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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가는 이러한 질문을 세심한 도안으로 아크릴 화면에 옮기고 도시화 혹은 거부할 수 없는 공동체적 상황에 유입되는 일련의 도시프로세스(디테일하게 묘사된 풍경) 및 사적 의미들을 공적인 상응(거친 화면에 부유하는 감각의 질) 속에서 피워낸다. 독립적인 존재이면서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가 구축한 수많은 관계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인들의 내외적 초상을 화면에 담으며,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현실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되풀이되는 일상과 곧 소멸되면서도 이내 재생되는 사회적 알고리즘과 일회적으로 소모되고 재구성되는 현대의 단면들을 '도시'라는 테제 아래 서술한다. 이렇듯 그의 그림엔 명료한 지각을 요청하면서도 혼재되어 해석을 자유롭게 하는 다면성이 얹혀 있다. 하지만 이 설명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단초의 전부는 아니다.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할 부분은 작가적 의도가 무엇인가이며, 도시라는 자체에 대한 해부와 그 내부와 외부에서 꿈틀거리고 조응한 채 일상을 소비하는 도시인들의 정체성은 과연 어떻게 발현 및 유지되고 무엇을 의미인가라는 자문이랄 수 있다. 기실 작가는 단순해 보이는 작업을 통해 동일한 성격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이 도시라는 하나의 거푸집 아래 획일화될 수 있는지, 누군가 그 틀을 벗어나 경계를 알 수 없는 공간과 시간 속에 개별적으로 존재할 경우 어떤 상황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찰한다. 허나 이는 외적인 것으로, 현대인의 삶을 녹여내고 자아와 만나 빚어지는 또 다른 자아와의 갈등과 고민 속에서 한없이 부유하는 정체성을 '도시'라는 명사를 통해 확인하려는 것이 의도와 의중의 본질에 가깝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도시 속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인간들의 욕구, 욕망에 대한 철학적 기술의 독해이며, 작가는 이를 양면의 도시와 공유한 채 직접적이진 않은, 그러면서도 분명한 의도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영화 언어로 빌려 말하면 일종의 단면과 단면의 결합, 즉 일상에 관한 귀속이라는 평범한 신(scene)과 그것을 이탈하려는 신(scene)의 조합으로 도시 및 도시적 삶과 존재에 관한 시퀀스(sequence)라고 할 수 있다. 보다 철학적으론 구분과 탈구분, 경계와 탈경계, 의식과 무의식, 개인과 집단, 커뮤니티와 언커뮤니티, 소외와 교류, 소속과 비소속, 독립적 혹은 합의적 공동체라는 다양한 개념을 그리드화 시켜 또 하나의 미적 가치를 생산하는 일종의 '매칭 트랜슬레이션(Matching Translation)'이라 해도 그르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박준형의 근작에 남다른 의미부여가 가능하도록 이끄는 구동체 역할임에 틀림없다.
3. 그러나 박준형의 작업에서 위와 같은 요소들이 단번에 드러나는 건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사회에 선행하는 도시적 공동체 의식, 특정한 목적성을 지닌 집단에 상존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전체 속에서의 개인이기도 한 도시인들에 대해 제3자의 관점에서 고백하고 있지만 가시성과는 달리 확연한 인지성을 띠진 않는다. 그것은 A와 B의 문제에 속한다. 즉, A는 지극히 현실적이며 더불어 실존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B는 존재본질(essentia)에 대한 현실존재(existentia)의 탐구, 개개의 개별적인 개체이자 개인과 주체를 작품 내부에서 배양하고 있기에 이 두 가지의 병립은 구상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수월한 읽음을 어렵도록 한다는 것이다. 대신 그의 작품들은 궁극적으로 정형화될 수 없고 끊임없이 유동적인 동시대의 도시성과 경계가 모호하고 흔들리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심할 시간조차 허락지 않는, 연약하며 불안한 시대의 개인적 정서를 자신만의 상징과 기호를 통해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있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특히 규칙적으로 배열된 상태의 형상들에 반해 비교적 동적인 흐름을 드러내는 다른 한편의 공간성은 사회적 묵시적 합의나 그것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작가의 욕구를 들여다보도록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들은 도시자체에 대한 표면적 안내나 묘사라기 보단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려는 작가적 의지의 반영이라는 측면에 무게감이 있다. 특히 한쪽에 덧대어진 거칠고 두터운 안료의 향연은 제한 없는 공간성에 대한 갈구, 예술성의 확장을 꾀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을 경계가 흐릿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 살아가는 (작가 자신을 포함한)인간들의 현실을 보다 밀도 있게 투사하려는 조형적 노력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노력은 그의 작품들을 통해 어느 정도 효과를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박준형의 근작들은 그 '효과'를 입증하면서도 이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음을 확인토록 한다. 왜냐하면 두 장면의 교차는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친절하다는 인상이 강하고, 그것이 비록 조형언어의 명료함을 구체화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계산된 이미지 이면에 부유하는 조형원리가 상냥한 안내를 불필요하게 여길 만큼 충분히 작가적 의도와 전개, 언어의 완성을 인도하고 있는 탓이다. 이를 쉽게 말하면 어느 한 쪽에서 메시지의 전달을 익히 포괄하고 있기에 딱히 더 부언할 이유가 희소함을 뜻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는 주제가 무엇이든 사유의 여백과 감각의 질을 일깨우는 요소가 이미 놓여 있기에 가급적이면 이젠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방향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를 계기로 이후의 담론을 기대할 수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 홍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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