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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신앙
고전 15:29-34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전 15:29-34 / 만일 부활이 없다면 왜 사람들이 죽은 이를 위해서 침례를 받겠습니까? 죽은 사람이 장차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합니까? 30)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생명의 위협을 감내하고 있는 것입니까? 31) 사실 나는 날마다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나의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그 일 또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32) 만일 내가 이 한 목숨을 부지하려고 야수 같은 에베소 사람들과 싸운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ㄷ) `가서 진탕 먹고 마시고 유쾌하게 놀아보세. 어차피 내일은 죽을 목숨이 아닌가? 만사가 다 끝장이란 말일세!' 하는 식이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ㄷ. 사22:13) 33)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만일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여러분도 똑같은 짓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34) 정신을 똑바로 차리십시오. 죄짓지 말고 바른 일만 하십시오. 부끄러운 줄 알라고 하는 말입니다만 여러분 가운데는 아직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부활이 중요합니다. 부활을 실제하지 않다면 어떤 세례도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서 “매일 죽는다”고 고백하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부활에 근거한 절제된 믿음 생활을 권면합니다.
죽은 자를 위한 세례(29) 바울은 먼저 죽은 자를 위한 세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세례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의도로 행해졌는지 정확히 알 순 없습니다. 학자들은 다양하게 추측합니다. 첫째는 믿지 않고 죽은 자가 사후에도 천국가기를 빌며 죽은 자에게 행한 세례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죽은 자를 씻는 행위 즉, 염하는 행위를 세례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유대 전통에서 씻는 행위는 정결례로 기독교에서는 세례의식과 동일하게 본 견해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남아있는 가족들이 죽은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소망하며, 망자의 믿지않는 가족들에게 주었던 세례라고 설명합니다. 그 세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바울은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즉 부활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세례도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부활 신앙을 강하게 주장한 바울(30-32) 바울은 부활을 확신하며 강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신약성서에서 한번 밖에 쓰이지않는 “단언하노니”라고 번역된 ‘ne’는 강력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여기서 사용하는 이유는 그만큼 절실하게 부활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매일 경험하는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 에베소에서의 치열했던 선교 경험을 상기시킵니다. 부활신앙이 있었기에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속지말고 깨어 의를 행하라(33-34) 부활과 내세의 삶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음 생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32). 그래서 절제하지 않고, 현세의 즐거움만으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제 바울은 부활이 실제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나 사상에 속지 말고 삶 속에서 항상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적용: 바울의 고백처럼 부활의 증인으로서 당신은 삶 속에서 매일 죽고 있습니까?
"죽음은 인간의 침묵이다. 부활은 우리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다시 새롭게 살리는 것, 우리를 다시 불러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로암 윌리암스. 우리의 뇌는 무언가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그 일에 더 집착하고 더 큰 흥미를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우리 마음에 격렬하게 스며듭니다. 내 자아가 죽어야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 뒤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모든 것이 멈추고 아무 것도 없을 때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일어납니다.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통해 부활의 증인이 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나는 날마다 죽겠습니다
고전 15:29-34 / 조정헌목사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의 참으로 귀한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은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바울은 원래 즉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름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큰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때리고 죽이고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체험이 바울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이제 후로는 주를 위해서 살겠다.’ ‘주를 위해 날마다 죽겠다.’ 이렇게 결단하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큰 일군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혹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영화의 원래 제목은 Short Time입니다. ‘짧은 시간’ 즉 ‘시한부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퇴직이 8일 밖에 남지 않은 그래서 몸을 사리는 아주 겁쟁이 경찰관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혈액자각 중독증’이라는 불치병 환자의 검사결과와 서로 뒤바뀌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졸지에 2주 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인생을 선고받게 됩니다.
그는 고심하다가 이왕 죽는 거 화끈하게 순직해서 가족들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겨야 되겠다. 라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날마다 위험한 현장에 자원해서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죽기로 결심하고 덤벼드니까 오히려 날아오는 총알도 그를 피해서 지나가는 겁니다.
죽고자 결심하니까 죽기는커녕 초인적인 사람이 되어서 급기야는 유공훈장까지 받게 됩니다. 이처럼 보험금을 타려는 소망을 가지고 날마다 죽고자 할 때에도 이런 능력자가 되는데, 하물며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결단하는 우리 앞에 얼마나 놀라운 삶이 펼쳐지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날마다 바울처럼 죽어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먼저, 바울은 십자가 때문에 날마다 죽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나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바울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인인 바울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엄청난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에도 보시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만 자랑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또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에 보여 지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갈 때에 내가 아무리 힘들고 고달프고 괴로워도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는다.’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고백의 참 의미는 ‘이제부터 예수님을 닮아가겠다. 예수님처럼 살겠다.’라는 강한 의지와 결단력의 표현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성화’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말을 합니다. 이처럼 ‘칭의’ 즉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화는 내가 매일 매일 예수님의 모습을,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우리가 예수님을 한꺼번에 닮을 수 없기 때문에 날마다 점진적으로 닮아가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내 것을 포기하면서 미워했던 내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시기했던 내 마음을 섬기는 마음으로 바꾸어가는 것이 바로 성화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에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예수님을 닮기로 고백했던 바울의 모습 속에 진정으로 ‘나는 날마다 죽는다.’ 하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더 열심히 달려가야 될 인생의 후반전이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날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물론 그것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울에게도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복종시켰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망가진 곳은 없는지, 고장난 부분은 없는지... 깨지고 부서진 부분이 있으면 하나씩 하나씩 고쳐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고백했던 바울처럼 우리도 오직 예수님과 십자가만 자랑하면서...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담대하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부활 때문에 날마다 죽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말한 의미가 뭐겠습니까? 날마다 살아가는 것이 죽을 만큼 힘들다고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날마다 죽는다고 하는 것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죽기까지 헌신하겠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된 진정한 자랑거리였습니다.
여러분! 내가 어떻게 죽어야 그 죽음이 자랑스러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나이가 들어서 죽고 병이 들어서 죽는 것은 그냥 무의미한 죽음이고 참으로 허망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죽으면 나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날마다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어야 30배 60배 100배의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영적인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11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고백 속에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겠습니다. 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전에는 율법의 증인이어서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보면 미워하고 핍박하고 심지어는 죽이고... 그들을 더 큰 고통 속으로 몰아가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난 후에는 바울이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증인으로 살아가기로 결단을 하니까 날마다 생명의 위험을 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결심했기에 꿋꿋하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부활장입니다. 바울에게 어떤 위험이 있다 할지라도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증인으로 살아가는 일에 결코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을 헬라어로 의역해보면 ‘나는 매일 죽습니다.’ ‘나는 매일 죽음 앞에서 살아갑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매일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죽는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만 살겠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나를 통해서 오직 예수님만 드러날 수 있도록 ‘나는 날마다 죽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어떻게 세례를 받았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율법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야 합니다. 절망에 대해서는 죽고 소망에 대해서는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깨어져야 합니다. 내 자아가 완전히 부서져야 합니다. 그리고 대신 내 안에 내 자아가 아닌(내 생각이 아닌,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꽉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죽어야 할 때 왜 죽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죽지 못하고 오히려 내 못된 성질만 드러내고, 내 욕망을 왜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를 합니까? 왜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분노하고 원망과 불평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If' 만약에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회의적이고 의심하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믿는 것 같은데 여전히 불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부활에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나 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9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세례를 못 받고 죽으면 대신 세례를 받게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그런 세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0절에 보시면 바울 자신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가 바로 부활을 믿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라고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바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31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에베소의 검투사들처럼 어차피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 차라리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면 된다. 라고 말을 합니다.
