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스키… 참 멋진 거다.
천지를 뒤덮은 하얀 설원 위로 날렵하게 쭉 뻗은 스키 플레이트에 몸을 실은 채, 뺨에 와닿는 차가운 공기를 가로지르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가슴 가득 안겨오는 청량감. 하얀 캔버스에 자유롭게 뿌려진 색원(色原)들이 만들어내는 카오스의 미학. 바람에 묻어 흩날리는 고운 머릿결 사이로 하얗게 묻어나는 겨울꽃의 포말. 그 위로 오버랩되는 아련한 미소. 오우~ 컴 온 베이비…
험험, 어쨌거나 스키, 참 멋진 거다. 그런데 이 스키를 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고글? 아니다. 장갑? 것도 아니다. 스키 플레이트, 스키복? 역시 아니다. 멋진 여자 코치? 음… 그건 쪼끔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스키를 타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건 바로 눈이다, 눈. 스노우.
나, 눈발이 흩날리기만 해도 온 동네 아이들이 눈싸움하러 골목으로 뛰쳐나오고 동네 뒷산 꼭대기에 희끄무리하게 눈내린 흔적만 보여도 교통 대란이 발생하는 일산 출신이다. 거기서 30년 넘게 살았다. 눈? 별로 본 적 없다. 스키? 1미터 이내에 접근한 적도 없다. 당근, 스키 타 본 적도 없다. 타고 싶다거나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네버 에버 포에버 없었다.
휴우. 그러나 인생이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더라. 하고많은 데를 놔두고 왜 하필이면 스키장에서 워크샵을 하냔 말이다. 가서 스키 안 타거나 아예 안 가면 되잖냐고? 가서 스키 안 타면 안 간 걸로 처리하고, 안 가면 짜른다는데 날더러 우짜란 말이고, 씨바! 그 놈의 아이엠에프, 그 놈의 영삼이.
그렇게 해서 나, 난생 처음으로 스키란 걸 타러 끌려가게 되었던 거다.
스키… 참 멋진 거다. 남이 타는 거 볼 때는...
첫번째 난관 - 가는 버스 안에서
화려한 꽃무늬 커튼 아래로 20인치 비디오 텔레비젼에다 빵빵한 스테레오 마이크가 설치된 관광 버스 안에서 모두들 신났다. 그래, 신도 나겠지. 한 넘이 다가와서 묻는다(스키와 관련해서 내 앞에서 졸라 폼을 잡았거나 나를 개무시한 그때 동료들은 본 글에서 싸그리 '넘'이라 칭하기로 한다. 나쁜 넘들!).
"고추야, 스키장 어디 가 봤어?"
"홍천."
"오, 그래? 보광은 눈이 별로 안 좋아서. 홍천은 어때? 눈이…"
근데 이 넘이 미쳤나? 눈이 좋고 안 좋고가 어딨어? 다 같은 눈이지. 예의상 한마디 대답한다.
"하얗겠지."
"……"
할 말 없나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던 넘이 묻는다.
"스노보드는 좀 하지?"
"응. 그건 기본이잖아."
"무슨 스타일 즐겨? 일본 꺼야? 아님 미국 꺼?"
"응. 남해 화학 요소 비료. (때로는 럭키 모노륨 장판도 졸라 잘 탄다. 됐나?)"
첫번째 교훈. 스키장 가는 버스 안에서는 잘난 체 하지 말자. 다 왔다고 깨울 때까지 그냥 자자.
두번째 난관 - 스키 장비 대여점에서
전화로 예약을 해 두었던 까닭에 각자의 이름이 적힌 스키와 폴, 스키 부츠와 스키복이 준비되어 있다. [왕건] 할 때, 나오는 아자개 같이 생긴 대여점 사장이 다가온다.
"아저씨는 이 옷을 입으세요. 사이즈도 딱 맞겠네요. 얼룩말 무늬 스키복입니다. 흰 색과 검은 색이 어우러져 활강할 때, 들판을 달리는 얼룩말처럼 속도감이 확 살아납니다. 화이트 블랙 호오스 웨아입니다. 하하하."
