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를 펼치면 참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욥이란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인간들이 부러워하고 소망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처럼 보인다. 동방 최고의 갑부였고, 화목하게 지내는 열 남매를 거느린 가장이었다. 그리고 신앙심이 두터워 늘 하나님께 제사 드리며 경건한 삶을 살았다. 하나님도 욥을 보면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런 욥에게 어느날 갑자기 엄청난 시련이 닥쳐온다. 아니 시련 정도가 아니라 파탄이라고 해야 할 만큼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 많은 재산 다 없어지고, 그것도 모자라 열 남매가 한꺼번에 모두 죽는 그런 기막힌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욥에게 닥친 불행을 보면서 ‘왜 신앙생활 잘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욥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궁금해 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사단이 대화하는 가운데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상식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인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런 전제하에서도 욥기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도대체 인간이 뭐기에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한 인생을 마구 다루시는가 하는 분노를 금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인간이기에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해서 이 땅에 인간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고 믿어왔는데,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여기지 않으시는 것 같다.
1장 말씀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을 마치 자신의 장난감 정도로 다루신다는 생각이다.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단이 입씨름하면서 거론된 자가 땅에 사는 욥인데, 그 입씨름에서 누가 옳은가 확인하는 차원에서 욥은 이용되고 있으니, 마치 고래 싸움에 새우 등터지는 겪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한 인간을 이렇게 극심한 난관으로 몰아세우게 된 하나님과 사단의 주장은 어떤 것이었나 하는 점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욥이란 인물을 평가하면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8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평가에 대해 사단은 반기를 들고 나섰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9절) 란 것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욥이 참으로 순전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칭찬하셨고, 사단은 그가 순전하고 정직한 자여서 하나님을 공경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복되게 하셨기에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우겼다.
그렇게 서로의 주장이 맞서게 되니 하나님은 욥의 가진 재산을 빼앗아보라고 허락하셨고 그래서 사단은 욥이 가진 소유물을 빼앗게 된 것이다.
욥기는 42장이라는 많은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1장에서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이번 장에서 생각해야 할 부분만큼은 충분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은 어떤 위치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심히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아무리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고 하나 어떻게 하나님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멀쩡한 한 가정을 그렇게 파탄 낼 수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땅에서의 일들이 저 높은 하늘에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땅의 일은 인간들이 하기 나름이라고 여겼는데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에서 결정내린 사항이 이 땅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이 적이 놀라울 뿐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모든 의문은 다 풀린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도 어쩔수 없다. 그분은 자기 뜻대로 세상 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하신다. 자신의 계획하신 바에 의해 모든 인간은 살아간다. 이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된다.
욥이 모든 사람이 다 부러워할 만한 그런 환경에서 살게 된 것도 욥 개인의 행위와 무관했듯이, 그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고 참당한 환경에 처한 것도 그의 행위와 무관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자가 왜 그렇게 태어나게 된 것인지 궁금해 하며 던진 질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9:2]
이 질문은 던지면서 그들이 예상할 수 있었던 해답은, 부모 아니면 본인의 죄 때문일 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요9:3)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이 땅에서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사실.
욥기 2:1-13절
1장에서 벌어진 하나님과 사단의 내기는 사단의 완패로 끝나고 말았다. 사단의 주장은 ‘욥이 가진 모든 소유물을 치면 그는 하나님을 욕할 것’(1:11)이란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의 소유물을 빼앗도록 사단에게 허락했고, 사단은 그의 소유물을 빼앗았다. 그러나 모든 소유를 다 잃었지만 사단의 말처럼 욥은 하나님을 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라는 고백을 했다.
