바쳐 살다가 부활과 영생을 얻는 성도가 됩시다. 복음과 사랑을 줄 이웃을 찾아 종처럼 섬기면서,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 중에 한 사람도 이 영광스런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서로 돌보면서, 우리 모두가 참 신자로서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치유는 성령의 역사
고전15장 01절 ~ 10절 / 박지온목사
오늘 제목을 "치유는 성령의 역사"다 그렇게 제목을 잡았습니다 만은 제가 조금 여러분도 저도 뭔가 사실적인 어떤 확인들이 좀 있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지난주부터는 제가 철야를 인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본당에 모이다가 하층에 모이니까 굉장히 많아 보이더라 구요. 일단 장소가 좁으니까! 가득 차잖아요. 그래서 기도의 분위기가 좀 되어진다는 것이 감사하고 조금 답답한 것은 앉을 자리가 없어서 조금 좁았다는 것이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 마음이 좀 듭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이 뭘 생각했느냐 하면, 하나님 내가 송현교회 목사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를 이루는 자로 세우심을 받았다라면 먼저 내게 사실적인 확인이 필요합니다. 사실적인 증거가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이 들었고 또 송현교회 찾아온 여러분들이 또 송현교회에 있는 여러분들이 내가 왜 이 교회에 세웠고 하나님이 왜 나를 이 교회에 보내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왜 이 교회에서 내가 사업을 성공하게도 하고 실패도 하게 하시고 왜 이 교회에서 건강도 하게 하시고 약함도 있게 하시고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이 교회에 세우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전도한다. 선교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 가지로 닉네임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단, 삼단! 뭐 사단까지는 안 갈지 모르겠지만 구체적으로 그런 이야기도 하고 그러나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나는 암만 나는 쳐다봐도 이단이라는 이런 생각이 안 든다는 정도가 아니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왜 내가 이단인 것 같으면 내가 이단인 것을 내가 안다 그러면 누구보다도 나는 거기에서 나와 야죠. 그리고 누구보다도 여러분들이 정말 이단으로부터 빠져나와야지. 그리고 그렇다 그러면 다른 사람보다도 내가 거기를 인도한다 이건 뭐 엄청난 하나님 앞에 저주인데...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런 어떤 상황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이 이 교회에 세우신 계획과 뜻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리고 또 이 교회에 보내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이 돼요. 그래서 뭐든지 전도하러 갈 때에 혹시 나를 뭐라 그럴까? 송현교회에서 왔다 그러면 이단이라 그럴 때에 뭐 어떤? 그런 위축감보다도 어떤 면에서 자랑스럽게 확신과 담력으로 우리가 복음 전하고 그리스도 전하고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제가 가만히 보니까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더러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확인이 안 돼요. 본인이! 처해있는 축복과 은혜가 확인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어떤 자입니까? 행복한 자입니다. 진짜 행복합니까! 우리가 그러기 위해서 여기 모였어요. 그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금 전도한다고 이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해야 될 얼굴이 비참해진다. 는 그 진짜 하나님도 자존심 상하겠어요. 송현교회 교인들이 뭐 저런 것들이 다 있냐! 행복할 자리에 세워 놓았는데 이 비참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 위축감이 든다. 이건 심장이 상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 동안 뭐 여러 가지로 오랜 기간동안 있으면서 다음 5월 달이 딱 약 2년인데... 근간에 들어서 정말 하나님 앞에 내가 기분 나빠요. 주여 송현교회에 세운 목사로서 나았다 안 나았다 이전에 하나님 정말 송현교회 목사로서 진짜 행복하게 해 주옵소서. 내가 이 자리에 섰다는 것이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 된 교회요. 가장 행복 된 목사요. 가장 행복 된 사람이다. 증거 주옵소서. 조금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제 얼굴을 보십시오. 상당히 오늘 아침에도 굉장히 활기를 얻고 제가 뭔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마음에 굉장히 기쁨이 좀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정말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았다는 데서 자부를 느낄 수 있어야 될 뿐 아니라. 가장 행복하다 이게 안 와지면은 우리는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참해 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그런 면에서 바로 어떻게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그래서 결론은 오늘 진짜 여러분 치유 받아야 됩니다. 치유 받아야 돼요. 상당히 뭐 여러 가지로 정신적인 문제 육체적인 문제 있습니다. 만은 진짜 치유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치유 받는다는 역사가 어디서 오느냐? 받아합시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만큼~" 뭐가 됩니까? 치유가 되는 겁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만큼 치유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시점에서 오늘 조금 배경을 가지고 먼저 여러분과 제가 이런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주시는 그 약속과 은혜의 역사에 확인이 개인적으로 안 되면 어렵거든요. 그래서 오늘 구체적으로 개인적으로 좀 확인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이 되어집니다.
먼저 뭘 확인해야 되느냐? 여러분 하나님 정말 믿습니까? 힘이 없어요. 하나님 정말 믿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믿습니까? 저는 몇 번 몇 번 반복해도 강조하고 싶고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내 안에 계세요. 그런데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느냐! 창세기 1장부터 쭉 나가면서 천지를 무엇으로 창조했습니까? 말씀으로... 말씀한마디에 완전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마태복음에 말씀한 것처럼 천지는 변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일 점, 일획도 변치 않고 다 뭐라 그랬습니까? 이루리라 그랬습니다. 말씀은 성경말씀은 그대로 이 땅에 성취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전능하시냐! 말씀대로 이 땅에 성취할 것이 약속 된 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믿는 정도가 아닙니다. 확신과 여기에 감사해야 됩니다.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이루어 져야 돼요.
그리고 특별히 여러분들이 아실 것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창조하신 존재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람을 향해서 가장 아름답게 창조했지만 인간이 사단의 꼬임을 통해서 사단의 유혹을 통해서 창세기 3자에 빠졌죠. 그래서 저주와 재앙이 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완전히 부서져버렸어요. 하나님의 형상이 부서져버리고 그 축복과 은혜가 다 부서져 버렸습니다. 이것을 회복하는 것을 성경은 뭐라 그랬느냐? 재창조라 그랬습니다. 신약에 한번 받아합시다.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로다." 완전 바꾸어졌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피조 되는 새롭게 창조되는 이 축복과 은혜가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런 축복을 주시면서 이런 축복의 예로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참 재미있는 말씀을 주었어요. 뭐라 그랬냐하면, 이사야 43장 1절에 보면 야곱아! 말하자면 선택받은 자를,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우리 다같이 한번 불러 볼 때에, 우리 할 때에 야곱아! 그럴 때에 자기 이름 부르세요. 이 한 구절만 하겠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그것만하겠습니다. 자기 이름 불러요. 다같이 시작 "'박지온'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것만 믿어도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랬냐하면요. "이제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누구 것입니까? 내 것이라. 내 것이 누구 겁니까? 하나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이 만들어서 당신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당신 것으로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해 놓고는 어떻게 하나님이 축복하고 인도하셨느냐! 2절에 보면,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 43: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할렐루야! 받아합시다.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참 약속을 붙잡으면 애굽과 구스를 통해서 굉장히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했어요. 그런데 절대로 약속 잡으면 주변에 모든 고통하게 하는 자들을 정복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가 어디냐 하면요.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할 때는 계속 정복을, 침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강할 때는 전 강대국을 다 먹어 버렸습니다. 다윗 때에 있어서 그건 대 제국이 된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언약 잡게 되면 여러분들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을 전부 정복해 버립니다. 이 엄청난 축복과 약속이 어디에? 언약 속에... 그러면서 여기에 하나님께서 약속했습니다. 절대로 너는 신분자체가 망할 수 없다. 왜 너는 내 것이라. 이 사실이 여러분 확인되어야 됩니다. 그냥 앉아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여기에 나올 수 없어요. 바로 이 사실을 누가 구체적으로 이루어 주시느냐! 나와 함께 하시는 누구입니까? 성령께서, 성령께서...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여기에 앉았다. 이 사실만으로도 참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한 달에 한 번씩 이 자리에 오셔도 그게 자기 마음까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저 안 믿는 사람 죽었다 깨도 못 앉아요. 갖다 놔도 안 돼요. 제가 보니까, 어떤 잠깐 앉았다가 정신이상하고 점치는 분들인데 앉았다가도 예배드릴 때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못 있더라고요. 그러니 나가 버리더라고요.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축복입니다. 받아합시다. 절대로 망할 수 없는 자들. 절대로 실패할 수 없는 자들 승리만 할 수 있는 자들 하나님께서 시작부터 끝까지 지키도록 약속 받은 자들만 이곳에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뭡니까 여러분의 교회요. 제가 앞에 선 교회입니다. 이 확신과 자신을 가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올 수도 없고 올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뭐 오늘도 서약서를 드리고 뭘 이렇게 합니다. 서약서에 뭐 여러 가지 서약도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때에 따라서 좀 못할 수도 있고 좀 약할 수도 있고 서약해놓고 못 지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 바라보세요. 약한 것 고백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지난번에까지는 뭐 술 담배 다 먹고 다 했는데 이번에는 보니까 그런 건 뺐더라고요. 왜? 너무 구질, 구질 하니까! 그런 것조차 거론할 필요도 없어요. 왜 하나님의 약속잡고 앉아 있으면 누가 이루십니까! 성령의 인도 받으면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이루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서약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약속잡고 하나님 앞에 섰다는 그 약속 언약의 확인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 바로 깨달아야 되죠.
