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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호무우(風乎無雩)
무우 땅에서 바람 쐬다는 뜻으로,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은자적 삶을 대변하는 말이다.
風 : 바람 풍(風/0)
乎 : 어조사 호(丿/4)
無 : 없을 무(灬/8)
雩 : 기우제 우(雨/3)
출전 : 논어(論語) 선진편(先進篇) 第25章
선진편은 문인들과 그 인물들에 대해서 평한 것이 많다. 모두 25장으로 되어 있다. 호인(胡寅)이란 학자는, "이 편이 민자건(閔子騫)의 언행(言行)에 대하여 말한 것이 네 군데나 되고, 그 중에는 민자(閔子)라는 존칭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혹 민자건의 제자가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논어의 선진을 상하로 나누는 경우 제11편 선진(先進) 이상을 상(上)으로, 그 이하를 하(下)로 분류하기도 한다.
논어(論語) 중에서 가장 긴 글로, 네 사람의 뜻을 공자가 평(評)한 것이다. 사제지간(師弟之間)에 화기애애(和氣靄靄)한 봄바람이 넘쳐흐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증석(曾晳)이, 정치적인 것보다 유연자적(悠然自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이에 공자가 찬성하였다.
노인에게는 편안하게 하고 친구에게는 믿음을 갖게 하고 어린이는 따르게 해야 한다(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라는 말은 학문(學), 예(禮), 인(仁), 정치(治)의 종국적 목적은 노인들이 평안히 잘살 수 있고, 친구, 동료, 사회인들이 상부상조하며 신의(信義)를 지켜 협동할 수 있고, 동시에 후세의 연소자들이 기존사회, 현세대를 보고 따르며 보호 육성되는 데 있다.
이리하여 과거와 현시대와 앞날의 세대가 서로 평안과 신의와 사랑으로 계승 성장하여, 인류의 문화는 발전하는 것이다. 군자(君子)나 인자(仁者)는 이런 흐름을 더욱 발전시키는 일꾼인 것이다.
풍호무우(風乎無雩) : 제자들의 포부
子路曾晳冉有公西華侍坐.
자로와 증석과 염유와 공서화가 공자를 모시고 앉아 있었다.
子曰 以吾一日長乎爾 毋吾以也. 居則曰 不吾知也 如或知爾 則何以哉?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 보다 몇 해 연장자이기는 하나, 주저하지 말고 말해 보거라. 너희들은 평소에,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한탄하더니, 만약 남이 너희들을 알아 등용하여 준다면, 무엇을 하려 하느냐?"
子路率爾而對曰 千乘之國 攝乎大國之間 加之以師旅 因之以饑饉 由也爲之 比及三年 可使有勇 且知方也.
자로가 얼른 대답하였다. "천승의 나라가, 대국 사이에 끼여, 전쟁의 화를 당하고, 기근에 시달림이 있어도, 제가 이들을 다스린다면, 삼년 안팎에, 백성은 용기를 얻게 하며, 또 도의를 알게 하겠습니다."
夫子哂之. 求爾何如.
공자께서는 빙그레 웃으셨다. 그리고 구(求; 冉有)의 뜻을 물으셨다.
對曰 方六七十 如五六十 求也爲之 比及三年 可使足民. 如其禮樂 以俟君子.
염유가 대답하여 말했다. "사방 6~7십리, 또는 5~6십리의 나라를, 제가 다스리면, 3년 안팎에, 백성들로 하여금 의식에 부족함이 없게 하리다. 다만 예악(禮樂)의 진흥은, 군자를 기다려 그 힘을 빌리겠습니다."
赤, 爾何如?
공자께서, "공서화야, 너는 어떠하냐?"고 물으셨다.
對曰 非曰能之 願學焉. 宗廟之事 如會同 端章甫 願爲小相焉.
공서화가 대답하여 말했다. "능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우기를 원하나이다. 종묘의 일이나, 혹은 제후들의 회합 때에는, 검고 단정한 예복(禮服)과 예관(禮冠)을 쓰고, 군주의 예식을 돕는 소상(小相)이 되오리다."
點, 爾何如?
공자께서, "증석아, 너의 생각은 어떠한가?"고 물으셨다.
鼓瑟希 其爾舍瑟而作 對曰 異乎三子者之撰.
거문고를 뜸뜸이 뜯더니, 던지고 일어서며, 대답하여 말했다. "저는 저들 세 사람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子曰 何傷乎. 亦各言其志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가? 저들 모두는 저들의 희망을 말했을 따름이니라."
曰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증석이 말하였다. "늦은 봄, 봄 옷이 만들어 지면, 갓을 쓴 어른 5~6인과, 어린 아이 6~7인을 이끌고, 기수(沂水)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舞雩)에 소풍을 나갔다가, 시(詩)를 읊으며 돌아 오겠습니다."
夫子喟然嘆曰 吾與點也.
공자가 슬픈듯이 탄식을 하며 말씀하셨다. "나도 너의 말에 찬성하노라."
三子者出 曾晳後 曾晳曰 夫三子者之言何如?
세 사람이 나가고, 증석이 뒤에 남아 있다가, 증석이 말하였다. "저들 세 사람의 말이 어떠하옵니까?"
子曰 亦各言其志也已矣.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제각기 제 뜻을 이야기 했을 뿐이니라"
曰 夫子何哂由也?
증석이 다시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왜 유(由)의 말에 웃으신 것입니까?"
曰 爲國以禮 其言不讓 是故哂之.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나라를 다스림은 예로써 해야 하거늘, 그 말이 겸손치 않아, 그래서 웃었느니라."
唯求則非邦也與?
(증석이 다시 물었다) "염유가 말한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아니오이까?"
安見方六七十 如五六十 而非邦也者.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사방(四方) 6~7십 리, 또는 5~6십 리가 되고, 나라가 아닌 것이 있으랴"
唯赤則非邦也與?
(증석이 다시 물었다) "공서화는 나라를 말함이 아니오이까?"
宗廟會同 非諸侯而何? 赤也爲之小 孰能爲之大?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종묘의 제사와, 제후의 회동이 어찌 군주가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공서화가 소상(小相)이라고 한다면, 누가 대상(大相)이 되겠느냐?"
(論語 先進篇 第25章)
이 문장은 공자가 만년의 나이에 자로, 증석, 염구, 공서화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오고 갔던 대화 중의 하나다. 공자는 먼저 4명의 제자들에게 나이 많은 스승의 앞이라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너희들의 포부를 말해보라고 하신다.
이때 자로가 제일 먼저 나와 자신은 혼란과 속박을 받고 있는 천승의 나라 제후국도 자신이 통치하면 금방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호언한다. 뒤이어 염구는 사방 50~70리(里) 되는 작은 나라도 자신이 다스릴 경우 3년 안에 백성을 풍족하게 만들 수 있다고 자랑한다. 이에 공서화는 제후국과의 외교적 만남에서 집례자가 되고 싶다고 소망을 피력한다. 집례자는 지금으로 말하면 외무부장관이나 차관으로서 외교의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을 의미한다.
