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의선사(道義禪師)
---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조, 우리나라 선종의 종조, 부도의 시작
도의 선사가 북쪽으로 간 이유
도의 성은 왕(王)씨이고 호는 원적(元寂)이며 북한군(北漢郡)출신이다. 784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서 서당지장(西堂智藏:739~814)에게 불법을 이어받고 도의라 개명하여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였다. 무려 35년간의 유학이었다.
도의가 당나라에서 익힌 불법은 선종(禪宗) 중에서도 남종(南宗) 선의 골수였다. 달마대사에서 시작된 선종이 6조에 와서 남종과 북종으로 나누어져 남종선은 조계혜능(曺溪慧能:638~713)부터 다시 시작됨은 내남이 모두 알고 있는 바 그대로다. 달마대사가 "편안한 마음으로 벽을 바라보면서(安心觀壁)" 깨달음을 구했던 것이 혜능에 와서는 "문자에 입각하지; 않으며,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不入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고 호언장담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6대조 혜능의 뒤를 이어 8대조인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에 이르면 더 나아가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自心卽佛)" 임을 외치게 되는데, 이 외침은 곧 마조선사가 있던 지명을 딴 홍주종(洪州宗)의 진면목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마조의 뒤를 이은 9대조가 서당지장이다. 도의선사는 바로 그 서당의 홍주종을 익히고 고국으로 돌아 온 것이었다.
서라벌에 돌아온 도의선사는 스스로 익힌 홍주종의 외침을 부르짖고 돌아다녔다. 경전이나 해석하고 염불을 외우는 일보다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변혁사상이며, 인간의 평등과 인간성의 고양을 부르짖는 진보적 세계관이었다. 당시 통일신라는 왕권불교로서 왕즉불(王卽佛)의 엄격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은 곧 부처요, 귀족은 보살이고, 대중은 중생이니 부처님 세계의 논리와 위계질서는 곧 사회구성체의 지배와 피지배 논리와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런 판에 도의가 서라벌에 와서 그 논리와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서라벌의 승려와 귀족들은 도의선사의 외침을 '마귀의 소리'라고 배격했다. 따지고 보면 도의선사의 주장은 해괴한 마귀의 소리라기보다는 위험한 사상, 불온한 사상이었다. 만약 통일신라에 지금과 같은 국가보안법이나 불교보안법이 있었다면 도의는 영락없는 구속.처형감이었다. 구런 위험이 도의에게 닥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의는 서라벌을 떠나 멀고 먼 곳으로 가서 은신할 뜻을 세웠으며, 그가 당도한 곳이 바로 설악산의 진전사였던 것이다.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함을 알고 산림에 은둔" 한 것이라고 한다.
'동해의 동쪽'에서 '북산의 북쪽'으로
도의선사가 북쪽으로 간 이유는 달마대사가 양나라 무제의 군대를 피해 갈대잎을 꺾어 타고 양자강 건너 소림사로 간 이유와 같다는 비유도 있다. 그 사정을 최치원은 지증대사비문을 쓰면서 다음과 현란한 비유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도의스님이 서방(中國)으로 건너가 서당지장으로부터 '심인(心印: 즉 自心卽佛)' 을 익혀 처음으로 선법(禪法)을 말하면서
원숭이 처럼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혀 북쪽으로 치닫는 단범(교종의 단점)을 감싸주었지만, 메추라기가 제 날개를 자랑하며
붕(鵬)새가 남쪽바다로 떠나는 높은 뜻을 비난하듯 하였다. 그들은 인습적인 염불에 흠뻑 젖어 있어서 도의 스님의 말을 마귀
의 말(魔語)이라고 비웃었다.
이에 스님은 진리의 빛을 행랑채 아래에 거두고 자취를 항아리 속에 감추며, 동해의 동쪽(중국에서 본 동해의 동쪽, 즉 서라
벌) 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북산의 북쪽(설악산)에 은둔하였다. ..... 그러나 겨울 산봉우리에 빼어나고 정림(定林)에서도 꽃다
우매 그 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사람이 산에 가득하고, 매로 변화하듯 뛰어난 인물이 되어 깊은 골짜기로부터 나오게 되었
다.
도의선사의 사상은 그의 제자 염거화상(廉居和尙: ? ~844)에 전해지고,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계시던 염거화상의 가르침은 보조 체징(普照體澄:804~880)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보조선사는 장흥 가지산(迦智山)에 보림사(寶林寺)를 세우고 여기에서 그 법을 전하니 이곳이 곧 하대신라 구산 선문(九山禪門)중 가장 앞에 나오는 가지산파의 개창 내력이 된다. 그래서 보조선사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 때문에 달마가 중국의 1조가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도의선사가 1조, 염거화상이 2조, 우리 스님(보조선사)이 3조이다.
