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증인이나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들은 빌립보서 2장 6절의 본문중에 '할파그몬'이라는 단어로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하는 구절에 시비를 걸어옵니다.
할파그모스라는 말은 강도, 강탈, 약탈 노획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할파그모스가 빌립보서2:6절에서 어떻게 쓰였냐는 것이지요.
여호와의 증인이나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들은 예수께서 원래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뺏을(강탈)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욕심을 부리지 않으셨다는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같은 문장을 KJV 성경에는 "thought it not robbery to be equal with God."
라고 번역했는데, 하나님과 동등한 것이 탈취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2:6은 다수사본이나 소수사본의 본문이 같습니다. 즉 원어 차이가 아니고 번역의 차이라는 말이지요.
여호와의 증인이 번역한 신세계역의 “gave no consideration to a seizure, namely, that he should be equal to God.”라는 번역
을 보면 빌2:6에 헬라어 원문에는 ‘할파그모스’라는 단어가 한번 나오지만 신세계역에는 그 단어를 seizure(압수)라고
말해 놓고 namely(다시 말해) that he should be equal to God(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것)이라는 부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한글 신세계역을 보면
"그분은 비록 하느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셨지만, 장악하려고 곧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물론 그 부연 설명은 원문과 틀린 것이지요.
다분히 삼위일체적 본문을 의식한 원문을 한번 비틀어 반삼위일체적으로 해석한 번역입니다.
바울신학을 연구한 김세윤 박사는 빌립보서 2장 6절의 ‘할파그모스’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취할 에 해당하는 할파그모스 (αρπαγμοs) 의 기본적인 뜻은 탈취하다 는 의미입니다.
그 할파그모스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세 가지 이해가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전통적인 이해입니다. 나머지 두 가지 이해도 상당히 음미해볼 만한 이해입니다.
첫째, 이미 하나님과 동등됨을 얻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취해서 얻은 것(노획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곧 성자 예수님은 본질과 성품과 지위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치를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된 분임을 천명하는 역사적 기독론적 이해입니다.
이 주장은 위에서 설명한대로 전통적 신론인 삼위일체론에 가장 부합하는 이론입니다.
둘째, 앞으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얻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손만 내밀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이해할 경우 예수님을 종말의 아담으로 보고 첫번째 아담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창1:26-28) 그 높은 위상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됨을 취하려고 곧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언약을 어기고 금단의 열매를 취하였습니다 (창3:5).
그 결과 그는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위치에서 떨어져 사단과 죄와 죽음과 피조물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모두 첫번째 아담의 후손들로서 허영과 교만으로 하나님 위치에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타락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말의 아담으로 오셔서 첫 아담의 숙명을 극복했습니다.
그는 첫 아담과는 달리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비워 연약한 인간과 같이 되어
마침내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셋째, 하나님과 동등됨을 얻는 것 (행위 자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 번째 이해는 최근에 대두되는 이론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하나님과 동등됨 을 취할 (할파그모스)의 목적어로 이해하는 반면
세 번째에서는 의미상 주어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6절을 그런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하나님과 동등됨은 (무엇을)취하기를 의미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는 말이 됩니다.
또한 첫 번째와 두 번째에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라는 구 앞에 나오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는 구를 그는 하나님의 형체이셨으나 라는 양보구로 번역하지만,
세 번째에서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는 구를 그는 하나님의 형체이셨기에 라는 이유구로 번역합니다.
이 해석은 신성과 인성의 대조를 이룹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한계성을 가진 빈곤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성의 본질은 남의 것을 빼앗아야 만족합니다.
그 길은 갈등과 싸움과 고난과 죽음을 가져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온전하신 분이기에 남의 것을 빼앗아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신성의 본질은 스스로 충만함을 내어 주는데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였기에(신성의 존재),
하나님과 동등됨은 (남의 것)취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 은혜가 서로 빼앗아 만족을 얻으려 하는 인간들에게 진리로 나타나고 구원을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요1:1-18).”
제 생각으론 킹제임스 역이 김세윤 박사가 말하는 세 번째 유형의 번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탈취라 생각지 아니하셨으나"(한글KJV)
또 저는 7절에 이어지는 ‘알라’라는 단어 때문이라도 6절의 의미가 ‘탈취라고 생각하지 않
으셨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알라’라는 단어는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상반될 때 쓰는 접속사로
우리 말 “그러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랬을지라도.” 뜻으로
영어성경에서는 빌2:6의 ‘알라’를 모두 ‘But’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두가지 문장 중 어느 것이 자연스러운지 비교해보면 제 말을 더 쉽게 이해하실겁니다.
➀ “하나님과 동등해지는 것을 탈취하려고(강탈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알라) 종의 형상을 입으셨다.”
뭔가 좀 어색한 문장이 되지요?
➁ “하나님과 동등해지는 것을 탈취라(강탈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알라) 종의 형상을 입으셨다.”
어떻습니까?
➀ 번 보다 ➁ 번이 훨신 자연스럽지요?
우리는 신세계역이나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빌2:6절을 해석하는 키워드가 ‘모르페’라는 단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카페의 예수의 증인님은 ‘모르페’라는 단어가 그냥 겉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이해하시는 것 같은데 많이 오해하는 것입니다.
‘모르페’(μορφη)라는 단어에는 8절의 ‘스케마’(모양)라는 뜻보다 더 깊은 의미인 '본질에 속해 있는 것'이라는 뜻이 포함돼 있습니다.
빌 2:6-8에서는 '모르페'(형상), '호모이오마'(형체), '스케마'(모양)의 세 단어를 함께 관련시키고 있는데
지포드라는 학자는 그의 저서, 「성육신」(The Incarnation, Hodder and Stoughton)에서 말하기를,
“'모르페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실제적이고도 불가분리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라이트풋이라는 학자는,
“'호모이오마'는 같은 종류의 사물들 간의 관계를 말하며, '모르페‘는 스케마와 대조되는 것으로
전자가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우연적이고 외부적인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 모르페라는 단어는 막16:12 말씀에 나오고 ‘메타모르포오’(메타+모르페)로 마태17:12에 변형이라는 의미로 나옵니다.
두 단어 나타난 예수의 이 모습은 부활 이후 변화된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막16:12-헤테로스 모르페. 마17:12-메타모르포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영화로운 몸으로 변형되셨기 때문에(메타모르포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금방 알아보지 못한 것이지요.
모르페는 본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로마서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라는 말은 ‘메타모르퓨스다이’라는 말로,
이 말의 어근은 ‘모르페’(μορφη)입니다.
이 뜻은 사람의 ‘본질적으로 불변하는 형태나 요소’를 의미합니다.
즉 ‘본질적인 형체’ (essential form)를 말합니다.
로마서 12:2 말씀은 겉모습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변화, 인간의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종의 형체(모르페)를 가지셨기 때문에 사람의 모양(스케마)가 되신 것입니다.
인형이 사람의 스케마를 가졌다고 사람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모르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르페를 단지 ‘모양’으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의 사람이 되시고 부활하여 변화하신 모습을 보고,
겉모습만 변화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기독교의 근간을 부정하는 해석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예수의 증인님은 조롱하듯 하나님의 본체가 몇 개나 되느냐고 물으시지만 자신이 얼마나 성육신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자백하는 것이지요.
신학 용어로 양성론이라고 하는데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모르페와 사람의 모르페를 함께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참 신과 참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하여 바르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