공자는 이들 세 명의 제자들의 말에 탐탁치 못했기 때문에, 끝으로 남아있던 증석에게 "너는 무엇을 하고 싶냐?"고 재차 물으셨다. 증석은 논어 전편에 자주 등장하는 증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증석은 "늦봄이 찾아오면 어른 대여섯 명과 아이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沂水) 가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 땅에서 바람 쐬고 노래 부르며 살겠다"고 대답한다. 공자는 증석의 말에 화색이 돌며 그를 최고의 제자로 받아들인다. 물론 이 4명 가운데 최고를 의미한다.
공자는 자로, 염구, 공서화 등 세 명의 포부를 들으신 후 그것도 저마다의 희망일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왜 증석의 말에는 맞장구를 치면서까지 기쁨을 표출하셨을까? 공자는 아마도 앞서 말한 3명의 제자들이 모두 사사로운 욕심과 포부를 던지며, 인생의 즐거움보다 찌들어 살아가는 속세의 일을 앞 다투고자 했던 모습에서 다소 실망감을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정치적 자리를 탐내고 있었으니, 공자의 실망은 더더욱 컸을 것이다.
반면에 증석은 지엽적인 정치보다, 또 인간의 욕심과 야망을 내세우기보다, 현재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연과 더불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꿈꾸는 기상을 피력했으니, 공자는 그의 말에 감탄과 경의를 표한 것이다.
기실, 기수(沂水)는 공자의 고향 노(魯)나라의 도성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 조그마한 강이며,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의하면 온천이 샘솟는 지역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한편 무우(舞雩)는 대대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며 제단(祭壇)의 터가 있는 숭고한 자리라고 알려져 있다. 증석의 말에 비친 '기수'가와 '무우' 땅이 풍겨주는 이미지가 마치 공자가 늘 공경하던 예의(禮儀)를 치르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으니, 공자의 탄식을 자아내기에 더 이상 좋은 곳은 없어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정치적 야욕과 야망을 불태우며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드러낼 때, 누군가는 자연을 벗삼아 조상의 얼을 모시며 유유자적하게 삶을 마감하고자 했던 모습을 보였다면, 정말 그들의 인생에 대한 격(格)을 다시 한 번 평가하게 될 것이다.
옛말에 '늙은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는 속담이 있다. 부귀영달을 쫒아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한 친구가 있는가하면, 고향에서 묵묵히 부모를 모시며 조상대대로 물려온 터를 지키는 대장부의 의연한 모습도 결코 실패한 인생은 아닐 듯하다.
(解說)
자로와 증석과 염유와 공서화가 공자를 모시고 둘러 앉아서 각자의 희망을 얘기하고 공자가 이것을 평(平)한 글이다. 먼저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 보다 몇살 연상이기는 하지만 조금도 꺼릴 것이 없이 말해 보도록 하여라. 너희들은 평소에 '자기를 알아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는데, 만일 너희들을 알아 주는 이가 있어서 등용된다면 무엇을 할 생각인가? 어서 장래의 희망을 말해 보거라"고 하였다.
자로(子路)가 얼른 나서서 대답하였다. "대국(大國) 사이에 낀 병거(兵車) 천승(千乘)을 낼 수 있는 나라가,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 화(禍)를 입은데다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기근이 닥쳐와 일대위난(一大危難)을 겪고 있을 때, 제가 그 나라를 다스려서 3년 동안에 나라를 다시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은 용기를 내어 생업에 종사하여 도의생활(道義生活)를 하게 할 것입니다." 이에 공자께서는 빙그레 웃으셨다.
다음에 염유(冉有)는 말하기를, "사방 70 리나 사방 60 리 되는 작은 나라를 내가 3년동안 집정을 하게 되면, 백성의 의식이 풍족할 것이고, 예(禮)와 악(樂)은 유덕(有德)한 선비를 모셔다가 가르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서화는 말하기를,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종묘의 제사 일과 제후가 회동할 때, 검고 단정한 예복(禮服)을 입고 예관(禮冠)을 쓰고, 군주(君主)의 예식을 돕는 소상(小相)이 되고 싶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이 때 증석은 거문고를 뜯고 있다가 조용히 밀쳐내고 일어서서, "저는 세 사람의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고 하였다. 공자가, "염려말고 말해 보거라. 각자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하니 증석이 말했다. "저는 늦은 봄, 봄옷을 지어 입고, 어름 5~6인과 어린 아이 6~7인과 함께 기수(沂水)의 물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舞雩)로 소풍을 갔다가, 시(詩)를 읊으면서 돌아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공자가 슬픈듯 한탄하여, "나도 증석의 생각과 같구나"고 말했다.
세 사람이 돌아간 후에 증석이 혼자 남았는데, 공자가 세 사람을 각각 평하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자면 예(禮)를 세워야 하는데, 자로는 겸손한 태도가 없으니, 예(禮)를 잃었다. 그래서 내가 웃은 것이다. 염유(冉有)가 말하는 사방 70리 또는 60리도 훌륭한 나라이며, 그리고 종묘일과 제후가 회동하는 일도 군주(君主)가 하는 일이니, 나라의 일이다. 공서화가 소상(小相)이 되겠다면, 누가 대신(大臣)이 되겠는가"라고 하여, 네 명의 제자가 모두 집정(執政)할 자격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解釋)
어느 날 공자가 자로, 염유, 공서화, 증점 등과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증자의 아버지인 증석(이름이 '점'이기에 이 글에서는 증점이라고 했다)은 곁에서 비파를 잔잔히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스승 앞에서 말하기조차 어려워했던 제자들을 향해 공자는 '각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씩씩한 자로는 역시 망설이지 않고 먼저 나서서 대답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공자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염유, 공서화도 각자의 개성과 능력대로 소망을 말했습니다. 각자 자신들의 성격에 걸맞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증점의 대답이 퍽 의외의 내용입니다. 현실에 투신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과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유자(儒者)의 본분인데, 이와는 전혀 달리 증점은 자연과 하나되는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이는 도가적(道家的)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점의 대답, 곧 '기수(沂水; 노나라 도성 남쪽에 있는 강)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 하늘에 제사나 기우제를 지내는 언덕)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다'는 낭만적인 대답이 퍽 신선합니다. 목욕 후 맞는 소슬바람이 그대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증점의 대답에 대한 '증점과 함께하고 싶다'는 공자의 말은 더욱 놀랍습니다. 이를 보면 아마 공자 자신도 마음으로는 늘 자연을 동경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인간 사회에 대한 염려 끝에 어쩔 수 없이 인간과 인간 사회 속에서 살고, 그 안의 문제에 고민하는 삶을 살면서도 공자 역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舞雩)에서 바람을 쐬는', 자연속에서의 평화를 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고, 또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현실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펴기 위해,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고대 문화의 결정인 경전을 찬술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모습으로 동분서주하였습니다. 그 모습으로 한 평생을 살았기에 공자는 오늘의 우리에게 영원한 스승의 자리에 있습니다.
무우(舞雩)장의 지명론적 해석 가능성 시론
Ⅰ 서언(序言)
Ⅱ 논어 선진(先進) 제26장에 대한 기존의 견해
Ⅲ 논어 무우(舞雩)장에 대한 지명(知命)론 관점의 해석
Ⅳ 결언(結言)
<국문요약>
본 논문은 논어(論語) 무우(舞雩)장의 의미를 새롭게 밝히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장에서 공자(孔子)는 자로(子路) 등의 정치적 포부가 아니라 풍류를 즐기겠다는 증석(曾晳)의 답변에 찬동을 하였는데, 이는 유가(儒家)의 수기치인(修己治人) 정신에 비추어 볼 때 많은 의문을 남긴다. 이에 논자는 공자가 강조하였던 군자의 두가지 조건인 지명(知命)과 위인(爲仁)의 관점에서 이 장의 내용을 새로이 풀어 보았다.
