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과 갈등이 있습니다. 갈등보다는 고민이 좀 많지요.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물론 제게는 언감생심이겠지요. 인격은 바닥이고 양심도 깨끗지 못하며 태생 또한 삐딱해서 무엇하나 똑바로 정진시키지 못하니까요. 객관적으로는 힘듭니다. 더욱이 가정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받아들이면서도 나 자신까지도 받아들여야되기 때문에 힘든 여정이고요. 자기수용을... 운명에 순응하며 가족이나 남을 위해 희생하는 일종의 미덕 정도로 이해한다면 간단치만 그건 ‘자기형성’을 위한 투쟁을 포기한 항복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로서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주관성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렇게 힘이 듭니다. 핑계가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에서는 좀 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저는 주관적 입장으로 문제를 보려합니다. 말장난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삶을 훌륭히 살아‘낸다’면 좀 주관성이 살아납니다. 삶의 주체의 자리를 내 자신이 좀 더 확보한 느낌이랄까요? 내 의지가 좀 느껴지는군요. 이제 ‘훌륭히’라는 객관성과 ‘살아낸다’는 주관성이 어떤 장력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상태가 힘들지만 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누구나 우리는 어떤 국면에 안주하길 바랍니다. 그것이 간단하고 쉽고 편안하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여기에 훌륭한 삶은 없겠지요? 동의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고민과 갈등이 비난의 대상이 돼서는 안됩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힘들게 고민하고 갈등을 겪습니다. 동정의 대상은 더 더욱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 훌륭히 사는 것인가에 대해 사실 명쾌한 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보다 정의롭게 사는 것? 보다 이타적으로 사는 것? 보다 진실되게 사는 것? 보다 자유롭게 사는 것? 보다 명예롭게 사는 것?... 이 모든 필요조건들을 총망라한다 해도 저로써는 마땅한 전형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어떤 역사적 인물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닮고 싶은 전형적 인물도 없습니다. 교만이나 핑계가 아닙니다. ‘불의’란 미개한 대중이 불쾌하게 생각하는 행동들일 뿐이고, ‘이기’적이란 생존을 위한 본능이고, ‘진실’이란 사실을 왜곡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이고, ‘자유’란 이 세상에 목적이라는 관념이 있는 한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실천이므로 관념의 관념일 뿐이고, ‘명예’는 너무 고결하여 저의 천성에 맞지않기 때문에 사양하고... 결국, 훌륭한 삶이란 사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것이 실제 토록하기 위해선 ‘훌륭한 삶’이 실재한다고 우선 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정을 참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훌륭한 삶을 방해하는 요소들과 싸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위성이라기 보다는 정서적 가치라도 가져보자는 보잘것 없는 자구책이지요.
저는 훌륭한 삶의 저해요소로 두가지를 지목하고 싶습니다. 보다 본질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종교(성), 그리고 그 대척점에 있다는 행복지상주의. 먼저 행복지상주의를 봅시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이기적일 수 밖에 없지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보편적 본능이지요. 그러나 행복지상주의가 추구하는 건 나쁜 본능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만약에 악이 있다면 전 그게 악이라 감히 칭하겠습니다. 인간의 이기성. 일반적 이기성은 필요합니다만 어떤 도를 지나친다면... 그건 악입니다. 남보다 내가 잘살기위해 누군가를 짓밟는다면 사기친다면 도둑질한다면 악이지요. 귀여운 악입니다. 인간은 죽으면 그 뿐이니 무조건 즐기고 행복하면 그만이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이기심을 맘껏 부리는 것은 무서운 악입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같은 전체주의적 배타심은 절정적 이기심이고요. ‘선악’이란 이렇듯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아 알 수 있는 사회적 가치의 구별이여야 합니다. 예수가 오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참 정의가 흐르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인간이 절망스럽지요. 거룩하다고 표현된 피조물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쳐먹고 마시고 남을 속이고 억압하고 오로지 이기심에만 빠져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악을 사탄에 핑계댄다면 우리는 인간의 참모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쉬운 곳에는 진리가 자리하지 않습니다. 사탄의 유무 여부는 별도의 문제이므로 좀 나중에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여튼 훌륭한 삶을 살기위해선 행복지상주의는 반듯이 극복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행복해지길 원했지만... 행복지상주의는 반대했습니다.
