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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계 변 주 록(宗 系 辨 奏 錄)
○ 고려(高麗) 말(末), 여진(女眞)계 몽고(蒙古)인이었으며, 증조부(曾祖父)인 “이 안사”는 원(元)나라의 총독【總督 : 달로화적 또는 다루가치라고 하는데, 원(元)이 고려(高麗)를 정벌(征伐)하고, 각 주요지역에 총독(總督)을 두었다. 반도(半島) 땅에 72 명의 총독(總督)을 두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반도(半島)고려(高麗)를 부정(否定)하고 있다.】을 지낸, 소위(所謂) 여진(女眞)계통의 달단【韃靼 : 타타르】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조상(祖上)들의 묘지(墓地)가 달단(韃靼)동에 있으니, 더더욱 이러한 사실(事實)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 이러한 “이씨(李氏)” 호족(豪族)이 “고려(高麗)조정(朝廷)”에 귀화(歸化)한 것은 “이씨(李氏)”가(家)가 의탁(依託)하고, 몸 담았던 “원(元)” 세력이 급격(急激)하게 쇠퇴(衰退)한 것과 이어 다시 재 발흥(發興)하는 고려(高麗)의 위세(威勢)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그 외의 다른 조건(條件)은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 우선 “고려(高麗)”란 나라는,
『반도(半島)에 존재(存在)할 수 없는 대륙(大陸)의 거대(巨大)한 제국(帝國)이었다.』는 것을 기록(記錄)으로 고증(考證), 증거(證據)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高麗史82卷-志36-兵2-屯田 : 忠烈王三年二月令諸王百官以至庶民出米有差以充洪茶丘軍粮 : 충렬왕(忠烈王)3년, 2월, 『여러 왕(王)과 모든 벼슬아치들 서민에 이르기까지 미곡을 차등(差等)있게 내어, ‘홍 다구’ 군(軍)의 군량으로 충당하도록 명을 내렸다. 》고 하였는데, 여기서
명령(命令)을 내린 이는 “고려(高麗)의 황제(皇帝)”였고, 그 명을 받는 자들은 “여러 왕들과 모든 벼슬아치와 백성(百姓)들이었다.”
통속적(通俗的)인 역사해설(歷史解說)은 『고려(高麗)는 원(元)의 부마국(鮒馬國)으로 속국(屬國)과 같고, 명(明)나라의 변방(邊方) 속국(屬國)정도의 제후국(諸侯國)이었다.』고 하며, 『역사서(歷史書) 기록으로 원(元)이나 명(明)을 상국(上國)으로, 천자 국(天子國)으로 황제 국(皇帝國)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서슴없이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고려사(高麗史)에 있는 기록은 이러한 속된 역사해설(歷史解說)에 『반기(反旗)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고려(高麗) 땅에는 많은 여러 제후국(諸侯國)이 있어 이들을 지칭(指稱)해 “왕(王)”이라 했으며, 그 왕(王)들에게 명령(命令)을 내린 사람이, 고려(高麗)의 왕(王)이었다면, 고려왕(高麗王)은 왕(王)중의 왕(王), 태왕(太王)이요, 다른 표현(表現)으로 황제(皇帝)였다는 사실이다.』
혹시나, 이 명령(命令)이 당시 원(元) 황제(皇帝)로부터 내려진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위의 글로 보면,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래 기록으로도 증명(證明)이 된다.
《高麗史82卷-志36-兵2-屯田-001 ; 顯宗十五年正月都兵馬使奏:發西京畿內河陰部曲民百餘戶徙嘉州南屯田. : 현종 15년, 정월에 도병마사가 상소하기를 ; 서경(西京) 기내(畿內) 하 음(河陰) 부 곡민 백여 호를 옮겨 가주(嘉州) 남쪽에 둔전(屯田)시켜야 합니다.》고 하였다.
기내(畿內)란 말은, 천자(天子) 또는 황제(皇帝)의 나라 외(外)에서 사용될 수 없다. “천자가 사는 곳을 위수(衛戍)하는 경기(京畿)지방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바로 중국(中國) 땅”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조(京兆)지방(地方)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서경(西京)인 평양(平壤)은 고려(高麗) 이전(以前)의 『고구려(高句驪) 황도(皇都)였으며, 이곳 땅이 바로 기내(畿內)지방(地方)이었다.』는 뜻이다.
