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 하느님 구원 이야기
예수님은 제자 중 열둘을 따로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다섯이나 열이 아니라 왜 열둘이었을까? 한국 사람에게는 별 의미 없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열둘은 특별한 숫자였다. 그들의 조상 야곱은 천사와 밤새 싸워서 이스라엘, 즉 하느님과 싸우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창세 32,29) 그는 두 아내에게서 열두 아들을 얻었고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 열두 지파의 시작이다.
예수님 시대 그 열두 지파는 거의 다 없어지고 두 지파만 남았는데 그들은 열두 지파가 회복되는 걸 하느님의 구원과 연관 지어 생각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이셨으니 열두 사도를 선별하시면서 다시 시작하는 이스라엘 백성, 하느님이 직접 지어 부르신 그 이름으로 불리는 하느님 백성이 만들어지는 걸 내다보셨을 거다. 그들이 바로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열둘은 열두 개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완전하고 충만한 하느님 백성 전체를 이른다.
하나 됨은 하느님 뜻이다. 다툼 미움 차별 혐오 분열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게 아니라서 언젠가 우리 안에서 없어진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독버섯처럼 곳곳에서 자라고 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없어지게 된다. 우리 안에 퍼져있는 죄스러움은 하느님 말씀을 안 듣는 유전자 같은 거다. 죄를 싫어하면서도 죄를 짓는 걸 보면 원죄 교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그런 우리들 안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셨고, 지금도 여전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세상 마지막 날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서로 사랑하게 만드신다. 하나가 되게 하신다. 서로 하나가 됨은 사랑의 본성이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계신다. 서로 좋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해서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된다.
하느님은 상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시고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우리나라는 지독히 어두운 일제 강점기를 벗어났고, 독재자들의 억압과 속임수도 이겨냈다. 남북 화해는 시간문제다. 화해와 일치는 하느님 뜻이기 때문이다. 전쟁 관련 뉴스를 본 어떤 사람이 하느님은 왜 저런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거냐고 물었다. 이스라엘도 한국도 그 민족이 뛰어나거나 특별히 더 불쌍해서 그러신 게 아닐 거다. 그들은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는 걸 보게 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분열과 대립은 하느님 뜻이 아니니까 언젠가는 없어지게 되어 있다. 세상은 그걸 우리 민족 안에서 보게 될 거다.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이 써 내려가시는 인류 구원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여전히 엮어지는 중이다.
예수님, 두렵고 떨리고 때로는 원하지 않지만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선하신 뜻을 따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의 뜻이 제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제게 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