종교. 이건 행복지상주의의 최종 결정판입니다. 그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닙니다. 최고의 이기와 배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문제인 것은 인간의 행복 추구를 범속하다 비하하며 최상의 행복은 천상에 있다 말하고 있지도 않은 행복을 자신의 권위(행복)를 위해 팔아 먹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만이자 (신이 있다면)신격 모독입니다. 이런 면에서 종교(업자)는 악의 본질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불행이나 죽음에 대한)공포와 동물보다 낫다는 자존감과, 그 두려움과 자존감에 의해서 생겨난 증오같은 ‘충동’에 기인했습니다. 사회적 현상의 산물이지요. 다른 차원의 말씀이지만... 여기에 신의 섭리나 우주의 목적된 의도 따위는 없다고 보셔야 합니다. 인간 자신에게 눈을 고정시켜야 진실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게 힘들거나 아프거나 하면 무언가에 의지하려 합니다. 인간은 보통 자신이 동물적 지위에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다 상위에 있을 법한 어떤 표상을 상상하며 거기에 의지하려 합니다. 신을 만들겠지요. 그리고 사람이 약해지면 착해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별로 영향력을 행사할 힘이 없다싶으면 그 방향이 내부로 향하지요. 그래서 착해질려는 생각을 하게되고요. 이것이 인간의 종교성의 시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개별적 정의로움, 단독적 숭고함등으로 발전시키며 이런 사람들이 결집해 하나의 종교를 형성합니다. 물론 우두머리 집단은 거기에 진리(?)를 부여코자 온갖 잡다면 현상들을 모집하고 간추려서 법을 만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얼마나 이율배반적이고 모순된 논거와 현상들이 있는지. 이런 억지들을 그럴듯하게 하기위해서 형이상학을 끌여들여 단숨에 해결합니다. 교리들 말입니다. 참 편리한 진리지요. 저는 종교가 인간의 참 행복을 가로막는 인류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생래적으로 타고난 본능적 이기심 정도로만 살 수 있었다면 우리는 이미 지상낙원을 건설했었을 겁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게 생겨나 이 이기심을 부추겨 증오를 품게 만들고... 심지어 사탄이라는 개념까지 만들어 그들의 적에게 화풀이 합니다. 사디즘의 시초이자 절정입니다. 사탄이 있다면 그게 사탄입니다. 저의 적입니다.
먼저, 그들이 말하는 교리라는 것을 봅시다. 그들의 구원의 증거가 이것에 있으니까요. 불교는 잘 모르니까 기독교사상을 중심으로 비판해 보겠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로써 이세상에 왔다고 합니다. 모든 인류가 구원되었습니다. 그것만 믿고 의지하면 죄 사함을 받아 죽어서 천당에 갑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 않으면 그의 영혼은 사탄에게 넘겨져서 지옥불에 던져집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기독교의 법입니다. 이런 이기적 시스템을 정말 하나님이 만들었을까요. 하기야 구약을 보면 자신이 질투하는 신이라고 밝히기는 했습니다만.... 소인배들의 인격에도 못미치는 신격이 그렇다는 거지요? 참 소도 웃고 갈 일입니다. 누가 구원해 달랬습니까? 그 예수가 구원해 주지 않았으면 죄도 없었고 따라서 지옥에도 가지 않을 것 아닙니까? 장차 기독교를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갈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사탄이 심어준 것이고 사탄이 있는 증거이고 그래서 악은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심령을 사탄이 장악하고 있어서 그런 생각들을 품게 된다는 거지요? 과연 그럴까요?
죄, 사탄, 신. 이제 이 문제로 넘어왔습니다. 이것의 존재유무를 떠나서 그것은 그냥 하나의 표상일 뿐이다라고 얘기하는 교인들도 있읍니다만 그러나 정말로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따져봐야 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아닌 게 아니라 이 세계는 우주는 신이 없으면 운영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목적없이 태양이 나를 비추고 있다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그 태양을, 나를 비추고 있는 그 태양을 내가 보고 있으니까요. 싸르트르의 말처럼 인간은 대자적 존재이지요. 사물이나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들기 때문에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내가 있는 한 태양은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나를 비추는 목적이 있습니다. 아니,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인간은 또한 선험적 사고를 하는 동물입니다. 나는 무엇을 할 때 반듯이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행동합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목적없이 행동하는 건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태양은 나를 비추는 목적이 반듯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인간의 사고체계입니다. 근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사물이나 사건은 반듯이 목적이 있어야 합니까? 전혀 별개의 문제 아닌가요? 사물(사건)하고 목적은 반듯이 관계가 있어야 합니까? 태양은 그냥 있는데 나는 그게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게 경험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인식 때문은 아닐까요? 이기심이지요. 사건이나 사물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나의 이기성이 그들이 관계가 있다고 단정짓 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없는 신이나 사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건 당연합니다. 인간의 이기성입니다. 그래서 다시 죄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은 본성에 이기성이 있으므로 악합니다. 악이 존재합니다. 어떤 죄같은 게 감지됩니다. 흔히들 그게 영적으로 사탄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물(사건)을 목적에 관련지으려는 그 의도가 죄입니다. 원죄입니다.
