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가 걷기 시작했고 딸아이의 뱃속에는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 둘째아이를 낳게 되면 여행이 어려워지니 이번에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다. 오키나와로 말이다. 대만과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 끼어, 먹거리나 풍경이 일본이라기보다는 동남아쪽에 더 가깝다. 겨울에도 춥지 않고 봄이 1월이면 찾아오고 낮은 건물들과 야자수와 코발트빛 바다로 동양의 하와이라 불린다. 도쿄에서 비행기로 3시간 한국에서 2시간20분 거리다. 휴양지다. 오랜만의 해외여행이라 두근거린다.
새벽 5시에 집에서 출발하였고 9시50분 비행기를 탔다. 오키나와 나하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찾고 나니 점심때다. 세찬 바람이 불고 비가 간간이 내렸지만 무엇이 문제랴. 전통 일본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물론 꼼꼼한 딸과 사위의 계획표에 들어있는 장소다. 두꺼운 소고기에 소스를 묻혀 튀겨낸 뒤 그것을 다시 개인별 작은 불판에 올려 구워먹는 음식이었다. 우리나라 고기전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고소하였으나 점차로 느끼해졌다. 좁은 장소에 테이블을 가깝게 놓았다. 서비스하는 아가씨들이 겨우 지나다닐 공간만 남아있었다. 맛집이라더니 손님들은 꽉 차 있었다. 모토뮤라 규카츠 란다.
국제거리가 가까이 있었다. 전쟁 후 도시 복구 과정에서 가장 눈부시게 발전한 도시다. 당시의 국제극장 이름을 따서 국제거리라 이름 붙여졌다. 쇼핑 위주의 거리다.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했고 백화점과 극장이 보였다. 명동거리처럼 사람들이 북적였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니 큰 비닐 우산을 두 개 샀다. 돈을 지불하는 방법이 특이했다. 현금을 사용하는데, 직원이 직접 돈을 받지 않고 현금을 넣는 기계를 사용했다. 지폐를 넣는 구멍과 동전을 넣는 구멍이 있고 그리고 잔돈이 나오는 구멍이 있었다.
슈리성에 갔다. 비가 내리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딸아이를 따라갔다. 류쿠왕국의 성이다. 고성중 고성이다. 1945년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의 공격으로 잿더미로 변했다. 성터에 류큐대학이 세워졌다가 이전되었고 1992년 성의 주요 건물이 재건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복원된 건물이 아니라 슈리성 터 가 등록되었다. 2019년에 화재 발생하여 전소되었고 현재 재건중이다. 매년 새해에 신춘연 축제가 진행된다. 전통음악 연주와 무용공연이 있다. 매년 10월과 11월 사이에 류큐왕조 축제 슈리 가 개회된다. 국왕와 왕비가 행차하는 퍼레이드는 과거 류큐왕국을 재현한다. 손자와 함께 바라보는 슈리성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오키나와는 길다란 고구마 모양의 섬이다. 1972년 일본으로 반환되기 전 약 26년간 미 군정 시기를 겪었다. 특히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음식문화는 미국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 많다. 남부와 중부와 북부로 구분된다. 손주를 위해 다다미 방이 필요했다. 아기가 있어 짐이 많아 숙소를 옮기는 일이 쉽지 않으니 중부에 숙소를 정하고 남부와 북부를 오가기로 했다. 숙소는 바다를 끼고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수영장에서 식당에서 카페에서 열 걸음 걸어 내려가면 바다였다. 방으로 가는 복도가 양쪽으로 있고 그 사이에 직사각형으로 뻥 뚫린 공간이 있는데, 초록 식물이 일층부터 사층까지 일직선으로 자라 있었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진기한 풍경이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시간 차이가 없으니 제 시간에 잠을 자고 제 시간에 일어났다. 손자가 초록빛 바지에 수박 그림이 있는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에구 귀여워라. 손자가 옆에 있으니 무조건 즐겁다. 추라우미 수족관에 갔다. 물고기도 많고 사람도 많다. 8m 고래상어가 압권이었다. 규모는 세계 2위란다. 형형색색의 열대어, 거대한 가오리, 신기한 산호초까지 다양했다. 돌고래쇼도 보았다. 드넓은 바다를 끼고 돌고래가 뛰어오르고 박수를 치고 체조선수들처럼 공중돌기도 했다. 손자의 궁금해하고 놀라는 모습이 더 신기하고 더 행복했다.
100년 전통을 이어 내려온 유명 장수 음식이 있다는데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산속에서 만났다. 우휴야 란다. 대가의 향 이라는 한자 팻말이 보였다. 고옥의 풍취도 풍취려니와 집옆에 경사면을 그대로 살려 정원을 가꾸어 놓았다. 꽃과 나무와 물이 흐르는 풍경이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테이블과 가까웠다. 자연스럽고 고풍스런 분위기만큼 맛이 좋을까. 일본식 집밥으로 유명하다는데 맛보다는 그곳의 분위기를 즐겨보라고 했단다. 맛은 별로라는 얘기. 우리는 간단하게 소바를 선택했다. 국수 위에 돼지고기를 듬뿍 올려놓았다. 돼지고기라.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었다. 국수는 덜 익은 것 같은 식감인데다가 국수 위에 돼지고기는 거리감이 들었다. 몹시 짭짤한 맛이었다.