그래서 구체적으로 여러분과 제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세우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그가 성령으로 나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전능하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거든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여러분 세상 창조했을 때에 나는 저 잠깐 어디 글을 보니까! 은하계에 대한 글이 나왔더라 구요. 그러니 참 밤하늘에 요즘 우리 시골에서 도시에서는 잘 못 보지만 그 은하수 그냥 은하라 안 그랍니까! 그 별 하나 하나가 지구 수백 배도 넘는 게 있어요. 그리고 또 그 은하계 중에 또 도는 별이 있어요. 그런데 보세요. 숫자를 세릴 수 없이 하얗게 깔려 있습니다. 그 어마 어마한 우주를 누가 창조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우주보다 가장 더 귀중하게 누구를 남자와 여자를 여러분과 저를 창조했습니다. 이 엄청난 축복과 은혜 그리고서는 창조하고 어떻게 했냐! 내가 너와 함께 하마! 불 가운데도, 물 가운데도 절대로 침몰치 못하게 내가 너와 함께 하마! 다시 말해서 너는 내 것이라. 절대로 망할 수 없다. 요즘 실패하는 것 같고 병든 것 같고 어려운 것 같아도 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믿습니까! 진짜 믿습니까!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를 향해서 우리의 하나님께서 뭐냐? 너희는 그런 의미에서 그런 배경 때문에 절대로 뭐냐? 두려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이것을 확실히 우리 속에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귀중한 사람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너무 감사해서 지난번에도 말씀했습니다 만은 만약에 하나님이 이 겉만 창조하고 속은 인간이 기술로서 뭘 만들었다. 참 고통스러울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하도 인간이 속여 가지고 너무 속여 가지고 보니까! 뭐 이건 뭐 전부 눈만 열면 속고 속는 게 청와대 눈까지 속이더라 만은... 참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혹시 말하자면 자 이 위장을 갈아넣었다. 이 모조품을 갈아넣으면 곤란합니다. 여러분... 이 5년도 못 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했습니다 만은 뭐 탈이 났거든 걱정하지 마세요. 주여 알았습니다. 이제 부르실 때가 됐는가 봅니다. 내가 준비하겠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다 하나님이 날짜 다 정해 놓았어요. 일찍 갈 사람 일찍 정해놓고 늦게 갈 사람 늦게 정해놓고... 여러분들이 한번 기도할 때에 주여 내가 죽기까지 주님 앞에 어떻게 해야 됩니까? 쓰임 받게 해 주옵소서. 마침 주님께서 찾으실 때에 나를 그 곳에 있게 해 주옵소서. 이게 우리의 소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께서 사실은 축복과 은혜가 전부 다입니다. 이런 은혜와 축복을 바로 붙들어야 되죠. 그래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인도!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에 대해서 구체적인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제가 늘 말씀을 중심적으로 말씀했지 만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그리스도를 여러분과 제게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잘 알아들어야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아직 앞도 분간 못하고 죽음과 멸망에 속해 있을 때에 여러분과 저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약속을 주시고 메시야! 그리고 구약의 약속을 이루실 그림자로 계속해서 양과 염소를 죽였습니다. 피 흘렸습니다. 그때 약속을 하신 후에 그 피 흘림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마치 도랑물처럼 죽은 짐승의 피가 흘러 내렸다는 사실! 피가 도랑물처럼 흘렀다 그래요.
메시아! 그러면서 대신 피 흘릴 것을 약속하시면서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서에 여러분과 제게 임마누엘로 예수께서 오셔서 마지막 주님께서 이 구약의 메시야의 예언이 실현되고 오늘 여러분과 저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모를 때에 이미 벌써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작정하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어요. 여기에 뭐 남아 있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못 믿어서 문제죠. 받아합시다. "다 이루었다.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믿습니까! 확실히 이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됩니다. 이게 바탕이 되어야 되요. 여러분 다 이룬 교회에 앉았습니다. 다 이룬 교회에 여러분 가정, 가정 이 믿음가지고 우리가 설 때에 누가 합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되죠.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도 대속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랬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도 뭐라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믿는 순간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는 순간 사망에서 어디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러분 다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사망에 있어요! 받아합시다. "이래봬도 영생을 가졌다." 제라 이래봬도 말하는 것은 꼬락서니를 알거든요. 그래도 나는 영생을 가졌습니다. 나는 생명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뭐라 그랬습니까 로마서 8장 2절에 생명과 성령에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완전 해방했습니다. 자유입니다. 이것 못 깨달으면요. 여러분 진짜 종교에 빠집니다. 이것 못 깨달으면요. 진짜 종교에 빠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 못 깨달아 가지고요. 자유 함을 받아 놓고도 자유 함을 받아놓고 광야에서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러다가 다 죽었잖아요. 처참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사는 교회에 오셨다 정도가 아니고 이 교회 오시게 된 여러분에게 긍지와 자신을 가지기 원합니다. 이것 못 깨달으면요.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힘드는 겁니다. 양 사방에서 공격하고 있는데 여기 와서 정말 생명 전해야 되겠다. 전도에 눈이 열리고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실을 감당해야 되겠다. 이것 모르면 감당할 수 없어요. 이것을 깨닫고 아는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뭡니까! 조금만 기도하고 조금만 전도하려고 몸부림쳐도 어떻게 합니까?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생활과 사업과 모든 직장과 일터 위에 구체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을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중요한 것은 마지막으로 여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아닙니까! 삼위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삼위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실질적인 존재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누구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사실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실제입니다. 여러분 받아합시다. 지금 성령께서 나와 실제로 함께 하신다. 믿습니까! 진짜 믿습니까! 맨 날 거짓말하고 살아요. 진짜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함께 하신다. 믿을 때에 앞에 창조주 하나님이요. 나를 위해서 여러분 위해서 대속하시고 모든 문제 해결하신 그리스도요. 그 분이 성령으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졌다. 그때부터 우리 할 일이 우리 생각이 바꾸어져버립니다. 달라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자연적 나오는 것이 뭐냐? 기도하게 됩니다. 어디 가든지. 뭐 열심히 일한다. 아닙니다. 무슨 사건이나 일을 만날 때 뭐부터 합니까! 기도부터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 받아야 되니까! 성령의 인도 받아야 되니까! 그게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 볼 때는 뭐 답답하고 뭐 이상하고 그렇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어디 가든지 먼저 찾는 곳이 기도 처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오늘 이 말씀을 드리면서 제가 다시 한번 다짐을 좀 더 해봤어요. 마음으로... 이제는 우리가 언약을 알았기 때문에 이 언약을 모르고 기도하면 어디에 빠집니까! 또 종교에 빠져요. 그래서 언약을 알았기 때문에 절대로 악한 사단은 여러분과 저를 끌고 갈 수가 없어요. 괴롭힐 수 없습니다.
이 사단은 참 묘하거든요. 계시록 12장 10절인가 아마 그렇죠. 사단은 뭡니까! 자꾸 우리 죄를 하나님께 고발해요. 참소하는 자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안된 상황에서 기도하게 되면 뭐가 되느냐? 옛말에 그런 말했죠. 우리 죄악들이 필름처럼 지나가더라! 필름처럼 지나가더라! 그래요. 그 필름처럼 지나가는 후유증이 얼마나 크냐! 나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 도저히 못서! 나는 완전히 죽은 사람이야 좌절해 버립니다. 여러분 기도하면서 죄악이 들어 나면 들어 날수록 자신이 없어져요. 그런데 바로 그것이 악령의 통로입니다. 사단의 통로입니다. 왜? 자꾸 죄 짓잖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느냐! 너는 자격 없어. 자꾸 양심의 가책 죄 책에 눌리게 하고 고통을 받게 합니다.