이제 2장에서는 사단이 최종적으로 하나님과 진리 대결에 나섰다. ‘아무리 욥이 대단한 신앙의 소유자라 해도 자기 생명보다 더 신앙을 소중히 여기지는 않을 것’이란 것이었다. 그래서 벌어진 사태가 욥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서 사단의 생각에 큰 오점이 있음이 발견된다. 1장에서도 “소유물을 치소서”라는 말이 있었는데, 2장 역시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4절)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신앙과 인간의 소유물이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조차 인간 개인이 가진 소유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신앙은 인간 개인이 자기 원대로 소유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는 것이란 점이다. 만약 신앙이 개인의 의지와 결단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단의 주장이 옳다. 즉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 인간인데 생명이 위태롭게 되면 그 생명 지키기 위해 자잘한 소유물들을 포기할 것이란 주장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기에 욥은 사단의 생각처럼 하나님을 욕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말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10절)라는 말을 했다.
욥의 아내는 신앙이 자신의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한 소유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랬기에 더 이상 욥의 생명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신앙을 버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욥의 처는 모든 인간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연히 내 삶에 보탬이 되어야 하고, 내가 원하는 복을 제공해야 한다. 만약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런 하나님을 섬길 이유도 없고, 그런 신은 믿어야 할 하등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 신앙은 인간이 소유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기에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로마서 8장 35절 말씀을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성도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입은 성도가 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세상의 그 어떤 세력으로도 끊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만약 욥의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이 욥 개인의 소유물이었다면 그는 그의 처가 말하는 것처럼 자신을 환란에 빠Em리고 질병으로 고통을 주는 그런 신을 저주하고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욥 마음대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철회한다거나 그를 저주하고 욕할 자유도 없는 것이다.
또 욥의 아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육체가 건강을 유지한다는 것이 내가 누릴 당연한 권리’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건강을 주신 분도 질병을 주신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인간은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이다. 창조주께서 자기 뜻에 따라 피조물을 지으셨다. 그러기에 피조물은 그저 창조주를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말은 욥의 처지가 예전과 비교할 때 너무도 비참하고 남들이 볼 때 차마 눈뜨고 못 볼 상황이 되었다 해서 그것에 대해 불평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저 모든 상황에서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건만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죄인의 악함이다. 우리에게는 감사의 조건이 따로 있고 원망할 조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경배와 찬양을 드릴 뿐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욥기 3:1-26절
하나님을 경외하고, 지상의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받고 부러움을 살만큼 넉넉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던 욥이 어느 날 갑자기 우환이 닥쳐와서, 그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다 소멸되고, 또 열 자녀가 한꺼번에 몽땅 죽는 비참한 사태가 벌어진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몸이 심한 악질이 생겨 문둥병 환자처럼 되고 말았다.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고통스러울 수 없을 정도의 최악의 사태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일을 당하면서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3장에 오면,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었던지 욥의 입에서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는 말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고(1절),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원망하기 시작한다(11-12절). 이것은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귀결된다.
우리의 바람은, 하나님의 칭찬을 들은 욥이 끝까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원망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실 인간이 이런 환경 속에서 어찌 불평이 나오지 않을 수 있으랴!
그렇다면 ‘욥의 불평과 원망이 정당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데, 이 부분을 말하기 전에, ‘과연 우리는 욥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태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 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점이 먼저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욥을 비난하려고 하면 최소한 욥과 같은 어려움을 겪고도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당연히 욥을 욕하며 그의 신앙이 엉터리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욥의 아픔을 감지할 수 없고, 그가 겪은 엄청난 시련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입장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태도는 성경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는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관점을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이 표준이 되어 세상 모두를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라면 욥과 같은 고통을 경험했기에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욥의 고통 이전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해야 하고 거기서부터 모든 논의의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
사실 본문은 ‘욥이 원망을 했느냐, 안 했느냐? 원망이 합당한가, 부당한가?’ 하는 그런 측면을 말씀하는 구절은 아니다. 우리는 욥과 똑같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그런 것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1장에서부터 참으로 생소하고 낯선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다. 지상에서 욥이라는 한 인물이 겪는 극심한 아픔이 하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전능하셔서 연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보살피시고 도우셔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그런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욥에게 갑작스런 고통을 안기시고, 그것도 욥이 하나님께 큰 죄악을 범했다거나, 혹은 이웃에서 고통을 주었다거나 하는 특별한 일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하나님과 사단의 의견 충돌로 하나님이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셨다는 사실 앞에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욥은 하나님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뽑힌 인물인데, 그 일 때문에 그는 졸지에 가족과 재산을 몽땅 다 잃고, 제 몸도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만약 내가 욥의 입장에 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내 현재의 삶이 100% 만족하다고는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신앙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직장이 있고, 건강한 몸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일시에 다 잃게 된다면 어떨까?
