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걸려온다. 최다. “멀리 댔냐?”라고 묻는다. 아니라고 했더니 그가 부탁한다. “그럼 사다리 좀 가져다줄래? 생각보다 많이 몰렸네.”라고 한다. 알았다고 말한 뒤 트렁크를 열고 차에서 내린다. 취재용 사다리를 들고 가파르다 싶은 길을 오른다. 뒤에서 따라오던 누군가 묻는다. “뭔 일 있어요?” 돌아보니 진한 화장으로 나이를 깎아내린 중년의 여성이 방송 취재차량과 사다리를 번갈아 바라본다. 마약 연예인이라고 말하자 그녀가 먼저 피의자의 이름을 말한다. “아, 드라마에서는 정말 멋쟁이로 나왔는데.”라고 말한 뒤 앞서간다. 그녀의 발에는 제법 높은 굽의 구두가 걸려 있다. 높지만 볼과 앞코가 매우 좁은 구두다. 발가락 하나가 사라지면 딱 맞을 것 같은, 그럼 불편하지 않을 것 같은 구두다.
취재를 마친 최가 조수석에서 노트북을 펼치며 말한다. “점심은 동태찌개로 하자. 알지, 그 집?” 성남 구시가지에 오면 찾는 집이 있다. 최에게는 그런 식당이 수십 개는 된다. 그곳에 가면 그 집을 찾는다. 가끔 낯선 곳에서 낯선 식당에 들어가면 최는 항상 메뉴 맨 꼭대기에 있는 것을 주문한다. 그것이 그나마 확률이 제일 높다고 최는 말했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지라 이르긴 하지만 바글거리는 사람을 싫어하는 최에게는 딱 알맞은 시간일 수도 있다. “출발하겠습니다.” 10분이 걸린다. 마감이 끝나지 않은 최는 노트북을 들고 차에서 내린다. 이른 시간이지만 홀은 이미 가득 차 있다. 방으로 안내받는다. 먼저 오르는 최의 발을 내려다본다. 발가락 양말이다. 각각 다섯 개씩 열 개의 발가락이 양말을 채우고 있다. 무좀이 없긴 하지만 설령 창궐한다 하더라도 이제 발가락 양말은 신을 수 없다. 구멍이 네 개뿐인 발가락 양말이 있다면 모를까.
식당을 나서며 오후 취재 일정을 묻는다. 최는 물고 있던 이쑤시개를 버리며 말한다. “특별한 건 없다.” 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지만 옅은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다. “빛이 좋네. 광교산 쪽으로 스케치나 가자. 아, 그리고 저녁엔 배구 있으니까 알아서 퇴근해.” 최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차에 오른다. 저녁에 시작해 밤에 끝나는 야구나 축구, 농구, 배구 등 스포츠 취재는 경기장까지 최가 직접 운전을 한다. 가끔 보고 싶은 경기가 있어도 함께 가자는 말을 꺼낸 적은 없다. 취재차를 움직이는 규칙은 그가 정한다. 불편하지 않다면 따르면 된다. 불편하지 않으면 문제될 것 없는 사라진 발가락처럼.
잎은 떨어졌지만 감은 그대로 남아 있는 감나무를 찾는다. 초겨울 풍경으로 최가 그린 것은 까치밥을 먹는 새 사진이다. 광교산 시골길을 달리다 폐가 너머로 그런 감나무를 발견한다. 차를 세우자 최는 망원렌즈와 모노포드를 꺼내 장착한다. 이어 사다리도 꺼낸다. 사다리는 이번엔 의자가 된다. 모노포드의 높이를 조절한 다음 사다리에 앉는다. 차에서 내리지 않고도 최와 나무가 보인다. 최가 어느 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살핀다. 방향으로 보건대 이미 절반 정도 먹힌 감인 듯싶다. 하지만 까치는 좀처럼 날아오지 않는다. 최는 움직이지 않는다. 눈은 파인더에 오른손 검지는 셔터에 올린 채 기다린다. 구름은 가득하지만 바람은 없다. 바람이 없으니 소리도 없다. 모든 것들이 움직임을 멈춘다. 깜빡 잠이 든다. 짧은 꿈에 감 대신 밤이 등장한다. 입을 벌린 밤송이를 양발로 누르며 밤톨을 빼려한다. 오른발이 눌러 벗겨야할 밤송이에서 자꾸 벗어난다. 헛발질이다. 발가락 때문인가, 라고 생각한다. 트렁크 여는 소리에 눈을 뜬다. 최가 렌즈를 정리한다. 차에서 내려 사다리를 들고 와 싣는다.