받아합시다. "죄 책도 양심의 가책도 말씀 앞에서, 말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히 해결하셨다." 믿습니까! 죄 책 느낄 것 없어요. 이제 주님 바라보면 돼요. 성령의 인도 안 받으면 여기에 끌려가요. 그러니 성령의 인도 안 받고 우리가 열심히 40일 금식기도하고 열심히 기도하면 여기에 빠져 버립니다. 종교에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해온 배경이 이겁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이제 해야돼요. 그래서 지금부터는 나도 작정을 조금 해 봤어요. 지난주간에도 건강이 조금만 허락되었으면 진짜 기도원에 가서 한 2, 3일 굶고 오려고 생각했어요.
굶식이 될지 모르지 만은 정말 하나님 앞에 이 언약 붙잡고 정말 주님 앞에 이 축복과 은혜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나님 역사 해 주옵소서. 그렇게 한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이제는 금식기도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하면, 사도행전 13장 1절에 조금만 했더니 전 세계를 일으킬 수 있는 누구를 붙였습니까? 일꾼을 붙였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역사 이제는 여러분들에게 약속이 되어 있다니까요! 자꾸 이걸 안 믿으니까! 그리고 기도를 못하니까! 못하게 하니까! 나 같은 사람이 뭘 기도하느냐! 목사님이 기도하면 들으시지. 여러분이나 저나 본질상 진노의 자녀! 똑같습니다. 내 기도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들으십니까! 여러분 기도 들으십니다. 왜냐?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요한복음 1장 22절에 말씀 보면 뭐라고 그랬냐하면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뭐가 됩니까? 바꾸어 버렸어요. 여러분을 바꾸었어요.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즘 유행하는 노래 속에 '바꿔~ 바꿔~' 그 말이 아닙니다. 완전히 여러분 바꾸어 버렸어요. 아직까지 내가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아직까지 얼굴모습 그대로고 아직까지 인상도 쓰고 있을지 모르지만 본질적으로 이미 여러분과 저는 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참 이래도 기분 안 좋다. 그러면 어떻게 더 말을 합니까! 그건 사단의 인도 받는 것이지. 정말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순간에 여러분 참 맞다. 내가 이 사실을 못 믿었구나! 못 믿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못 믿었고 못 믿었기 때문에 근심 걱정으로 계속 찌들려 사는 겁니다.
받아합시다. 오늘부터 마음과 생각을 '바꿔~ 바꿔~' 바꾸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합니까! 한번 얼굴모양부터 한번 바꾸어 보세요. 옆에 사람 쳐다보고 싹 웃어보세요. 옆에 또 남자들 앉아서 오해하지 마시고요. 진짜 바꾸세요.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조금만 기도하면 주님이 엄청난 역사와 은혜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역사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면요. 뭐라 그랬냐 하면요. 엄청난 말씀으로 약속했죠.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27절에 생각만 나게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잡고 말씀이 생각나게 되는 그때부터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아멘.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확실하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의 약속이 이 사실을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인정만 해도 달라질 것입니다. 인정만 해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인정만 해도 달라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삶의 태도가 달라져요. 왜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이니까! 뭐하고 삽니까? 자연적으로 나도 모르게 기도하려고 애를 씁니다. 나도 모르게 뭐 합니까! 전도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인정만 조금만 해도 나도 모르게 어디 가든지 뭔가 기도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냥 앉으면 눈을 딱 감고 기도하는 습성이 자연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뭐 그 저희 부모를 통해서 물려받은 유산입니다 만은 가기 전에도 기도하고 어디 가서 앉으면 눈감고 앉았어요.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데도 그것이 이 언약 바탕이 안 되면 종교와 형식에 빠져 버립니다. 이 언약이 바탕이 되면 순간, 순간 누가 역사 하는 순간입니까? 성령이 역사 하는 순간입니다. 축복과 은혜와 성공의 역사로 인도함 받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산업을 회복하시고요. 여러분 건강 회복하시고요. 여러분 중심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축복이 구체적으로 회복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이 자리에 선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크냐? 이 사실이 회복되어야 됩니다.
이미 회복되어졌어요. 워낙 아직까지 체질이 율법 체질이 되어 가지고 회복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지! 받아합시다. 눈떠보니까! 이미 다 이루어 졌다. 다 이루어졌어요. 눈 떠보니까! 그래서 제가 지난 금요일에 설명했습니다 만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글로리아와 글로바라 하는 같이 내려가는 그 두 제자가 응답하시는 사실을 보고도 몰랐어요. 종교에 빠진 겁니다. 예수님이 같이 걸어가고 있는데도 예수님인 줄 몰랐어요. 참 비참하죠. 그러니까 낙심이 계속 되는 겁니다.
그러니 뭐냐 말씀이 성취되는 현장을 믿을 수 있어야 되는데 이 믿음은 성령의 인도 아니면 절대로 안 되게 되어 있어요. 한번 받아합시다. 예수를 성령이 아니고는 그리스도라 시인할 수 없다. 말씀을 시인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먼저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리라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도 이미 벌써 두 번이나 갈릴리에 간다고 말씀했는데도 이것을 못 믿으니까 그렇게 열심히 믿는 막달라 마리아 새벽부터 일어 나가지고 어디 갑니까! 말씀 못 믿으니까 어디 갑니까? 예수님 무덤에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 비참한 겁니다.
여러분 참 우리가 참 신앙생활에 성령의 구체적인 인도와 말씀을 못 믿게 되면요. 나도 모를게 종교에 빠져 버립니다. 열심을 냈지만 결국 뭡니까! 망하게 됩니다. 결국 고통과 어려움에 잡히게 됩니다. 조금만 우리 눈을 열고 참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복음을 조금만 사랑하게 되도 하나님의 인도를 조금만 받게 되면요. 여러분 정신적인 문제 마음의 생각 모든 문제 완전 바꾸어집니다. 누가 성령의 인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여러분 가운데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다른 길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서 뭐가 됩니까! 너무 증거거리 많아서 입만 열면 뭐가 나옵니까!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약속 받은 자들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입니다.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여러분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결론을 맺으면서 이 배경 위에서 여러분과 제가 이 자리에 앉게 된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왜 지금까지 다른 교회가 다 나쁘다! 좋다! 돌아가는 것이 나쁘다! 좋다! 그 말이 나는 이전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러 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이 자리에 앉게 해 주셨느냐? 여기에 대한 답을 못 얻으면 당황하거든요. 왜 내가 이 자리에서 이 교회에 중직자가 되었느냐? 이 교회에 제직이 되었느냐? 이 교회에 성도가 되었느냐? 이게 확인이 안 되면 또 방황하게 되는 겁니다. 늘 말씀 하지만은 자꾸 귀 너머로 듣더라 구요. 받아합시다. "성령의 인도 받으면 반드시, 반드시!" 뭐가 열립니까? 세계 복음화가 열리게 되어 있어요. 세계 복음화! 세계를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복음화 때문입니다. 세계복음화 쉽게 말해서 전도 위해서입니다. 세계를 바꾸게 한 전도! 왜 너무 우리가 받고 누리는 축복과 은혜가 귀하기 때문에 이걸 전하는 겁니다. 전도하러 가니까 외치고 막 고통스럽게 말한다 그 말이 아닙니다. 축복과 은혜를 우리가 전하는 겁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가 여러분 어떤 시대입니까! 바로 이 시대를 알고 나를 보내시고 이곳에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붙잡고 확인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나를 하나님이 이곳에 보낸 계획을 바로 깨닫게 하면 역사를 바로 알아야 되죠.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금 시대는 누구든 신 불신간 재앙의 시대입니다. 재앙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문명은 발달하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모든 문명이 이제는 많은데 점점, 점점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정신병자는 옛날에 비해서 월등히 지금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재난의 시대가 외게된 배경은 여러분 교회가 바로 서 버리면 문제가 해결돼요. 그런데 옛날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막론하고 이런 시대일수록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해요. 그리고 교회가 어떻게 합니까! 전도가 안 되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됩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정말 전도 안 됩니다.