도의가 '아직 때가 되지 못해 감추었다는 빛'은 그의 손자 제자 되는 시기에 와서 비로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도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은 서라벌의 귀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방에서 나름대로 경제적. 군사적 부를 키워온 호족들이었다. 호족의 입장에서 보면 도의가 주장한 '자심즉불(自心卽佛)'과 일문일가(一門一家)'는 하나의 구원의 사상인 셈이었다. 왕즉불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 호족들의 위치는 지배층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체제와 질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침의 능력이 중요하고 스스로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사상은 호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비약하게 된다. 이에 호족들은 다투어 지방에 선종사찰을 세우게 된다. 선종의 구산선문이 한결같이 오지 중의 오지로 들어가 보령의 성주사, 명주의 굴산사, 영월의 흥녕사처럼 오늘날에고 폐사지로 남고 남원 실상사, 곡성 태안사, 문경 봉암사, 장흥 보림사처럼 답사객을 열광케하는 심산의 명찰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진행은 이내 호족 중의 한 사람인 왕건의 승리, 불교의 이데올르기는 선종의 우위라는 확고한 전통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모든 진행의 출발이 곧 여기 진전사에서 비롯되었으니 어찌 우리가 도의와 진전사를 모르고 역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진전사 폐사지에 서면 변혁의 계절을 살던 한 선각자의 외로움과 의로움을 함께 새겨보개 된다.
◀ 진전사터의 도의선사 부도
위대한 조형물 부도의 탄생
진전사터에서 산등성을 조금 올라가면 보물 제439호로 지정된 진전사지 부도(浮屠)가 있다. 진전사를 발굴한 정영호교수는 이 부도가 곧 도의선사의 부도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역사학계에서도 공인된 학설이다.
부도란 고승의 시신을 화장한 납골(舍利)을 모신 건조물로써 선종의 유포와 깊은 연관이 있다. 부도의 유행은 곧 하대신라 사회의 변혁적 기류의 한 상징물인 것이다.
부도의 탄생, 그것 또한 위대한 탄생이었다. 도의선사 이전에도 부도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것은 확실치 않다. 도의선사 바로 전에 활약했던 저 유명한 고승들, 원효. 의상. 진표. 자장 등 어느 스님도 그 부도가 남아 있지 않다. 화엄세계의 거대한 논리와 질서 속에서 고승의 죽음이란 그저 중생과 같은 하나의 죽음일 뿐이었다. 그러나 대선사의 죽음은 이제 다르게 생각되어 졌다. "본연의 마음이 곧 부처" 이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곧 부처와 동격이 된다. 일문일가라고 했으니 그 독립성의 의미는 더욱 강조된다. 일문(一門)을 이끌어 온 대선사의 죽음은 석가모니의 죽음 못지 않은 것이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 바로 탑인바, 이제 성불(成佛)했다고 믿어지는 대선사의 사리도 그만한 예우로 봉안해야만 한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절의 권위와 전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구산선문의 제일문인 가지산파의 제1조 도의선사의 부도가 진전사 뒤쪽 산등성이에 모셔진 것이다. 이제 전에 없던 새로운 창조물을 진전사에서 처음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창조물의 형태는 모방하거나 창조하거나 둘을 혼용하거나 하는데, 이 모방과 창조가 도의선사의 부도에 나타난다.
당나라에 전해지는 부도로는 초당사(草堂寺)에 유명한 불경번역승인 구마라즙의 사리탑이 존재한다. 이 사리탑의 구조가 8각당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바로 도의선사의 부도 또한 8각당을 기본으로 하고 그 받침대는 석탑의 기단부를 그대로 원용하였다. 그리하여 2성기단에 8각당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부도나 탑이나 모두 사리를 장치한 것이니 그 논리가 맞는다.
도의선사 부도 이후, 가지산문의 2조인 염거화상에 이르면 이 부도가 마치 장고의 몸체를 연상케하는 형태(鼓腹型)의 연꽃받침대에 8각당을 얹은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염거화상의 부도는 이후 하대신라에서 고려초에 이르는 모든 부도의 전형이 된다.
왜 2성기단에서 고복형의 연꽃 좌대로 바뀌었을까?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성불한자의 대좌는 연꽃이고, 축소해 말해도 극락환생은 연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모습이니 적절하다. 조형의 원리로 말한다면 도의선사 부도처럼 2성기단에 8각당을 얹는 것은 아래 쪽이 너무 넓어서 비례가 맞지 않는다. 어떻든 염거화상의 부도의 형식이 모범이 되었고 입적한 해가 844년이니 그 때에 완성된 것이다.
염거화상의 부도는 지금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모셔져 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이것을 원주 흥법사터에서 실어내어 반출하려다 실패하여 1914년 무렵 파고다공원에 설치했다가 해방후 경복궁으로 옮긴 것이다. 그래서 미술사가들은 염거화상 부도의 원위치를 찾으려고 원주 흥법사지를 샅샅이 조사했으나 거기서 반출된 근거를 찾지 못해, 시끄러운 경복궁에 그대로 처연히 서 있는 것이다.
염거화상의 제자인 보조선사의 부도에 이르면 우리는 9세기 하대신라의 석조물에서 부도가 지닌 위치를 확연히 확인하게 된다. 9세기 경주의 중앙 귀족문화를 본뜬 석탑은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졌다손 치더라도 새로운 양식인 부도의 건조에는 온갖 정성을 다하게 되는 현상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다.
화순 쌍봉사의 철감국사 부도, 남원 실상사의 증각국사 부도와 수철화상 부도, 곡성 태안사의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 부도, 그리고 누구의 사리탑인지 알 수 없는 연곡사의 북부도와 동부도.
9세기는 부도의 세기였으며, 호족의 세기였고, 선종의 세기였다.
[출처] ◈ 도의선사(道義禪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