32절 말씀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33절과 34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나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방해를 하고, 좀 더 편안한 삶을 살도록 유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은 절대로 '좋은 친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넘어뜨리고 나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악한 동무들"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절대로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항상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지고 바울처럼 날마다 죽어질 때에 부활의 증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겠습니다."라고 결단할 때에 우리가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가 죄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것은 내 목숨을 바쳐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진리를 발견한 사람 바울의 고백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의 이 고백이 오늘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서 부활에 기쁨에 함께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날마다 죽을 때에 날마다 다시 살아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날마다 생각해야 하는 것이 뭘까요? ‘내가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이것을 항상 고민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죽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날마다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우리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날마다 죽는다. 라는 말은 날마다 다시 산다. 라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 멋진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날마다 다시 사는 삶! 얼마나 흥분이 되는 삶입니까? 또 얼마나 소망이 있는 삶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이런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이 없으면 부활의 기쁨도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죽는다. 라는 말이 우리에게 단순히 생각으로만 끝나버리면 안 됩니다. 구호로만 그쳐버려서도 안 됩니다.
복음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것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된 소식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그 복음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을 통해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전해지고 삶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과 삶이 서로 일치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보시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의 삶을 사랑하고... 복음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부활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하면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희생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다 비울 수 있을까?’를 항상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어제보다는 오늘을, 오늘보다는 내일을 더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함께 외워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정말로 뜨겁게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뭐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뭐겠습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데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죄인인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 안에는 아직도 깨져야 되고 부서져야 될 부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은 우리가 당연히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왜 걸어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가 없고... 순교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바로 소방관입니다. 왜냐하면 소방관은 물불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면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런데 그런 소방관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도 시각장애인이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분이 국회 연설에 나와서 “저는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이 정말로 무서운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까 막 달려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바울처럼 죽기를 각오한 사람입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이판사판’ ‘깡생깡사’ ‘죽으면 죽으리라’ 이렇게 달려드는 사람이 정말로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마귀에게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겠습니까? 예수님은 죽기를 각오하고 세상에 오신 분 아니겠습니까? 죽기를 각오한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심어줍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죽음을 뛰어넘으신 분이기 때문에, 사탄이 예수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의 공포를 가져다주는 존재가 바로 사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죽음을 뛰어넘을 때 음부의 권세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무서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앞에서도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죽기를 각오하면 오히려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 기쁨은 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시 사는 기쁨을 맛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으려고 합니다. 다시 채워지는 기쁨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비우려고 합니다.
여러분! 언제 우리에게 위기가 찾아올까요?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을 때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 시간 저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게 해주십니다. 바울의 삶은 끊임없이 내어주고 또 내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번만 내어준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내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진실한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죽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날마다 다시 사는 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날마다 죽어질 때에 부활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다시 사는 기쁨을 맛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겠습니다.”
날마다 이 고백을 외치면서 결코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이 있기에 날마다 죽는 백성
고린도전서 15:29~34 / 이수영목사
이미 부활의 확실성을 역설하기 시작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그것을 계속하며 또한 부활신앙을 가진 이들의 생활윤리를 언급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확실성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한 가지 관행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의 삶입니다.
먼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관행입니다. 본문 29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묻기를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없이 죽은 조상이나 가족이나 친지들이 부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서, 또는 믿기는 했어도 세례를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살아있는 신자들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세례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도 부활하고 구원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일 텐데 그것은 이미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만일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도무지 있을 수 없다면 부활을 기대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다 헛일을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물론 이미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세례를 받아 죽은 사람을 부활하게 한다는 사고나 관행을 사도 바울이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대신 세례 받는 이들까지 거론하며 부활의 확실성을 역설한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두 번째 근거는 자기 자신의 삶입니다. 즉 부활이 없다면 자기가 그토록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는 논리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니다. 먼저 본문 30절입니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가 세상이라고 알고 있던 모든 곳을 다 다니려 했습니다. 그 당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온갖 위험을 다 무릅쓰고 쉬지 않고 여행을 했습니다. 그 여행에서 그는 수없이 많은 위험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파선하여 죽을 뻔하고 독사에 물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겪은 고난과 위험을 그 자신의 입을 통해 들어봅니다. 고후11:23하-27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안 겪어본 위험과 고난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독사에 물리는 일도 있었습니다(행28:3). 여행에서의 위험만이 위험이 아닙니다. 이교도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도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일로 바울은 법정에 서기도 하고 살해의 위협도 받았으며 결국은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가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한 것은 또 하나의 물음이 아니라 대답인 것입니다. 29절에서 제기한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이라는 전제에 걸리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일 부활이 없다면 왜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겠느냐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과 확신 때문에 그런 온갖 위험과 고난도 다 무릅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람이 몸으로 죽는 것은 한 번 죽는 것이지 날마다 죽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여기서 날마다 죽는다고 한 것은 고후4:10-11에서 쓰기를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한 것과 같은 뜻일 것입니다. 즉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는 뜻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치심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절제의 삶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렇게 날마다 죽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고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듯이 우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부활과 영생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은 계속됩니다. 본문 32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를 쓴 에베소에서는 맹수들과 싸우는 경기를 즐기는 것이 일상생활의 일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격투기장에서든 어디에서든 맹수와 싸웠다는 기록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또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형벌로서든 구경거리로서든 맹수와 싸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그가 실제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워야 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은 오히려 사도 바울이 맹수와 싸우는 것 못지않게 힘든 대결을 그를 적대하는 자들과 벌여야 했음을 뜻할 것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왜 맹수와 싸우는 것 같이 힘든 싸움을 그의 대적들과 싸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을 암시하는 것이 그 다음에 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한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내가 무슨 유익이 있다고 맹수와 싸우는듯한 그 힘든 싸움을 싸우겠는가?” 되묻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과 확신 때문에 그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삶이 아니라 맹수와 싸우는듯한 그 힘든 싸움을 싸운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살아있을 때 먹고 마시며 순간순간을 즐기는 것이 중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이 무덤을 넘어 계속되며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히 계속될 우리의 삶을 위한 준비일 뿐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의 자세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리 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부활신앙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으로 연결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과 확신 때문에 “내일은 없다. 오늘 먹고 마시고 보자.” 하는 식의 삶의 태도와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내려놓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적 원칙을 제시한 사도 바울은 그 원칙을 무너뜨리고 그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세상의 사고와 논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본문 33-34절입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말은 기원전 4세기 말 경에 활동한 아테네의 희곡작가 메난데르(Menander)의 <타이스(Thais)>라는 작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는 기원전 321년에 첫 작품을 내놓은 이래로 적어도 백 여 편의 극본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대중에게 유명했을 것이고 그의 말들은 그리스말을 사용하는 청중들에게 친숙했을 것입니다. 대중적으로 친숙한 그의 말을 활용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면이 한층 더 강한 설득력을 갖게 하려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메난데르의 말을 인용하며 “악한 동무들”로 가리킨 것은 바로 부활이 없다 하는 자들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삶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오직 오늘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중에 죽은 후에 즐길 삶이 없다면 매일매일 그때그때의 최대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의례 유혹하기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그런 삶의 자세는 십중팔구 불의를 행하고 죄를 짓게 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지 말고 정신 차려서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34절 끝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한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부활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는 자들은 현세적 쾌락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고 그런 자들의 유혹과 속임수에 넘어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하는 자들이 있음을 경고함으로써 고린도 교회가 각성하고 부활신앙 위에 바로 서기를 바라서 편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은 부활과 영생에 이르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교리는 단지 신학적 진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윤리적 삶을 좌우하는 중대한 진리입니다. 새롭게 맞은 이 사순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부활과 영생의 구원과 그 기쁨을 깊이 묵상하며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분명히 깨닫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날마다 다시 사는 삶
고전 15:29-34 / 이대성목사(광성교회)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날마다 다시 사는 삶”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날마다 다시 사는 삶” 여러분? 온 국민들이 평창올림픽의 열기에 듬뿍 빠져있었던 지난 21일에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소천하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유족들이 전하는 빌리 그레이엄목사님의 말과 행동은 대중적인 카리스마보다는 예수님처럼 겸손하려 노력했던 한 신앙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자 윌 그레이엄 목사가 전한 고인의 유언입니다. “언젠가 당신은 빌리 그레이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이전보다 더욱 살아날 것입니다. 방금 ‘이사’를 완료했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살아생전에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합니다. “천국에서 가장 가슴 뛸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여행 끝나는 날에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께서 가장 애송했던 성경말씀은 바로 이 말씀. 갈라디아서 6장 14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렇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그는 평생 동안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며 살았던 복음 전파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았던 진실된 하나님의 종이요, 참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1973년 제가 중학생때 혼자 마포대교를 건너서 여의도 광장에서 들었던 그 분의 설교를 결코 잊지 못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확실한 진리를 긴 막대기를 지렛대 삼아 나이아가라 폭포를 외줄로 완벽하게 건너곤 하던 한 장인의 예화로 들려 주셨습니다.