혹자(或者)는 이러한 말을 빗대어 “반문(反問)”하기를, 일본에도 “기내(畿內)지방(地方)”이 있고, 현 베트남지방에도 이런 것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민족사학(民族史學)이 태동(胎動)한 근세(近世)의 작품(作品)이란 것을 염두(念頭)에 두지 않는 무책임(無責任)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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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계변주록(宗 系 辨 奏 錄) : 종계 (한 집안의 가계 체계) 가 잘못된 것을 밝히기 위하여 중국 황제에게 아뢴 내용과 중국의 서책을 수정한 시말(始末)을 기록한 글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란 조선(朝鮮) 초 이래 선조(宣祖) 때까지 말썽이 되었던 조선 왕조의 조상이 명나라의 서적에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치고자 주청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高麗)조의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고치고자 하여 여러 차례 주청하였으나, 선조 때까지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선조 때에 이르러서 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를 비롯한 여러 사신들의 힘으로 인해 겨우 수정(修正)되었다. 종계(宗系)를 변무하는 일이 완성되고 나서 선조(宣祖)는 이를 몹시 기쁘게 여겨, 이 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책봉하였다. <고전번역원의 것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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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을 보면,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고 난 후(後),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당시 명(明)나라에서는 개국(開國)조의 혈통(血統)에 대해 몰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명사(明史) 열전(列傳)편을 보면, 가정(嘉靖) 8년 8월에, 배신(陪臣) “유부(柳溥)”가 상언(上言)한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대명회전 및 황명조훈”에 “이인임(李 仁 任)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명(明)과 조선(朝鮮)과의 당시 관계(關係)를 보건대 20년 정도(程度)라면 몰라도 200년(年) 가까운 세월(歲月)동안 몰랐다는 이야기는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무언가 좋지 않은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점이다.
조선(朝鮮)에서는 몇 차례 시정(是正)할 것을 요구(要求)했으나, 명(明) 조정(朝廷)에서 시정(是正)해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며, 더하여 『고려(高麗)의 왕 네 사람을 잇달아 시해(弑害)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큰 치욕(恥辱)과 원통(冤痛)함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하는 상소문(上疏文)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명(明)나라에서는 조선(朝鮮)에 대한 정통(正統)성을 인정치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사정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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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두수 후 광 세 첩 / 종 계변주록(宗 系 辨 奏 錄) 》/ 고전번역원의 것을 인용
○ 종 계변주록(宗 系 辨 奏 錄) : 종계 (한 집안의 가계 체계) 가 잘못된 것을 밝히기 위하여 중국 황제에게 아뢴 내용과 중국의 서책을 수정한 시말(始末)을 기록한 글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란 조선(朝鮮) 초 이래 선조(宣祖) 때까지 말썽이 되었던 조선 왕조의 조상이 명나라의 서적에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치고자 주청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高麗)조의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고치고자 하여 여러 차례 주청하였으나, 선조 때까지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선조 때에 이르러서 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를 비롯한 여러 사신들의 힘으로 인해 겨우 수정(修正)되었다. 종계(宗系)를 변무하는 일이 완성되고 나서 선조(宣祖)는 이를 몹시 기쁘게 여겨, 이 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책봉하였다. <고전번역원의 것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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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두수 후 광 세 첩 / 종 계변주록(宗 系 辨 奏 錄) 》/ 고전번역원의 것을 인용
우리 조선의 국조(國祖)이신 강 헌 왕(康 憲 王)은 실로 전주 이씨(全州李氏)로서, 부친은 아무 - 환조(桓祖)의 휘(諱) - 인데, 그만 다른 사람인 이인임(李仁任)의 가계(家系)로 편입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국조(國祖)가 나라를 얻게 된 것 역시 혼란스러웠던 고려(高麗) 말기에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추대하였기 때문인데, 그만 고려(高麗)의 왕 네 사람을 잇달아 시해(弑害)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큰 치욕과 원통함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시에 이렇게 참소(讒訴)와 무함(誣陷)을 입게 된 데에는 그 사이에 특별한 사연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각 씨족(氏族)의 선조와 후손들을 살펴보면 금방 판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네 임금의 시해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공민왕(恭愍王)을 시해한 자에 대해서는 시해한 자와 거짓으로 아뢴 자가 모두 범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부자(父子) 역시 위성(僞 姓)이라는 이유로 정창 군(定 昌 君) 왕요(王 瑤)에게 복주(伏誅) 된 것입니다. 그리고 왕 요는 국조(國祖)에 의해 편저(便 邸)에서 봉양을 받다가 천수(天壽)를 다 누리고서 죽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온 나라의 백성은 물론, 신령들까지도 모두 환히 알고 있는 바입니다.