이런 의문에 대해 본문은 우리의 잘못된 관심과 관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주관자시고,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운행하시는데,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네가 무슨 권한으로 그분이 하시는 일에 이러쿵저러쿵하느냐는 것이다. 즉, 왜 모든 사고를 너 중심적으로 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네 고통, 네 아픔, 네 체면, 네 억울함, 너의 궁금증 등등.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불평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뭘 잘못 했기에 모든 것을 순식간에 다 빼앗아 가시냐고 따질 수 있다. 그러나 창조주의 입장에서 보면 하등의 문제될 것이 없다. 그분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운행하신다. 그래서 이런 환경도 만들었다가 저런 환경으로 변경시키기도 하신다. 창조주에게 왜 그런 권한이 없겠는가?
성도는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자이다. 여기에는 내 개인의 입장을 논할 여지가 없다. 그것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대목이다.
욥기 4:1-21절
욥을 위로하기 위에 찾아온 친구 엘리바스의 주장이 본문의 내용이다.
불행을 당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 왔으나 감히 입을 열 엄두도 못 낼 만큼 친구가 당한 상황은 참담한 것이어서 한동안은 그냥 통곡하며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친구 욥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주섬주섬 얘기를 하는데 듣고 보니 더 이상은 침묵할 수 없어서 무겁게 입을 연다.
‘너는 원래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으로 가르쳤고, 실의에 빠진 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던 자가 아니냐? 그런 네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실의에 빠지면 되겠냐?’ ‘죄 없이 벌 받는 자가 없고, 정직한 자가 망한 적이 있느냐? 너의 자랑은 네 행위의 완전함에 있지 아니하냐?’ 는 등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얘기들로 욥이 빨리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기를 촉구했다.
그리고 엘리바스의 자신의 주장이 단순한 자기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밤중에 하나님이 이상으로 자기에게 일러주셨다며 자신이 이상으로 깨달은 바를 이야기 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17-19절).
그러니까 친구 엘리비스의 주장은 한 마디로 ‘네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벌을 받아 이렇게 된 것이니, 빨리 그 원인을 찾아서 회개하면 다시 예전의 환경으로 돌아갈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사고는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이들이 가지는 평범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왜곡하게 만들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불만을 일으키는 요소로 등장한다.
욥이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잘 참는 듯하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불평을 터트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역시 ‘잘못한 것이 있으면 벌을 받는다.’ 는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경우를 놓고 보면, 본인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주셨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본다. 모순투성이요, 이유 없는 자기중심적 사고이다. 만약 ‘죄를 범했기에 벌을 받는다.’는 논리가 성립되려면, 역으로 ‘선을 행했기에 복을 받는다.’는 것이 성립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것들을 소유하며, 이웃으로부터도 사랑받으며 살았는데 그 때에는 그가 많은 선행을 했기에 그런 삶을 향유할 수 있었단 말인가?
우리의 생각 중에 가장 모순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몸이 병들고 아프다면 이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기에 내 몸이 건강할 때는 아무런 문제 제기도 없다가 몸에 이상이 생기면 그 때는 뭔가 문제 제기를 한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만약 이런 생각이 합당하려면 건강할 때, ‘내가 뭘 잘했기에 이렇게 건강한 몸을 주셨을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 어떤 이들도 자신의 몸이 건강할 때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없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몸이 건강한 것도 주님이 주신 것이요, 몸이 그렇지 못한 것도 주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병든 몸 때문에 주님을 원망할 일은 없어야 한다. 이것을 원망하는 자는 건강할 때엔 왜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는가?