선진(先進) 제26장은 위인(爲仁)과 지명(知命)의 대립에서 공자가 지명(知命)에 먼저 손을 들어준 것으로 해석된다. 지명(知命)은 위인(爲仁)을 위한 전제가 되기 때문에 지명이 실현되지 않으면 위인이 실현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공자는 먼저 증석의 풍류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제자들에게 지명(知命)의 덕을 깨우친 것이고 나중에는 위인(爲仁)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증석을 깨우친 것이다.
공자는 증석의 풍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갖는 지명(知命)적 함의에 대하여 찬동한 것이다. 지명이란 세상사에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알지만 운명적 사태에서 원망하거나 슬퍼하지 아니함을 그 요건으로 한다.
본 논문을 통하여 논자는 논어 선진 제26장, 속칭 무(舞雩)장의 의미를 새롭게 밝히려 한다. 이 장의 개요는, 공자가 네 명의 제자들에게 만일 군주가 알아줘서 자신을 등용해 준다면, 즉 포부를 이룰 수 있는 조건이 된다면 어찌 하겠는가를 묻고 제자들이 이에 답하였는데, 그 중 증석(曾皙; 曾點)의 답변에 공자가 동의했다는 것이다.
자로(子路; 仲由), 염유(冉有; 冉求), 공서화(公西華; 公西赤)는 각각 국방, 재정, 의례 및 외교 방면의 포부를 말한 반면 증석은 '늦은 봄의 풍류를 즐기겠다'는 포부를 이야기 하였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증석의 이례적인 답과 이에 동의한다는 공자의 발언이다.
유가의 근본적 지향이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증석의 답과 공자의 이에 대한 동의는 실로 반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논어 전편(全篇)에서 학자들로 하여금 가장 많은 신비와 의혹을 불러 일으켰던 장구가 바로 이 장이다'라는 말처럼 이 대목은 후대 유가들의 다양한 견해가 교차되는 곳이 되었다.
조선의 홍대용(洪大容)이 이에 대하여 가졌던 의문을 들어본다. 기수에서 목욕하는 일은 물론 즐거운 일이요, 또 군자가 때때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평생의 뜻을 들어 여기에 있을 뿐이라 하면 증석의 광성(狂性)이 또한 너무 심하다. 공자가 동의한다고 하지만 그는 과연 무엇을 공감했을까?
공자의 뜻은 늙은이를 편안히 해주고 젊은이를 품어주고 붕우(朋友)를 믿게 하는 데에 있다. 이것은 모두 실제적 사안이고 곧 위대한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기상이다. 지금 증석이 구세(救世)할 마음이 없고 무실(務實)할 뜻이 적고 현실을 내버리고 마음을 바람 쐬고 노래 부르는 일에 두고 있으므로 광자의 뜻만 크고 일에는 소홀한 것이 이런 까닭이리라. 공자는 마땅히 잘못을 지적하고 억제시켜 뉘우치게 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감탄하고 깊이 인정하니 어찌 된 일인가?
홍대용은 공자의 평소 포부가 구세(救世) 즉 늙은이를 편안히 해주고 젊은이를 품어주고 붕우를 믿게 하는 데 있음에 근거하여, 현실을 내버리고 바람 쐬고 노래 부르는 일에 마음을 두겠다는 증석의 발언에 공자가 찬성한 것을 의문스럽게 보고 있다.
이 의문은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있기에 합당한 답이 제시되어야 한다. 물론 이에 대하여 고금의 많은 학자들이 견해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그 견해가 논어 전체의 맥락에 일치하지 않거나 타당한 논증이 결여되어 그대로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논자는 무우장의 의미를 새로이 밝히려 한다.
이 장에서는 무우장의 내용과 이에 대한 기존 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한다. 먼저 무우장의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로(子路), 증석(曾晳),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가 공자를 모시고 앉았었는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 나이가 다소 너희들보다 많다하여 나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너희들이 평소에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는데, 만일 혹시라도 너희들을 알아준다면 어찌 하겠느냐?"
자로가 경솔히 대답하였다. "천승(千乘)의 제후국이 대국의 사이에서 속박을 받아 전란이 일어나고 따라서 기근이 들어도, 제가 다스릴 경우 3년에 이르면 백성들을 용맹하게 할 수 있고 또 의리(義理)를 알게 할 수 있습니다." 공자께서 빙그레 웃으셨다.
(염유에게) "구(求)야!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자, 염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방 60∼70리, 혹은 50∼60리 쯤 되는 작은 나라를 제가 다스릴 경우, 3년에 이르면 백성들을 풍족하게 할 수 있거니와, 예악(禮樂)의 문제는 군자를 기다려 해결하겠습니다."
(공서화에게) "적(赤)아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자, 공서적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제가 이 일에 능숙하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배우기를 원한다는 전제에서 말씀드립니다. 종묘(宗廟)의 일과 제후들의 회동(會同)에서 현단복(玄端服)을 입고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작은 집례자(執禮者)가 되기를 원하옵니다."
(증석에게) "점(點)아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자, 그는 비파를 타기를 드문드문 하더니, 쨍그렁 비파를 놓으며 일어나 대답하였다. "이 세 사람이 갖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저 각기 자기의 포부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하시자, 증점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5∼6명과 동자 6∼7명과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공자께서 깊이 탄식(喟然歎)하시며 "나는 점(點)과 같이 하겠다."라고 하셨다.
세 사람이 나가자, 증석이 뒤에 남았었는데, 증석이 말하였다. "저 세 사람의 말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또한 각각 제 뜻을 말했을 뿐이다."
(증석이)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유(由)를 비웃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공자께서) "나라를 다스림은 예(禮)로써 해야 하는데, 그의 말이 겸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웃은 것이다."
(증석이) "구(求)가 말한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아닙니까?"하고 묻자, (공자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방(方) 60∼70리, 또는 50∼60리가 되고서 나라가 아닌 것을 어디서 보겠느냐?"
(증석이) "적(赤)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아닙니까?"하고 묻자, (공자께서)이렇게 대답하셨다. "종묘의 일과 회동하는 일이 제후의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적(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작다 한다면 누구의 일을 능히 크다 할 수 있겠느냐?"
공자는 네 명의 제자에게 그들이 군주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여 평소 불만을 나타내고 있음을 환기한 후, 만일 군주가 자신을 알아줘서 등용해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에 자로는 국방을 중심으로 한 포부를, 염유는 재정방면의 포부를, 공서화는 집례(執禮)방면의 포부를 말하고 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정치적 포부를 말한 것이다. 반면에 증석은 어른과 동자 몇 사람을 대동하여 기수와 무우에서 늦은 봄의 풍류를 즐기겠다는 포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서언에서 언급한 홍대용의 의문대로 공자는 구세(救世)의 포부 실현을 위하여 평생을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 제자들의 정치적 포부가 아니라 증점의 풍류적 포부에 찬성한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태도는 확실히 그의 삶의 지향점 및 평소의 행동거지와 어긋난 듯이 보인다.