○ 고려 말기에 우리나라의 여자로서 홍무(洪武 명 태조를 가리킴)의 궁인(宮人)이 된 자가 있었는데, 태조 고 황제(太祖 高皇帝)가 그를 통하여 우리나라의 사정에 대해 자못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선원(璿源)이 무함을 받게 된 것은 대개 이 여자가 사실과 다르게 전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서포만필(西 浦 謾 筆)》
처음에 태조 초에 죄인인 윤이(尹 彝)와 이초(李 初)가 중국에 들어가 우리나라 왕실의 국계(國 系)를 무함하였으므로 《대명회전》 및 《황명조훈》에 우리 태조의 세계(世系)를 기재하면서 태조가 이인임(李 仁 任)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며, 또 ‘네 임금을 잇달아 죽이고 나라를 차지하였다.’고 운운하였는데, 네 임금이란 우(禑)ㆍ창(昌)ㆍ요(瑤)ㆍ석(奭)을 가리킨 것이다. 석은 바로 공양왕의 세자이다.
공정 왕【恭 定 王 태종(太宗)】때에 비로소 종계(宗系)가 잘못 기록된 것을 들어서 알고는 곧바로 사신 이빈(李 彬)을 보내어 개정하여 주기를 요청하자, 명나라 성조(成祖)가 칙서를 내려 윤허하였다. 그 뒤에 선왕들이 계속하여 사신을 보내어 개정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기도 하고 허락하지 않기도 하였다.
태조(太祖) 3년(1394) 갑술(甲戌)에 중국의 사신 황 영수(黃 永 壽) 등이 〈고제해악산천등신축문(告祭海嶽山川等神祝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안에 ‘고려의 배신(陪臣)인 이인임(李 仁 任)의 후사(後嗣)인 지금 왕 휘(諱) 운운’ 하였다. 이에 곧바로 ‘본종(本宗)의 세계(世系)는 이인임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내용으로 주문(奏文)을 지어서 중국에 상주(上奏)하였다.
태종(太宗) 3년(1403) 계미(癸未)에 조온(趙 溫)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황명조훈(皇 明 祖 訓)》에 ‘조선 국왕의 세계는 바로 이인임의 후예’라고 운운하였다.” 하였다. 이는 대개 우리나라의 반적(叛 賊)인 윤이(尹 彝)와 이초(李 初)가 중국 조정에 ‘태조는 역신 이인임의 후예이다.’라고 무고하여, 《황명조훈》과 《대명회전》에 모두 무함한 말이 실린 것이다. 이에 이빈(李 彬)을 파견하여 개정해 달라고 주청하였다.
중종(中宗) 13년(1518) 무인(戊寅)에 이 계맹(李 繼 孟)이 《대명회전》을 얻어서 돌아왔는데, 본국에 관한 조항 아래의 주(注)에 이르기를, “이인임과 그의 아들 이성계는 홍무(洪武) 6년(1373, 공민왕22)부터 28년(1395, 태조4)에 이르기까지 전후에 걸쳐 네 명의 왕씨(王氏) 임금을 시해하였다.” 하였다. 이에 곧바로 남곤(南衮)ㆍ이자(李 耔)ㆍ한충(韓忠)을 파견하여 무함을 받은 사정에 대해 주문하였다.
10년(1577) 정축(丁丑)에 사은사 윤두수(尹斗壽)가 회답 자문(咨文)을 얻어서 돌아왔다. 또다시 주청사 황림(黃 琳)을 파견하여 새로 간행하는 《대명회전》을 상세히 베껴 가게 해 달라고 주문하였다.
13년(1580) 경진(庚辰)에 성절사(聖 節 使) 이증(李 增)이 회답 자문을 받아서 돌아왔는데, “이젠 더 이상《대명회전》안에 사열(査閱)하고 교정(校正)한 것이 빠질 염려가 없다.” 하였다.
14년(1581) 신사(辛巳)에 주청사 김계휘(金繼輝)를 파견하여 영원토록 선대(先代)의 원통함을 씻어 달라는 내용으로 주문하였다.