모든 일이 잘 되고, 몸도 건강하고 이런 것을 당연시 여기는 자들이 이와 반대의 경우를 당할 때 불평하고 원망하게 된다. 주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 때문에 자신이 건강을 유지하고 있고 평안한 생활을 즐길 수 있음을 진실로 감사하는 자는, 반대로 몸이 병들고 평안이 없는 삶이 닥친다 해도 원망하지 않는다. 욥기 초기 고백처럼 주신 자도 여호와, 취하신 자도 여호와인데 뭐가 문제인가?
하나님은 욥기를 통해서 사단의 하수인이 된 인간들의 생각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가를 말씀하신다. 그래서 맨 먼저 사단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셨고, 그 이후 욥의 친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욥의 생각이 허망한 것임을 일러주신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앞에 모든 피조물은 그저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해할 수 없어도 불평할 수 없는 존재들이 인간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자신의 지혜를 욥기를 통해 보여주시면서 진정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밝히신다.
욥기 5:1-27절
인간은 막연하지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산다. 그러기에 고통에 처한 자들을 위로하는 표현도 역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는 것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이런 말이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말도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회개하라.’는 것(1-16절)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다시 너를 축복하실 것이다.’ 라는 것(17-27절)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전혀 복음이 아니며 진리도 아니다.
엘리바스가 말하는 이런 내용은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자들도 능히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며, 이방신을 경배하는 자도 얼마든지 사고할 수 있는 평범한 인간 이성에서 도출된 것에 불과하다.
만약 이런 것이 복음이라면 굳이 예수 믿을 이유도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복음이라고 외칠 이유도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래서 그런 복잡하고 믿기 힘든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인간 이성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고,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생각들을 주고받으며 편히 세상살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들이 상상하거나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아이디어에서 나왔고, 그러기에 인간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지며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면 거부하고 외면하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어려움에 처한 친구 욥을 위로하는 내용은 전혀 생소하거나 받아드릴 수 없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고 듣기 좋은 장밋빛 희망을 전했다.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 것이라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 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24-26절).
이런 헛된 위로를 남발하면서도 엘리바스는 자기 말에 대한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상으로 보았다(4:13)고 하고, 깊이 연구한 것(5:27)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참 진리를 깨달은 자는 자기 생각을 긍정하기 위해 변명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진리 그 자체를 전할 뿐이며, 인간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이것이 무슨 뜻인가? 복음은 아무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란 말이다. 즉 십자가가 어리석게 들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 얻을 자에게는 그것이 믿어지고 깨달아진다. 물론 이것이 인간의 지혜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전도자의 태도는 엘리바스처럼 자신의 외침이 진리라고 굳이 변명하거나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작업에 나서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굳이 진리를 아름답게 포장해서 진리 됨을 나타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 자체가 진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겉으로 잘 꾸미고 아름답게 장식해야만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진리를 진리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시면서 진리를 자기 백성에게 전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 구출 작업이다. 이렇게 되어야만 진리를 발견하고 생명을 얻은 자들이 자기 열심이나 지혜를 자랑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만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듣기 좋은 말은 사단이 속삭이는 거짓 복음이며, 헛된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참 생명의 말씀은 귀에 거슬리고 우리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게 가다온다. 오직 주의 영이 임하셔서 믿음으로 깨닫게 된다.
재산 잃고, 건강 잃고, 친구 잃고, 희망마저 잃어버린 욥에게 친구 엘리바스가 말하는 내용이 참 복음이 될 수 있을까? 다시 재산을 모을 것이고, 건강도 회복할 것이고, 친구도 돌아올 것이며 새로운 희망이 찾아올 것이란 말이 진정 복음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고통스럽고 외롭고 쓸쓸한 환경이 평안과 즐거움과 행복한 환경으로 바뀐다고 해서 이것을 복되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을 아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참 복음을 깨달은 자는 주님의 주 되심으로 지금도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성취하심에 찬양하며 감사하는 자이다. 내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그분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자리가 복된 은혜의 자리이다.
