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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처럼 대단히 이중적이다. 어느 종교에서는 돈이라는 말 대신에 물질이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 신성한 장소에서 돈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 조차 불경스럽게 여기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돈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상스럽고 천하게 여기는 태도는 우리 사회 어디서나 나타난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 장군식의 초월적 가르침도 있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게를 베면 행복한 것”이라는 식의 안빈낙도가 교육의 한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이 사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깨끗하고 청렴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살펴보면 작가출신 정치인 김홍신의 말처럼 이 나라는 한 푼이라도 서로 더 빼앗기 위해 “서로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 이 가득한 곳이고 , 그러한 탐욕으로 인해 한국의 부정부패지수는 에스토니아, 남아프리카 공화국,모로코 등보다도 더 낮은 48위이며(국제투명성기구 2000년도 발표) 전세계 수출주도 국가 19개국 가운데 한국의 뇌물공여지수는 최하위인 18위에 머물고 있고, 떡값과 리베이트가 어느 곳에나 만연하여 있다.
돈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상한 모순을 보이는 나라가 또 있을까?
J.크놀린의 소설 '천국의 열쇠'는 두 청년 안셀모 밀리와 프랜치스 치셤의 삶을 비교하여 보여준다. 같은 성직자의 길을 가면서도 늘 가난한자의 편에서 검소하게 사는 프랜치스와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안셀모. 신학생 시절에 안셀모는 학생회 회장과 여러 모임의 회장직을 맡았었고 프랜치스는 조용하면서도 종종 풍파를 일으키는 문제 학생이었다. 출세를 하는 것은 안셀모였다.
프랜치스는 자신이 선교사로 활동하는 중국의 파아란 지방에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들어서자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사랑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그는 이단시 당함으로써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실패로 연속된 삶을 살게 된다. 반면에 안셀모는 주교가 된다. 주교가 된 안셀모의 방문을 위해 프랜치스는 새로 성전을 준비하느라 정성을 다하지만 홍수로 인해 성전은 모두 무너진다. 그 자리에 거대한 행렬을 이끌고 멋진 말만 하러 온 안셀모. 그리고 보여줄 것이 모두 다 무너져 버린 프랜치스. 안셀모의 마차때문에 프랜치스는 진흙탕 물 까지 뒤집어 쓴다. 여전히 세상의 존경을 받는 쪽은 안셀모이다. 프랜치스는 사회적인 명예나 부는 원하지 않았다. 그가 추구한 것은 오직 사람들간의 화목과 사랑이었다.
안셀모와 프랜치스는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탐내는 두 가지 욕심을 보여준다. 명예와 부와 편안함이라는 욕심과 자기를 희생하며 실천하는 사랑과 그로 인한 보람내지는 기쁨을 누리려는 욕심. 그 어느 쪽의 길도 사실 쉬운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내가 독자들이 주목하기를 바라는 인간 유형은 "좋은 말만 늘어놓는" 안셀모이다. 소설에서 안셀모가 대중의 존경을 받았듯이 이 세상은 "좋은 말만 늘어놓는" 사람들이 존경 비슷한 것을 받는(한국은 특히나 더 그렇다) 이상한 곳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변호사;나는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억울한 사람을 위해 변론하는 것이다. 의사;나도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일한다. 정치인;나 역시 돈이나 명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일한다. 교수; 나는 돈은 없어도 그만이고 미래의 재목들을 키우는 것이 보람이다. 종교인; 나야 물론 돈과는 거리가 멀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봉사하는 사람 아닌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부자로 살고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엿먹어라! 나는 당신들 모두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돈을 낸다." 나는 돈에 대한 욕망을 그럴듯한 명분이나 보람으로 위장하여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는데 능숙한 사람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저술가 김지룡은 ‘개인독립만세’에서 이렇게 말한다. “명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은 패거리 문화를 만들어 낸다. 명분의 세계에서는 옳고 그른 것이 없다. 자기에게 얼마나 유리한가가 판단의 근거이다. 명분을 내세우는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고 사기꾼이기 십상이다.”(사족; 나는 김지룡의 책을 매우 좋아한다. 그와 술자리를 같이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 아내는 그의 여성편력이 잘 나타난 책 '나는 솔직하게 살고싶다'를 먼저 읽었기 때문에 그의 다른 책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ㅎㅎ)