기존 학자들이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제시하였던 대표적 견해들을 검토해 본다. 첫째는 바람 쐬고 노래 부르는 일에 마음을 두겠다는 증석의 발언이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 이상의 깊은 사상적 함의를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겉으로는 단순히 풍류를 즐기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상세계를 달성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정호(程顥), 정이(程頤), 주희(朱熹) 등이 이런 견해를 보인 이래 다수의 학자들이 이에 합류하고 있다.
○ 정자(程子)가 또 말씀하였다. "세 사람은 모두 나라를 얻어 다스리고자 했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취하지 않으신 것이다. 증점은 광자(狂者)이니, 반드시 성인의 일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능히 부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다'고 말한 것이니, 즐거우면서도 제자리를 얻었음을 말한 것이다. 공자의 뜻은 노인을 편안하게 해주고, 붕우를 미덥게 해주고, 젊은이를 감싸줌에 있어서 만물로 하여금 그 본성을 이루지 않음이 없게 하셨는데, 증점은 이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길게 감탄하시며 나는 증점과 함께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又曰, 三子皆欲得國而治之, 故夫子不取. 曾點, 狂者也, 未必能爲聖人之事, 而能知夫子之志. 故曰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言樂而得其所也. 孔子之志, 在於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使萬物莫不遂其性. 曾點知之, 故孔子喟然歎曰, 吾與點也.
○ 주희(朱熹)가 이르기를, "증점의 학문은 인욕(人慾)이 다한 곳에 천리(天理)가 유행하여 곳에 따라 충만하여 조금도 결함이 없음을 봄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동정(動靜)할 때에 차분하고 자연스러움이 이와 같았으며, 그 뜻을 말함에는 현재 자기가 처한 위치에 나아가 그 일상생활의 떳떳함을 즐기는 데에 지나지 않았고, 애당초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하려는 뜻이 없었다.
曾點之學, 蓋有以見夫人欲盡處, 天理流行, 隨處充滿, 無少欠闕. 故其動靜之際, 從容如此, 而其言志則又不過卽其所居之位, 樂其日用之常, 初無舍己爲人之意.
그리하여 그 가슴속이 한가롭고 자연스러워 곧바로 천지 만물과 더불어 위아래로 함께 하고 천지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는 묘함이 은연중 말 밖에 나타났으니, 저 세 사람이 지엽적인 정사에 급급한 것에 견주어 보면 그 기상(氣象)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부자(夫子)께서 감탄하시고 깊이 허여 하신 것이며 문인(門人)들이 그 전말을 기록함에 특히 이를 더욱 자세히 한 것이니, 그도 또한 이것을 앎이 있었던 것이다.
而其胸次悠然, 直與天地萬物, 上下同流, 各得其所之妙, 隱然自見於言外, 視三子規規於事爲之末者, 其氣象不侔矣. 故夫子歎息而深許之, 而門人記其本末, 獨加詳焉, 蓋亦有以識此矣.
한 세계에서는 국토를 방위해야 할 군사 전문가도 필요 없고, 빈곤을 퇴치해야 할 정치가도 필요 없으며, 국가간의 이해관계를 절충해야할 외교가도 필요 없다. (…) 증석의 회포는 현실세계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절대적인 이상세계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이다. 이 상징적인 묘사가 인자(仁者)의 심경을 자극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공자의 탄식이다.”라고 하였다. 삼인(三人)은 증점이 말한 경지를 이상적 경지로 보고 있다.
정자(程子)는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다'는 증석의 말이 '노인을 편안하게 해주고, 붕우를 미덥게 해주고, 젊은이를 감싸주겠다'는 공자의 포부를 이해하였지만 자신이 광자라서 이를 실현할 수 없음을 토로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공자의 뜻이 '노인을 편안하게 해주고, 붕우를 미덥게 해주고, 젊은이를 감싸줌에 있어서 만물로 하여금 그 본성을 이루지 않음이 없게 하는 데 있음'을 어찌 세 제자들은 모르고 증석만이 이를 알았겠는가? 논리적 타당성이 약하다.
주희(朱熹)는 증석의 경우 그 가슴속이 한가롭고 자연스러워 곧바로 천지 만물과 더불어 위 아래로 함께 하고 천지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는 묘함이 은연중 말 밖에 나타난 것이며, 나머지 세 사람이 지엽적인 정사에 급급한 것에 견주어 볼 때 그 기상(氣象)이 뛰어난 것이어서 공자가 찬동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해석 역시 일차적으로 증석의 발언과 거리가 심하게 멀고 공자의 찬동을 받았다는 것 외에는 그렇게 볼 근거가 없다. 공자의 찬동에 초점을 맞추어 증석의 말을 견강부회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적으로 주희 역시 이렇게 주석한 것을 말년에 후회하였다고 전해진다.
둘째는 증석의 말을 표현 그대로 받아들여 '순수하게 풍류를 즐기겠다'는 것으로 보되 공자가 말한 찬성(與)의 의미를 달리 보는 것이다. 즉 공자가 근본적으로 증석과 생각을 같이 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 소회가 같았다'는 것이다.
○ 황씨일초(黃氏日鈔)는 세 사람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대하여 말했는데 모두 질문에 대하여 바르게 답한 것이다. 증석은 공문(孔門)의 광자(狂者)로서 세상사에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소탈한 취향을 말한 것인데 이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바르지 않다. 공자는 도를 행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것을 마음에 두었는데 시운이 따르지 않았다.
바야흐로 몇몇의 제자들과 더불어 적막한 물가에서 사사롭게 밝음[明]을 강론하다가 마침 문득 기수에서 목욕하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다는 증석의 말을 들었는데 '바다를 건너 오랑캐의 땅에 살겠다'는 뜻을 얻은 듯 했다. 그리하여 깊이 한숨을 쉬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니 그 느낀 바가 깊은 것이다. (…) 공자께서 어찌 세상을 잊고 혼자 즐거운 것을 현명하다고 여기며, 오로지 증점에게만 동의하고 나머지 세 사람에게는 동의하지 않겠는가?
황씨일초(黃氏日鈔)는 역시 공자가 기본적으로 도를 행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시운이 따라주지 않아 포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공자는 일시적으로 현실을 떠나고 픈 생각이 들었다. 이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내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려 한다'라는 심정과 흡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탈한 취향을 드러낸 증석의 말을 들으니 공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한숨이 나오고 자신의 심정이 증석이 말하는 그것과 같다는 것을 토로하게 된 것이다. 증석의 말 자체는 그렇게 심원한 것이 아니지만 포부를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공자의 당시 심정에 부합하였기에 공자는 증석의 말에 공감한 것이다. 리허쩌우 역시 이러한 견해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문리에도 어긋나지 않고 논어에 보이는 증석의 미약한 비중과도 괴리가 없다. 그런데 단순히 일시적 소회 때문에 타당한 제자들의 답이 아니라 증석의 답에 찬동하였다는 것은 온당치 않아 보인다. 논어에서 가장 긴 이 절의 내용이 순전히 공자의 감상(感傷)적 소회를 그린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 내용을 논어에 기록한 것은 감상적 소회를 그린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셋째는 풍류를 즐기겠다는 증석의 발언을 표현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내용이 아니라 이면의 함의에 공자가 동의했다는 것이다. 즉 증석은 공자의 질문의 전제였던 '자신을 알아준다면'이라는 사태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답을 한 것이며 공자 역시 이러한 판단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자신을 알아준다면'이라는 사태가 오지 않는다고 보는 근거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시세의 흐름을 파악한 것(知時)'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안 것(自知)'이다.