욥기 6:1-30절
엘리바스의 주장에 대한 욥의 변론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첫째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무게에 대해 서술하고 있고, 둘째는 죽음을 갈구하는 마음을 피력했다. 그리고 셋째는 신실치 못한 친구들에 대해 원망하면서, 무턱대고 비난하고 욕할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지적해 달라고 안타깝게 호소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닥쳐오는 고통을 해소하면서 살아간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일 또한 자기 고통 해소 차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아담 후손들의 한계이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필요와 자기만족을 위해 산다.
욥이 위대한 신앙인인 것 같으나 그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 앞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자신을 비난하고 욕하는 친구들에게 화내며 자신을 변명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하며 더 이상 고통이 지속되지 않기를 갈구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의 신앙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임을 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누구도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없고, 피조물의 위치에서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생을 보내는 이가 없다.
그래서 믿음이란 것이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뜻에 따라 나눠주시는 선물이란 사실을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새삼 느끼게 된다. ‘믿음 없는 나’, ‘내 만족과 내 욕망과 내 기쁨을 위해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나’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실상이다.
이런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도 당연하고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징계 앞에 한 마디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런 자들에게 주님의 용서가 베풀어지고, 그 은혜를 알게 되고 믿게 된다면 이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에 의한 것이다.
욥이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그 또한 평범한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그를 붙들고 계시고 그의 허물과 죄를 정죄하고 참소하는 자들의 방패가 되시어서 그 누구도 그를 향해 비난하지 못하도록 막으신다.
그러나 욥은 이런 하나님의 깊고 높은 사랑을 아직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고통만을 호소하고 있다.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고,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빨리 고통이 멈추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죽기를 바란다는 말을 여러 사람이 하는데 여기에도 두 종류가 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너무도 사모하는 나머지 빨리 육을 벗고 싶은 생각에서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욥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고통이 너무 견디기 힘들기에 그 고통이 멈추기를 원해서 죽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자들이다.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사실이 큰 착각이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데.
욥은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그 다스림 속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을 인간과 대화하고 의견을 조율해서 어떤 일을 결정하시는 그런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처럼 성실하게 살아가고 부지런히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당연히 평안과 즐거움과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에게 난데없는 고난이 닥쳐왔고, 그 고난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또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되니 고통은 더 배가된 것이다. 육신의 고통과 함께 심적인 고통이 동반된 것이다.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10절)는 말이나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24절)는 외침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나온 발언이다. 예전에 남들에게 칭찬 듣고, 평안하고 화목하게 살았을 때와 현재의 내 심성이 조금도 바뀐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내 환경이 이렇게 곤두박질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긍휼을 줄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바꿔 말하면 기쁨을 줄자에게는 기쁨을 주고, 슬픔을 줄자에게는 슬픔을 주시는 그런 자유를 지닌 하나님이다. 내가 슬픔을 당한다고 해서 ‘왜 내게 슬픔을 주십니까?’ 하고 항변할 수 없는 처지가 우리 처지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주이기에 자기 영광을 위해 자기 뜻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란 말이다.
욥기 7:1-21절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11절)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욥은 지금 자신이 당하는 억울함과 끝없는 고통과 괴로움으로 당연히 하나님께 따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런 인간의 태도가 합당치 않음을 알게 된다. 아니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고 경배하며 찬양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 요셉이 그러했고(창 39장), 사도 바울 또한 그러했다(빌 4장). 다윗은 시편 136편에서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성도가 하나님께 원망이 아닌 감사와 경배만이 합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어느 누구도 고통을 기뻐하며 즐길 수는 없는 일이다. 육을 가진 인간이기에 아픔이 올 때는 온 몸으로 아파할 수밖에 없고, 근심과 걱정이 닥쳐올 때 염려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픔과 염려가 성도가 얻은 영생을 가로막을 수 없기에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 몸이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다. 그러기에 주님이 십자가 지신 것이 사실이듯, 우리가 죄 사함 받은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런 엄연한 현실 앞에 무엇이 우리를 가로막을 수 있단 말인가? 원수가 나를 핍박한다고 해서 주님 십자가 지신 일이 무효화 되겠는가? 아니면,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큰 죄악을 범한다고 해서 그 행위가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 사죄하신 그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오직 감사와 경배와 찬양만이 합당한 것이다.