17년(1584) 갑신(甲申)에 주청사 황정욱(黃廷彧)을 파견하여 완성된 《대명회전》을 반포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21년(1588) 무자(戊子)에 사은 겸 주청사(謝恩兼奏請使)로 갔던 유홍(兪泓)이 돌아왔는데, 황제가 칙서를 내려 《대명회전》에 실려 있는 본국 관련 기록 한 통을 미리 부쳐 보내었다. 이에 상(上)이 드디어 제사를 지내어 종묘와 사직에 ‘이륜(彝 倫)이 다시 펴지게 되었다.’는 뜻으로 고하였다. 그러고는 유홍 등 일행 및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들에게 태평관(太平 館)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22년(1589) 기축(己丑)에 성절사 윤근수(尹根壽)가 돌아왔는데, 황제가 칙명을 내려 《대명회전》 전질을 반포해 주게 하였다. 다음 해에 드디어 녹훈(錄勳)하였는데, 황정욱ㆍ유홍ㆍ윤근수를 수공(首功)으로 삼고, 이 일에 공이 있는 전후의 사신과 당시의 대신들에게 등급을 나누어 훈 권(勳 券)을 주고 광국공신(光國功臣)이라 칭하였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이 상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겸양하여 윤허하지 않다가 오랜 뒤에야 윤허하였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상에게 존호를 ‘정륜입극성덕홍렬(正倫立極盛德洪烈)’이라고 올렸으며, 중전에게 장렬(章 烈)이라고 올렸다. 그러고는 조정 신하 및 종실들에게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이에 180년 동안에 11차례나 사신을 보내어 요청한 일이 비로소 완료되었다. 《조야기문(朝 野 記 聞)》 <관심부분을 발췌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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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을 보면, 여러 방향(方向)으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餘地)가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진실(眞實)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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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공민왕 (恭愍王) / 경술 19년(1370), 대명 홍무 3년
《 우리 태조【이성계(李 成 桂)】가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東北)면에서 황초령【黃 草 嶺 함남 함흥(咸興)】을 넘어 6백여 리를 가서 설한 령【雪 寒 嶺 평북 강계(江界)】에 이르고, 또 7백여 리를 가서 갑진 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이날 저녁에 서북(西北)방에서 자줏빛의 서기가 공중에 가득히 차고 그 그림자가 모두 남쪽으로 향하니, 서운관(書雲觀)에서 말하기를, “맹장의 기운입니다."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성계(李 成 桂)를 보냈으니, 반드시 그 징험일 것이다." 했다.
이때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 첩목아【李 吾 魯 帖木兒 이 원경(李 原 景)】가, 태조(太祖)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 라 산성【亏 羅 山 城 : 봉천 성(奉天 省) 회인 현(懷 仁 縣) 동가 강(佟 佳 江) 오른쪽 오 녀 산성(五 女 山城)】으로 옮겨 험한 곳에 웅거하여 막으려 하였다. 태조가 야 돈 촌(也 頓 村)에 이르자 오로첩목아가 와서 싸움을 걸었으나, 조금 후에 무기를 버리고 두 번 절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대는 본래 고려 사람이니, 신복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며, 3백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했으나, 그 추장 고 안위(高 安 慰)는 아직도 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니, 우리 군사가 이를 포위하였다. 이때 태조는 활과 살을 가지고 있지 않아 종자의 활을 가지고 아기살로 적을 쏘았는데, 무려 70여 발을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니, 성 안 사람들이 놀라 기운이 빠졌다. 고 안위는 밤에 처자를 버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넘어서 도망하였다. 이튿날 두목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니, 여러 산성도 풍문만 듣고 모두 항복했는데, 그 호수가 무려 만여 호나 되었다. 노획한 소 2천여 마리와 말 수백 필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저자로 사람들이 몰려가듯 귀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동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 서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모두 텅 비게 되었다. <東至皇城,北至東寧府,西至于海,南至鴨綠,爲之一空>
● 위 글에서 아주 중요(重要)한 글귀가 있다. 이는 곧 《 東至皇城,北至東寧府,西至于海,南至鴨綠,爲之一空 : 동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 서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모두 텅 비게 되었다. 》이라는 구절(句節)이다.
㉠ <동쪽으로는 황성에 이르고 : 東 至 皇 城> : 이때 이성계(李成桂)는 기병(騎兵)5천과 보병(步兵)일만 등 “일만(一萬)오천(五千)”의 군사들을 데리고, 봉천(奉天)성에 있었으니, 바로 반도(半島) 평양(平壤)의 북쪽지방이다. 이곳에서 『동쪽지방으로 황성(皇城)에 이른다.』는 말은 지형지리(地形地理)적으로 보면, 너무 황 당(荒唐)한 이야기가 된다.
