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하이네
연꽃은 찬란한
햇님이 두려워,
머리 숙이고 꿈꾸며
밤이 오기를 기다린다.
달님은 그녀의 연인,
달빛이 비쳐 그녀를 깨우면,
연꽃은 수줍게 얼굴을 들고
상냥하게 님을 위해 베일을 벗는다.
연꽃은 피어 작열하듯 빛나며
말없이 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향내음 풍기며 사랑의 눈물 흘리고
사랑의 슬픔때문에 하르르 떤다.
[작가소개]
하이네[ Heinrich Heine ]
국적 : 독일
출생 – 사망 : 1797년 ~ 1856년
출생지 : 독일 뒤셀도르프
직업 : 시인
가족관계 : 배우자 : 마티루데
관련인물 : 듀체프, 위고, 발자크, 뮈세, 고티에, 마르크스
독일의 시인. 뒤셀도르프에서 양친이 모두 유대 계인 포목상(布木商) 집 장남으로 출생.
어린 시절 프랑스 혁명군이 뒤셀도르프에 주둔했었고 시작을 시작하기 훨씬 이전에
봉건적인 독일에 반역하는 자유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1816년 함부르크에 있는 숙부의 은행 견습원이 되었으며 처음에는 종매(從妹)인
아리에를, 나중에는 그녀의 동생인 테레제를 열렬하게 사랑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체험에 의해서 연달아 시를 썼다. 1819년에 본 대학에 입학,
법률을 전공하면서 문학에 전념, 이어서 괴팅겐ㆍ베를린, 다시 괴팅겐 대학으로
전전하였다.
A. W. 슐레겔의 문학 강의ㆍ헤겔의 철학 강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학창 시절부터
활발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821년 처녀 시집 《시집》을 내고, 1823년 비극
《라트크리프》ㆍ《아르만졸》과 시집 《서정삽곡(抒情挿曲)》을 간행하고,
1824년 하르츠 지방을 여행하여 《하르츠 기행》을 집필했다. 졸업 후에
출판한 《여행의 그림 제1권(1826)》으로 명성이 높아졌으며,
1827년 《루그란의 서(書)》를 포함한 《여행의 그림 제2권》이 나오자
세평이 떠들석했지만 귀족이나 교회에 대한 비판이 문제가 되어 프로이센에서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 해 영국으로 건너갔지만 선진 자본주의에 실망한 나머지 귀국,
그 동안의 시를 정리 《노래책 Buch der Lieder》을 발간했다.
1828년 이탈리아에 여행하고 마렝고에서 《인류 해방의 용감한
한 병사(兵士)》로서의 사명을 고창하는 정치 선언을 하였다.
사상적으로는 날카롭게 현실과 대결하나 몸은 점점 쇠약해져서
객혈까지 하게 되었다. 1830년 북해(北海)의 헬골란트 섬에서 정양하고
있을 때, 파리의 7월 혁명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보도에 접하자,
"나는 혁명의 아들이다"하고 분기하였지만, 독일의 현실은 혁명을 기대할 수
없어 봉건적이고 속물적인 독일을 떠나 1831년 자진해서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하이네의 제2의 인생은 파리에서 시작된다. 위고ㆍ발자크ㆍ뮈세ㆍT. 고티에 등과
교제하여 프랑스의 실태를 독일인에게 알리는 한편 독일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프랑스인에게 소개하여 독불 문화의 교량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의 상태(狀態 ; 1832)》등을 썼으나 1835년 독일 연방 의회에 의해
모든 작품의 발표를 금지당하여 곤경에 빠지게 되자,
소설 《프로렌스 야화(夜話 ; 1836)》등의 순수 문학 작품을 쓰면서
혼미의 시대를 보냈다. 1840년부터 프랑스의 정치ㆍ예술ㆍ대중 생활에 대한
통신 《루테치아》를 쓰기 시작하고 또한 《베르네의 메모》를 출판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그 해 오랫동안 교재해 오던 프랑스 처녀 마티루데와 결혼,
1843년에 해학 서사시(諧謔敍事詩) 《Atta Troll》을 발표, 향수에 사로잡혀 잠시 귀국,
모친을 만났으며 그 해 파리에 온 마르크스와 친교를 맺었다.
그는 계속하여 사회시ㆍ혁명시를 썼으며, 1844년 《신시집 Neue Ged ichte》ㆍ
혁명적 장시 《독일의 겨울이야기》를 발간한 그 해 잠시 동안 귀국,
그 후 계속하여 건강을 해쳐 병사했다는 오보까지 나왔다.
그 동안 무언극(無言劇) 《여신(女神) 디아나(1846)》ㆍ무용 시
《파우스트 박사(1847)》등을 발표. 1848년 2월 혁명 무렵부터 죽기까지
자리 위에 누워 병고와 고독 속에서 신(神)에의 귀의를 받았지만,
사상적 신념으로서는 민주 혁명의 원리를 견지하였다.
1851년 병고에 신음하면서 발표한 산문 시집 《Romanzero》가 출판되자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빈사 상태에 빠진 병상에서 우수한 시를 써냈다.
1853년 기담(奇譚) 《유적(流謫)의 제신(諸神)》을 발표, 또한 《고백(告白)》에 이어
이듬해 《회상(回想)》을 썼다. 그가 죽음 앞에서 헤메고 있을 때
카미라 세르단이란 여인이 나타남으로써 하이네는 마지막 정염(情炎)을 불태웠으나
1856년 끝내 사망했다. 처음 낭만파에서 출발했으나 유대인에 대한
차별 의식과 7월 혁명의 현실에 부대낀 탓으로 2개의 분열된 요소가
항상 그를 지배, 달콤한 낭만적 색채 속에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냉소가 숨어 있고, 열렬한 애국심의 이면에는 편협한 독일 사람에 대한
반항이 불타고 있었다. 괴테와 더불어 독일이 낳은 세계적 시인이다.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출처] 하이네 시모음|작성자 옥토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