그리고 죄인이 고난당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래서 죄인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몸이 병들어 아프고, 또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을 수 있는 등등의 일을 이상히 여길 것이 일이 아니다. 이런 우리들이 평안을 기대하고 행복을 꿈꾸는 그 자체가 욕망이다.
이처럼 인간의 본래 모습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 자이기에 어떤 형편이 닥쳐와도 불평할 수 없는 자이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요, 그러기에 원망과 불평이 하나님께 돌아간다. 그러기에 원래의 내 모습을 제대로 깨닫는 자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다. 아니 그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한다.
내게 좋은 조건을 허락하셔서 그 은혜만을 감사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자가 아니다. 조건의 호, 불호를 떠나 그분의 살아계심 그 자체를 감사하는 것이 성도의 태도이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 성도는 용서 받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워져 있다. 이 관계보다 더 크고 분명한 관계는 없다. 그러기에 성도는 날마다 제 허물을 보면서 주님의 용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감탄하게 되고, 심령으로부터 감사가 터져 나온다. 이렇게 되지 않고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절제하고 힘써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 자랑하려 한다면 그는 용서 받은 자의 자세가 아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는 말씀을 기억하는가? 이것이 원래 우리의 모습이다. 이 본래의 내 모습을 잊으면 아니 된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욥1:21)는 말씀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요, 빈손으로 와서 아무 것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현재의 나를 생각해 보자.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가? 물질적인 것도 엄청나게 받아 누리고 있고, 이보다 더 큰 것을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생명을 새롭게 받은 것이다. 죽었던 우리가 주님의 대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더불어 영생하는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런 우리가 육신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겠는가?
욥기 8:1-22절
욥을 위로하기 위에 찾아온 친구 중 하나인 빌닷의 주장이 나오는데, 이 주장 역시 예전 엘리바스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즉 ‘무엇인가 잘못 한 사실이 있기에 벌을 받는 것이니 그 문제를 해결하면 과거보다 더 큰 은총을 누릴 것’이란 내용이다.
출발부터가 문제다. 지금 욥이 당하는 일을 징벌이나 징계로 여긴다는 것 자체가 착각이다. 욥은 지금 온 몸이 만신창이 되고, 자녀들이 다 죽고, 가산을 몽땅 잃었지만 이것이 결코 하나님께 잘못한 일이 있어 벌 받는 차원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발상이다. 어떤 일이 잘 풀리고 원하는 대로 진행되면 그것은 신의 은총으로 여기고, 반대로 욥처럼 환경이 어려워지고, 원치 않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 그것은 신의 저주, 혹은 징벌로 여긴다.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시는 형벌은 지옥으로 보내시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는 천국인데 영생을 얻은 자는 이 땅에서 어떤 일을 당해도 그것을 불행한 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 그런 저런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영광을 찾으시고, 궁극에 가서는 그와 더불어 영생하시기 때문이다.