제가 몇 일 전에 차를 몰고 시내에 잠깐 나갔는데 뭐 여기 가까운데 입니다. 나갔는데 노란 차가 상당히 버스가 좋더라고요. 그런데 딱 트는데 보니까 뭐냐하면 불교 유치원이더라 구요. 아이들이 가득 찼습니다. 아 진짜 참 보통 일이 아니구나! 왜 점점 이제는 우리뿐만이 아니고 우리 후손들까지 지금 현재 자꾸 죽습니다. 이제는 불교 나간다 그럴 때에 아버지 어머니 불교에 나가니까 이름만 불교에 얹었다. 저절로 불교에 나간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벌써 구체적으로 이 사람들이 나갑니다.
이 젊은 아줌마들이 집에 있으면서 어떻게 하느냐? 우리 전도캠프에서도 확인을 했더라 구요. 뭘 하느냐 하면요. 이제는 절에 나간다. 그냥 나가서 그저 부처만 구경하고 온다 그 말이 아닙니다. 가서 뭐 이렇게 빌고 온다 그런 말이 아니더라 구요. 불교 대학을 다녀요. 구체적으로... 그 모두 머리 좋은데다가 이해도 빠른데다가 불교대학을 다녀요. 이제는 보통 시대가 아닙니다. 우상이 급증하고 정말 이 땅에 흑암의 권세들이 점점, 점점 더 덮어오는 시대입니다. 전도는 안 됩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전도하려고 하면요. 전도가 좀 되었어요. 지금은 점점, 점점 어려운 시대입니다.
여러분 전도가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전도하는 사람들을 오해하는 시대입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역사 속에 전도하는 사람 치고 이단이라고 낙인 안 찍혔던 부분이 없었어요. 제대로 하는 단체마다! 제가 가끔 가다가 조금 지난날 시간입니다. 뭔가 이 마음이 안 맞고 고통스러울 때에 뭔가 하면, 그만 옛날 교단을 생각했을 때에 뭐가 오느냐 하면, 거기서 중요한 것이 전도 때문에 내가 이런 고통을 당했는데 전도가 안 된다 그럴 때는 수 만금을 주더라도 나는 소용없다! 아마 똑같이 여러분 심정일 겁니다. 우리가 전도 때문에 핍박받고 전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데...
그래서 뭐 전도 때문에 심지어는 뭡니까? 요즘 제가 이렇게 생활 속에 들어가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뭐 결혼이라던가 이럴 때에 여러분 청년들 많이 있어요. 마음의 문제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 전도 때문에 모든 문제를 희생해서도 하나님 앞에 세우신 전도 때문에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확인이 안 되면요. 여러분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말세 때에 반드시 하나님이 역사 하실 것입니다. 받아합시다. "마지막 때는 반드시 불신시대! 우상의 시대가 온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완전히 인간은 멸망 속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마지막 때에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 주님께서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에 그때에 해답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준비되어야 전 세계가 복음화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시대에 여러분과 저를 쓰실 것입니다. 나는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믿고 있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고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마지막 때입니다. 바로 주님이 약속했습니다. 그때에 어떤 역사가 나옵니까? 비로소 온 세상이 복음화 될 것입니다. 복음화 될 것입니다. 성경에 약속했어요. 그러면 그때에 누가 옵니까? 그때에 주님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빰빠바~~' 누가 옵니까?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과 제가 전도에 쓰임 받고 있던 여러분과 제가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전도했던 그 사람들과 함께 천군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오시는 주님을 두손들어 영접할 것입니다. 이 이상 인간에게 축복된 것이 없습니다. 이때에 이 세상에 모든 지난 과거와 고통은 꿈에 본 듯 잊혀집니다. 영원히 여러분과 제게 영원한 그 생명 속에 하나님의 축복된 영광스러운 역사 속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이 세상에 잘못된 잠깐 동안에 쾌락이나 편리함 때문에 이 축복을 영원한 축복은 놓친다! 바보 중에 바보입니다. 저주가 따라 다닙니다. 그걸 가지고 저주라 그럽니다. 저주가 구체적으로 다른 게 아닙니다. 이 자리에 바로 섰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여러분 이 시대를 좀 알아야 됩니다. 뭐냐 하면요. 하나님께서 모든 천지 만물은 지었습니다. 그 중에 누구를 지었습니까? 가장 귀하게 남자와 여자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물어봅시다. 남자가 더 고귀합니까? 여자가 더 고귀합니까? 이걸 말한다는 게 이상합니다 만은 남자가 더 귀하게 지어 졌어요! 여자가 더 귀하게 지어 졌어요! 예, 저는 다른 측면에서보다도 재료가 여자가 훨씬 낮습니다. 남자는 무엇으로 지었어요! 흙 가지고 지었고, 여자는 뭐 가지고 지었어요! 갈비뼈 가지고 지었습니다. 재료가 훨씬 여자가 월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 여자들 낙심하지 마세요. 참 여자들 귀히 여기십니다. 보호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남자들에게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보호하고 인도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여자들은 그렇다고 너무 또 딴 짓 하지 마시고... 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이렇게 귀중한 여자들의 존재가 오늘날 이 땅에 완전히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욕심과 정욕의 노리개로 되고 상품화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여자들의 위치가 엄청나게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우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그런 세계를 물론 옛날에 조금 군 생활 중에서 약간 그저 그런 모습 옛날과 지금은 달라요. 옛날과 지금은 그때 타락했다는 것은 요즘은 흉내를 못내는 그런 겁니다. 그때는 흉내도 못 냈어요. 그래서 목사의 입장에서는 제일 지금 현재 모르는 부분이 뭐냐하면 세상이 얼마나 타락되어 있는가 이걸 모르고 있어요. 아마 우리 교인들도 거의 모를 겁니다. 그저 남편하나 바라보고 그 다음에 말씀잡고 교회 왔다 갔다 하니까! 이걸 잘 모릅니다. 요즘 우리 아이들이 중고등학생들이 얼마나 타락된 나라로 떨어질 환경인가 이걸 잘 몰라요.
그래서 그걸 좀 구체적으로 알아보려고 몸도 아프다. 집에 앉아 있는 동안에 제가 좀 이 인터넷을 통해서 좀 선 접을 했어요. 선 접을 했는데 놀라운 것은 여자들을 도구로 음란 사이트를 만든 데마다 대 성공입니다. 그래서 그런 회사는 직원들에게 심지어는 매월 1억까지도 지불될 수 있을 정도로 돈방석에 올라앉아 있더라 구요. 참 기가 차더라고요. 제가 그걸 보면서 돈 좋아하고 돈 탐내는 사람은 거기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런 사이트는 '천지 삐까리'입니다. 경상도 말로 '천지 삐까리'입니다. 들어가면 나와요. 그래서 우리 학생들이요. 조금만 뭔가 눈 돌리면요. 얼마든지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뭐 요즘 성인들만 들어간다 그러고 뭐 방비 장치한다 그러고... 그게 컴퓨터에서 그 장치를 암만 해봐도 기술에는 못 따라가요. 들어 갈 사람 다 들어가요. 눈치 빠른 사람 다 들어가요. 그러면서 제가 느낀 것은 오늘 그대로 여러분 가장 고귀하게 창조된 여자들이 가장 비참하게 성 노리개로 그 다음에 정욕의 대상으로 그 다음에 돈 버는 욕심의 대상으로 완전 타락했습니다. 이게 우리 한국뿐만이 아닙니다. 전 세계에 훨씬 더합니다. 여러분 이 시대가 말세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복음 아니면 이 시대를 바꿀 수 없어요. 완전히 문화가 되어 있습니다. 성문화 이제 일본 문화가 막 들어옵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 세계의 문화입니다.