다시 조수석에서 노트북을 펼친 최가 투덜거린다. “이건 뭐야?” 신호에 걸리자 슬쩍 노트북을 들여다본다. 굵직한 가지에 편하게 앉아 붉은 감 열매에 부리를 박은 새가 확대돼 보인다. 까치는 아니다. “알아? 이 새가 뭔지?” 최가 묻는다. 그가 모르는 것을 알 리가 없다. 고개를 젓는다. “까치 아니면 차라리 직박구리라면 좋잖아. 이거 또 한참 찾아봐야 하나.” 최는 사진 설명에 넣어야 할 새의 이름을 인터넷을 통해 찾기 시작한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앞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다섯 후 경적을 울릴 작정이었으나 뒤의 트럭은 셋이 한계다. 승용차와 다른 묵직한 굉음이 차들을 움직이게 한다. 이어 최가 소리를 지른다. “찾았다. 오호 딱따구리였어. 청딱따구리.” 최의 손가락이 달린다. 100미터 경주에 나선 스프린터처럼 빠르고 경쾌하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린다.
최를 사무실에 내려준 뒤 기름을 넣고 오겠다고 말한다. 최는 노트북만을 들고 차에서 내린다. 사무실에서 도로 한 블록 떨어진 주유소로 향한다. 주유소 진입로에 들어서자 “어서옵쇼!”라는 외침과 함께 유니폼을 입은 젊은 여자가 손짓으로 차를 유도한다. 창문을 내리고 주유구를 연 다음 “가득”이라고 말한다. 열린 창틀에 왼팔을 건 채 리터와 원이 경쟁적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계기판을 본다. 빠르다. 발가락이 없는 것들도 이처럼 빨리 달릴 수 있다. 남은 기름으로 달릴 수 있는 거리가 130km였다. 5만 6천원이라고 예측한다. 빗나간다. 5만 9천원을 넘어 덜컥 소리가 난다. 여자는 “6만원, 넣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달리는 것들은 또 있다. 기름 값도 열심히 달리고 있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어 휴대전화가 짧은 신음소리를 낸다. 그녀의 문자 메시지다. ‘수사과장이 한 잔 하자네.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늦더라도 들릴게. 발가락은 봐야지.’ 그녀의 문자는 정갈하다. 오로지 문자 정보만 있을 뿐이다. 기호나 아이콘 따위는 없다. 대신 마침표는 잊지 않는다. 가끔 읽어보는 그녀의 기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녀는 경찰청을 출입하는 2진 취재기자다. 바로 답신을 보낸다. ‘무리는 하지 마.’ 본부장에게 인사를 하고 퇴근한다. 최는 이미 30분 전에 배구 경기가 열리는 안산으로 떠났다. 걷기로 한다. 사무실에서 원룸까지는 차로 10분, 걸으면 40분이 걸리는 거리다. 사라진 발가락이 40분 동안의 걸음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인하기로 한다. 하지만 채 몇 십 미터 걷기도 전에 발가락 따위는 의식 속에서 사라진다. 발가락은 그 정도 존재인 것이다.
원룸 근처에 새로 문을 연 감자탕 집으로 들어선다. 입으로 “감자탕”을 말하며 오른손 검지를 세워 ‘하나’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개업한지 며칠 되지 않은 식당치고는 활기가 없다. 넓은 홀에는 3명이 자리한, 이미 소주 몇 병이 놓인 딱 한 테이블에만 손님이 있다. 그들보다 많은 숫자의 종업원은 텔레비전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말없이 재방송되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는 이맘때가 이 정도라면 새벽에는 어떠할까? 이곳은 24시간 운영한다는 감자탕 집이다. 불편하지 않은 발가락이 아닌, 뭔가 더 결정적인 것이 사라진 것이 틀림없는 감자탕 집이다.
좋은 자료라 퍼 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