㉡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당시(當時) “이성계(李成桂)”는 분명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곳에서 “황성(皇城)의 방향(方向)은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있지 않는 한 ”남쪽지방“에 있을 수밖에 없는 지세(地勢)다.”
㉢ 국내학자들은 주석(註釋)에서 “금(金)나라의 서울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설명(說明)을 하고 있다. 금(金)나라가 여진족(女眞族)의 나라이며, 이성계(李成桂) 역시 여진(女眞)계라 하더라도, 금(金)나라의 황성(皇城)이 이곳에서 동쪽에 있었다는 역사적(歷史的) 기록(記錄)은 전무(全無)하며, 오직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만 존재(存在)하는 설명(說明)이다.
㉢ 홍호(洪皓)가 기술(記述)한 “송 막 기문(松漠紀聞)”과 “성경강역 고(盛京疆域考) 또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등에서도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설명(說明)은 없다. 이것은 지형지리(地形地理)나 방향(方向)등으로 볼 때 불가능(不可能)한 것이다.
㉣ 여진(女眞)의 선대(先代)는 말갈(靺鞨)이며, 말갈(靺鞨)의 선대는 물길(勿吉)이며, 나아가 읍루(挹婁)이며, 숙신(肅愼)이다. 숙신(肅愼)은 서북(西北)과 서(西)쪽 지방에 있었다는 것이 역사서(歷史書)의 설명(說明)이기 때문에, 이성계(李成桂) 역시 서북(西北) 또는 서쪽지방에서 활동했던 역사적(歷史的) 인물(人物)이다.
근세(近世) 조선(朝鮮) 오백(五百)년 동안 “서북(西北)지방(地方)”출신은 차별(差別)하여, 이곳에서 반란(叛亂), 민란(民亂)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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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歷史)를 논(論)하고자 한다면, 주관(主觀)이나 선입감(先入感)은 버려야 한다. 특히 배후(背後)세력(勢力)이니, 창조적(創造的) 운명론(運命論)같은 것은, 스스로를 거짓과 진실을 분별(分別)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케 한다. 웃기는 말 같지만, 인간(人間)은 스스로 사고(思考)하는 동물(動物)임을 잊지 말자.
2012년 07월 15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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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명나라에서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조선과의 외교에서 약점을 잡아둠으로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리고 만력제 때에 왜구들과의 싸움으로 국력이 쇠하여 할수없이 조선과 관계를 개선하려고 요구를 들어준 것이었지요.
역사공부를 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지금 내가 구상하고 있는 내용이 당시의 사회상과 얼마나 근접하고 있을까입니다. 당시의 사상이나 사회상을 무시한 역사해설은 판타지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당시 사회를 좌지우지하던 사상을 빼고, 역사를 말할 순 없습니다. 봉건 왕조 시절의 백성은 양 날의 칼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고려 5백년 "왕"씨 왕조를 하루아침에 "이씨" 왕조로 바꿨다는 것은 "혁명적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민심을 얻으려 했다면, 전 왕조의 패륜적 행위를 부각시키고, 하늘이 "왕씨" 왕조를 버렸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이해시켜야만 했었을 것입니다. 또한 승자의 서술이란 점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태조 이성계가 여진계 몽골인, 또는 몽골계 여진인, 몽골에 잠시 의탁했었던 고려인 등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이 모두는 "조선"에 포함된 것입니다. 망국자는 하늘이 그를 버리는 것이고, 개국자는 하늘이 낸다는 것이 봉건왕조의 철학입니다. 태조 이성계를 비평할 수는 있으나, 비난이나 비방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당시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논평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어찌됐든 하늘의 선택으로(인간이 만든 사건이지만) 그는 조선을 개국했으며, 그 왕조는 오백년을 이었다는 것은 지구사에서 몇 안되는 왕조 중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의 선대 국가였다는 것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주관(主 觀)이나 선입감(先入感)은 버려야 한다ㆍ
제가 문무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근현대사를 인식함에 있어 주관(主 觀)이나 선입감(先入感)은 버려야 한다.
문무께선 과거가 보이시겠지만 저는 현재가 보입니다. 더 길게 이야기하면 또 종북으로 몰리겠지요. 종북을 하자는게아니라 지북을하자는거지요. 주적이라고 하면서 적을 알려고 하는데 막는다는건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소리며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반증이겠지요. 조용히 눈팅만 할려다가 너무도 코믹해서 한 말씀 올렸 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고뇌에 찬 세월을 세월을 한 글을 읽고 코믹이라고 몇 줄 써 내려간 글로 한 사람의 인생을 논하는건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연륜이 어지 되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흠 잡힐 분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몇자 적습니다.