도저히 이런 시대에 상식적으로 이기적으로 쓰임 받는 이런 시대에 여자의 회복이 복음 아니면 되어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여러분 자신들도 우리 여자 분들이 여기 많이 계시잖아요. 복음가지고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복음으로 회복 안 하면요 회복할 길이 없어요. 돈을 벌입니까! 뭘 합니까! 물로 조금 벌이는 사람도 있지만... 남자한테 힘이 셉니까! 돈 벌입니까! 싸워도 지잖아요. 그런데 무엇으로 하느냐? 복음으로 아니면 회복이 안 되는 겁니다. 복음으로... 이게 확실히 붙잡혀야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말세에 떨어진 여자의 위신들이 참 복음으로 이 땅과 이 세상에 문화권을 일으킬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은 전도뿐입니다. 이걸 이해 하셔야 돼요. 여러분과 제가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냥 우리 여자 분들이 졸고 있다 그러지 마시고 사명가지고 아 맞다 이 땅에 나와 내 후손들에게 정말 내 딸들에게 뭡니까? 너희들이 정말 복 받은 자들이다. 라고 자부심을 줄 수 있는 축복의 복음을 여러분은 가졌습니다. 내가 가졌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걸 바로 하셔야 되죠.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런 과정에서 뭘 다 잃었느냐? 완전 인간의 삶이 정상이 안 되어 있어요. 조금만 여러분 들어가면요. 정상이 안 되어 있습니다. 제대로 머리가 괜찮은 사람들은 술 안 먹고는 못 살고요. 머리가 제대로 괜찮은 사람은 집 나가야 되고, 머리가 제대로 괜찮은 사람들은 학생들도 집 나가야 되요. 그러니 학생들이 집에 붙어 있는 것만 해도 머리가 그건 IQ 50입니다. 다 집 나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왜 그러냐? 너무 지금현재 문화적으로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집에 붙어 있기도 힘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때에 복음으로 아니면 자식들도 우리 가정도 우리 남편도 아내도 회복이 안 됩니다. 삶이 회복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마지막까지 5개의 문제들이 해결이 안됩니까! 전도의 문이 열려야 되죠. 구체적으로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죠. 제자가 보이죠. 그때부터 모든 사업과 생애에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구체적인 이런 역사들이 복음 전파에 전도의문이 회복되면서 이것이 삶이 회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받아합시다. "전도가 회복되면 뭐가 회복되어요? 삶이 회복돼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쫓아다니고 전도하러 간다 그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조금만 앉아있는 자리에서 기도해야 되겠다 성령의 인도 받아야 되겠다. 그 앉아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 나를 누구에게 붙여 주실 겁니까! 전도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 다음에 앉아 있는 자리에서 내가 사람을 만날 때에 무슨 말씀을 전해야 될 것인가 메시지 조금만 정리하는 마음으로 가지고만 있어도 하나님께서 완전히 그 사람에게 붙여 주시고 열게 해 주시고 옳은 사람 붙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실을 여러분과 제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과 제게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 결론입니다. 어떤 사람이냐? 이제 말씀한 것처럼 구체적으로 하나님 그분이 나와 어떤 관계인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와 어떤 관계냐? 성령님이 어떤 관계이냐?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여러분과 저를 완전히 망할 수 없는 신분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신 그 역사가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십니다. 내 안에 누구로 아버지로 계십니다. 절대로 나를 보지 않습니다. 나에게 오셔서 어떤 것으로 평안으로 와 계십니다. 평안으로...
이때부터 여러분과 제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조금만 기도해도 금식한다, 안 한다!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생각되는 데로 기도하시고 전도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다음 내게 주신 말씀을 구체적으로 붙잡고 내가 사람 만났을 때 무슨 말씀으로 그에게 힘을 줄 것인가 신분만 조금 소개해 줘버려도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과 은혜로 그 사람과 가정에 다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 자리에 세우셔서 세계 경제를 일으키고 세계 정치를 바꾸고 세계 문화를 바꿀 축복된 자리에 여러분과 제가 앉아 있습니다. 서있습니다. 누가 합니까? 내 힘으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실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다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이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이루어 주옵소서.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 그 분을 보내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내 안에 오셨습니다. 이 사실이 내 안에 우리 안에 망할 수 없는 신분으로 바꾼 사실을 확인하도록 오늘도 복을 주시고 이 축복 속에서 전도와 기도 속에 우리의 삶을 확실히 이끌어 인도하시옵소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지금은 우리를 구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위로 충만 교통하심이 모인 무리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고전15장 01절 ~ 11절 / 최건호목사
오늘은 예수 부활 후 첫째 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신 기록 가운데 중요한 사건들은 여러 제자들과 귀중한 사람들을 만나시는 사건들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부활한 주님을 지상에서 만난 확고한 체험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위대한 영적 변화를 경험했고 그들의 인격과 삶이 180° 전환되는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 도마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의심의 사람이 변하여 확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요20:28).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감탄하며 이 진리와 은혜를 따라가는 길이야 말로 가장 행복한 길이라 믿고 예수를 3년 동안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던 날 그의 꿈과 희망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도마는 믿음 없는 사람으로 전락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제자들의 증언을 들으면서도 그는 믿지 않았습니다. 절망과 의심과 두려움과 좌절 속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믿음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 도마에게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도마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에게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라고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도마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꿔놓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부정하던 입으로 주님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헌신을 했습니다.
둘째, 실망과 낙심과 근심 중에 엠마오 길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변화되었습니다(눅24:32). 실망과 낙심과 근심 중에 엠마오 길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을 주님과 대화 하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 예수만 생각하면서 슬픔과 실망감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대화를 하지만 대화 상대가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식사하시면서 구약의 예언과 선지자의 말씀을 다 풀어주시고 그들을 위해 축복하시고 떡을 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절망과 슬픔에 빠져있던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의 은혜를 맛보며 주님의 사랑과 성령으로 뜨거운 사람으로 변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변화되었습니다(요21:15).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했습니다. 맹세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오셔서 그에게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모든 것을 한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만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을 때 베드로는 변화되었습니다. 목숨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되어서 베드로는 뜨거운 가슴으로 성령충만한 가운데 예수님을 위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는 순교자가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부활한 주님을 만났기에 새사람이 되어 인생의 방향이 전환되고 가치와 목표가 달라지고 한 세상을 진리 가운데 살게 된 훌륭한 신앙인들을 생각하면서 부활하신 예수와 예수의 진리와 접촉되는 그 영을 통해서 주님과 교제하는 귀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
민경설목사 / 고전 15:1-11, 행 1:9-11
18세기에 영국의 존 웨슬리(John Wesley)는 25세에 영국 국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일찍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열정이 있던 사람으로 박식하고 공부에 남다른 은사가 있어서 학교에서 고전어와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홀리클럽(Holy Club)을 만들었으며 미국에 선교사로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확신과 믿음의 체험이 없었기에 늘 침체에 빠지고 흔들렸습니다. 그러한 웨슬리에게 신앙의 반전이 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 큰 풍랑을 만나 사람들과 같이 피신하여 배 밑으로 갔을 때 어디선가 찬송 소리가 들렸습니다. 폭풍 중에 찬송을 하는 이들은 몇 명의 모라비안 평신도들이었습니다. 목사임에도 무서워서 피신을 가는데, 평신도들은 평안함과 감격 속에서 찬송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웨슬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피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라비안 평신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마저 이 밧줄을 놓아버리면 이 배는 금방 부서질 것입니다. 이 폭풍우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신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 때 웨슬러는 무릎을 꿇고 회개를 했습니다. 그 후 웨슬러는 어느 집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설교하는 목사님이 루터가 지은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롬1:16-17)“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 날 밤 그는 그 교회당에서 밤새 기도를 하고 성령의 체험으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건을 ‘올 더 케이스’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는 ‘전세계가 나의 교구다’라는 말을 하며 위대한 전도자가 됩니다. 인간의 열심만 가지고 안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복음을 믿어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고전15:3-4)“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반드시 부활의 주님을 체험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체험을 할 때 성경을 알게 되며 내 길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역경이 와도 갈등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주님을 만난 후 믿음으로 사는 삶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여기 와 계십니다. 확신을 가지고 순종할 때 성령이 임하시고 당신의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2.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고전15:10)“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는 하나님이 무조건 주신 사랑과 은총을 말합니다. 그 은혜를 실제 삶에서 체험한다는 것은 삶 속에서 무슨 일을 하던지 그것이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으면 안식과 평강을 누립니다. 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3.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행1: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이유는 우리의 종착역이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새 하늘 새 땅을 목표로 삽니다. 감정이나 환경, 여건으로 살지 않습니다. 인생은 주님이 오셔야 완성이 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주님 앞에 간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날마다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나의 나된 것
고전15장 01절 ~ 11절 / 박조준목사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10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 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사람을 꼽으라면 여러 사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을 지적하라면 저는 서슴치 않고 사도 바울을 꼽겠습니다. 그는 위대한 목회자요,위대한 학자요, 위대한 전도자요, 위대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 신앙의 근거를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세 상에서 기독교의 존재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실적으로 설 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론이나 당위성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게바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고, 500여 신도들에게도 일시 에 보이셨고,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고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고 맨 나중에는 바울 자신에게도 보 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 것 을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부족한 사람이라.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라 고 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 은 전연 하나님의 은혜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자신이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고 감격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특성 을 발견합니다.