그 장인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날도 나이아가라 폭포를 외줄로 완벽하게 건넌 후에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손수레에 흙을 담고서 외줄을 타고 건널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Yes!”라고 화답합니다. 이에 그는 한술 더 떠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손수레에 흙이 아니라 사람을 태워도 가능하다고 믿으십니까?”
그러자 이번에도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Yes!”라고 화답합니다. 그 순간,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이 믿는다면 자원하실 분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갑자기 정적이 흐르면서 아무도 자원자가 없었다는 얘기였습니다.
빌리그레이엄 목사님은 이 예화를 드시면서 ‘입술로 아무리 믿습니다! 믿습니다! 외쳐도 진짜로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주님을 믿느냐? 네가 진정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절기에는 40일을 지키는 절기가 두 번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앞으로 40일, 그것을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기다린다, 준비한다고 해서 대강절, 대림절이라고 부르고 그 절기를 지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역사를 통해서 이 대림절 기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터인데 그 다시 오실 예수님을 어떤 마음으로 우리가 맞이할 것이냐?’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재림을 기대하면서 신앙을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순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날을 기점으로 해서 앞으로 40일 인데 주일은 제외하고 40일을 말합니다. 그래서 지난 2월 14일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난주간 금요일까지의 40일 동안을 사순절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그리고 부활을 기대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을까?’ 신앙적인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특별새벽기도회 등을 통해 집중적으로 신앙을 훈련시킵니다.
영어로는 사순절을 ‘Lent’라고 하는데요? 이는 “봄”이라는 뜻입니다. 추운 겨울 속에서 따뜻한 봄으로 가는 계절처럼 얼었던 땅이 녹고 새싹이 돋아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과거의 신앙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으로 거듭나는 기간이 사순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저는 왜 신앙이 안 성장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오늘 이 시간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훈련이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꾸준히 운동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오히려 건강해 보입니다. 젊은이의 건강을 되찾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도 영적 훈련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영적 훈련을 심도있게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7절과 8절 말씀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아멘.
그러므로 이번 사순절만큼은 날마다 경견에 이르기를 더욱 힘씀으로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한층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에 나오는 바울은 원래 예수를 믿기 전에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라는 말은 ‘큰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박해하며 살인을 자행했던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후에 그 다메섹이 그의 인생에 있어 전환점이 된 겁니다.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이제 후로는 주를 위해 살겠노라.’ ‘주를 위해 날마다 죽겠노라.’ 결단하는 주님 보시기에 가장 큰 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사도 바울의 이 결단이 있었기에 우리 모두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경배와 찬송을 돌리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런 확고한 신앙고백을 하게한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기에 날마다 죽을 수 있었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예수 십자가로 날마다 죽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는 사도바울로 하여금 철저하게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 주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죄인된 사도바울을 십자가 희생으로 당신의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지만 예수님의 희생으로 오늘 나를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의 진실된 고백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 이는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빌리그레이엄이 평생 모토로 삼았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랑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는 또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보여 지는 것에 기뻐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내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 때에는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삶 속에서 ‘날마다 죽노라’ 담대히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의미는 나는 이제부터 계속해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겠노라는 강한 결단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성화의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칭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사람은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화라는 것은 내가 매일매일 주님의 그 모습을, 그 속성을, 그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주님을 한꺼번에 닮아갈 수 없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닮아가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내 것을 포기하고 내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내 시기의 마음을 섬김의 마음으로 바꾸어가는 것이 성화의 삶이라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 말씀 제가 읽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겠노라 말하는 사도바울의 그 모습 속에 진정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귀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뛰어가는 인생의 후반전은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귀한 날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도바울 또한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려움이 닥치는 매순간 마다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쳐서 복종시켰노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흔들거릴 때마다, 힘들 때마다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강권적으로 쳐서 복종시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매일 매일 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부서진 부분, 고장 난 부분, 갈라진 부분을 하나 하나 고쳐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도 바울의 이 고백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담대히 세상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었기에 날마다 죽을 수 있었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예수 부활로 날마다 죽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날마다 죽는다.”는 의미가 과연 무엇입니까?
날마다 사는 것이 죽도록 힘들다는 탄식의 말입니까? 아닙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날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죽기까지 헌신한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사도바울의 진정한 자랑거리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죽는 것이 자랑일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 죽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요, 허망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 날마다 죽으면 날마다 나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 진정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비밀을 알았기에 예수님처럼 십자가 고난을 겪고서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과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이 말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겠다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전에는 율법의 증인이었기 때문에 율법에 어긋나는 자를 죽이고 박해하고 남을 고통 속에 빠지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난 후에 사도바울은 이제 예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의 증인으로 살겠노라 결단하는 순간, 전세가 180도 역전되어 날마다 생명의 위협에 처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다짐하며 매 순간 꿋꿋이 전진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입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생명의 위협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것처럼 그 또한 다시 살줄로 믿는 확실한 부활신앙이 있었기에 예수의 증인으로 사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을 헬라어로 의역해보면 ‘나는 매일 죽으면서 삽니다.’ 또는 ‘나는 매일 죽음 앞에서 살아갑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매일 세례를 받습니다.’
