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어휘가 ‘추상(秋霜) 같은’이다. 서리에 연관되어 뇌리에 새겨진 편린을 떠올린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숨 가쁘게 치닫던 어린 시절 회억(回憶) 두 가지이다. 가을이 깊어지며 나락이 익어 가기 시작하면 논둑이나 개울가 숲으로 벼메뚜기를 잡으러 다녔었다. 하지만 메뚜기가 하도 빨리 튀고 날아다니는 때문에 쩔쩔매며 허둥대기 일쑤였다. 그렇게 끌탕을 치다가 무서리가 내릴 만큼 싸늘해진 아침나절에 서둘러 들판으로 나가면 추위로 둔해진 그들이 제대로 날거나 도망을 가지 못해 믿기지 않을 만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또 다른 회상의 조각이다. 가을이 깊어 초겨울로 들어서 갑자기 기온이 곤두박질 쳐 추위에 벌벌 떨면서 이른 시각에 넘던 고갯마루 능선에 얼을 뺄 정도의 선경을 펼치던 새하얀 상고대(rime)*의 황홀경은 반세기가 넘은 여태까지도 내 가슴을 쿵쾅대게 한다. 지표면 가까운 위치의 기온이 0∘C 아래로 내려가면 대기 중에 포함되어 있는 수증기가 지면이나 지면상의 물체나 설면(雪面) 등에 승화*하여 생겨나는 결정체가 서리(frost)로서 다양한 모양을 띈다. 흔히들 서리가 내린다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서리는 공중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가 머금고 있던 수증기가 지표면 위에서 응결한 얼음이다. 우리나라에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시기인 상강(霜降)은 24절기 중에서 열여덟 번째로서 음력 9월 중기(中氣)*에 들어 있어 양력으로 10월 23일 아니면 24일이며 황경(黃經) 210도이다. 일반적으로 ‘흰서리’라고 지칭되는 결정은 대기 중의 수증기가 중간 과정인 액체상을 거치지 않고 얼음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기온이 영상이 되면 서리는 이슬이 된다. 이슬이 형성된 뒤에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면 얼어버리기도 하는데, 이는 서리와 구별이 불가능하다. 입자 형태의 서리를 상고대라고 한다. 이는 과냉각수적(過冷却水滴 : 영하의 온도에서 공기 중에 부유하는 물방울)이 영하의 기온에 놓여있는 어떤 물체와 충돌하는 순간 거의 동시에 얼어서 상고대층을 형성한다. 상고대층은 입자들 사이에 공기를 함유하고 있는 작은 얼음 알갱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흰색을 띄는 반면에 알갱이 모양의 외형적 특징을 보인다. 그런데 상고대 현상이 가장 빈발하는 곳은 과냉각수적을 머금은 구름으로 덮인 산 정상 부근이며 항공기에서 흔히 발생하는 착빙(着氷)의 형태이기도 하다. 또한 고추같이 매서운 기온하의 하천⦁호수⦁연못⦁샘 주위에서 나나타기도 한다. 서리는 가을 상강 무렵에 처음에 내리는 묽은 서리를 ‘무서리’, 늦가을 추워진 날씨에 되게 내리는 서리를 ‘된서리’, 나무의 가지나 풀에 등에 내리는 서리를 ‘수상(樹霜)’ 또는 ‘상고대’, 유리 창문에 생기는 서리를 ‘창상(窓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전문가들에 다르면 서리의 결정(結晶)은 주상(柱狀)과 판상(板狀)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주상이나 침상(針狀)의 결정은 매우 낮은 영하의 기온에서 형성되고, 판상은 전자보다 조금 높은 기온에서 형성되는 결정이라는 얘기이다. 분명히 서리는 기상현상에 지나지 않지만 식물의 생육이나 성장기간을 정의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서리에 가장 약한 농작물을 기준으로 할 때 식물의 성장기간은 봄에 된서리가 마지막으로 내린 종상(終霜)날로부터 가을에 첫 된서리가 내린 초상(初霜)날까지의 무상기간(無霜期間)을 성장기간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서리를 얘기하는 우리와는 달리 원예학(園藝學)에서는 식물을 죽이는 원인이 되는 것으로서 식물의 세포에 함유되어 있는 용액이 동결(凍結)되는 현상을 일컬어 ‘서리’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식물 중에서도 잎이나 열매 등에 함유된 용액이 많고 묽은 경우에 치명상을 입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처럼 승화에 따라 흰서리를 형성하지 않고 된서리가 형성되는 것을 ‘검은 서리(black frost)’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터를 따라 남녘의 마산에 뿌리 내린지 서른여섯 해째이다. 따뜻한 지방의 도시 복판에 둥지를 틀었던 관계로 최근에 서리가 내리는 생생한 모습을 제대로 본 기억이 도통 없다. 하물며 이 지역에서 상고대 구경은 언감생심이다. 어쩌다가 매스컴이 전하는 비경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지난 세월을 더듬거나 이런저런 일로 대진고속도로를 지나다가 먼발치 지리산 자락에 피어난 상고대를 스쳐 지나다가 눈에 담으며 지난날의 어렴풋한 추억을 회상하는 게 고작이다. 내 머리 위에도 세월의 더께인 백발이 볼썽사납게 내려앉은 여태까지도, 갑자기 곤두박질 친 기온 때문에 들판이나 산야를 희뿌옇게 뒤덮고 있는 상서로운 서리를 밟고 싶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산자락 된비알이나 저 멀리 정상에 피어난 상고대의 비경이 무척 그리워 간헐적으로 그리움이 솟구친다. 이런 갈증을 풀 수 있는 날을 꿈꿔본다. 새하얀 서리나 신이 빚은 걸작 같은 상고대의 아름다운 자태를 음미할 겨울 여행을 올해라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축복일터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 행운의 여신이 내 손을 잡아 이끌어 줄지 모르겠다.
(한판암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