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노조의 시국선언과 관련하여!!
와각지쟁(蝸角之爭)?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이런 저런 불필요한 피해를 줄이고자 “노조의 이름으로 시국선언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전교조 식으로 공직자 개인의 서명을 받아 시국선언을 하는 게 옳다”라는 주장이 있다. 양자의 입장차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논리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단순하기 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이명박 정권이 민주주의를 퇴보시키는 작금의 상황을 결코 좌시해선 안 된다는 차원에서 “공무원노조의 이름으로 문제를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고, 후자는 시국선언은 개인의 서명이 담겨야 시국선언 본연의 뜻에 맞는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전교조식 시국선언을 해야”한다는 논리다.
2004년 총파업 논리?
나는 2004년 총파업 당시 노조지도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따라서 총파업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온갖 유 ․ 무형의 비난을 면하지 못했지만, 나는 총파업의 부당성을 끊임없이 지적했다. 그럼에도 대세는 시위를 떠난 화살이요, 내 던져진 주사위의 형국이었다.
당시 우리 수원시지부의 간부들 가운데 아마도 유일하게 총파업 반대논리를 폈고 때가 무르익길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태수습하기에 바빴고 무너진 조직을 재건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 번 신뢰를 잃은 조직이 다시 이전의 조직으로 재건되기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변화(變化)’를 인정해야!
시간은 흘러 어느덧 5년이 되어 가지만 이전의 노무현 정권이나 현 이명박 정권이나 공무원노조에 대한 탄압의 양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노조의 대응 또한 마찬가지다. 뭐 약간 달라진 형태라면 합법노조라는 것 정도가 아닐까. 조합원의 숫자와 조직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진정 지도자라면 ‘변화’의 의미를 되 세길 때다. 무엇이 ‘변’이고 무엇이 ‘화’인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한다. 현명함과 우둔함의 차이는 그 때를 잡거나 놓치는 일에서 비롯된다고 하지 않던가. 호리지차(毫釐之差)를 보라. 초기엔 거의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벌어진다.
화쟁사상(和諍思想)과
원효가 살던 신라 때에는 크게 중관과 유식이라는 두 학파가 존재했다. 먼저 중관사상(中觀思想)은 진여문(眞如門)이라고도 하는데, 이에 속한 이들은 늘 부정에 치우쳐 부정하는 주체와 부정당하는 객체를 모두 싸잡아 부정함으로써 철저히 부정에 떨어져 결국 허무주의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와는 상대적인 유식사상(唯識思想)이 있었다. 생멸문(生滅門)이라고도 하는데, 이에 속한 이들은 모든 교리를 잘 분별하고 매우 정밀하게 정립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세운 가설을 다시 부정하고 나오지 못하여 결국 ‘유(有)’에 집착하는 폐단이 있었다. 마치 지금의 우리 노조 지도부와 흡사한 양상을 띤다고나 할까.
원효는 양자의 사상을 면밀히 분석하여 모두 비판하고 두 사상을 아우를 수 있는 화쟁사상(和諍思想)을 주창했다. 화쟁사상은 오늘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사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관련 학계에서는 비상한 관심 속에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 노조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만하다.
권도(權道)를 발휘할 때!
평소 시동생은 형수와 손을 잡지 않는 것이 상도(常道)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일 경우 시동생은 형수의 손을 잡기도 한다. 예컨대 형수가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을 때, 형수의 손으로 보지 않고 손을 내밀어 형수의 손을 잡는 것이다. 과거 총파업 때 노조와 정부는 ‘상도’만 주장하다가 양자 모두 큰 상처를 남긴 바 있다.