여러분? 과연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는 죽는다는 말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의 피를 수혈 받고 공급 받아서 예수님의 혈액형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매 순간 순간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주님의 뜻에 위배된다면 나는 죽겠습니다. 나를 통해서 주님의 뜻이 표현되어지고 주님의 삶이 내 삶을 통해서 행해질 수 있도록 나는 날마다 죽겠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 세례 받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매일매일 율법에 대해서는 죽어야 하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야 합니다. 절망에 대해서는 죽어야 하고, 소망에 대해서는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순간마다 깨어져야 합니다. 날마다 내 자아가 부서져야 합니다. 내 에고가 파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신 내 속에 주님의 뜻으로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내 삶이 주님 인도하심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우리는 정작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고 있을까요? 죽지 못하고 오히려 나의 욕망을 드러내고, 내 기질을 발휘하려 하고, 내 성격을 남에게 강요하려 할까요? 왜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분노함은 물론이요, 늘 원망과 불평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을까요?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고린도 성도처럼 'If'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If의 신앙생활은 항상 회의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 같지만 여전히 믿지 않는 불신과 회의의 독소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 분명한 부활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저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여러분? 그 당시 예수님을 믿고서 세례를 못 받고 죽었을 때 대신 세례 받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이 없으면 이런 의식적인 세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 자신이 시마다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다시 사는 부활을 믿기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사도바울의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31절을 다함께 읽습니다. (시작)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만일 부활이 없다면 에베소의 검투사들과 같이 내일 죽을 터이니 차라리 먹고 마시는 삶을 살겠다고 말합니다. 32절 말씀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바울은 이렇게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33절과 34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시작)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아멘.
지금 여러분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좀 더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도록 유혹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이들은 결단코 '좋은 친구들'이 아닙니다. 나를 타락시키고 나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악한 동무들"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다시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우리 또한 부활의 산 소망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날마다 부활신앙으로 깨어 있어 의를 행해야만 합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영향을 받는 자가 아니요, 부활신앙 가지고 날마다 죽을 때에 날마다 사는 예수 부활의 산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죽노라" 결단할 때에 부활의 능력을 체험케 될 줄로 믿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절망을 이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매일 매일 다시 사는 소망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날마다 죽는 삶에는 결코 한계가 없습니다. 날마다 체험하는 예수 십자가와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도 오늘의 연속이 아닌, 날마다 새로운 부활의 날들이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죽노라." 이는 진정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능력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발견한 사도바울의 진실된 고백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도바울의 뜨거운 영적 헌신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날마다 죽노라.”는 사도바울의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진실된 신앙고백이 되어 예수 부활로 말미암아 날마다 다시 사는 기쁨과 감격을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날마다 죽을 때에 우리는 날마다 다시 사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날마다 죽을 때 날마다 다시 삽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매일 매일 해야 하는 생각이 무엇일까요? ‘내가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잘 깨어질 수 있을까?’ 항상 이 문제를 고민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교회에서는 자꾸 죽어야 한다고 말할까요? 때로는 이런 말이 좀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고, 미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죽는 것에만 생각이 너무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날마다 다시 살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결단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부활의 종교입니다.
죽는 종교가 아니라 다시 사는 종교입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날마다 다시 산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멋진 삶입니까? 이 얼마나 흥분된 삶입니까? 이 얼마나 소망 있는 삶입니까?
날마다 다시 사는 삶!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의 죽음이 없으면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이 없으면 부활의 기쁨과 감격도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 복음의 핵심입니다.
오늘날 복음을 말하는 자들은 많지만, 정말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된 소식입니다. 그런데 진정 복된 소식은 말씀과 삶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복된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전 생애를 통해서 만 천하에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소식은 말로 전해지는 세계가 아니라, 삶으로 전해지고, 삶으로 계승되는 세계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제가 읽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한 주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주님을 깊이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또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 가신 그 길,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왜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할까요?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단코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죽기를 각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께서 죽음을 각오하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음을 뛰어 넘으신 분이기에, 오히려 사탄 마귀를 조롱할 수 있었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긴 자는 음부의 권세가 범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긴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는 것은 사탄 마귀입니다. 우리가 이를 뛰어넘을 때 그 어떤 음부의 권세도 우리를 범할 수 없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자는 그래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날마다 죽기를 각오한 자는 그 속에서 오히려 날마다 다시 사는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기쁨 또한 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자랑 또한 더욱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다시 사는 삶을 체험한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꾸만 죽으려고 합니다. 다시 채워지는 것을 경험한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꾸만 비우고자 합니다. 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언제 위기가 찾아오는 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이런 죽을 각오가 다 사라졌을 때입니다. 그러면 겉으로 볼 때는 여유 있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참된 평화와는 전혀 다른 여유입니다.
자꾸만 대충 대충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죽는 게 두려워집니다. 왜냐하면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자꾸 자꾸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없으면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길을 가고자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십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끊임없이 내어주고, 또 내어주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고 또 죽었습니다. 그럴 때 놀랍게도 그는 날마다 다시 살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바로 우리 모두의 진실된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수 십자가로 날마다 죽고, 예수 부활로 날마다 다시 삽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 다 예수 십자가로 날마다 죽고, 예수 부활로 날마다 다시 살아, 영생의 기쁨과 감격을 온 세상에 힘차게 전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날마다 죽는 생활
고전15장 31절 / 최병남목사
기독교인 생활의 진수는 한마디로 '나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을 죽이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는 말은 매일매일 나 자신을 억제하고 선한 경주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날마다 죽는 생활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48에 보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온전하라'는 말은 자신이 깨어지고 죽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2:8 이하를 보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시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지만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그의 친구들은 욥의 죄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욥은 자기가 시련을 당할만한 큰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 때 비로소 큰 시련에서 자유함을 얻고 갑절의 복을 받게 됩니다. 결국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며 나를 죽이는 생활입니다. 죽는만큼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며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과 '복종'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복종은 어떻게 하는가?
1. 내가 죽어야 한다
(빌2:8)이하를 보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내 욕심, 내 생각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복종합니까?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복종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내가 죽는만큼 복종할 수 있으며 복종하는 만큼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생활, 예배생활, 봉사활동 하는 이 모든 신앙생활은 나를 깨뜨리는 작업이요 신앙훈련이라는 것입니다.
2.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공회에서 심판을 받을 때입니다.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바울의 변론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하였고, 바울은 그를 향하여 '회 칠한 무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바울은 즉시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했노라'고 잘못을 시인하고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였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복종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복종은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3. 말없이 복종하는 것이다
복종은 이론을 주장하며 압력에 의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 맞지 않아도 불이익이 와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말없이 복종하는 것입니다. 복종의 정상은 말없이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말에 붓고 자신의 머리칼로 발을 닦았습니다. 제자가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았느냐'라고 비난하였지만 침묵하며 헌신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하고 침묵하며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삭의 순종도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잡으려 할 때에도 이삭은 반항하지 않고 그저 침묵으로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복종이요 값진 헌신입니다. 바로 내 삶을 주인되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왜 말없이 순종해야 하는가?
모세는 출애굽한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마칠무렵 하나님의 명령으로 형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함께 호르산에 오릅니다. 그곳에서 아론은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아론은 아무런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론의 대제사장의 옷을 벗겨 엘르아살에게 입히게 됩니다. 모세도 말없이 순종합니다. 엘르아살도 침묵하며 순종합니다. 어떤 사람은 입술로 불평하고 짜증내고 신경질 부리며 반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게 유익하든지 해롭든지 나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가 전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차원 높은 신앙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아멘으로 침묵하며 순종하는 것을 묵종이라고 합니다. 즉, 순종에서 복종으로, 복종에서 묵종으로 하는 것입니다.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120년에 걸쳐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노아에게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조롱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노아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을 밟고 행진하여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쫓아온 이집트 군대는 바닷길에 들어섰다가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29절을 보면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죽었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으로, 믿음으로 건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어떻게 죽는가?)