노란색 셔틀버스를 타고 파인애플 농장을 빙 돌아 파인애플 파크로 갔다. 파인애플 모양의 작은 차를 타고 파인애플 송을 들으며 농장을 구경하였다. 파인애플뿐만 아니라 각종 열대나무들이 정글처럼 가꾸어져 있었다. 윤기가 나는 푸른빛으로 지나치게 가득 들어차서 마치 초록빛 감옥에 있는 기분이었다. 곳곳마다 다양한 공룡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면서 소리를 질렀다. 기념품샵과 카페와 와이너리가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다. 파인애플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파인애플 송이 셔틀버스와 파인애풀 작은 차를 타는 내내 흘러나왔고 내려서 농장을 구경하는 내내 흘러나왔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흥얼거렸다. 파파파파 파인애플 파파파파 파인애플....
아침 일찍 바다를 끼고 만들어진 호텔 주변 산책로를 걸었다. 푸른바다가 펼쳐져있고 마침 날씨가 맑아 하늘은 파랗고 야자수를 비롯한 열대식물들과 꽃들로 장식되어있는 산책로는 아름다웠다. 확 트여있어 시원했다. 소박하게 꾸며진 작은 결혼식장도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시간이었다. 여행은 여기저기 둘러보는 재미도 있지만 이렇게 색다른 풍경에서 천천히 걷거나 앉아서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 일, 여행의 진수다. 나는 말했다. 바닷가를 걷거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좋아. 너무 좋아 어디 구경 안가도 좋아.
오키나와 동물원에 갔다. 손자가 손가락질을 하며 궁금해 하는 모양새는 얼마나 귀엽고 대견한가. 하마와 개미핥기 기린 사자 원숭이 뱀등 150종의 동물을 사육하고 있다. 큰 연못이 있는데 잉어와 물고기와 오리를 보았다. 흐린 날씨 덕분에 천천히 한시간 가량 동물들을 구경하면서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오랜만에 동물구경이었다. 손자가 없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손자 만세! 손자 최고!
아메리칸 빌리지에 갔다. 중부에서도 손꼽히는 관광지며 종합 쇼핑 타운이다. 미군 비행장으로 쓰이던 부지를 반환받아 미국 샌디에이고의 시포트 빌리지를 모델삼아 조성했다. 오키나와와 미국을 동시에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 곳으로 쇼핑, 먹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까지 다 갖춰 만족도가 높다. 타코라이스라는 스테이크와 밥을 먹었다. 남편이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덕분에 나도 열심히 먹었다. 사실 인풀란트를 임시로 심어 사용해보는 중이었는데, 그만 젤리를 먹는 중에 빠져버렸다. 한쪽 어금니가 부실하니 고기를 씹는 일이 쉽지 않았다. 미국식 달달한 블루씰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을 했다. 오키나와 미군 부대에서 1972년부터 대중화되어 대표 아이스크림 브랜드로 거듭났다는데,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아침을 먹고 수영복을 입은 손자와 만났다. 엷은 노란빛 옷에 모자까지 쓰고 크록스를 신었다. 어찌나 귀엽던지 쫒아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꽉 안아주었다. 날씨가 화창하니 바다로 직진했다. 사위와 딸과 남편은 아이를 가운데 두고 신이났다. 나는 뜨거운 햇볕을 피해 파라솔 아래 누워 바다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아끼며 사느라 바다에 가도 파라솔 한번 빌려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수영복이라도 근사하게 입었다면 아니 젊었더라면 파라솔과 바다와 더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래도 흰빛깔의 챙이 넓은 얇은 모자라도 쓰고 있으니 바닷가 기분은 난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는 이 기분, 짱이다.
수영장으로 이동했다. 야외 수영장은 햇살이 뜨거워서 건물 안쪽의 수영장으로 갔다. 처음에는 물이 차가워 우리는 구경만 했다. 딸과 사위와 손주가 신나게 노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달라졌다. 사람이 별로 없으니 부담없이 간편한 차림 그대로 풍덩. 물속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마음이 넓어지는가. 웃음이 절로 나온다. 우두커니 앉아 구경하고 있는 남편도 오늘의 이 즐거움을 놓치면 안되겠다 싶어 소리쳤다. 들어오셔 들어오셔 손주와 놀아야지. 후후후 손주라면 목숨도 내 놓을 남편이 어찌 참으랴. 물 속으로 풍덩. 함께 놀았다. 이 시간을 무엇과 바꿀까.
만좌모 코끼리상을 보러 간다. 푸르고 너른 바다가 있고 바닷물에 깎이고 깍인 절벽이 코끼리 모양을 이루었다. 어디를 가도 아파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근사하게 지은 전원주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소박하고 낮고 밋밋한 회색 집들이 대부분이다. 차 역시도 대부분 소형이다. 남에게 보여주기보다는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 엿보인다. 우리가 배울 점이다.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옷으로 자신을 내보이고 싶어하는 한국 사람들의 허영심과 비교된다. 복도식 연립주택 형태가 많은데 우리나라처럼 복도에 창을 만든 곳은 보이지 않았다. 저녁은 Jack in the steake에서 스테이크와 우동을 맛있게 먹었다. 밖으로 나오니 건물 사이에 노을이 가득하였다. 축복받은 오늘이 분명하였다.
짐을 싸고 비행장으로 출발. 시간이 남아 오키나와의 산토리노 라는 곳으로 갔다. 나하 공항이 바다를 끼고 가까이에 있었다. 비행기가 착륙하는 모습이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그곳은 집도 층계도 바닥도 흰색이다. 야자수와 열대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산토리니를 닮았다. 손자가 비행기를 보고는 손을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 처럼 움직이며 우웅웅 소리를 냈다.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나도 손자와 똑같이 손가락질을 했다. 손자와 같은 몸짓으로 같은 소리를 내는 일, 행복이다. 과일 음료로 목을 축이고 공항으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