그렇게 말해놓고 자기도 쑥스러운 모양이다. 얼룩말이 언제부터 화이트 블랙 호오스였나? 어쨌건 폼 난다니 다행이다. 스키와 폴을 확인하고 스키 부츠를 한 번 신어 보았다. 로보캅 흉내내다가 쫄딱 미끄러졌다. 쪽팔렸다. 더럽게 미끄럽다.
두번째 교훈 - 왠만큼 배우면 개인 장비 사자. 스키 부츠 신고 무좀 옮은 건 나 밖에 없을 거다.
세번째 난관 - 옷 갈아 입기
얼룩말? 속도감? 놀고 있네. 이건 완전히 교련복이다.
요대하고 각반만 차면 스키 대신 총을 들어야 할 판국이다. 부장하고 둘이서 완전히 배달의 기수다. 게다가 멜빵을 잡아당겨 어깨에 걸었더니 바지가 엉덩이 계곡을 따라 아무런 저항없이 그대로 들어와 똥꼬에 쫙 낀다. 스키 타러 가기도 전에 속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불알 모양도 그 갯수와 함께 확연히 강조된다. 부장하고 내 꺼 합하면 세 개다. 씨바.
세번째 교훈 - 스키복은 가능하면 입어보고 빌리자. 얼룩말 무늬는 절대 피하자. 절대!
네번째 난관 - 스키장에 서다
스키장에 개인 보관함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신발 보관할 데 없을까봐 콘도 룸에서부터 스키 부츠를 신고 나섰다. 스키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종아리가 뻐근해졌다. 다들 스키를 내리고 신기 시작했다. 이거 어디가 앞이야? 어떻게 신는거지? 옆 사람 하는 걸 힐끗힐끗 보고 그대로 따라했다.
아, 뿌듯하다. 내 발 밑에 두 개의 플레이트가 붙었다. 드디어 나도 스키를 탄 거다. 올라 탄 거다. 사람들이 한 쪽으로 모이자고 한다. 저마다 쭉쭉 잘도 간다. 나도 팔을 내젓는다. 그러나 당최 움직일 생각은 않고 제자리에서 허둥대는 모습이 영락없는 '날씬한 몸매를 원하심까?' 헬스 기구 광고 그 자체다. 결국 스키를 벗고 손에 들고 가서 다시 신었다.
경험자가 앞에서 기초 교육을 한다. 넘어지는 연습부터 하란다. 그건 자신있다. 철퍼덕.
일어나란다. 근데, 이거 왜 안 일어나지지? 발을 한 쪽으로 모아 탄력으로 일어나야 된단다. 안된다. 결국 스키를 벗고 일어나서 다시 신었다. 아…
대략 10분을 자빠졌다 일어났다 하더니 이제 타러가잔다. 징한 넘! 리프트 대기장까지 멀기만 하다. 오늘 중에 갈 수 있으려나. 나는 다시 스키를 벗었다. 초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 쪽 어깨에 스키를 걸치고 여유있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걸었다. 대기장에 도착해서 스키를 내려놓는데 뒤에 꼬마넘이 다 들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엄마, 저 아저씨 엉덩이에 바지 끼었어."
네번째 교훈 - 초보 강습을 반드시 받자. 야메로 하지 말자. 잘한다고 재는 넘들, 진짜로 잘 안 가르쳐 준다. 돈 들더라도 꼭 전문 강사한테 배우자. 진짜다. 돈주고 배우자. 씨바, 눈물이 날라 한다. 훌쩍...
다섯번째 난관 - 리프트 타기
오호.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거다. 뚜껑없는 케이블 카. 과천 경마장 말 출발선같이 생긴 난간을 지나 줄줄이 서서 기다린다. 잘 앉아야 되는데. 뒤로 돌아들어오는 리프트 자리를 보면서 엉덩이에 살짝 낮춘다. 척! 드디어 리프트에 올라 앉았다. 두둥실 떠올라가는 리프트. 선녀들과 함께 홍길동이 율도국을 찾아 구름을 타고 나설 때의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비록 옆에는 마적 같은 부장이 앉아 있지마는 애써 시선을 피하고 스키장을 내려다본다. 가능하면 여기서 많이 아는 체를, 잘 타는 체를 해야 한다.
"부장님, 오늘 코스 좋슴다! 저기가 S자 코스군요."
"……"
"저기가 지난 번에 제가 외발스키 탔던 데 아닙니까, 하하하!"