예컨대 변호사가 매일 라면도 먹기 힘든 보수를 받으면서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한 변론만 하는 직업이라면 당신은 그 직업을 택하겠는가? 의사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진료를 하여야 하고 과거 소련에서처럼 낮은 월급을 받을 뿐인 그런 직업이라면 당신은 하겠는가? 국회의원이 생기는 것 한푼 없는 직책이고 힘도 없는 그런 직책이라면 그렇게들 하고 싶어 하겠는가? 대다수는 그럴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사실은 대가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라고 극구 변명한다. 그들이 빈민촌의 가난하고 헐벗은 자선사업가, 무보수의 자원봉사자라면 나도 그 말을 믿고 존경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저 그들을 자기 속내는 숨기고 "듣기 좋은 말"만 하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평가 절하시키고 만다. 특히 툭하면 국민의 이익을 내세우며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자기 실속과 밥그릇을 따지는 집단들은 그 집단이 공기업 노조건 무슨 협회건 간에 나에게 있어 꼴갑 떠는 놈들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가난하였을 때 이 사회에서 이른 바 존경 받는다는 사람들은 내게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어느 일을 하던지 간에 보람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들이 즐겨 들려주던 예화는 “두 명의 석공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였고 다른 사람은 부처님을 위한 석탑을 만든다는 보람을 갖고 일을 하기에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은 석공이 아니었다. 폼 나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자기들은 챙길 것 다 챙기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보람을 가지고 일을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나에게 그건 위선이며 자기 기만이다. 보람을 느끼라고? 프랜체스처럼 자기를 희생하며 사는 사람이 내게 그렇게 말을 한다면 나도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일한 대가로 받는 보수가 이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편에 속한다면 그는 대가를 보람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고자 일을 하면서도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은 꺼려 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미화시키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로는 아름답다. 프로 선수는 돈 때문에 뛴다. 또 돈 때문에 뛰기에 프로가 되게 된다. 더 많은 돈을 받고자 더 많이 노력한다. 프로 선수에게 돈은 그 노력에 대한 대가이며 자기만큼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차별을 원하는 자존심이며 명예이다. 돈을 적게 받으면 당연히 그것은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명예에 금이 간다.
1970년에 발표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온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읽어 보았는가? 조나단이라는 갈매기가 고기잡이 배와 해변 사이를 단조롭게 오고 가며 먹는 것에만 급급한 다른 갈매기들 사이에서 추방당했어도 자신의 꿈인 완전한 비행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 진정한 삶의 목적을 찾아서 비행하는 조나단은 더 높이 나는 것을 통해서 완전한 자유를 찾아간다. 정말 멋지다. (자고로 책은 이렇게 돈이나 먹을 것을 초월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잘 팔리는데 정작 그런 책의 저자들 대부분은 국내의 류 시화 시인 처럼 인세를 많이 받게 되어 돈이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게 나로서는 좀 떮떠름하다. )