이 땅의 삶은 잠시 거쳐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과정이 어떠하든 그것을 놓고 복이니 저주니 하는 평가자체가 심히 어리석은 죄악된 발상이다. 건강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던 자녀들이 한 날 한 시에 다 죽은 일을 가지고 ‘그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에 그런 일을 당했다’는 빌닷의 주장은 보편적으로 죄인들이 지니고 있는 생각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런 사고는 돌이켜 말하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바른 삶을 살면 더 좋은 일이 발생할 것이란 생각으로 귀결된다. 그런 사고에서 나온 말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구절이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꿈꾸는 것이 인간이다. 이들이 기대한 것처럼 일이 이루어지면 이것은 복이고, 반대의 경우가 되면 저주다. 왜 이런 식의 평가가 일어나는가? 그것은 최후 심판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빌닷의 주장대로 그들이 원하는 일이 성취되고, 모든 것에 흡족할 만한 그런 삶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자. 마치 욥이 과거 행복했던 시절을 다시 찾는 것처럼. 그러나 그 삶의 끝이 지옥으로 귀결된다면 그 전에 이 땅에서 누렸던 부귀영화를 복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하면, 현재 욥이 당하는 이런 극심한 고난을 지속하다가 그 영혼이 주님 품에 안겼다면 욥이 거친 고난의 삶을 저주로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올바른 평가를 내리려면 최후를 알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그 시점이 이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알고 감사한다. 자신이 당하는 육신의 어떤 문제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는다. 이 말은 내 몸의 안락과 연관해서 복과 저주를 논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사도행전 13장 48절 말씀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확실한 말씀이다. 누가 복을 받은 자인가? 육신의 안락을 추구하는 자를 복된 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가 복 있는 자다. 그리고 이렇게 작정된 자는 결국 다 믿도록 조치하신다. 이 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 어디 있는가?
이사야 53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구절은 무엇을 말하는가? 간추려 말하자면, 우리는 몽땅 죄인이라 엉뚱한 길로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대신 죽게 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에게 착하게 살아야만 천국 넣어주겠다는 것이 아니요, 또 복 받기 위해 어떤 일을 하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그냥 우리의 죄악을 그 아들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뭘 더 바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게 우리 죄악을 담당시키셨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스스로 죄 씻을 방도를 간구하게 된다. 즉 자신의 선행으로 죄도 탕감 받고, 복도 따 내겠다는 것이다. 마치 본문에 등장하는 욥의 친구 빌닷처럼. 이런 자들을 향해 갈라디아서 5장 4절에서 주님은 참으로 냉담한 말씀을 던지셨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잘못된 사단의 속삭임에 속지 말자. 성도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이며,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받은 자이다.
욥기 9:1-35절
모든 성경이 다 그러하겠지만 특히 욥기의 내용은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시켜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 하는 점을 폭로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부각시키는 것으로 말씀을 끝맺고 있다.
인간들은 누구나 보편적인 신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보편적인 신관으로 하나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고, 또 그런 관점으로 세상 만물을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의 상식적인 관점 모두는 전혀 하나님의 지혜와는 무관한 것이며, 오히려 참 하나님을 배척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미리 결론부분을 조금 인용하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향해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38:1)고 책망하시고, 이에 대해 욥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고 하면서 회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사실 십자가 사건이 이렇게 해서 유발된 것이다. 인간들이 기다리고 알고 있는 메시아관으로 판단해 볼 때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우겼다. 그러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비쳐졌고, 도저히 그냥 묵과할 수 없어서 결국은 죽인 것이다. 메시아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으로 여겨지고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온다(고전1:18).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조롱하고 비웃으며 그것 외의 다른 방법의 구원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은 없지 아니한가?
오늘 본문에서도 욥은 나름대로의 신관으로 열심히 하나님에 대해 논하고 있다. 창조주로서 하늘을 펴시며 각양 별들을 만드셨고, 지혜가 한이 없으신 분으로 그분의 질문에 인간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전능자로서 산을 무너뜨리기도 하시고 땅을 움직이기도 하시는 분으로 묘사했다.
물론 하나님은 욥이 표현한 것처럼 전능자이며 한없는 지혜를 가진 분이기도 하고, 창조주이시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지식으로는 참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즉 인간의 지혜로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이 부분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분이 창조주이며, 전능한 분이고, 지혜로운 분으로서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란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으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정도로 아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욥이나 욥의 친구들도 이런 정도로는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회개해야 했고, 그들의 신관을 다 버리고 참 하나님을 다시 알아야 했음을 상기하자.