1. 그의 정직을 보세요. 바울은 매우 정직하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더구나 지도자 가운데 는 자기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흔히 위인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 사람의 훌륭한 점, 좋은 점, 잘한 일만을 부각시키고 그의 잘못한 것은 덮어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잘못한 점, 나쁜 점을 적나라하게 내어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 점을 조금이라도 변호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는 그것을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자기 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함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시인 하기를 싫어하거나 모릅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깨달을 때 곧 이를 시인하고 시정 할 줄을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2 . 그의 회개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이 회개 의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는 가편투표를 하였고, 모든 회중에서 여 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의 성에 까지도 찾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에 대한 범죄 인 것을 알고 중심으로부터 회개하였습니다. 옛사람의 인격의 파멸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간적인 면으로 말하면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못하지 않은 선천적인 소질과 다른 사람이 부러울 것이 없는 후천적인 환경을 가졌었습니다.
유대인으로 길 리기아 다소에서 낫고, 이 성에서 자라 당시 최고 명문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 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건을 구비한 사람이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 자기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 것을 솔직히 고백하며 회개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용납되는 사람은 자기를 정죄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 라 고 하였습니다.
3 . 그의 용기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후 용감한 그리스도 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는 일에는 무슨 일에든지 위 축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여 말하기를 변절자 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겁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 습니다. 나를 왜 세상에 보내셨나 하는 자기 존재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밀레도에서 예 루살렘으로 가면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 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하였습니다(행 20 : 23 - 24). 이 얼마나 담대합니까? 사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베드로가 그처럼 비겁하고 소심 한 사람이었지마는 성령을 충만히 받은 후에는 능력을 얻어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 였습니다. 바울과 베드로 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4 . 그의 충성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충성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위하여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바울이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솔직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모든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그가 얼마나 주님 을 위하여 수고한 것을 말합니다. 나는 심한 고역을 했으며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없이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 했습니 다. 유대 사람들로부터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그 리고 스물 네 시간 동안을 아득한 바다 위에 헤매었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 강물의 위험과 도둑 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노동과 고역에 시달리며 여러 번 밤을 새우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 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이런 수고 속에서 그는 관제와 같이 주님을 위하여 완전히 헌신한 것입니다. 한 방울의 기름도 남 기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온전히 부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수고하고 많은 일 을 하고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하였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일군이요 충성 스러운 종이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처럼 충성스러운 일군이 되었습니까?
그 동기가 어디 있습니 까?
5. 그의 사랑입니다. 주님이 그를 사랑하고 그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그로 하여금 충성된 일 군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충성되게 일했든지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미친 사람으로 보였습니 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바울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이라 고 하 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편 을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온전히 헌신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에게 충성해야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고역이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충성의 동기는 구원받은 은혜 에 감격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하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요한 1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 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므로 구원을 받습니까? 그렇다면 구원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 님을 사랑하므로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지키는 계명은 무거울 수가 없 습니다. 고역이 아닙니다. 바울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힘든 것, 어려운 것을 모르고 일할 수가 있었습니다.
6 . 그의 겸손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였습니다.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 십니다.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내려가야만 합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어 린 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입 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겸손한 사람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지식이 많은 대학 교수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해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권세가 있는 국회의원이나 장관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돈이 많은 부자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같이 겸손해야 하늘나라에 들 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육신을 내세우자면 누구에게 지지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든지 그에 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겼습니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 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이 자랑할만한 모든 것을 버릴 마음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리스 도 앞에 겸손해지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여러 가지 아름다운 덕이 있겠지만 겸손의 덕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울은 겸손하였습니다.
7. 끝으로 그의 감사입니다. 본문에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새 번역에는 나는 하나님의 은 혜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즉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전연 하나님의 은혜에 의 해서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 내 구주로 받아들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위하여 일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내게 힘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나는 감사합니다. 주께서는 나를 신실하게 보셔서 내게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자기가 할만해서 맡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신실하게 보셔서 귀한 직분을 맡기신 것을 생각할 때 감사한 것 뿐이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사람이 지만 우리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셔서 나를 의롭다 인정해서 구원받게 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은혜에 감격하여 열심히 일해서 모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일하고 수고하였다고 할지라도 이 것 역시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무슨 일이든지 주님께서 능력을 주시므로 할 수 있는 것을 믿었습니다. 다른 말로 주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 기의 지내온 생을 돌아볼 때 그저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것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에게도 이런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지식 많은 분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시고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이 지식으로 사회를 봉사하게 되었으니 얼마 나 감사한가? 하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지위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지위를 허락해 주셨 는데 얼마나 감사한가 ! 내가 이 지위에 있는 어간 무엇으로 이웃을 봉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까? 이런 생각하십니까? 재산을 많이 가지고 계신 분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재산을 맡겨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이런 재산을 맡기셨습니까? 얼마나 고마운가 ! 이 재산으로 어떻게 이 민족을 봉사할 수 있을까? 생각하십 니까? 혹 어리석은 부자처럼 아, 이렇게 사업이 잘되어서 재산이 많이 늘었으니 참 좋다. 내 사업 능 력이 보통이 아니지. 내가 어떻게 하면 여생을 즐길 수 있을까? 이런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육신으로 건강한 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까? 지금의 내가 어떻게 있습니까? 이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 니까? 은혜를 알면 어떻게 합니까? 내 최선을 다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봉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지내온 우리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우리 가정이 있고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의 여생을 감사와 감격으로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십시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배웁니다
고전15장 01절 ~ 11절 / 박조준목사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고 했습니다. 본문 중에 10절 말씀에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사람을 꼽으라면 여러 사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을 지적하라면 저는 서슴지 않고 사도 바울을 꼽겠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도요, 위대한 목회자요, 위대한 학자요, 위대한 전도자요, 위대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 신앙의 근거를 설명하였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기독교 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세상에 기독 교란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실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론이 나 당위성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게바 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고, 오백여 신도들에게 일시에 보이셨고,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고,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고, 맨 나중에는 바울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했습니 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돌아봅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고백 했습니다. 사실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부족한 사람이라 사도라 칭함을 받는 것도 감 당하기 어려운 사람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고 분명히 말했습니 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자기 자신이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고 감격하고 있습니 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모습을 배웠으면 합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정직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약점이나 단점을 가려 보려 고 애씁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넉넉한 것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무식한 사람일수록 유식한 것처럼 보이려고 애씁니다. 얼굴에 자신 없는 사람일수록 화장을 짙게 합니다. 약한 사람일수록 강한 것처럼 보이려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 특히 지도자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의 약점을 드 러내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인의 전기를 읽어보세요. 그 사람의 훌륭한 점,좋은 점, 잘한 일만을 부각시키고 잘못한 일, 실수한 일은 덮어 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위인을 신격화시키려고 합니다.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잘못한 점, 약점을 적나라하게 내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수나 약점을 조금이라 도 변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는 그것을 변명하기에 급급합 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자기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함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어떤 잘못을 시인하기를 싫어하고 또는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깨달을 때 곧 이를 시인하고 시정할 줄 압니다. 다윗을 보세요. 그는 베들 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었는데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여러 가지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이스 라엘 나라의 왕위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나라는 비교적 안정이 되고 자신이 직접 일선에 나 가서 전쟁을 지휘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궁전에서 좀 쉴 수도, 낮잠도 잘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바쁘게 뛰어 다니고 전쟁할 때는 그런 유혹이 없었는데 좀 한가해지다 보니까 다윗에게 유혹이 들어와서 자기 부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의 나라 왕들은 그 자신이 법이니까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그렇게 심각 하게 생각지도 않았고 다소 마음에 가책을 받게 될 때 우리아를 격전지에 내보내어 전사하게 함 으로 그의 죄는 자연스럽게 은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속일 수 있고, 사람의 눈을 가리울 수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나단을 통해서 알아들으리만큼 말을 했지만 처음에는 남의 일처럼 생 각했었는데 나단 선지가 직접으로 지적하니까 그 자리에서 다윗이 고꾸라지고 잘못을 인정했습니 다. 