악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법칙뿐만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도 악이 감지됩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자연현상의 지진, 질병, 기근이나 홍수 같은 것입니다. 자연법칙도 이기의 속성없이는 운영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법칙도 똑같습니다. 물질이란 존재론적 의미에선 이기성으로써만 존재하니까요. 원죄입니다. 인간법칙, 자연법칙, 우주법칙에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죄로 오염되었습니다. 종교철학자들의 말대로 무엇이든 어떤 연원없이, 법칙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원죄입니다. 이 법칙에, 그렇게 되도록하게 한 법칙 ‘부여자’에게 악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한 그 의도, 목적, 법칙. 그렇습니다. 빅뱅, 천지창조하신 하나님의 로고스가 원죄입니다. 죄의 근원. 사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죄였고 악이었고 사탄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권세를 사탄에게 내주었습니다. 그건 세상을 시험하여 진실한 기독교인을 색출해내기 위한 장치가 아닙니다. 색계는 사탄의 작품입니다. 여기가 악하다면 신들의 세계 역시 악이 지배합니다. 그런 개연성으로 그 쪽 세계를 보는 것이 타탕합니다. 천지창조는 우리가 생각하는 착한 신과 악한 사탄이 싸워 이긴 결과로써 생긴 결과물입니다. 사탄이 이겼기 때문에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사탄이 이기도록 허락한 존재 역시 신이지요. 그것을 허락한 상위개념의 그 신 역시 죄를 면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똑같은 말씀입니다.
엊그제 토요일. 조율연 선배님이 진행하는 토요시네마에 갔었습니다. 휴대폰으로 메일이 왔는데 제목이 ‘사탄의 태양 아래’였습니다. 전 직감했습니다. 아~ 아. 나홀로 망상에 빠진 것만은 아니었구나. 태양은 밝음이고 긍정이고... 정의롭고 착하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근데 그게 사탄의 것이라니. 다들 깜짝 놀라시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맞는 소리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 우주의 권세는 사탄의 것입니다. 무서운 비밀입니다. 그 무서운 비밀을 말하려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만사 제치고 갔습니다. 과연 그랬습니다. 신앙과 실존의 양극단에서 몸부림치는 한 신부의 이야기였습니다. 도니상 신부. 그의 신앙은 그의 실존이 방해했고 그의 실존은 그의 신앙이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절대로 실존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뛰어넘지도 못하는 것. 신앙이 인간실존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런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자기기만이자 도피지요. 그는 참 신앙을 찾기위해 실존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무세트라는 소녀가 나오는 데 그녀는 세 사람의 남자에 둘려싸여 있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두 남자. 두 남자와는 관계에서 누구의 아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임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자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차츰 절망속에 빠져듭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합니다. 사람은 흔히 습관과 행복이 있으면 크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삶의 엄청난 부조리를 목도하며 그녀는 미쳐갑니다. 죽음을 생각합니다. 한 남자를 죽입니다. 죄의식은 거의 없었으나... 자신도 자살을 생각합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살장에 끌려온 소는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여유롭게 되새김질을 한다’고... 그 소와 내가 도대체 왜 달라야 하느냐 항변하듯 자살을 감행합니다. 도니상 신부는 그녀의 시신을 교회 제단에 올려놓습니다. 그녀의 실존적 고민을 자신도 똑같이 공유했었다는 증표처럼 말입니다. 절망합니다. 이 사건으로 도니상 신부는 다른 교구로 쫓겨납니다. 그 도상에서 그는 뭔가를 체험합니다. 무엇을 봅니다. 사탄의 시험같기도 하고 영적 깨달음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꼬마 아이가 죽었는데 그 아이를 살려냅니다. 기적을 행합니다. 단숨에 신앙의 문제를 해결한 듯이 보였으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또 무엇인가를 봅니다. 그리곤 다시 또 절망합니다. ‘아니... 이 기적마져도’라고 독백합니다. 그는 사탄을 본 겁니다. 절망치 않을 수 없었겠지요. 여기에서 그는 정확히 예수와 닮아 있습니다. 엄청난 고통속에서 그는 뭔가를 씁니다. 아마도 짐작컨데 그 무서운 체험을 통해서 본 신성이란 것이 곧 사탄이었다는 것을 쓰려했을 겁니다. 그러나 몇 자 쓰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신앙하는 자의 필연적 절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앙하는 사람은 영적으로도 절망해야되고 실존의 문제있어서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실존. 인간의 삶이란, 인간이란 어떤 본질로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인간에겐 실존만이 존재할 뿐 그의 본질은 중요치 않습니다. 삶의 그 어떤 가치나 목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냥 존재합니다. 