성경은 참으로 인간의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대표적인 구절 중 한 대목을 살펴보자. 요한복음 12장 40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해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시는 분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위 구절에서의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적극적으로 막으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못 보게, 그리고 못 깨닫게 하기 위해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 이성으로 알 수 없는 분이란 말이다. 이런 하나님이기에 그분 스스로가 자신을 나타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분을 알 방법이 없다.
인간의 경험과 지식, 사고를 가지고는 기껏해야 욥과 그의 친구들이 말하고 있는 그런 정도의 신관을 가질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데 아직 많이 부족한 정도의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혀 엉터리로 알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 즉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의 뜻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의 참 모습을 보게 하신다. 이런 은혜는 아무에게나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에 한해서 주어지는 은총이다. 따라서 참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은 인간의 지혜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하심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욥기를 보면서 더 이상 내 경험과 지혜로 하나님을 알려는 교만을 버리고, 철저히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말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이외의 하나님은 다 우상이다.
욥기 10:1-22절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나 이런 끔찍한 사태는 늘 벌어지고 있다.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들의 불평과 원망이 타당해 보이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다.
2절에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라는 구절은, 욥의 심정을 너무도 잘 표현해 주고 있는데, 이것은 욥이 스스로를 죄 없다고 단정하고 있기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죄 없는 나를 왜 이렇게 곤경에 처하도록 하십니까?’ 라는 하나님을 향한 반발심이 그대로 실려 있다.
죄 없는 인간도 없거니와, 설사 죄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주님은 자신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해 소경을 소경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그런 분이다(요 9장 참조). 그러기에 욥이 갑자기 환경이 변하여 고통에 처한 사실은 자기 죄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자기 뜻을 펼치시기 위해 욥을 그렇게 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사45:9) 라는 이사야의 말씀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창조주의 하시는 일에 피조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징벌하는 차원에서 인간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실 경우가 있다. 그러나 죄를 징벌하는 것과 무관하게 우리에게 아픔과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 이런 사실에 대해 인간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욥이 자기 고통을 죄의 형벌차원에서만 생각해서 특별히 범죄한 사실도 없는 자신을 왜 징벌하시는가 하고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왜 욥처럼 이런 불평들을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살아가게 되는가? 그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욥이 자신을 죄 없는 사람으로 규정하듯이 우리 또한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를 잊고 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원래 죄인은 심판받아 멸망한 자이다. 그런 우리의 형편을 정확히 안다면 환경이 좀 열악해 지고, 과거에 비해 생활하기 더 힘들어졌다고 해서 감히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지 아니 한가?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라고 말 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는 큰 그림이 있다. 그 원대로 하나는 이렇게 만들고, 또 다른 것은 그와 달리 저렇게 만드셨다. 그러기에 피조물끼리 서로 비교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해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려면 우선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점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없다는 점이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를 깨달은 후에라야 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그분을 향한 경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여겨 열심히 공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깊이 생각하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 또한 전혀 무지한 발상이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고 궁구해도 자신이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자란 사실에도 둔감할 뿐이다.
자신이 죄인인줄도 모르고, 삶의 이유도 모르는데 그런 자를 향해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가? 또 어떤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인정할 수 있는가? 전혀 아니다. 아무런 가능성도 없다.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그 가능성은 죄 지을 가능성뿐이다.
이 부분에서도 인간들은 착각하고 있다. 본인의 의지에 따라 죄를 범할 수도 있고, 선을 행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일을 해도 불의한 것이다. 본인은 선한 일이라고 여길지 모르나 주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하는 일 모두는 불의한 것이다.
왜 그런가 하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일 외에는 의가 없기 때문이다. 불의란 말은 의가 아니라는 표현이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의를 행할 수 없고 불의만을 행할 뿐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이 어떤 일을 할지라도 불의한 것이다.
욥은 아직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에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이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 자신이 죄인인줄 알 때만이 불평 아닌 감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