바로 이것이 다윗이 위대한 성군이 되게 한 비결입니다. 사람이 잘못할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헤롯왕은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가졌을 때 세례 요한이 그 잘못을 지적했지만 인정하지 않고 시끄럽다고 감옥에 가두고 종래는 목을 잘라 죽였습니다. 그래서 충이 먹어 죽는 것이 그의 말로 (末路)였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둘째, 바울은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의 자기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 게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가슴 아파하고 회개하여 돌아서야 합니다. 이 회개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이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용 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인정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 보면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 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며, 또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일 때는 당연하게 생각해서 가 편 투표를 했고 모든 회중에서 강제로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대 하여 심히 격분해서 외국의 성에까지 찾아가서 핍박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일을 한 것 이 하나님께 대하여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한 것인가를 알고 중심으로부터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옛 사람의 인격의 파멸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면으로 말하면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4절 이하에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 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 는 흠이 없는 자로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못하지 않은 선천적인 소질과 다른 사람이 부러울 것이 없는 후천적인 환경을 가졌습니다.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나 그 당시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 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모든 조건과 환경이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 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앞에서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한 것 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용납되는 사람입니까? 자기를 정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통회하 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상한 심령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 앞에서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 으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심령을 귀하게 보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아버지의 마음을 괴롭히고, 아프게 하고 실 망을 준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자신이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했습니다. 많은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돼지 키우는 데 가서 돼지 먹이 로 배를 채울 지경이 되었으니 그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은 자기 자신 의 처량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내가 이러다가는 여기서 주려 죽겠구나 하며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심각하게 깨달았습니다.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서 돌아가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회 개입니다. 회개는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더 귀한 것은 돌아오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그 심령이 산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에게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기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자기 자신 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후에 용감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담대하게 과감하게 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여 변절자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울을 겁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께로부터 받은 복음 전파의 사명이 있는 것 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를 왜 세상에 보내셨나 하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밀레도에서 예루살 렘으로 가면서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을 불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2∼24절에 보 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 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이 얼마나 담대한 선언입니까? 사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생명을 내놓고 일하는 사람 앞에는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깡패 생활하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 니다. 싸움해서 누가 이기느냐 하는 것은 힘이 얼마나 세고 기술이 얼마나 좋으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결국은 목숨 내걸고 싸우는 사람이 이긴다고 합니다. 목숨 내놓고 덤비는 사람 앞에는 무서운 것이 없기 때문에 감히 덤비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처럼 담대했습니까?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 기지 아니하노라. 사명 위해 생명을 내놓으니까 그렇게 담대해진 것입니다. 사명에 충실한 사람 은 담대합니다.더구나 성령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 다. 베드로가 그처럼 비겁하고 소심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충만히 받은 후에는 능력을 얻어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과 베드로뿐만이 아닙니다. 그리 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넷째, 바울은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충성된 사 람들이었습니다. 어떤 환경과 처지에 있든지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바울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본문에서 솔직히 말하는 것처럼 그는 모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수고했 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그가 얼마나 주님을 위해서 수고한 것을 말합니다. 나는 심히 고역을 했으며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없이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유대 사람들로부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스물 네 시간 동안을 아득한 바다 위에서 헤매었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 강물의 위험과 도둑의 위 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노동과 고역에 시달리며 여러 번 밤을 새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이런 수고 속에서 바울은 관제와 같이 주님을 위해서 완전히 헌신한 것입니다. 한 방울의 기름 도 남기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온전히 부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 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말합니다.바울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수고하고 많은 일을 하고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라 고 간증한 것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일꾼이요,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처 럼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습니까?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다섯째,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 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를 사랑하고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그로 하여금 충성된 일 꾼이 되게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충성되게 일했던지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미친 사람으로 보였습 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바울의 대답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사로잡기 때문이라 고 했습니다.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자연히 헌신이 따릅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남 편을 위해서 하는 수고가 짜증스러운 것이거나 짐이 되어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 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고역이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삼일 기도회에 나오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이 시간에 참석하시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럽겠어 요?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워서 이 시간을 기다리다가 오시니 그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습니까? 이 시간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격 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그리스도인의 충성의 동기입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 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했습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습니까? 그렇다 면 구원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지키는 계명은 무거울 수가 없습니다. 고역이 아닙니다. 바울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힘든 것, 어려운 것을 모르고 일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섯째, 바울은 겸손한 사람 이었습니다.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내 려가야만 합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 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 는 겸손한 사람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지식이 많은 대학교수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해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권세가 있는 국회의원이나 장관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해야 하나 님의 자녀가 됩니다. 돈이 많은 부자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같이 겸손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육신을 내세우자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든 지 그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 해로 여겼습니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왜요?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자 랑스럽게 생각하던 모든 것을 버릴 마음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습 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아름다운 덕이 여러 가지 있지만 겸손의 덕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일곱째, 바울은 감사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구주로 받아들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위해서 일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보면 내게 힘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께 나는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보셔서 내게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할 만해서 맡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신실하게 보셔서 귀한 직분을 맡긴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사람이지만 우리 주님의 은혜가 풍성해서 나를 의롭다 인정해서 구원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은혜에 감격해서 열심히 일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수고했다고 할지라도 이것 역시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많은 분, 권력의 자리에 계신 분, 많은 재산이 있는 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까 생각 하십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와 감격으로 우리의 여생을 교회와 사회를 위해 봉사합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사는 성도
고전15장 01절 ~ 11절 / 김양인 목사(목양제일교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셔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에게는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러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는 몸이 아파서 교회에 나오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건강을 주신데 대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아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식지 않고 우리 속에서 지속되는 것이야말로 큰 은혜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주일이 되면, ‘오늘은 먼저 교회에 나가 예배드려야지’ 이런 마음이 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예배에 대하여 자원하는 심령이 사라집니다. 그리하여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예배를 기피하는가 하면, 예배에 참석했더라도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설교 시간에도 유두고처럼 졸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며 송이 꿀보다 더 단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은혜가 있어야 할 줄 압니다. 시편 84편은 고라 자손의 시인데, 그 10절에 이르기를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저와 성도님들도 이 시편을 지은 고라자손과 같이 ‘나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단지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인 만남을 갖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찬송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기도를 통해 우리의 진심을 고하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 받습니다. 예배는 우리 편에서 일방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이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 살았듯이, 성도들은 예배를 통해 신령한 영의 양식을 공급받아 한 주간 동안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의 원천으로 삼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 뿐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도 하나님의 은혜로 영위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영적인 은혜를 구할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것들도 기탄없이 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슨 소득을 얻으면 자기의 능력과 수완으로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땀 흘려 수고하고 애 쓴 결과로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명기 8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당부했습니다.