초보가 스키장에서 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가능한 한 많이 구경하고 떠들어라. 고글을 가져갔다면 머리 위에 걸치고 노래도 불러라. 리프트에서 내리기 전까지 말이다. 내리기 전까지. 명심해라. 내리기 전까지…
다섯번째 교훈 - 리프트 타는 데도 이용권을 끊어야 한다. 그걸 입고 있는 옷에 붙여야 한다. 본 기자, 그거 진행 요원한테 안녕하세요 인사하면서 내밀었다가 개망신 당했다. 대뜸 그러더라.
"(밝은 조소가 섞인 미소와 함께)처음 오셨군요."
여섯번째 난관 - 리프트 내리기
본 기자의 경험을 토대로 보았을 때, 리프트에서 내리기는 스키 전 과정을 통틀어 가장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부분이다. 리프트가 도착지에 다다르면 보호 손잡이를 올리고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나를 당황하게 했던 것은 도착지 옆에 있는 안내 간판이다. "폴대를 쓰지 말고 앉아 계시면 저절로 일어섭니다." 졸라 어려운 헷갈리는 멘트다. 앉아 계시면 저절로 일어난다? 무슨 발기약 선전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그래, 믿어 보자.
잠시 후, 활강의 꿈은 개박살나고 정말 비참하게 자빠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폴대를 쓰지 말라고 해서 들고 있다가 발은 땅에 닿았는데 계속 앉아 있으니 리프트가 나를 도로 싣고 내려갈 것 같은 졸라 불안한 예감이 들어 풀쩍 뛰어 내리려고 했다. 근데 이 죽일 넘의 리프트가 꼭 삽으로 눈 치우듯이 나를 푹 퍼서 던져버리는 꼴이 된 것이다. 개구락지 된 거란 말이다. 진행 요원이 다가와서 팔을 잡아준다. 웃긴 왜 웃어? 더 쪽팔리게.
그 날 나는 도착지에서 한 번도 정상적으로 일어선 적이 없고 줄창 미끄러졌다. 나중엔 하도 자주 자빠지니까 서로 얼굴도 익히게 되고 진행 요원이 통성명이나 하자는 투로 어디서 오셨어요 물어보더라. 그래서 나는, 환한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XX전자 신입사원 연수 왔는데요."
여섯번째 난관에 얽힌 비화.
아시다시피 리프트는 쉬지 않고 사람을 실어 나른다. 계속해서 도착지에 사람이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날 후반부 내가 탄 리프트에 앉은 네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이 도착지에서 쫄딱 미끄러졌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뒤이은 리프트의 네 사람이 이를 피하지 못하고 우리 위에 엎어졌다. 연달아 네 대의 리프트가 사람을 포개놓고 가니 진행 요원도 어쩔 수 없었는지 사무실 뒤로 숨어 버렸다.
그런데 그 엎어진 네 세트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들이었다. 그 중에는 부장도 있고 인사부장도 있고… 내 밑에 깔려서 신음이 새어 나왔어도 진짜 신났다. 꼬소하다, 이 넘들아.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웃어 넘길 것이 아니라 미시 경제의 발현 원인이 되는 도미노 현상을 몸소 실험하여 문제의 심각성을 직접 체득하려는 연구 활동의 일환으로써… 그만 두자. 갖다 붙일려니 더 쪽팔린다.
답답한 가슴 풀어헤치고. 그래, 달리자! 세상 끝까지
우욱.. 멀미나...
나는 스키장을 다녀와서 친구와 함께 사우나에 갔더랬다. 친구가 한마디 한다.
"너 아직도 몽고 반점이 있네?"
그 날의 상처는 아직도 용변 종료 30초 경과시의 가쁜 신음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가까스로 출발선에 도착해서 아득히 멀기만 한 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필살 각오를 다지고 있는, 내가 온몸을 다 던져가며 출발지로 돌아오기까지의 감동적인 인간 승리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기대하시라.
피에쑤 : 다음 편 예고
1. 드디어 활강이다.
2. 달걀놀이와 봅 슬레이 즐기기.
3. 스키 타면서 2001 비전 생각하기
4. 리프트에서 여자 후리기
5. 스키타다 입이 찢어진...........??
6. 드디어 귀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