1. 기도해야 합니다
순종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할 때에 자신을 깨뜨리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한만큼 자기자신을 깨뜨리고 자신이 죽어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죄성)인 부패성, 타락성, 정욕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나를 강력하게 지배할 때에 비로소 자신을 억제할 수가 있습니다.
복종의 결과는?
1.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철저히 죽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와 능력으로 복종의 삶을 살게 될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내 감정대로 내 이권대로 내 방법대로 모든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2. 죄를 이기고 깨끗하게 살게 된다
하나님 말씀에 복종할 때에 죄로부터 승리하게 되며 깨끗하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욕, 명예욕, 쾌락욕을 버리지 못하고, 성욕을 절제하지 못해서 많은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충만한 사람은 자신을 절제하며 깨끗하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강력하게 지배받을 때에 마음의 평안이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쉽게 짜증내고 스트레스 받는 것은 자기 욕심과 자기 주장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로 꽉 찬 사람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궁정에서 왕자로 살 때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받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작가 파니 크로스비의 찬송가 288장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가사의 고백처럼 주님과 함께라면 가난해도 좋아! 병들어도 좋아! 세상바람 휘몰아 불어와도 좋아! 멸시천대받아도 좋아! 오직 주님의 뜻대로만 이루어주옵소서 라는 고백 위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으로 날마다 죽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5. 복을 받는다
한국의 초대교회 큰 일을 했던 김익두 목사는 젊은 시절에 깡패로 유명했습니다. 그가 시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누워있으면 시장 가던 사람들이 그를 피하기 위해 30리나 되는 길을 돌아가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깡패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절처히 회개하여 신학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안수를 받기 전 그는 '김익두 사망'이라고 부고장을 고향 동네 사람들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목사가 되어 성경 찬송을 끼고 자기 고향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저 놈 죽었다더니 저렇게 멀쩡히 살아있네? 귀신은 뭐하나? 저런 놈이나 잡아가지 않고서?' 그 말을 듣자 김익두 목사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성경 찬송을 바닥에 놓고 '예수님 여기 잠깐만 계십시오. 내가 저 놈들 혼 좀 내놓고 오겠습니다.' 하고 논으로 뛰어들어서 농부를 논바닥에 메다꽂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한 노인이 소리쳤습니다. '저 놈 좀 보게. 옛날 김익두가 멀쩡히 살아있네 그려! 부고장도 다 거짓으로 돌린게야.' 이 말을 들은 김익두 목사는 그 자리에서 회개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옛날 김익두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죽으려고 들어갔는데 목사 안수를 받을 때는 십자가 아래서 죽은 줄 알고 부고장까지 보냈는데 내가 덜 죽어서 이 모양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 일 후에 그는 한평생 자기와의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죽이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해졌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신유의 은사를 주셔서 많은 병자와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금년 한 해동안 '날마다 죽노라'는 본문 말씀처럼 날마다 나를 죽이는 훈련을 합시다. 내가 죽으면 모든 문제의 해결이요 기적을 만들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장 31절 / 이필재목사
예수께서 사역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루살렘을 가실 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기록이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것을 기념해서 종려주일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뜻은 고난을 당하기 위해 가신다고 자신이 직접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종려주일 이후 내일부터 일주일은 고난주간으로 연결되어 지내게 됩니다. 주님이 행하라 명령하신 이 성찬을 받는 것으로 고난주간 한 주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성찬을 제자들에게 나눠주실 때는 자신의 사명의 마지막 시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아울러 주님의 모든 설교의 초점은 종말론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는 것이라는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를 하셨고, 바울 신학에서도 똑같이 성도의 생활 철학을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인간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 불멸의 진리를 조명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께서 자신이 사는 모습을 단면적으로 나타내는 유명한 한마디를 남겼는데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에서 오늘 사도 바울이 남긴 이 말씀의 의미가 성찬과 함께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시카고 대학의 정신의학 교수 엘리자베스 퀴플러 로스 박사는 다시는 의학적으로 소생할 길이 없는 죽음을 앞둔 수백 명을 상대로 연구를 해서 자기 논문을 신문에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이 사회에서 한때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의사들의 판단이 내려진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마음을 갖게 될 것인가? 다섯 가지 순서라고 발표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절대로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항상 다른 사람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로 온다는 생각은 하기도 싫은 것이 첫째 반응으로 가장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죽음의 시간이 점점 더 다가오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분노! ‘내가 왜 죽어야 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는 아직 젊고 할 일이 많고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는데 왜 벌써 죽어야 돼?’ 그래서 굉장한 분노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세 번째는 마음이 좀 누그러지면서 타협을 한다고 합니다. ‘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텐데 어떠한 방법이든지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그 길과 타협할 수 있겠다!’
그래서 최대한의 모색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의 시간은 다가왔습니다.
그때는 할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체념의 순서가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체념하고 나니까 마지막 단계가 오는데 내세를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어떤 세계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길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는 다섯 가지 단계로 발전한다고 합니다. 우리 갈보리 교회에서도 병원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365일 병원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 병원 선교는 할 만합니다. 아주 효과가 큽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임종 환자를 담당하던 처녀 간호사 한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사람을 보면서, 매일같이 똑같은 일을 계속하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죽음이라는 똑같은 사건 앞에 그것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왜 다르게 나타날까?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그렇게 발버둥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초연히 받아들이고 마지막에 가장 선하고 편안한 말을 남기면서 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모든 환자들의 종교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확실하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초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결론이 내렸습니다. 그녀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죽음을 초월하는 어떤 초월적 힘의 내재가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교회에 나갔고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영생의 진리에 심취해 자기가 하던 일을 다 중단하고 신학 연구가가 되어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유학을 하고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칼바르트 신학의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나는 내 평생을 통해서 이 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에 몸을 바치겠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가르치시는데 저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마라나타 커뮤니티’라고 했습니다.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한 가지 목적을 향하여 다 같이 가고 있는 공동체이다.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데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그 거룩하고 선한 한 가지 목표로 다함께 순례의 길을 떠나는 그것이 교회이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정의합니다.
