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여름내 녹아서 꼭대기 부분에만 눈이 약간 남은 천산산맥이 요즘 다시 하얗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번 주말부터 이곳에는 눈과 함께 밤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기 시작한답니다.
벌써 밀과 옥수수, 사탕무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는 여름내 산으로 올라갔던 양들과 소들이 내려와 풍성한 가을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침 저녁 집 앞을 오가는 양떼 무리들은 하루가 다르게 통통하게 살이 찌고 양떼를 몰고 가는 어린 목동들의 말들도 윤기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참 저희 가정은 지난 8월 중순에 이곳 프로그레스 마을 쩬트랄나야 23번지로 이사를 들어왔습니다. 지루하리만큼 더디게 진행된 2달간의 내부 수리공사가 끝나고 이사는 왔지만 아직도 집안 곳곳과 집 주변에 정리할 것들이 매일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0년 가까이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집이라 살면서 천천히 정리하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년까지는 계속 씨름해야 할 일인가 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매일 물을 길으러 가지 않고 집안에서 수도꼭지만 틀면 깨끗한 계곡물이 나오는 집으로 수리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무슬림 명절에 이곳 관습대로 저희도 식탁을 차려놓고 집에 찾아오는 마을 이웃들을 맞았는데 모두들 이 집에 누가 들어와 살게 되는지 궁금했다면서 반갑게 저희를 대해 주었습니다. 저희가 무슬림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그리고 주마벡 아저씨네 가족 잔치에서도 모인 7남매 형제자매들 모두 그들이 태어나고 자랐던 집에 들어와 수리해서 사는 사람이니 한 가족으로 쳐줘야 한다며 기쁘게 저희 가정을 맞아 주었습니다.
사진은 주마벡 아저씨네 조카 결혼잔치 사진입니다. 맨 왼쪽이 주마벡 아저씨이고 세번째 앉아 있는 분이 구잘 아주머니 입니다.
매일 저녁 젖소에서 갓 짜낸 따뜻한 우유를 받으러 다블럇 아저씨네(주마벡 아저씨네 처남)로 지성이와 인애가 집을 나서려 하면 막내 하늘이도 자기가 꼭 따라가겠다며 떼를 쓰곤 한답니다. 아침 식사 때마다 마당에 서 있는 사과나무에 사다리 놓고 직접 올라가서 딴 사과를 먹는 기쁨도 이 마을로 이사온 뒤 생긴 변화입니다. ^^ 지난 여름내 이사 오자마자 마당에 자라는 살구나무와 자두자무, 산딸기, 블루베리를 따서 잼 만들고 텃밭에서 딴 채소들로 병절임 해놓는 일들을 엄마와 아이들이 하느라 힘도 들었지만 구잘 아주머니와 함께 하다보니 아이들도 서로 친해지고 저희도 즐겁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지하실에 저장된 병들을 보면 흐뭇하네요.
하지만 대문과 담장이 생겼음에도 아직도 불쑥 텃밭 어딘가를 가로질러 예고도 없이 나타나는 마을 사람들로 인해서 놀라기도 하고 때로는 말없이 가져가는 사소한 물건들로 인해 불쾌하기도 합니다. 아직도 예전에 사람이 살지 않던 때처럼 마당에 들어와 필요한 볼일을 보는 이곳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지만 언젠가 그들과 러시아어가 아닌 키르기즈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웃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 기대합니다.
친구 막사트 가정도 지난 9월에 집주인이 집을 팔게 되어 살던 곳에서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했는데 함께 이사갈 집 단장를 하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엔 막사트 고향 탈라스라는 도시에도 함께 다녀왔었는데 막사트 가정 뿐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지역사회를 어떻게 섬길지, 어떤 고민들을 갖고 있는지 나누고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매주 목요일 막사트네 집에서 모이는 모임에서 토크막에 사는 키르기즈 형제 자매들과 교제하며 말씀을 나누는 기쁨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매주 일요일 나쟈 선생님과 함께 모이는 분들은 주로 고려인들이어서 당연히 러시아어로 대화하고 키르기즈 정서보다는 러시아 정서에 가까운 분들이서 아쉬움도 있었었지요. ^^
사진은 막사트 가정의 초대로 식탁에 양머리 올려놓고 전통음식 베쉬파르막 맛보는 모습입니다.
그동안 알아보던 비닐하우스 자재는 결국 한국에서 가져오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중국산 자재의 가격도 그리 저렴하지 않고 품질 역시 신뢰가 가지 않은 상태에서 러시아나 키르기즈에는 유럽에서 수입된 자재들만 간간이 유통되고 있어 경제성이 없었습니다. 조만간 한국에서 비닐하우스 자재를 실은 컨테이너가 선적될 예정인데 막사트의 도움으로 통관대행사를 찾긴 했지만 이곳 통관 관행이 워낙 편법이 난무해서 걱정입니다. 선적에서 현지 통관과 설치까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두손 모아 주세요.
그리고 저희가 이곳 생활에 안정되는대로 이곳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 예정입니다. 저희 부모님 역시 중국 동북지역의 시골에서 몇 년 계시면서 그곳에서 사역하는 선생님들을 도와 일하신 경험이 있으셔서 이곳에서 노년을 지내시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부모님의 건강과 기후와 환경, 문화에의 적응을 생각하면 답답해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저희에게 주어진 길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볼 생각입니다.
저희 아이들에게도 부모님이 함께 계시면 더 좋겠지요. 지성이와 인애는 이제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구잘 아주머니네 손자인 이라다, 이잣, 막사트네 아이들인 아직, 베카 그리고 다블럇 아저씨네 아이들과 동네 형들과 동생들.. 다들 이름은 생소하지만 동네축구에서 골을 자주 넣는 지성이는 인기있는 편입니다. 인애는 피아노 선생님이 재능이 있다고 칭찬했다며 멜로디언으로 배운 것을 열심히 연습을 합니다. 하늘이는 벌써 키르기즈어로 숫자를 배우고 있구요. 이곳 아이들에 비하면 저희 아이들이 형제자매가 적어서 아쉽지만 홈스쿨링을 하며 또 저희가 해야 할 섬김들을 생각하면 저와 아내에게는 충분한 듯 합니다. ^^ 아내와 저는 다시 9월부터 매주 비쉬켁에 있는 키르기즈 국립대학교에서 언어연수를 다니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가르치는 강사가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아서 언어를 배우면서도 키르기즈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곧 한국에도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겠지요.
저희 가정은 벌써 이달 초부터 석탄 난방을 시작했습니다. 프로그레스에서 처음 맞는 겨울이 아이들 기대처럼 러시아만큼 눈이 많이 오면 좋겠습니다.
일교차가 심한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은혜 가운데 항상 평안하시길……
1. 저와 아내가 키르기즈어를 잘 배우고 또 익히게 되기를.
2. 막사트 가정과 주마벡 아저씨네 가정, 프로그레스의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세워가기를.
3. 한국에서 준비중인 비닐하우스 자재의 운송과 통관, 설치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4. 지성, 인애, 하늘이 모두 건강히 잘 적응하고 홈스쿨링을 잘 해나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