그러나 이 세상에는 벌레를 찾아 낮게 날면서도 자신이 높게 날고 있다고 착각하는 갈매기들이 넘쳐 난다. 그 갈매기들은 그 착각 때문에 위선자들로 전락하고 만다. 나는 그런 위선자들 가운데서 능력있는 프로를 보지 못했다. 나는 남들이 뭐라고 하던지 간에 삶에 대한 자존심 때문에 낮게 날면서 벌레부터 먼저 잡아 먹자고 작심을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프로다. 월 스트리트 금융 기관들에서 신입사원 면접을 볼 때 지원 사유를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답하면 모조리 불합격이다. 돈을 벌고 싶어서라고 말하는 사람만 합격된다. 부자가 되려면 돈에 대한 가식을 버리고 프로가 되라. 배고픈 갈매기는 높이 날려고 해도 기운이 없어 그렇게 하지 못한다.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5월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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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rawPixelSizedText("훔냐리", 76, false) 훔냐리| 2007.03.13 1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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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 가면 여러 가지 안내장이 붙어 있다. 평균 잔고 얼마 이하는 이자를 주지 않겠다, 창구에서 공과금을 받지 않겠다, 동전을 교환해주지 않겠다, 등의 내용이다. 반면에 거액 이용자들을 위해서는 프라이빗 뱅킹(PB) 코너라는 것을 만들고 극진한 정성을 쏟는다. 은행의 이런 움직임에 대한 이용자들의 불만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어떤 기업이든 돈만 쫓는 기업은 고객의 외면을 당한다. 고객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은행의 공과금 수납은 사회봉사 차원에서 계속되어야 한다. 은행들의 거만한 태도를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지 답답하다. 정말 은행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고액 예치자들에 대한 은행의 우대를 보면 자존심이 상한다.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고급 인테리어에 대형 화분, 1 대 1 데스크 등 일반창구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PB코너는 은행의 주고객인 일반 직장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점심시간에 직원이 식사 중이라 소수인원만 근무할 때 고객들이 밀려들어 대기하는 동안 PB코너는 한산해 파리 날리며 VIP를 기다린다. 돈 없다는 이유만으로 일반 고객들이 홀대 받는 것 같아 씁쓸하다…이러쿵저러쿵.
어느 경제지 기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쓰기도 했다.
VIP고객들은 송금 액수와 상관없이 수수료가 면제된다. 부자도 아니고 인터넷 사용도 못하는 그야말로 서민들은 100만원 넘는 돈을 다른 은행에 보내려면 4,000원을 내야 한다. 부자고객에게 각종 무료 서비스와 선물을 제공하는 데 따른 손실을 서민들에게서 번 돈으로 보전하는 셈이다.
나는 은행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은행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들도 당신처럼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인력으로 돈 벌고자 애쓰는 사람들일 뿐이다. 은행이 거만하다고? 돈 많이 벌어주는 고객들에게는 친절하다. 당신도 당신에게 이익을 많이 주는 손님에게는 그럴 것이다. 정말 은행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은행은 자원봉사단체가 아니다. 당신이 식당을 한다면 굶주린 사람들을 모두 먹이겠다는 말이냐. PB 코너가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고? 홀대 받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당신은 지금 “돈 갖고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고 믿는 것이며 “인간은 돈 앞에서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이다. 정말 골 때린다. 게다가 부자에게 무료 제공하는 서비스가 서민들에게서 번 돈으로 충당된다고? 정말 웃긴다. 그 서비스는 부자들로 인해 벌게 된 돈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당신이 저녁에 술을 파는데 단골손님이 와서 양주 몇 병과 안주 몇 개를 시켰다. 다른 손님은 맥주 몇 병에 팝콘 안주 뿐이다. 당신 같으면 누구에게 신경을 더 쓰겠는가. 물론 장사건 사업이건 친절이 기본이다. 은행이 참으로 미숙한 것은 거절하는데 있어서도 미소를 가득 띄어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점이다. (일본 선술집에서 저녁에 밥을 시키면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띄우면서 “찬밥밖에 없는데 찬밥을 드릴 수는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속내는 “술집에 왔으면 술하고 안주를 먹어야지 바빠 죽겠는데 왜 돈도 얼마 남지 않는 밥을 시키느냐”는 뜻이다.)
공연장에서 무대가 잘 보이고 음향도 좋은 자리는 당연히 비싸다. 유독 한국에서는 불이 꺼지고 공연이 막 시작되려고 하면 재빨리 자기가 산 좌석보다 더 비싼 빈 좌석으로 옮기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나는 예전에 우리나라 비행기에서 일등석이나 이등석 좌석에 미친 척하고 앉아 있는 3등석 손님들도 보았다. 승무원이 자리를 옮겨 줄 것을 요구하면 얼굴이 벌개져서 자리를 옮기는 사람도 있지만 “비어 있는 좌석인데 좀 앉아 간다고 무슨 일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소. 그냥 앉아 갑시다”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사람들도 있다.