“17)…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우리에게 있는 건강과 지혜와 지식, 재주, 열정, 유리한 조건들, 할 것 없이 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능력을 자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과 재간이 본디부터 자기 것이라고 알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만 사용하지만, 성도들은 모든 것이 은혜로 받은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알고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우리 교회에서 심방하는 요양원에는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열다섯 분에서 스무 분까지 모여서 예배들 드리는데, 매번 빼놓지 않고 부르는 찬송가가 있는데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곡입니다. 이 찬송가를 부를 때 팔십, 구십 난 노인 분들의 얼굴에 숙연한 감사가 떠오르는 것을 봅니다. 언제 무슨 불상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일평생 무난하게 살아온 것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성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현재 뿐 아니라 장래도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삶을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 성도들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화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계시면서 성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감화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감화를 따라서 살아가기만 하면 언제나 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선한 의욕이 생겨날 때 그것은 성령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주의 일을 위해 헌신하고픈 열망이 일어날 때 그것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감화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화를 순종할 때 은혜로운 결과를 얻게 됩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이르기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소원을 주실 때, 기꺼이 순종하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동안 아시아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웠는데, 2차 전도 여행 기간에는 그가 세운 교회들을 방문하여 믿음을 격려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계속해서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지나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으나 성령께서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려 한 것이지만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였습니다. 그것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기를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곧 마게도냐로 떠나고자 했더니 길이 순순히 열렸고, 마게도냐의 관문인 빌립보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은혜로운 결과를 얻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 속에 성령의 감화가 일어날 때 억누르고 무시하면 어느덧 그 감화가 사라져 버리고 아무런 은혜로운 결과도 얻지 못합니다. 주일 성수와 관련해서 예를 들면, 평소에 주일 성수를 하던 성도들은 혹 무슨 일이 생겨 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면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두번 주일 예배를 빼먹다 보면 어느새 신앙양심에 아무 가책도 생기지 않습니다. 자주 성령의 감화를 무시한 결과 성령께서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 이르기를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회심한 사건을 간증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라고 할 만큼 철저하게 계율을 지켰던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로 알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위임 받아 예루살렘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어 매질하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드디어는 수리아의 다메섹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오려고 성전 경비병들을 거느리고 달려갔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낸다고 생각하였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면서도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줄로 아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가 알지 못하고 복음의 원수 노릇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메섹으로 달려가는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홀연히 나타난 강렬한 빛 앞에서 사울과 그의 일행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때 위엄찬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그러자 그 음성이 대답하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때 사울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여 핍박하던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 자손이 그토록 고대했던 메시아이신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그를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전도자로 부르셨고, 그때부터 사울은 그가 그토록 핍박하던 나사렛 예수를 전파하는 일에 그의 생애를 다 바쳤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것은 그를 불러 복음의 증인으로 삼아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한 공로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님을 전하는 일로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그런 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로지 친히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복음의 일꾼으로 삼아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런데 그런 나를 주님께서 친히 만나주셨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이 간증은 단지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구원받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우리의 실상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첫째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된 채 영적인 흑암 속에서 지냈습니다. 둘째로, 이 세상의 타락한 풍조를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대로 사는 것 같지만 실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비참한 우리 인생들에게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4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에게 큰 사랑 곧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곧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천국을 상속받은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의 자질이나 공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하신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믿어야 받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의 믿음이 공로가 되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다만 구원을 주시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습니다. 은혜는 그것을 받을 아무런 자격이나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가없이 거저 주신 것이므로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선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관련해서 우리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구원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업적을 세웠으나 조금도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인간적인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어찌 교만할 리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십니까? 자기의 수고와 공로를 내세우지 마시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주의 일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오셨습니까?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장차 강림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때까지 풍성한 은혜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를 바꾼다
고전15장 01절 ~ 19절 / 옥한흠목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금요일 오후 3시쯤 운명하셨습니다. 그날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운명하시고 안식일이 시작될 때까지 불과 3시간 정도의 여유밖에 없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둘러 시신을 장례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굉장히 촉박했습니다. 유대나라도 매장이 있었기에 가난하고 보통 사람인 경우 그냥 땅을 파서 묻어버리면 끝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존경하던 부자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를 위해 파 놓았던 동굴 무덤을 기증했습니다. 당시 부자들은 동굴에 무덤을 만들고 거기에다가 선반을 달아서 시체를 안치했습니다. 마침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 무덤에 장사하기를 원하여 이제 급히 장례 절차를 밟고 준비를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라는 경건한 사람이 찾아와 마치 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대우하듯 많은 향료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신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수위를 싸고 두건을 씌워 정중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장례 지냈습니다. 이 일에 여인들이 와서 함께 거들었습니다. 그리고는 10~20명 되는 장정들이 매달려야 겨우 굴릴 수 있는 큰 돌로 동굴 무덤 아귀를 막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급하게 장례를 끝냈습니다.
예수님을 장례 한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무덤을 막은 돌을 굴리고 다시 살아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남자건, 여자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장례와 함께 예수님의 시대는 끝이 났고 예수님의 생애도 종말을 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흘이 되던 날 아침,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죽음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천사들을 통해 이 사실을 먼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실제로 무덤에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무덤으로 급히 와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시체는 온데 간데 없고 비어있는 무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위와 두건만이 고스란히 누웠던 자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 몇 사람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자기가 부활하신 것을 실제로 입증해주셨고, 여인들 중 몇 사람에게도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이 사실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만나주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이 사울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20여 년이 지나고 난 후,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본문 15장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약 25년이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나신 것을 목격자들을 중심으로 하나씩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야고보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등, 전부 일일이 기록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한번에 오백 여명이 될 때도 있었는데, 아직 그들 가운데서 반이나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이 안 믿어지면 앞서 생존해 있는 그 목격자들을 만나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오늘 15장의 내용을 가지고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안 믿는 편이 훨씬 쉽습니다.그래서 복음을 막론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안 믿으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여러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온 천하가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런 삭막한 분위기에서 바울로부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듣고 예수 믿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었기에 그들이 다 세례를 받고, 고린도교인이 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 안에서 조차 예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부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말이다. 부활은 절대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답답해가지고, 바울이 지금 고린도전서 15장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날조된 학설 내지는 종교적인 맹신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 특별히 머리가 비상한 학자들 중에는 평생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까운 인생을 다 날려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실과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 학자의 생활을 했다면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거짓말로 증명하려고 평생 학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특히 독일에는 부활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는 것을 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평생 머리를 싸매고 달려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를 연구해서 박사나 교수,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왜곡하고 잘못된 것으로 증명하여 세상적으로 학자, 박사가 되면 뭐하겠습니까? 정말 그들이야 말로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은 절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쓴 복음서를 읽다 보면 이야기가 제각기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입을 맞추어 거짓을 진실처럼 꾸미려고 하면 그런 식으로 기록해서는 안됩니다. 어설프기 끝이 없는 기록들을 복음서에 남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의 이름을 보면 사복음서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간 시간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곳는 새벽 일찍이 갔다고 하고, 어떤 곳은 해가 돋아서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여인들이 무덤에 가서 만났다는 천사의 숫자도 틀립니다. 어떤 기록에는 천사 한 명을 만났다고 하고, 어떤 기록에는 두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천사가 있던 위치도 다릅니다. 어떤 기록은 천사가 무덤 안에 있었다고 하고, 어떤 기록에는 천사가 굴러낸 돌 위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도대체 누구의 말이 옳은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을 날조하려고 조작했다면 이렇게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증명하려고 하는데 여자를 앞세워서 되겠습니까? 요즘 같이 여권이 큰 소리를 치는 때는 여자 말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여자는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법정에서도 여자를 증인으로 채택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여자 말은 안 듣기로 작심을 한 시대입니다. 그런 마당에 여자들을 내세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날조됐거나 조작됐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보고 들은 대로 적어 놓았습니다. 하나도 꾸밈 없이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서로의 말들은 좀 틀려도 확실한 결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이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소문이 난 것은 예수님이 처형 당한 지 사흘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현장이 예루살렘에서 수백 리 떨어진 갈릴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먼 곳에서 나온 이야기라면 예수님을 사모하던 사람들이 너무나 그리워서 만들어낸 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지 사흘 만에, 그것도 예수님이 처형당한 예루살렘 현장에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 말을 겁 없이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직도 형장에는 핏자국이 낭자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자고 소리치던 폭도들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있습니다. 빌라도와 대제사장이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무덤가에는 병정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는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함부로 떠들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발각되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제자들은 두려운 나머지 방안에 틀어 앉아 자기들도 잘못하면 예수님처럼 끌려가지 않을까 하여 밥도 제대로 못 먹는 판국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소리를 함부로 합니까? 그런데 그런 현장에서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그런 말을 하는 여인들이 습니다. 그것이 진실이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예루살렘이 그런 소문을 듣고도 조용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군인들도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무도 여인들과 제자들의 주장을 반박해서 뒤집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요. 왜 그렇습니까? 변명을 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경 기록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날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번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날조된 사건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책을 읽어보십시오. 물론 학적으로 굉장히 높은 수준에 있는 학자들의 이야기이므로 쉽게 읽을 수는 없지만 한번 읽어보면 우스워서 못 읽을 정도입니다. 그것을 말이라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증명하려면 그럴 듯한 소리를 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가지고 똑똑한 것처럼 고개를 흔들고 있는 것을 보면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형당한 그 도시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 사실을 생명 걸고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이 뭉쳐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에 관한 신앙은 교회가 세월과 함께 만들어낸 신앙이 아닙니다.
C. H. 도드라는 유명한 학자가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이긴 하지만 중생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깊이 연구하면서 이렇게 유명한 말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부활신앙은 교회 안에서 막연히 생긴 믿음이 아니다. 막연히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부활신앙은 교회를 존재하게 만든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부활 신앙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교회에는 이 지상에 등장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부활을 믿지 않는 것보다 믿는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를 다니는 많은 분들 가운데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은근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니까 이런 주장을 하는 거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 다만 아내의 권유에 밀려 억지로 교회에 나오다 보니 약간 믿기는 하지만 그게 있을 법한 일이겠어? 그냥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지.'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실존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사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내가 그러리라고 믿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가지고는 구원을 못 얻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부활을 안 믿는다는 말을 듣고는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도 예수님을 못 만나야 됩니다. 그런데 엄연히 살아계신 주님을 본 바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한 유명한 논증을 인용하겠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아무도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다 쓸데 없는 것이 된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