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흘려갔다.(2009-9-23)
그날도 오늘처럼 하늘은 청명하였다. 반팔입기에 아침은 춥고 낮에는 더웠으니 딱 지금 쯤으로 기억 된다. 넓은 회사 마당에 한잎 두잎 떨어진 낙엽이 이리 저리 바람의 방향에 따라 날리고 있었다
그때 나의 나이 16세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한창 공부에만 전념한다해도 어린 나이인데 여의치 못한 가정 형편으로 가족의 곁을 떠나야 했고 돈을 벌면 그 돈으로 남들처럼 상급 학교를 갈수 있다는 희망으로 40여키로의 원당(사탕수수)을 목덜미에 메고 높은 차에 오르내리는것도 이겨낼수 있었다.
나이는 적고 체격은 왜소하였으나 어른들과 똑 같이 일을 하며 뒤떨어지지 않았다. 익숙치 못한 가대기(노동)일에 목은 아프고 허리의 통증은 나를 짓눌렸다. 그 아픔을 참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한달쯤 일을 했을까? 노동의 댓가로 받은 돈은 나에게 큰 보람이고 희망이였지만
그만큼 나에게 골병으로 다가왔다. 하루 하루 힘겨운 날이 계속되었으나 나는 오직 의지 하나만으로 버텼다.
그러던 어느날. 몸이 무겁고 한기가 내 온 몸에 엄습해 왔다. 그날 겨우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다. 한기는 더 해오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떨림은 웃니 아랫니가 스스로 맞닿아 뿌드득 거리는 소리가 초리한 판자집 골방에 울렸다
이불울 뒤집어 쓰고 아픈 배를 움켜쥐며
그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집이라 해 봐야 둑방에 지어놓은 판자집으로
그중 방 하나를 세 내어 사용하고 있었다. 겨우 한사람만이 지나 다닐수 있는 골목길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연탄불에 팔팔 끓인 물을 마셔도 마셔도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그당시 2교대하는 형과 같이 사용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나 혼자 였다. 허리를 움키쥐며 앞 가게에 갔다. 혹시 음식이 체해서 그런가 싶어 소다를 사기위해서였다 소다는 작은 비닐봉지에 넣어 스케취 용지에 몇봉지씩 걸어놓고 팔았다. 몇봉을 먹었는데도 효과는 없었다. 비싼 활명수를 마셔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를 더 견뎠을까? 참고 참으면서 지칠대로 지친 나의 시선은 파리똥으로 세카만 천정에 머물고 있을뿐 이미 자아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허리는 펼수가 없었고 다리와 배를 가까이 움추려야만 조금이라도 통증이 덜했다.
어린나이에 객지로 간 큰 아들이 그리도 안 쓰러워 떠날때 하염없이 우시던 어머님 모습도 형 돈 벌어오면 맛있는 눈깔 사탕과 장난감 사달라던 동생들의 모습도 눈물고인 눈밖으로 아른거렸다. 엄마~~ 엄마~ 몇번을 불렸지만 엄마의 대답은 없었다.
흐르는 눈물은 베게에 흥견히 젖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그 순간에 이제는 고통마져 느낄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걸 체념한듯 고이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 이였다. 발가락을 움직여 보려 하나 움직이지 않고
팔도 내 마음데로 움직일수 없었다.
정신이 드는 그 시간도 마취상태였다.
*
*
*
*
다음날 아침 병원으로 옮기에 된 사연은 이러했다.
교대 근무를 마치고 들아온 형이 축 쳐져있는 나를 보고 황급히 근처 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형이 보증을 하여 이미 수술도 끝냈다고 했다. 급성 맹장염이 발단되어 수술시기를 놓쳐 안에서 터졌다고 했다. 터진 그 오물이 창자 전체로 번져 복막염이 되었다고 했다.
호스를 넣은채 20여일을 치료했었다. 그 창자가 터지느냐고 그렇게 아팠을까?
고향의 부모님께 연락이 되고 다음날 어머님이 오셨다. 죽다 살아난 아들을 보며 하염없이 우시던 어머님. 다행히 차도가 있어 20여일의 병원생활을 끝내고
나는 다시 어머님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다.
우리 딸이 어릴때 배꼽보다 더 쑥 들어간 수술 자국을 보며
아빠는 배꼽이 두개라고 늘 신기하게 물어보곤 했었다. 그때마다 아픈 자국이라고 했었는데 이제는 다 말 할수 있는 때가 되었다.
흘려간 지난날의 한추억~~
새벽 운동나간 나를 배웅하는 아내가 아쉼지 않게 가져가란 카메라를 놓고 가서 할일이 없어서인지. 어느때 보다 더 붉게 떠으른 태양을 보며 잠시 과거로 돌아가
소년 부개동의 모습을 회상해 본다.
(현재는 용산 선인상가 21동1층 안전사(아답터)가 저의 일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