화치님은 조금 더 카페를 보신 후에 슬을 쓰셔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문무님의 역사를 연구하는 자세나 결과물에 대해선 존경하고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 현명하시고 논리적이신 분들이 대한민국의 현ㆍ대사에 대해선 메트릭스에 갖혀계신게 웃기다는것이지요. 대한민국이 미제식민지 입니까? 아닙니까?
연륜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연륜이 있으신분들을 모두 미제식민지 주구의 공범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후대에겐 모두 죄인이지요.감사합니다.
쿠빌라이인 고려 원종을 원나라와 고려라는 두 개의 나라로 나누어논 데칼코마니 기법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 기술의 고전적인 수법인 카피를 해서 그대로 옮겨다 붙이는 방법도 있지만, 하나의 인물과 하나의 나라를 둘로 쪼개 놓는 조작도 흔히 행해지는 수법입니다. 고려의 조정이 원(元)에 있다가 명(明)으로 바뀌어 온 것이지, 고려(朝鮮)이라는 나라 자체가 새로 세워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왕건이라는 이름자체도 왕(王)이라는 성자체가 있었다기보다는 금(金=king)이라는 뜻의 다른 발음일 뿐입니다. 왕금(王金),왕건(王建),왕기옌,완완, 모두가 고려의 왕(king=金)이 있는 피라미드를 나타낸 말일 것입니다.
왕들을 왕(王)씨나 김(金)씨가 계속 헤쳐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왕의 일반적인 호칭이 왕건,왕금,왕기옌,완완부였다는 거지요. 왕이 사는 궐에서 행헤지는 정치 자체가 왕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실질적인 왕을 지낸 성씨는 조씨일 것입니다. 사림인 조광조가 누명을 쓰고 죽은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 죽은 땅도 대륙의 개봉부 인근이겠고요.
이성계가 개봉부(카이펑)에 있던 원(元)을 북원으로 쫒아내고, 한양(장안)에 천도하여 명(明)고려라 이름 지웠다가, 왕자의 난으로 함길도 함흥(사마르칸트)으로 간 것이 티무르 제국과 대명(大明)인 동.서 고려로 나뉜 것으로 보입니다.
역성 혁명이니 뭐니 할 것도 없이, 고려는 원래가 군벌들이 정치를 했는데, 처음에 조씨들이 전횡을 하다가, 정씨나 윤씨,최씨,길씨(쿠빌라이 계열)로 집권층이 바뀌다가 오이라트 출신의 이씨 군벌이 집권한 것인 것 뿐입니다.
얼어죽을 역성혁명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쫑궈에 그 많은 왕씨가 왕족인 왕건의 후손 같습니까? 비단장수 왕서방은 고려인이 아니라 라(羅)땅인 인도나 동남아 계통입니다.
앵무새처럼 조선사 편수회의 소설을 복명복창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이성계가 군벌이 된 것은 왜구를 토벌하러 사방을 휘젓고 다니었기 때문입니다. 고려를 멸하려는 잔나비 유태인인 왜구들을 상대한 것이죠.
티무르 제국의 서방,남방 원정이 모두 왜구토벌이며, 동명(東明)에서도 장강이남의 왜구들을 처단하려고 발진한 것이 훗날의 정화의 함대일 것입니다. 왜구들이 바다건너 인도네시아와 호주, 인도와 아프리카까지 튀자 뿌리를 뽑으로 끝까지 쫓아간 것이죠.쫑궈에서는 정화를 페르시아의 이슬람교도인 마씨라고 구라를 칩니다. 고려의 영역이 동서 아시아에 뻗어있어, 페르시아와 장강을 모두 통치하고 있었지만, 정씨가 마씨가 되는 것은 고려인을 대머리 유태인이라고 속이는 행위입니다. 이성계를 유태인이라고 의심하는 스탈린과 왜구들의 날조 선전을 퍼트리는 유태인의 압잡이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약한 가야인들일...
이안사는 다루가치가 되면서 이씨 집안은 고려가 원에 굴복하는데 어떤방식이든 보탭이 되었을 것이고 이자춘이 고려에 귀하하면서 이성계는 고려를 업어버린다. 고려의 망신창은 이씨 집안을 어떻게 보아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