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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국가라면, 나라의 크기나 사정은 달라도 그 사회구조만큼은 비슷한 구석이 있을 것이다. 성리학을 믿든, 불교를 믿든, 아니면 기독교를 믿든 간에 일단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그 나라에서 최고의 지존(至尊)은 왕이 된다. 지존이란 말이 원래 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말 그대로 '지위가 끝까지 오른 사람'이 바로 왕이다. 하긴 왕위에 누가 있을까? 그렇다면 이런 왕조국가에서 가장 하층민은 누구일까? 제일 밑바닥 막장인생은 노예들이었다. 두말하면 숨찰 이야기겠지만, 일단 신분부터가 바닥이다(백정이나 불가촉천민같은 특수계층이 있긴 하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이들도 비슷한 범주에 넣을 수 있으니 논외로 치겠다). 어디 신분뿐인가? 기본적인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한 건 물론, 그 자손들까지 대대로 노예의 신분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체제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막장인생'이 바로 노예들이었다.
이 대목에서 슬슬 오늘의 주제에 대해 말해야겠는데, 왕조국가… 정확히 표현하자면, 왕조국가였던 조선에서 지존 중의 지존으로 군림했던 왕에게 신분 상 가장 낮은 계층… 소위 말하는 막장 오브 막장이었던 노비가 왕에게 딜(deal)을 걸었다면, 믿어지시겠는가? 감히 노비 주제에 왕에게 거래를 제의했다니…. 왕의 용안(龍顔)이라도 한번 올려다 볼 수 있으면, 가문의 영광으로 삼아야 할 노비가 왕에게 거래를 제안하다니….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야기 시작해 보기로 하자.
"아 쉬파, 네들 자꾸 이럴래? 뭔 대책을 내놔야 할 거 아냐!"
"저기 전하, 그래서 대책회의를 계속 열고 있는 게…"
"이것들이 누가 공무원 아니랄까봐… 대책회의만 하면 뭐하냐고? 실질적인 해결책이 나와야지! 네들 지금 대책회의나 하면서 시간 때우는 거 모르는 줄 알아? 책상에만 앉아 있지 말고, 현장으로 나가라니까! 가서 사태를 파악해야 할 거 아냐?"
"저기… 현장 상황은 보고서를 통해서 충분히 파악을 하고 있어서, 굳이 저희들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이것들이 지금 장난 하나… 지금 가뭄이 들어서 나라가 절단나게 생겼는데, 뭐? 보고서를 통해서 충분히 파악해? 지금 네들 뇌구조부터 한번 심도 있게 파악해 줄까?"
성종 16년(1485년) 5월부터 시작된 가뭄의 조짐은 조정을 바짝 긴장케 만들었다.
"에이, 설마 가뭄이 들라고."
"그…그렇지?"
복지부동이라고 싸잡아 욕하고 싶겠지만, 사람이란 게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분명 말하지만, 가뭄을 비롯한 천재지변은 사람이 어찌 할 도리가 없는 말 그대로 '운'에 맡겨야 할 일이었다. 문제는… 1485년의 조선은 지지리 운이 없었다는 것이다.
"휴… 농사 시작했는데, 비가 안 내리면 어쩌라는 거야? 네들 무슨 대책 없냐?"
"그게…"
"이번 시즌 그냥 포기하자는 거야? 우승은 아니어도 그래도 가을에는 농사 지어야 하지 않겠냐? 공무원이라면, 뭔 대책을 내놔야 할 거 아냐!"
"그…그렇다면, 재난대비 계획에 따라 절차를 밟는 것이…"
"재난대비 계획? 너 또 나보고 빌라는 거야?"
"아니… 그게 절차에 따라서…"
당시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타깃이 되는 것이 바로 왕이었다.
재이설(災異說)에 근거해서 왕이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벌을 준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란 걸 신하도 알고, 왕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괜히 군약신강의 나라인가? 무슨 수를 써서든 왕에게 견제구를 던지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신하들은 언제나 무슨 일이 터지면, 왕을 쳐다봤다.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누굴 구청 민원실로 아나, 아니면 전자 대리점 AS센터로 보는 거야? 툭하면 나야!"
"저기… 이게 또 절차라는 게 있어서…"
"알았어! 이 색희들아!"
성종은 자신의 부덕함을 탓했지만, 하늘은 비를 내리지 않았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기우제를 시간차로 지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이제 대책은 점점 '안드로메다'로 향하게 되는데…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감동되면 천변(天變)이 위에서 반응으로 나타나, 좋은 징조와 나쁜 징조가 각각 종류대로 이르는 것이다.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비가 제때에 오지 않고 불볕이 내려쪼여 곡식을 상하게 한다. 내가 염려하건대, 안팎의 관리가 내 뜻을 따르지 않고 혹 억울하게 매를 때려서 인명(人命)을 상하게 하거나 혹 옥사(獄事)를 결단하는 것을 게을리하여 이를 체류(滯留)시켜서 화기(和氣)를 상하고 재앙을 부른 것이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하였을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관리는 각각 자신의 직책에 충실하여 옥송(獄訟)이 유체됨이 없고 원통하고 억울함이 다 풀리게 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대응하고 나의 수성(修省)하는 뜻에 부합되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성종 16년(1485년) 5월 29일의 기록 중 발췌.
혹시 억울한 애들의 한이 가뭄의 원인이 된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송사 처리에 만전을 기하라는 것이었다. 과학적으로 정말 이해불가의 일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당시에는 이렇게 해왔던 것을… 과연 조선의 하늘은 비를 뿌려줄 것인가? 이야기는 다음회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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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우제도 지내고.....소용 없는 짓인데..
여러 미심을 믿었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