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1일 마음 그릇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 살면서 ‘웬수’는 몰라도 원수라고까지 부를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싫고 밉고 함께 있기 불편하고 저 멀리 보이면 다른 길로 가는 그런 사람들일 거다. 그런 사람들을 있는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잘해줘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 자녀라고 불릴 수 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콜로 3,12-14) 바오로 사도의 이 권고대로 살면 성인이 되고 천사처럼 될 거다. 그런데 그런 바람과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세례받고 괜히 마음고생하며 이 어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선택할 필요 없다. 우리는 성인이 되고 천사처럼 돼야 한다.
성인은 하늘나라 시민이다. 하늘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2천 년 전에 이미 시작됐다. 예수님은 사랑이고 하느님 뜻에 순종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이름처럼 그리스도 예수님 같은 사람이니, 계속해서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매일 사랑으로 거듭나고 아이가 부모 말을 듣는 거처럼 하느님 뜻에 순종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꿈을 좇지 않는다. 그 꿈 뒤에 뭐가 있겠나. 세상에서 성공이라고 부르는 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것이 아니던가. 오히려 그런 자신을 포기하고 하느님 뜻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성모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범인 이유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러니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해낼 수 없는 과제다.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다. 우리가 지닌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로마 5,5) 하느님, 하늘나라가 그 희망인데 하느님은 우리처럼 이랬다저랬다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은 순례가 된다. 목적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를 하늘이나 어느 오지 속에서 찾지 않는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찾아다니지도 않는다. 이 순례는 내적이고 영적인 순례다. 내 안에서 심오한 진리를 찾는다기보다는 마음 그릇을 넓고 깊고 크게 만들어가는 하나의 긴 과정이다. 우리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예수님은 고작 제자들 몇 명이 아니라 배반자 유다를 포함한 모든 이를 위해서 당신을 희생하셨다. 그런 마음이 되고 그런 사람이 되려고 오늘도 내일도 이 순례길을 간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 답은 하느님만 알고 계신다.
예수님, 서로 사랑하는 저희를 보고 세상은 하느님이 저희와 함께 계신 줄 알게 될 겁니다. 비폭력, 보답을 바라지 않는 호의, 싫어하는 이들에게도 잘해주는 차별 없는 사랑, 이웃을 판단하지 않음, 언제나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인내하지 못한 걸 가슴을 치며 죄라고 고백하는 저희는 하늘나라에 아주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자주 이 이콘 앞에서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며 복닥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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