○ 황간(皇侃)의 견해이다. 공자가 증점의 바램을 듣고 깊이 탄식했다. 탄식하고 나서 "나는 증점과 함께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의 뜻이 증점과 같다는 것이다. 당시 도가 쇄미해지고 세상은 어지러워 서로 다투는 자는 많았다. 이런 까닭에 여러 제자들이 모두 출사하는 것을 마음에 두었는데 오직 증점만이 홀로 때가 변했음을 알았기 때문에 공자가 그와 함께 한 것이다.
○ 소자유(蘇子由)의 견해이다. 부자께서 자로를 비웃은 것은 그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증점에 찬동한 것은 그의 스스로를 아는(自知) 현명함 때문일 것이다. 증석과 같은 광자(狂者)는 반드시 세상에 대하여 베풀 것이 없을 것이다. 진실로 자신을 모르고 억지로 정치에 종사한다면 반드시 재앙이 따를 것이다. 그가 제자를 이끌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즐거움에 나이 듦을 잊는다는 것은 곧 처신이 잘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공자가 어찌 벼슬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겼겠는가?
황간(皇侃)은 증점이 세상의 시운(時運)이 유가에 있지 않음을 깨달아 구세를 위한 출사에 연연해하지 않고 풍류의 세계를 선택하였는데 공자 역시 그러한 마음이었다고 보고 있다. 공자는 증점이 홀로 시(時)를 알았음을 좋게 여긴 것이다. 정약용 역시 이와 비슷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증점이 홀로 시(時)를 알았다는 것은 논어에서 차지하는 그의 미약한 위상을 감안해보면 논리적 근거가 다소 약한 듯하다. 논어에는 시세(時勢)를 알고 은둔한 인사들에 대한 공자의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약화시킨다.
소자유(蘇子由)는 여기에서 증석은 광자(狂者)로서 세상에 베풀 것이 없는 부족한 인물로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자질을 잘 알고서 정치에 종사하지 않고 풍류나 즐기겠다고 답하였다. 공자는 증석이 자겸(自謙)하는 처신을 높이 산 것이지 그 발언의 내용에 동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공자가 벼슬을 권했는데 칠조개(漆雕開)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벼슬을 사양한 일에 대하여 공자가 기뻐했던 사건과 맥을 같이 한다.
이는 증석의 말을 듣고 공자가 길게 감탄하였다는 내용과 맥락이 다소 어긋난다. 칠조개의 경우에서처럼 기뻐할 정도일 뿐이지 길게 감탄할 사안은 아닌 듯하다. 또한 공야장 5.8에서 자로(子路), 염구(冉求), 공서적(公西赤)에 대하여 공자는 그들이 충분히 정치적 능력을 갖추었다고 인정하고 있는 점에서 유독 증점(曾點)만이 스스로를 알았다고 볼 근거가 취약하다.
이 세 가지 견해 중 첫째(정자, 주희)는 문리를 현격히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주장의 근거가 취약하여 받아들일 수 없음을 전술하였다. 둘째(황씨일초), 셋째(황간, 소자유) 견해는 대체로 문리를 현격히 벗어나 있지는 않지만 이 역시 공자의 찬동에 근거를 두고 있을 뿐인데 찬동의 이유 역시 소략하고 논어전체의 맥락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면할 수가 없다.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증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가 선진(先秦) 서물에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아니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단순히 다른 전적에 나타나는 증석의 덕이나 지적 수준에 의거하여 이 대목을 해석할 수 없다. 대안은 이 인용문의 내적 맥락, 논어의 다른 문장 및 공자의 철학이라는 외적 맥락에 의거하는 것이다.
본문 초반부에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평소에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한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종반부에서는 세 제자들의 포부 역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증점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논자는 본문의 이러한 맥락 및 논어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원망하지 말라'는 공자의 강조점에 주목하여 본문의 의미를 지명(知命)과 위인(爲仁)의 관점에서 새롭게 풀어 보려 한다.
1. 지명(知命)의 함의
지명(知命)과 위인(爲仁) 중 위인(偉仁)은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의미를 갖는다 할 수 있으므로 지명(知命)에 초점을 맞추어 그 함의를 검토한다. 논어의 마지막 장구는 '명(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로 시작된다. 공자는 군자의 조건으로 지명(知命)을 들고 있는 것이다.
대체 지명이 무엇이기에 군자의 조건이 되며 또한 공자 자신은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지천명(知天命) 하였다고 하는 것인가? 고대 서물에서 명(命)은 대체로 수명의(壽命義; 수명, 생명, 명맥), 운명의(運命義; 운명) 및 덕명의(德命義; 하늘의 도덕적 명령, 이치)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갖는데, 논어에서 지명(知命) 및 지천명(知天命)의 명(命)은 모두 운명의(運命義)로 사용되었다고 판단된다.
운명(運命)이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필연성을 의미하며 이에는 덕복(德福) 불일치의 사태가 포함된다. 즉 덕이 충만함에도 집권자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 등용되지 못한 사태 역시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논어의 명(命)이 운명의(運命義)로 쓰였다 하더라도 지명(知命)은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지명(知命)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의 내용을 안다', '운명이 존재함을 안다', '운명의 개념을 안다', '운명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를 안다' 등의 다양한 의미의 후보군을 갖는다. 지명(知命)의 의미 정치적 포부를 말하였던 세 제자 중 가장 작은 포부를 말하였던 공서화가 하고자 하는 일마저도 작은 것이 아니라고 공자는 증석에게 말하고 있다.
본문의 "너희들이 평소에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한다."라는 공자의 발언에서 군주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태에 대하여 제자들이 평소에 불만을 표출하는 일이 잦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논어에는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태에서 자신을 경계하고 단속하는 데 대한 공자의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②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③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지위에 설 자격을 걱정하며,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려질 만하기를 구해야 한다.
④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 없음을 걱정해야 한다.
⑤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사태를 어찌 하시겠습니까?"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고, 아래로 배우면서 위로 통달하나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이실 것이다."
⑥ 군자는 자기의 무능함을 병으로 여기고,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
위의 인용문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태에 대하여 근심[患]하고, 원망[怨]하거나 노여워[慍]하지 말고, 자기 계발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있다. 특히 인용문 ①, ⑥에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는 것이 군자에게 요구되는 자세임을 알 수 있다.
인용문 ③은 여타의 인용문과 같은 취지이지만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함'이 '지위 없음'으로 대체되어 나타난다. 이에서 나를 알아주는 궁극의 주체는 군주임을 알 수 있다. 인용문 ⑤에서는 알아주지 않는 대상으로 공자 자신이 나타나며 이에 대한 공자의 자세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아니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태에서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한 공자의 반복적 강조는, 역으로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일반적이었으며 그리하여 그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첨예하게 느끼고 있었음을 함의한다. 군주들이 알아주지 아니하여 발생한 실제 사태에서 운명이 문제화 되고 이에 대한 공자의 지명(知命)적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논어의 장구를 살펴본다.