우리 노조는 당시 정부의 공무원노조 특별법안을 매우 신랄하게 공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부는 마치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를 상대로 정책을 수립하는 것과 같은 모습들이었기 때문이다. 헌법에도 보장된 노동 3권을 정부가 헌신짝 취급하고 있음에 비판은 당연했고 앞으로도 이에 대한 비판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작금과 같은 투쟁일변도의 노동운동 또한 여론이 곱지 않음을 냉철히 인식해야 한다. 이는 정부가 엄청난 탄압을 가하는 요인이 됨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이 악(惡)을 알면서도 그에 굴복하는 것은 잠재적 두려움에서 출발한다고 하지 않던가. 정부의 초법적 대응을 냉철한 이성을 통해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이야 말로 중용의 자세가 필요!
시국선언과 관련하여 ‘지금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중용(中庸)을 지켜야 할 때다. 중용이란 대충 중간쯤 서 있는 것을 중용이라 뜻하지 않는다. 죽어야 할 땐 죽는 게 중용이요, 살아야 할 땐 살아야 하는 것이 중용이다. 물론 중용이란 선(善)한 일에만 존재하지 악(惡)한 일에까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사람을 해(害)하는 데 있어서 적당한 수를 골라 해하거나 전쟁(투쟁)을 하면서 적당히 전쟁하는 것 등은 성립하지 않는 것처럼 중용은 선한 일에만 해당된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지금은 죽어야 할 때가 아니라는 얘기다. 주체성은 온데간데없이 오직 지도자를 자처하며 마구 주장하는 듯 보이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큰 용기(勇氣)를 취할 때!
손자(孫子)는 지도자의 덕목을 “지혜”와 “믿음(신뢰)”, “인자”, “용기”, “엄격”을 강조하였다. 지혜가 지도자의 첫째 가치요, 신뢰를 두 번째로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용기는 한참 뒤다. 물론 용기도 대용(大勇)이 있고 소용(小勇)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는? 맞다. 지금 우리에게는 소용이 아닌 대용을 발휘할 때다.
요컨대 칼을 들고 설치는 현 MB정권에 맞서 싸우는 용기를 작은 용기 즉 소용(小勇)이라고 한다면, 아예 칼을 들고 설치지 못하게 하는 용기를 큰 용기 즉 대용(大勇)이라 하는 것이다. 대용은 겉으로 들어나게 다투는 법이 없다. 하지만 이것이 후일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용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명실상부한 지도자라야 모두가 산다!
평소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폭력적으로 발악을 해도 될 것이 있고 아니 될 것이 있다. 마치 목후이관(沐猴而冠)처럼. 이는 원숭이가 관을 썼다는 말로 의관은 그럴 듯하지만 생각과 행동이 사람답지 못하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원숭이에게 목욕시켜 관을 씌워 놓아도 원숭이는 원숭이라는 말이다.
좀 더 쉽게 얘기하면, 이목구비를 다 갖추었다고 모두가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지도자가 식견과 덕(德)을 끊임없이 쌓아가지 않는다면, 결국 그 지도자와 지도부는 물론 주변의 귀중한 사람은 물론 그 사람들의 말과 그 사람들의 조직을 모두 잃는 지도자가 되고 말 것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찰미(察微)하면서 돌파구를 찾아야!
진정 ‘찰미’해야 할 때다. 글자 그대로 작은 부분을 살펴야 한다. ‘조짐’을 헤아려 사태(희생)를 미리 막을 수 있어야 지도자인 것이다. 현장의 지부장들이 어떤 말들을 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해답이 보일 것이다.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 주장하기 전에 “따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후에 주장”을 해도 늦지 않다.
중앙의 지도자들이여!! 이번 시국선언과 관련하여 무엇이 진정 공무원노동조합을 위하고 무엇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존재케 하는지 냉철히 ‘찰미’할 것을 권한다. 건강한 노조, 건강한 시민, 건강한 국가가 되는데 굳건한 토대를 세우고 길이 남는 노조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중앙 지도자들의 훌륭한 결정을 기대한다.
2009년 7월 2일
전국민주공무원노동조합 경기지역본부 수원시지부장 김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