한 유능한 젊은이가 자기 인생에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세 가지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하나는 일평생 가장 좋은 보상과 안정이 약속되는 국가 권위적 고시에 합격하기 위해서 아주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 고시만 통과하면 평생이 보장되는 그 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행복한 생활을 일생동안 보장받는 그런 일입니다. 그래서 그 시험을 치러놓고 합격 통지서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또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상속자가 없는 삼촌의 막대한 재산권이 유언장 없이 처리되어야 하는데 가장 가까운 혈육인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법적 투쟁을 지루하게 했는데 지금 그 결과를 기다리는 중에 있습니다. 또 하나는 당대 최고 미인으로 알려진 인정받는 처녀에게 구혼장을 내놓고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 세 가지만 이루어지면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권위 있고 보장받는 행복한 삶을 일평생 살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세 가지 소원이 하루에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흥분된 기분으로 국가고시 합격 증서를 손에 들고 또 한 손에는 재산 상속권 인정 판결문을 손에 쥐고 너무나 흥분해서 결혼을 약속한 아가씨를 만나려고 신이 나서 길을 달려가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만 길에 쓰러졌습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자기 앞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한분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했습니다. “젊은이! 무엇을 했기에 젊은이 몸이 이토록 망가졌소? 내가 가진 의학 상식으로 당신은 더 이상 살기 힘들게 되었소.” 장미꽃 한 송이를 그에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제가 한국 병원에서 한 번도 그런 광경은 못 봤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는 자주 제가 본 것이 담당 의사가 자기 판단으로 절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환자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암시적으로 줍니다. 그러면 이 환자는 그 꽃을 받아들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아! 담당의사가 마지막을 나한테 선물하는 꽃은 죽음이다.’ 미국의사들은 많이 합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 심방을 가서도 여러 번 본 광경입니다. 젊은 환자는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지금 이러한 시간에 할 일을 가르쳐주실 분이 이 병원에 있습니다. 신부님도 계시고 목사님도 계시니까 만나세요.”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신부님은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안 죽어요. 영원히 살아요. 당신이 이렇게 몸이 망가지도록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얻고 싶어 했던 그 세 가지 조건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어요. 당신이 그러한 행복한 초대에 응답만 하시면 됩니다. 지금 당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영세를 받으십시오.” 그 다음에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당신은 죽고 싶어도 못 죽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두 가지 길 중에 하나를 가야 합니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영생의 자리로 가던가 아니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고통스러운 시간을 영원히 보내게 되는 형벌의 장소로 가던가 이 둘 중에 하나만이 있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택의 권한은 지금 당신에게 있어요. 지금 세례를 받으시고 주님의 생명 불멸의 진리를 받아들이세요.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 병원에 영적 근무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신 물리학의 창시자 페히너(Fechner)씨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일평생 연구한 정신물리학 논문의 마지막 결론을 지금 발표하겠습니다. 인생은 세 가지 단계를 삽니다. 첫 번째 단계! 잠만 잡니다. 어머니 뱃속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자다가 깨고 깨다가 자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사는 시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영원히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는 단계! 하늘나라입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내 정신물리학의 결론입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 고백한 의미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게 무슨 뜻인가? 세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오늘이라고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 족하니라. 네가 무슨 능력으로 내일을 보자고 하겠느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가리켜 종말론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이 문제는 보통 우리가 생각할 때 절망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오늘 바울의 말을 보세요. “자랑삼아서” 그런 단어가 나오죠? 이것은 희망에 벅찬 감격 선언입니다. 이 날 하루가 나의 최종의 날과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삶! 이것이 “나는 오늘 죽을 것입니다. 만약 오늘 안 죽으면 내일 죽을 것입니다.” 절망 선언이 아니라 희망 선언입니다. “나의 자랑을 두고 명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자랑입니다. 이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순교적 삶입니다. 자, 우리가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 속에서 평생을 살지 않습니까? 그러면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하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살면 날마다 죽어야 됩니다. 수없이 죽어야 됩니다.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 마라나타 커뮤니티! 즉, “죽으러 오는 곳이다.” 이것이 우리가 섬기러 오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어제도 죽도 오늘도 죽고 내일도 죽어 날마다 죽는 것이 우리 십자가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고집 부릴 것 다 부리고 자존심 세울 것 다 세우고 명예나 체면 얻고 싶은 것 다 얻고 싸울 것 다 싸우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헌신의 서열은 날마다 꼴찌에다 두고 이러면 십자가는 뭡니까? 누릴 것 다 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내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아무 차이도 없는 생활을 하면서 말로는 십자가를 진다고 항상 그러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이 부분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 죽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날마다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감격 선언으로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죽기 위해서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패러독스 선언을 한 것입니다. 다같이 주님의 죽으심을 나도 죽겠다는 결심으로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이렇게 주님의 식탁에 초대를 받아 성찬대를 앞에 놓고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살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소원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이것이 죽는 부분입니다. 나는 무엇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룰 것인가? 그래서 바울은 나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죽어야 된다고 감격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세 번째 의미는 이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특징이 있는 성경입니다. 부활장입니다. 15장 전체가 인간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영생과 부활의 약속입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이 죽음의 철학과 신앙은 결국 뭡니까? “나는 날마다 산다.”입니다. 패러독스로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계산대로 한다면 “우리는 죽는 것 같지만 삽니다. 미련한 자 같으나 지혜로운 자요 가장 확실한 인생의 투자는 죽는 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고린도 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선물이 영생으로 주어지는 진리!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삶의 목표를 두고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대로 삶의 장소도 옮기고 사역의 종류도 옮겨가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사는 삶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참 이상하리만치 날보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한두 번도 아니고 참 여러 번, 특별히 부흥회를 가면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이럴 정도로 이상한 말을 듣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저는 부산에 가서 부흥회 인도하고 왔는데 똑같습니다. 맨 앞자리에 할머니 한 분이 앉으셨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손수건에 눈물을 닦으시면서 얼마나 은혜를 받으시는지 모릅니다. 시간마다 제일 먼저 나오시고 제일 앞에 앉으셔서 하얀 손수건이 다 젖도록 하염없이 나를 쳐다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겁니다. 이 할머니가 너무 은혜를 받으시니까 저는 이 할머니만 바라보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마지막 설교를 다 끝내고 이제 나와야 됩니다. 마지막 설교를 마치고 “여러분, 또 만납시다.” 인사하고 부흥회 잘 하셨다고 박수 받고 이제 강대상에서 내려가는데 그 할머니가 나를 만나러 오는 겁니다. ‘아! 이 할머니, 은혜 많이 받은 할머니! 나한테 인사하러 오시는구나!’ 내 손을 붙잡고 놓지도 않으십니다. 눈물을 내 손등에 떨어뜨리면서 하시는 말씀! “목사님은 죽은 우리 영감하고 목소리까지 똑같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할머니 생각을 압니다. 그 분은 이 세상이 벌써 싫어진 겁니다. 임이 계신 하나님의 나라만 생각하고 사는 겁니다. ‘나도 빨리 죽어서 임이 계신 그 나라에 가서 이런 외롭고 이런 쓸쓸한 세상이 아닌 영원한 주님이 주신 평안의 세계에 우리 님이 있는 그곳에 가서 살고 싶은데….’ 그런 생각이 가득 차 있는 그분의 머릿속에 비슷한 것만 봐도 영감같이 생각되는 겁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다.” 맞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내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이제 우리는 이 성찬의 떡과 잔을 주님의 죽으심으로 내가 살게 된 진리로 받고자 합니다. 어느 때나 똑같이 이 성찬을 받기에 내 영혼이 깨끗함 같이 내가 해보면 너무나도 퇴락한 나의 부끄러운 손이 주님의 피와 살을 받아들기에 괴로운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그 괴로운 양심의 소리와 떨리는 부끄러운 손이 오히려 주님이 원하시는 겸손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에 남이 모르는 불빛 하나와 한 자락의 어두움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품고 있는 어두움의 한 자락이 때가 되면 오히려 환한 불빛이 되는 경우가 많으며 사람들은 누구나 남모르는 용서받아야 할 한 가지 일과 한 방울의 눈물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역사가 지나면 그것 때문에 내 영혼이 맑아지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성찬의 떡과 잔을 통해서 모두 그렇게 주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이 베풀어주신 식탁에 저희들이 오늘 거룩한 초대자가 되었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끄러운 손을 내밀어 주님의 살과 떡에, 그리고 잔에 참여하겠습니다. 주께서 이 성찬에 참여하는 모두의 마음을 성령의 임재를 주셔서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가 나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바울 사도와 같이 날마다 죽는 헌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장 31절 / 윤창용목사
아프리카에서 전도를 하고 있던 어느 선교사 한 분이 '날마다 죽는다'라는 말을 했더니 토인들이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하기를 "선교사님! 몸이 살아 있는데 마음은 죄에 대해 죽는다는 말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이 "날마다 죽는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을 할까 생각하다가 아프리카 흑인들을 모두 불러 놓고 구덩이를 하나 팠습니다. 그리고 그 구덩이에 흑인 한 사람을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는 흙을 조금 그 구덩이에 넣고서, "어디 죽었습니까?"라고 묻자 그 흑인은 웃으면서
"아니요 선교사님! 죽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다시 구덩이에 흙을 넣어 허리에 차게 하고는
"아직도 죽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또 흑인은 "선교사님! 천만예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이번에는 목까지 올라오게 흙을 다 묻혀 버리고 목만 밖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이야기 하기 전에 그 흑인이 "선교사님! 이제 죽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흑인이 그러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
그러자 선교사는 그 사람을 구덩이에서 꺼내어 주며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은 살아 있으나 악한 일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다시 태어난 사람들의 각오이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죽는 일은 참 어이없게도 우리에게 쉽게 찾아오기도 하지만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친구의 권유로 읽은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꼭 젊은 청년들에게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책 이름은 "인간은 모두 죽는다"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작가는 우리가 잘 아는 불란서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샤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했던 샤르트르의 아내 「시몬느 드 보봐르」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79년 9월에 나온 것인데 그 서두에 보봐르의 어록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하자면 .