⑦ (공자 일행이) 진(陳)나라에 있을 때에 양식이 떨어지니, 따르는 제자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자로가 성난 얼굴로 (공자를) 뵙고, "군자도 궁할 때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답하였다. "군자는 궁하더라도 굳건한 것이나, 소인은 궁하면 넘친다."
인용문 ⑦은 공자 학단의 천하주유중 군주들이 '알아주지 않고(不知己]' 외면하여 진채(陳蔡)지간에서 양식이 떨어져 제자들이 병으로 쓰러지는 고난을 겪은 사건에서 자로와 공자의 대화이다. 자로가 성난(慍) 얼굴로 공자에게 "군자도 궁할 때가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자로의 이러한 태도는 두 가지를 함의한다.
하나는 자로가 '덕이 충만한 군자가 왜 어려움을 겪는가?' 다시 말하자면 '하늘은 왜 덕자에게 복(福)이 아니라 화(禍)를 내리는가?'에 대하여 물었다는 점이다. 자로의 이러한 물음은 서경의 복선화음(福善禍淫)론에 기반을 둔 것이다. 서경의 복선화음론은 덕과 복 사이에 상관적 원칙성이 존재하는 것으로서 우연성을 띠는 운명적 사태를 배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로가 궁한 사태에 대하여 성난(慍]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운명적 사태에 대하여 하늘을 원망[怨天]하거나 사람을 탓[尤人]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아야 하는 군자의 요건에서 벗어난다.
자로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운명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또한 운명적 사태에 대하여 바른 수용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아니함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공자는 태연한 자세를 유지하며 자로의 질문에 대하여 공자는 군자도 궁할 수 있으며 다만 궁하더라도 굳건한 자세를 유지한다는 답을 주고 있다. 이는 덕(德)이 현실세계의 궁통(窮通) 자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궁통에서의 자세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인용문 ⑦의 공자와 자로는 각각 지명(知命)과 부지명(不知命)의 대표적 인물인 것이다. 이렇듯 논어에는 지명의 덕을 강조하고 그것의 실천으로서 불원(不怨), 불우(不憂), 불온(不慍) 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우(舞雩)장을 지명론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2. 무우(舞雩)장의 지명(知命)과 위인(爲仁)론적 해석
본문에서 "너희들이 평소에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한다."라는 환기 뒤에 공자는 제자들에게 "(군주들이) 혹시라도 너희들을 알아준다면 어찌 하겠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곧 바로 답이 튀어나온 자로를 비롯한 세 제자들은 예상대로 정치적 포부를 말하였다.
반면 공자와 세 제자들과의 문답 와중에 비파를 타고 있던 증석은 늦봄의 풍류를 즐기겠다는 이례적인 답을 하였다. 표면상으로는 세 제자들과 증점 사이의 포부의 차이만 나타나 있지만 세 제자와 공자의 대화중에 증석이 비파를 타고 있던 상황과 증석에 대한 맹자의 평가를 감안해 보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늘 투덜대던 부류들은 세 제자들이고 증석은 그렇지 아니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달리 말하자면 세 제자들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태에 대하여 바람직하지(군자답지) 아니한 자세를 보여주었고 증석은 그렇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군주들이 자신을 알아주어 정치적 포부를 펼치는 것에 대하여 증석이 별 관심이 없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이에서 공자가 세 제자들의 평소 자세를 교정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감지된다.
다음의 문장은 군자가 근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자의 견해를 보여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도(道)를 도모하고 밥(食)을 도모하지 않는다. (…) 군자는 도를 걱정하고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군자의 근심(憂, 病) 대상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군자는 도(道)를 실현하지 못함을 걱정하고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 존재이다. 군자는 밥과 가난으로 대변되는 운명적 사태를 근심하지는 않지만 도(道)를 터득하지 못하였거나 도가 실행되지 아니하는 사태를 걱정하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서 불우한 운명적 사태를 근심하지는 않는 것, 즉 지명(知命)이 군자의 조건 중 일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공자는 "지명(知命)하지 아니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태에 대한 세 제자들의 투덜거림은 지명의 덕을 갖추지 못한 것이며 이는 군자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 된다.
세 제자들의 답변과는 달리, (군주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상황이 되면 어찌 하겠느냐는 공자의 질문에 대하여 증석은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5∼6명과 동자 6∼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문장만으로는 그는 늦봄의 풍류를 즐기겠다는 단순한 포부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증석의 답은 다른 세 제자들의 답과 두 가지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하나는 증석이 세 명의 제자들의 정치적 포부와는 달리 풍류적 포부를 말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차이이다. 다른 하나는 세 제자들은 그들이 원하는(그러나 실현하고 있지 못한) 미래를 말하였지만 증석은 그가 누리고 있는 현재를 말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포부를 말한 듯하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고 현재 자신의 삶을 말한 것이다.
증석이 말한 풍류는 물적(옷과 관), 인적(어른 5~6명, 동자 6~7명) 토대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다소 호사스러운 풍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의 핵심은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온다'에 있지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5∼6명과 동자 6∼7명과 함께 한다'에 있지 아니하다. ㉮는 언제라도 누릴 수 있는 것이지 군주에게 등용되어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는 약간의 물적, 인적 토대가 요구되는 것이긴 하지만 이 역시 반드시 군주에게 등용되어야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증석은 스승의 질문에 대하여 '저는 지금의 삶 그대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다만 (군주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상황이 되면 어찌 하겠느냐는 공자의 질문에 어긋나지 않는 답을 하기 위하여 ㉯를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증석의 답변에 대하여 '깊이 탄식(喟然歎)하면서' 그의 답에 '찬동을 표명[與]' 하였다. 공자의 찬동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현실의 삶에 만족한다는 증석의 안명(安命)적 자세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소탈한 취향 때문인지, 시(時)를 알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을 알았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여하튼 증석은 군주들이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입세(入世)하여 정치적 포부를 펼치는 것에 대하여 연연해하지 않았고 현재 자신의 삶에 즐거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증석의 이러한 모습에서 공자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 지명(知命)의 덕과 그것을 넘어서는 안명(安命)의 덕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 제자들에게 지명의 덕을 가르치고자 증점의 대답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세 제자들은 우연히도 공야장의 맹무백(孟武伯)과 공자의 문답에 모두 그대로 등장한다.
여기서 공자는 세 제자들에 대하여 정치적 역량은 인정하지만 그들의 인(仁)함에 대해서는 인정을 유보한다. 이러한 유보는 사실상 부인에 가까운 것이다. 위인(爲仁)의 바탕이 되는 지명(知命)의 덕을 그들이 갖추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상 그들의 위인 포부는 지명이 뒷받침되지 않는 허약한 것이었다. 공자는 그 허약성을 지적하고자 증점의 편을 든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증점에게 찬동을 표하면서 왜 깊은 한숨을 쉰 것일까? 그의 탄식은 일차적으로 증석의 대답방식의 현명함에 있다. 공자는 증석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 것이었는데 그는 현명하게도 "저는 저를 알아주는 것이나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답하지 않고 군주들이 자신을 등용해 준다면 지금보다 조금 호사스러운 풍류를 즐기겠다고 답한 것이다.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나타내면서도 스승의 질문을 존중하는 형식을 잃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공자의 깊은 탄식에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사실 공자는 군주들에게 등용되어 안민(安民)의 이상을 달성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이었음이 논어 곳곳에 드러난다.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여기에 아름다운 옥(玉)이 있을 경우, 이것을 궤 속에 넣어 감추어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구하여 파시겠습니까?" 하자, 공자(孔子)께서 대답하셨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좋은 값을 기다리는 자이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옥'은 공자 자신을, '판다'는 것은 군주의 등용을 의미한다.