개나 돼지처럼 그냥 존재합니다. 그래야만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냥 존재하지 못합니다. 실존하려니 엄청난 고통이 따릅니다. 가치나 목적은 세계를 인식키 위한 그런 장치로써 전혀 별개의 문제이건만 인간은 그걸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존재이유가 그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존문제의 시발입니다. 이건 종교가 특히나 서양종교가 무언가를 부추긴 결과임에 틀림없습니다. 병주고 약주는 격이지요. 단언컨데 종교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해결해 준다 공언하지만 그건 거짓입니다. 그 증거를 대겠습니다. 정신이나 물질이란 말은 모두 용어상의 어떤 편의를 위해 있는 것이지 그것이 궁극적인 ‘실체’들은 아닙니다.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활동합니다. 사고와 감정과 행동 이외에 달리 드러난 실체, 즉 이런 것들을 하거나 겪는 ‘주체’로서의 정신(영혼)은 없습니다. 사람의 정신이란 하나의 연속성인데 그건 습관과 기억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어제 한 사람이 존재했고 나는 그의 감정을 기억하고 있는데 바로 그 사람을 나는 어제의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어제의 나란 것은, 지금 기억에 남겨져 있기 때문에 지금 그것들을 회상하는 그 사람 역할로 간주되어지는 어떤 정신적 사건들에 불과합니다. 한 사람의 정신을 구성하는 것은 그래서 기억과 이른바 습관이라 불리는 류와 비슷한 어떤 것들로 연결된 일련의 경험들이 전부입니다. 우리의 기억과 습관은 뇌의 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것은 강물과 강 바닥이 관계맺는 방식과 흡사합니다. 강 속의 물은 항시 바뀌지만 늘 같은 길로 흐릅니다. 과거에 내린 비가 길을 터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사건들이 뇌 속에 길을 터놓으면 그 길을 따라 우리의 생각들이 그 길로 흐릅니다. 기억과 정신적 습관은 여기서 기인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주체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정신에 있어서 주체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영혼이란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차용해서 영원히 살아보려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형이상학적 미신입니다. 그럼 뇌를 봅시다. 뇌는 ‘물질’입니다. 물질에는 주체란 게 있을까요? 이제 물리학에서는 물질의 근원이라 불리는 원자들이 계속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몇분 전에 존재했던 어떤 원자가 지금 여기 있는 그 원자는 아니라는 얘기지요. 영혼과 마찬가지로 물질의 전자나 양성자도 논리적 허구라는 얘깁니다. 육체의 구성 물질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신진 대사 과정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세포는 몇 달 전의 세포조직이 아닙니다. 인간 육체의 연속성 역시 외관과 행동상의 문제이지 ‘실체’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질 역시 그렇게 존재하도록 하는 ‘주체’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사는데 왜 종교가 필요합니까? 개 돼지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전도서를 보십시오. 거기에도 그렇게 씌여있습니다. 왜 사람의 혼백은 죽어서 위로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개 돼지의 혼백은 아래로 내려가야 하냐고요. 성철 스님이 그랬다지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그렇게 정진하신 분이 이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못했다니... 침묵했어야 했습니다. 그 이상을 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침묵했어야 했지요. 도니상 신부처럼요. 어제 라디오를 듣는데... 배철수의 음악캠프였습니다. 오픈닝 멘트로 이런 소릴 하더군요. 어떤 스님이 ‘실체’에 대해 설법하려 하는데 마침 새 한 마리가 지져귀더랍니다. 그러자 그 스님이 그랬답니다. ‘실체에 대한 설법은 필요없다. 저기 저 새를 보라’ 이게 무슨 소립니까? 새가 무슨 목적을 깨달아서 사는 게 아니지요. 그냥 사는 겁니다. 인간이 좀 더 행복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정말이지 힘들 겁니다. 그러니 극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싸우는 길 밖에는...
무. 무위입니다. 하나님은 무입니다. 무로 존재합니다. ‘해 아래’서 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곳은 전도서입니다. 해 아래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이 의미를 잘 느끼셔야 합니다. 종교적 의미로서가 아니고 실존의 영역에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진실인지 발견하시게 될 겁니다. 건방졌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침묵할 때가 오겠지요.
첫댓글 얼굴좀 봅시다 (휴대폰 번호도 좀 알려 주시고...)
죄송합니다. 저 번 목요일도 글마당 가려고 했는데... 친구 놈한테 삐리리 전화가 왔어요. 빨자는 얘기지요. 그래서 또 못갔습니다. 내일 날은 꼭 가야지요.^^ 휴대폰 요? 011-676-9172. 근데요 제가 모르는 전화는 잘 안받아요. 빚쟁이 일까봐서...^^
ㅎㅎㅎ 경험이 있어서 잘모르는 전화 안받는 그심정 이해 갑니다.구란데 모임에 잘 안나오면 카페지기님을 비롯해서 회장님께 혼납니다.그리고 우리방 목사님도 계시지만 하나님께서 노하십니다.그러니 다음 모임에는 꼭 나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