"이성이나 선입감 따위는 인간에게 별로 쓸모가 없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그 무엇도 인간에게는 도움이 되질 않는다" 무척이나 우리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자연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바보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히 역사의 종말을 알 수 없으며, 그 전에 그들은 모두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 한번의 절망감이 밀려오는 말입니다.
구구절절 절망에 사로잡히게 하는 보봐르의 소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죽지 않는 '휘스카'라는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이 사람은 죽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후손들이 어떻게 사는 것도 봅니다. 그리고 한 여인으로부터 영원히 살면서 나는 한 점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훠스카 당신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저주를 받기도 합니다. 사랑은 한 여인만 사랑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 인생을 살 때 의미 있는 것이지 영원히 사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혼자만 영원히 살아서 70평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죽는다라는 제목처럼 모두 죽습니다. 그러나 오늘 죽는다라는 설교 제목의 죽는다는 것은 바울의 고백이며, 인간의 육체적이고 생리적인 노쇠함으로 맞이하는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지혜로우려면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야 할 날이 얼마 남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결국 이 내용을 종합하면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철없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날마다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날마다 산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날마다 산다고 말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날마다 죽습니다. 태어나는 것이 죽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독일의 쇼펜하우어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그가 살아있을 때보다 죽은 후에 더욱 학문의 빛을 발했던 철학자였습니다. 그가 건강하고, 학생들에게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그 학문은 별로 알려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은퇴할 무렵, 늙고 육체가 쇠하여 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자기와 함께 지내던 친구들도, 강의실에 자주 찾아오던 학생들도 다 떨어져 나가고 외로움에 빠져 있게 되었을 때, 하루는 베를린 대학 구내에 있는 어떤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니 공원을 지키고 있던 공원지기가 쇼펜하우어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 어디서 온 사람이요? 당신 무엇하는 사람이요?" 그래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그는 "당신 어디로 가야 할 사람이요?"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비로소 정신이 든 쇼펜하우어는 머리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내 말년에 이토록 시름하지 않았을 것이요. 지금까지 인생이 무엇인지 또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라는 문제를 가지고 평생를 살아왔지만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했소. 그러나 단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오"
전도서 3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음의 위기를 맞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맹장염에 걸렸습니다. 정월 초 이튿날 수술을 하는데 마취 의사선생님이 마취 주사를 놓고 열을 세라고 하더라구요, 열을 다 세지도 못하고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아침 8시에 수술을 받았는데 저녁 6시에 깨어났습니다. 몸이 약해서 마취에서 깨어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 지금도 제가 몸이 약합니다.
마취가 되어야 수술이 가능합니다. 마취가 된다는 말은 죽는다는 말입니다. 죽어야 수술이 됩니다.
사도 바울도 죽음의 위기를 맞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자기가 당한 죽음의 위기를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옥에 가두는 것은 죽으라고 가두는 것입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면 39대인데 이것을 다섯 번 맞았으면 195대를 맞은 것입니다.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는 긍휼히 여기고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를 줄여주는 의미로 39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또 돌로 치면 죽는 것입니다. 주야를 바다 가운데서 헤매는데 이것도 죽는 것입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을 건널 때 빠져 죽을 뻔했으며, 강도가 그를 추격해서 죽을 뻔했으며, 동족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고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추위에 떨고 배고파 굶주려 죽을 뻔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음의 현장속에서 살았습니다.
요즘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테러인데 바로 유대인들의 테러 속에서 평생을 산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이 고린도후서 11장에서는 극사실적으로 사도바울에게 일어났던 테러의 위험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울이 이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라는 생명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고전15장 29-30)
이 말씀은 만약에 내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 생명에 대한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세례를 받겠느냐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세례를 예수와 함께 받으므로 부활 생명에 대한 승리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이런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산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내가 에베소에 있는 악한 자들과 함께 싸워 복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이지 내가 먹고 살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 잘먹고 잘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데 부활 생명에 대한 보장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얼마나 위대한 말씀은 다른 말로 말하면 '부활 생명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나를 죽여서 주께 제물로 드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라는 말은 '내 생명을 주께 제물로 바친다'는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이하에서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친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헬라어로 '테테르스타이'라는 말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의 뜻을 죽음으로 이루었듯이 자기는 자기 생명을 주께 제물로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죽노라'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2) 또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은 '내 육신의 정욕과 인간의 욕심과 세상의 모든 것이 날마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날마다 죽지 않고는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바울은 잘 알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말씀에서 "나"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오고 "산다"는 말이 네번 나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죽는 신앙의 기본 원리입니다.
예수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신앙은 살자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됩니다. 내가 살려면 나를 죽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날마다 죽자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얻을 복이 하나 있습니다. 그 복이 바로 날마다 내가 죽는 복입니다.
`내가 날마다 죽노라' 이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못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노라'는 것은 날마다 살겠다는 선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와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안 사는 것이 편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안 살면 그것은 곧 죽는 것이고, 망하는 것이고,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의로워지고, 행복해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영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살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은 만큼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아이들도 자기 게으름이나, 자기 감정이 죽어야 학교에서 삽니다. 직장도 자기 사적인 감정이 죽어야 직장생활 잘 할 수 있지 죽지 않고는 직장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가정생활도 부부가 서로 자기를 죽여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려면 자기를 죽여야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3) 또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속에는 무슨 의미가 들어 있느냐? '나는 나의 죽음을 통해서 날마다 주께로 간다.'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많은 분들이 천당에 대하여 환상적으로 그리워하면서 실제로는 천당 가려는 마음이 적습니다. 천당 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천당 안 가려고 합니다. 억지로 죽는 죽음은 비참한 것입니다. 천당도 기쁘게 가야지 죽었으니까 천당 가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죽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음이 와도 억울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죽음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어야 되며, 이해가 있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할 때 나는 날마다 죽음이 준비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고 죽음이 닥쳐왔을 때 기쁘게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승리자의 노래입니다.
새가족 환영을 하면서 물어봅니다. "어떻게 저희교회에 오셨나요?"