이 문장은 군주에게 등용되기를 바라는 공자의 마음을 은유를 통하여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등용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그는 반란자였던 공산불요(公山弗搖)와 필힐(佛肹)의 초청에도 응하려다 자로와 마찰을 빚는 모습이 논어에 나타나고 있다.
등용되어 천하를 광정(匡正)할 능력과 희망을 가졌지만 공자는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이에 대한 한탄이 논어 곳곳에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논어 전반을 통하여 남이 알아주지 않는 운명적 사태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원망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의 일생은 한편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포부를 향해 나아간 궤적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충분한 덕에도 불구하고 군주들이 그를 등용해주지 않는 운명적 사태에서 자기 자신을 추슬러 나간 길이기도 하다. 그의 평생은 위인(爲仁)과 지명(知命)의 이중주였던 것이다.
인용문 ⑤에 보이는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사태를 어찌 하시겠습니까?"라는 자로의 질문에 대하여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고, 아래로 배우면서 위로 통달하나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이실 것이다."라는 공자의 답은 천하주유(天下周遊)의 말미에서 천하주유의 실패를 정리하는 소회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역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라는 공자의 탄식 뒤에 진행된 문답이다.
그는 종국에는 하늘이라도 나를 알아줄 것이고 자위하고 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사태를 받아들이는 것이 만만치 아니함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사태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스승과 제자 모두 군주들이 알아주지 아니하여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 못하는 사태에 대하여 일종의 트라우마(trauma)를 갖고 있었고 공자는 이를 극복하는 것을 커다란 과제로 가졌던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심리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현실에 만족한다는 증석의 태도는 공자의 탄식을 이끌어내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군주에게 등용된다면 겨우 다소 호사스러운 풍류를 즐기겠다는 그의 답변은 공자에게 지명(知命)을 넘어 안명(安命)의 경지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공자는 증점의 풍류적 포부에 대하여 찬동을 표하면서 깊은 탄식을 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찬동에도 불구하고 증점의 답변에는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대변되는 위인(爲仁)의 포부가 결여되어 있다. 그리하여 세 제자들이 자리를 떠난 후 공자는 증석과의 대화에서 또한 세 제자들이 표명한 포부의 가치를 넌지시 인정한다. 이는 증석으로 하여금, 군자가 지명의 덕만이 아니라 위인의 덕도 갖추어야 함을 깨닫게 하는 가르침이다.
정리하자면, 무우장의 대화를 통하여 공자는 먼저 증석의 풍류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제자들에게 지명(知命)의 덕을 깨우친 것이고 나중에는 위인(爲仁)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증석을 깨우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의미 외에도 무우장은 공학(孔學)과 장학(莊學)의 연결성에 대한 사상사적 단서를 제공한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여 다른 포부를 갖지 않는 증석의 안명(安命)적 자세는 장자철학의 분위기를 강하게 갖는다. 증석에 대한 공자의 동의는 장학의 뿌리가 공학에 있을 가능성을 함의한다.
장학의 뿌리를 유가에서 찾는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안회, 전자방, 자하 등을 기점으로 보고 있는데 무우장의 내용에 근거하면 증석 역시 장학의 기점이 되는 인물일 수 있다. 맹자 진심하에서 증석이 장자 대종사에 나타나는 금장(琴張) 등과 더불어 광자(狂者)로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 및 계무자(季武子)의 죽음에 증석이 문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는 기사는 이러한 추론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증석은 죽음이라는 운명마저도 편안히 받아들이는 인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논어 선진(先進) 제26장, 속칭 무우(舞雩)장은 논어에서 가장 긴 장이면서도 그 맥락이 잘 이해되지 아니하여 수많은 학자들의 갑론을박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여기서 공자는 자로, 염유, 공서화의 정치적 포부가 아니라 증석의 풍류 포부에 찬동을 하였는데, 이는 유가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기조정신에 비추어 볼 때 많은 의문을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학자들이 이 장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논자는 기존의 해석이 문리에 너무 벗어나거나 근거가 박약하다고 보아 공자가 강조하였던 군자의 두 가지 조건인 지명(知命)과 위인(爲仁)의 관점에서 이를 새로이 풀어보았다. 그 결과 무우(舞雩)장은 위인과 지명의 포부 대립에서 공자가 먼저 지명에 손을 들어준 것으로 해석되었다.
지명(知命)은 위인(爲仁)을 위한 전제가 되기 때문에 지명이 실현되지 않으면 위인이 실현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공자는 먼저 증석의 풍류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제자들에게 지명(知命)의 덕을 깨우친 것이고 나중에는 위인(爲仁)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증석을 깨우친 것이다. 즉 무우(舞雩)장은 공자의 지명과 위인의 철학이 차례로 드러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 외에 무우장은 공학이 장학의 뿌리였을 가능성을 함의한다 하겠다.