"오다가다 들렀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고, "가까워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고, "목사님이 좋아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님이 좋아서 왔다고 대답하면 제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왔나"고 물어 오실 때
"죽어서 왔습니다." 이렇게 싱겁게 대답을 하면 별로 예수님이 좋아하실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대답이 아니면 이런 대답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누라가 천국이 좋으니 지옥에 가지말고 천국에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물론 가라고 해서 가지는 곳이 천국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니면 "주님을 사모해서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주님이 좋아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인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천국에 예수님이 좋아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가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사람이 안 죽을 것처럼 사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평생을 살 것처럼 삽니다. 그러니 생명을 드리고 싶은 충동, 열정, 감격이 없습니다. 날마다 살아야 되겠다는 사람은 살 일만 생각해서, 돈을 모아야 하고, 집을 사야 하고, 살아야 하니까 계속 땅에 쌓다가 죽어버리니까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채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내가 천국에 갈 때 주님이 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의 돌에 맞아 죽으면서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이 모습을 바울이 보았습니다. 아, 위대한 그리스도인, 날마다 스데반은 자기 죽음을 선언하고 살았으며, 죽으면서도 성령이 충만했고,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날마다 세상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눈을 감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을 보지 않는다. 나는 예수를 본다. 하늘을 본다.' 이제 우리의 눈이 세상을 보다가 눈동자가 흐려졌습니다. 하늘을 봐야 눈이 열립니다. 모든 성도들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 생명을 주께 제물로 드린다. 내 정과 욕심을 날마다 죽인다. 나는 날마다 주께로 간다.' 이 고백, 이 승리, 이 영광이 동광 성도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부끄러워합시다
고전 15장 31절 ~ 34절 / 조재호목사
지난주부터 다음 주까지 3주에 걸쳐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부끄러움이란 어떤 일이나 행동이 당당하거나 떳떳하지 못하게 느끼는 상태에 있거나 숫기나 용기가 없어 거리낌을 느끼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기본적인 감정이고 공통된 감정으로 부끄러움은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들이 죄를 짓기 전 하나님의 행복한 동산 에덴 동산에서 서로 부끄러움 없이 살았습니다. 서로를 보면서 부끄러움 없이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서 저들은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한없이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가렸습니다.
서로 부끄러웠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보기도 부끄러워서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는 저들의 부끄러움을 벗겨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뭇잎 옷을 가죽옷으로 바꿔 입히셨고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저들을 하나님 앞으로 불러 내셨습니다.
죄책감으로 말미암는 부끄러움에서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죄 용서를 받고 당당하게 살아야합니다. 한편 성격적인 지나친 부끄러움은 우리의 정상적인 생활을 위축시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 없이 숨어 지내는 부끄러움의 골목에서 자부심과 자신감의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1. 오늘의 말씀 제목은 지난 주와는 반대로 ‘부끄러워합시다’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끄러움 모른다’는 말은 ‘뻔뻔하다’ 철면피다‘ ’창피한 것을 모른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부끄러움의 결핍시대에 수치 불감증시대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요즘 뻔뻔스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답십리에 살았을 때, 동네에 미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지 않은 여자인데 옷을 벗고 옷고름을 풀어 앞가슴을 헤치고 머리카락은 산발하고 그래도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부끄러워야 할 때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고장이 났다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사람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술 마시고 인사 불성이 되어 남의 아파트 들어가서 그 집 주인 보고 오히려 ‘왜 남의 집 들어왔느냐’, ‘당신이 누구냐’고 큰 소리 치며 전화기 들어 신고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술이 깨면 얼굴을 못 들고 다닙니다. 술 때문에 잠시 부끄러워해야 하는 정신 작용이 잠시 정지된 것입니다.
신문 TV 뉴스에서 뻔뻔스러운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수십 억의 뇌물을 받아먹어 구속되면서 부끄러운 기색이 없이 얼굴을 곧게 세워 당당해 하게 재수 없이 걸렸다는 사람들, 대가성이 없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사람들, 지하철 바닥에 침을 뱉으며 꾸지람하는 중노인을 재수 없다고 째려보는 젊은이들, 외국인 근로자들을 노예같이 부려먹고 월급을 떼어먹고 내 쫓는 야심불량 악덕 기업주들 이들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시대는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끄러워합시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윤리 도덕 의식이 결핍된 고린도교회와 고린도 사람들을 향하여 “사회의 잘못된 사람이나 일들에 속지말고...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노라”(34)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모른 채 하는 사람들, 옆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일들을 답습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것을 지적하고 그들을 부끄럽게 해서 고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부끄러움을 주어 비난, 창피, 모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것이 잘못인지를 알고 깨닫는 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선한 양심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고 앞으로 발전되고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앙적으로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신을 되돌아 볼 힘이 있다는 것이고 신앙적으로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며 신앙적으로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고쳐주시는 은혜의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고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으며 변화될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는 사회적으로 잘못된 일을 겪으며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회적인 정의와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몽골 근로자들이 임금을 받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는 것을 본 교회가 적극 나서서 성금을 모아 그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교회가 직접적으로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그런 한국 사람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성적 타락으로 하늘의 불 심판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조카 롯과 그 아내와 딸들을 악의 소굴에서 끄집어내도록 귀뜸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의인 10명만 찾으면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의인 10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의인 10명이 없는 사회에 아브라함은 부끄러웠고 결국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부정과 불법, 불의와 타락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난 15일 우리나라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옹이 별세하셨습니다. 일제 침략의 암울기에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 경주에서 당당히 1등을 하여 일제침략으로 부끄러운 삶을 살던 한국민족의 자긍심을 놓여 주었습니다.
그 당시 윤동주 시인은 여러 가지 시를 써서 우리 민족의 강인함을 드러냈습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가을 하늘과 같은 삶을 노래했습니다. 민족적으로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손기정옹과 윤동주 시인이 보여준 드높고 청명한 기개와 자부심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는 교회의 사회성, 크리스천의 사회성, 믿음의 사회성이 강조되고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예수님도 따르는 사람들을 보시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 소금의 역할인 맛을 잃으면 안 된다. 빛이 빛의 역할인 밝게 비췸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세상사람들이 교회가 하는 일을 보고, 크리스천이 하는 일들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나라의 크리스천들의 사회적으로 건전한 생각이 이 사회를 건전하게 만듭니다. 크리스천의 사회적으로 정의롭고 건강한 생각이 이 사회를 정의롭고 건강하게 만듭니다.
우리 자신은 빛과 같은 신앙 양심을 가지고 어두운 시대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교회는 소금과 같은 성경적인 양심을 가지고 잘못된 길가는 세상의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부족하고 잘못된 것들을 뒤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집을 떠나며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각각 일꾼들에게 맡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들 열심히 일해서 각각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남겼습니다. 이에 주인은 “잘했다 충성된 종아”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일꾼들이 주인의 칭찬을 듣고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웠을까요? 그간의 수고와 고생이 눈 녹듯이 다 사라졌을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아 아무 일도 안하고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일꾼은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질책을 받으며 욕먹고 밖으로 쫓겨났으니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웠을까요?
어느 사무실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데 몇 몇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책상 위에 안내 표지판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 안내 표지판을 본 시간은 오전 10시였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그 자리가 비어 있으면 부끄러운 자리가 됩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그 일이 비어 있게 되면 부끄러운 일이 됩니다. 충성해야 할 사람이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게으르게 되면 부끄러운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최선의 노력을 요구하시고 최선의 열매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끄러움은 들추어내고 지적하는 일에 민첩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해하고 고쳐주고 덮어 주는 일에 민첩해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정직한 용기이고 바른 믿음입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부끄러울 것이 없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으로 힘써 살아가는 우리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