▶️ 風(바람 풍)은 ❶회의문자로 风(풍)은 간자(簡字), 凨(풍), 凬(풍), 凮(풍)은 고자(古字)이다. 무릇(凡) 태풍이 지나간 다음에 병충(蟲)이 많이 번식한다는 뜻을 합(合)하여 바람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바람'을 뜻하는 風자는 본래 봉황새를 그린 것이었다. 갑골문에 나온 風자를 보면 큰 날개와 꼬리를 가진 봉황이 그려져 있었다. 봉황은 고대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새로 갑골문에 나온 風자는 바로 그 상상의 새를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風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바람이라는 뜻으로 혼용되기 시작했다. 바람의 생성원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고대인들은 봉황의 날갯짓으로 바람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에는 風자가 '봉황'과 '바람'으로 혼용되기도 했지만 이를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凡(무릇 범)자에 鳥(새 조)자가 결합한 鳳자가 '봉황새'를 뜻하게 되었고 봉황이 몰고 왔던 바람은 凡자에 虫(벌레 충)자가 더해진 風자로 분리되었다. 그래서 風(풍)은 (1)허황하여 믿음성이 없 말이나 행동을 이르는 말. 허풍 (2)바람을 막으려고 둘러 치는 천 (3)정신 작용, 근육 신축, 감각 등에 고장이 생긴 병. 전풍(顚風), 중풍(中風), 비풍(痺風) 따위 (4)원인을 알기 어려운 살갗의 질환(疾患). 두풍(頭風). 피풍(皮風). 아장풍(鵝掌風) 따위 등의 뜻으로 ①바람 ②가르침 ③풍속(風俗), 습속(習俗) ④경치(景致), 경관(景觀) ⑤모습 ⑥기질(氣質) ⑦병(病)의 이름, 감기(感氣), 중풍(中風: 뇌혈관의 장애로 인한 병) ⑧기세(氣勢: 기운차게 뻗치는 형세) ⑨절조(節操: 절개와 지조를 아울러 이르는 말) ⑩노래, 악곡(樂曲), 여러 나라 민요(民謠) ⑪뜻, 낌새 ⑫풍도(風度: 풍채와 태도를 아울러 이르는 말) ⑬소식(消息), 풍문(風聞) ⑭멋대로, 꺼리낌 없이 ⑮바람을 쐬다 ⑯바람이 불다 ⑰풍간(諷諫)하다(완곡한 표현으로 잘못을 고치도록 말하다) ⑱감화시키다, 교육하다 ⑲외우다, 암송하다 ⑳유전(流轉)하다(이리저리 떠돌다), 떠돌다 ㉑암수가 서로 꾀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옛적부터 행하여 온 모든 생활에 관한 습관을 풍속(風俗), 바람의 세력을 풍력(風力), 음식의 고상한 맛을 풍미(風味), 기후와 토지의 상태를 풍토(風土), 바람이 부는 방향을 풍향(風向), 어떤 상황이나 형편이나 분위기 가운데에 있는 어느 곳의 모습을 풍경(風景), 세찬 바람과 험한 물결을 풍파(風波), 속사를 떠나 풍치가 있고 멋들어지게 노는 일을 풍류(風流), 바람결에 들리는 소문을 풍문(風聞), 뜨거운 바람을 열풍(熱風), 몹시 세게 부는 바람을 폭풍(暴風), 자기가 가는 방향에서 마주 불어오는 바람을 역풍(逆風), 첫여름에 부는 훈훈한 바람을 훈풍(薰風), 갑자기 거세게 일어나는 바람을 돌풍(突風), 미친 듯이 사납게 부는 바람을 광풍(狂風), 바람 앞의 등불이란 뜻으로 사물이 오래 견디지 못하고 매우 위급한 자리에 놓여 있음을 가리키는 말 또는 사물이 덧없음을 가리키는 말을 풍전등화(風前燈火),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풍수지탄(風樹之歎), 바람에 불리면서 먹고 이슬을 맞으면서 잔다는 뜻으로 떠돌아다니며 고생스러운 생활을 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풍찬노숙(風餐露宿),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가 이미 돌아가셔서 효양할 길이 없어 한탄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풍목지비(風木之悲), 바람이 불어 우박이 이리 저리 흩어진다는 뜻으로 엉망으로 깨어져 흩어져 버림이나 사방으로 흩어짐을 이르는 말을 풍비박산(風飛雹散), 뚫어진 창과 헐린 담벼락이라는 뜻으로 무너져 가는 가난한 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풍창파벽(風窓破壁), 태평한 시대에는 나뭇가지가 흔들려 울릴 정도의 큰 바람도 불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상이 태평함을 이르는 말을 풍불명지(風不鳴枝),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라는 뜻으로 일정한 주의나 주장이 없이 그저 대세에 따라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풍타낭타(風打浪打), 구름과 용이 만나고 바람과 범이 만나듯이 밝은 임금과 어진 재상이 서로 만남을 이르는 말을 풍운지회(風雲之會),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친다는 뜻으로 매우 빠름을 이르는 말을 풍치전체(風馳電掣), 맑은 바람과 밝은 달 등의 자연을 즐기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풍월주인(風月主人),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진다는 뜻으로 들떠서 어수선한 것이 가라앉음을 이르는 말을 풍정낭식(風定浪息), 바람이 불어 구름이 흩어진다는 뜻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짐을 이르는 말을 풍류운산(風流雲散), 바람과 비가 순조롭다는 뜻으로 기후가 순조로워 곡식이 잘 됨 또는 천하가 태평함을 이르는 말을 풍조우순(風調雨順), 새가 높이 날 때는 바람은 그 밑에 있다는 뜻으로 높은 곳에 오름을 이르는 말을 풍사재하(風斯在下), 바람과 구름 고기와 물이라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의 아주 가까운 사이를 비유하는 말을 풍운어수(風雲魚水), 바람 앞의 티끌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풍전지진(風前之塵), 바람에 머리를 빗고 비에 목욕한다는 뜻으로 외지에서 겪는 고생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풍즐우목(風櫛雨沐) 등에 쓰인다.
▶️ 乎(어조사 호)는 ❶지사문자로 삐침별(丿; 목소리의 올라가는 것을 뜻함)部와 兮(혜)를 합쳐 이루어졌다. 목소리를 길게 뽑아 뜻을 다하는 말의 뜻을 나타낸다. ❷지사문자로 乎자는 '~느냐?', '~지?'와 같은 어조사로 쓰이는 글자이다. 乎자의 갑골문을 보면 T자 위로 세 개의 획이 뻗어 나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소리가 울려 퍼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乎자는 T자를 도끼를 그린 것으로 보고 도끼 찍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乎자의 기원으로만 보면 兮(어조사 혜)자와 다르지 않다. 다만 지금은 유래와는 관계없이 단순히 문장을 연결하거나 의문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乎(호)는 ①어조사(語助辭) ②~느냐? ③~랴! ④~지?, ~겠지? ⑤~도다 ⑥~에, ~보다(=於, 于) ⑦그런가 ⑧아!, 감탄사(=呼)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감탄을 표시하는 말을 호재(乎哉), 일단 결심한 것을 과단성 있게 처리하는 모양을 단호(斷乎), 슬프다의 뜻으로 슬퍼서 탄식할 때에 쓰는 말을 차호(嗟乎), 우뚝하게 높이 솟은 모양을 흘호(屹乎), 아주 든든하고 굳셈을 확호(確乎), 섞임이 없이 제대로 온전함을 순호(純乎), 온건한 말로 조용하고 부드럽게 이야기 함을 온호(溫乎), 너르고 큰 모양을 도호(滔乎), 동뜨게 뛰어나서 남이 따르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탁호난급(卓乎難及), 단단하고 굳세어서 뽑히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확호불발(確乎不拔) 등에 쓰인다.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외로운 처지를 이르는 말을 무원고립(無援孤立), 끝이 없고 다함이 없음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무궁무진(無窮無盡),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능(無所不能), 못 할 일이 없음 또는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위(無所不爲), 무엇이든지 환히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무불통지(無不通知), 인공을 가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기를 일컫는 말을 무위자연(無爲自然), 일체의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념무상(無念無想), 아버지도 임금도 없다는 뜻으로 어버이도 임금도 모르는 난신적자 곧 행동이 막된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부무군(無父無君), 하는 일 없이 헛되이 먹기만 함 또는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위도식(無爲徒食), 매우 무지하고 우악스러움을 일컫는 말을 무지막지(無知莫知), 자기에게 관계가 있건 없건 무슨 일이고 함부로 나서서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불간섭(無不干涉), 성인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을 무위이치(無爲而治), 몹시 고집을 부려 어찌할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가내하(無可奈何),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용지물(無用之物) 등에 쓰인다.
▶️ 雩(기우제 우)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비 우(雨; 비, 비가 오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亏(우)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雩(우)는 ①기우제(祈雨祭) ②기우제(祈雨祭)를 지내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하늘에 비를 비는 제사를 우사(雩祀), 기우제를 지냄을 수우(修雩), 기우제 또는 기우제를 지내는 곳을 무우(舞雩), 기우제를 지낼 때에 쓰던 단을 이르는 말을 우사단(雩祀壇), 기우제를 예스럽게 이르는 말을 무우제(舞雩祭), 무우 땅에서 바람 쐬다라는 말을 풍호무우(風乎無雩)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