디즈니랜드에서 디즈니가 직영하는 호텔에 투숙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입장을 1시간 이상 빨리 허용한다. 돈 갖고 사람을 차별한다는 말이다. 내가 만일 용인 애버랜드의 사장이라면 1등석 입장권을 매우 비싼 값에 별도로 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줄서기에서 1등석 입장객과 일반 입장객을 구분할 것이다. 런던 국제공항에는 1등석 승객을 위한 별도의 출입구 까지 준비되어 있다. 파리에서도 뉴욕행 콩고드 비행기 승객들은 출발 이전부터 완전히 분리된 대우를 받았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9.11 테러 이후 미국 공항에서도 1등석 승객은 검색대에서 우선권을 부여 받는다. 이게 자본주의다. 스키장에서도 회원들이 이용하는 리프트와 비회원 리프트는 구분되어 있지 않은가. 비회원이 비회원 전용 리프트를 타려고 길게 늘어 서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니 나 같으면, 줄이고 나발이고 없이 그냥 “원하시는 시간에 조금도 기다림 없이 타실 수 있으며 24시간 전담 요원이 따라 다니는 초특급 회원권”을 가입비 10억원에 연회비 1억원 정도에 팔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같은 인간인데 줄까지 차별하다니 너무 한다”, “돈 없다고 괄시하니 서러워 못살겠네” 따위의 생각을 한다면 당신은 평생 부자로는 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찢어지게 가난하였을 때도 그런 생각을 전혀 해 본적이 없는데 왜 당신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자본주의에서 돈을 지불하는 대상은 결국 “좀 더 편하고 좋은 것”을 얻기 위함이다. 당연히 그 질적인 면은 지불하는 돈의 크기와 비례할 수 밖에 없다.
백화점에서도 구매실적이 저조하면 차별을 감수해야 한다. 우수고객들은 바겐세일 기간이 아니더라도 특정품목을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다. 대다수 일반 고객들은 어떤 행사가 진행되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연평균 5000만원 이상 쓰는 특별고객을 위한 VIP 전용 휴게실은 당연히 일반 고객들은 출입 금지 공간이다.
해외 여행을 하다 보면 나라별로 호텔요금의 계산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값만 내면 투숙하는 인원 수는 상관 없는 경우도 많지만 같은 방이면서도 그 인원 수에 따라 방값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고 함께 투숙하는 자녀의 나이와 자녀 수를 제한하는 나라도 있다. 택시 요금 역시 짐을 얼마를 갖고 타든지 간에 미터 요금만 내면 되는 한국 같은 나라도 있고 홍콩처럼 가방 숫자에 따라 추가요금을 내야 하는 곳들도 있으며 심지어 승객의 숫자에 따라 추가요금을 내야 하는 나라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식당 요금 역시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좌석 위치에 따라 요금이 다르기도 하고(파리에서는 길가에 놓인 좌석이 비싸다) 음식을 싸 갖고 갈 경우에는 앉아서 먹는 요금 보다 할인이 되는 나라들도 꽤 있다. 서울의 몇몇 특급 호텔들에서는 도시락을 주문하여 가져 갈 경우 10%의 봉사료를 붙이지 않는다. 이게 자본주의에서의 합리성이다.
그래도 호텔에서 도어맨이 고급차를 우대시하는 것은 너무 하지 않느냐고? 알려면 제대로 알아라. 고급차이어서 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 오니까 우대하는 것이다. 나 부터만 하더라도 몇몇 호텔들에서는 도어맨들이 내 얼굴과 차를 기억한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조선 호텔이나 신라 호텔 같은 곳에 어쩌다 가게 되었을 때 내 차가 좋다고 해서 특별 대우를 받았던 경험은 전혀 없다.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소형차를 타고 호텔에 들락날락하면서 발리 (valet) 파킹을 부탁하여 보아라. 한 두 달도 안되서 도어맨들이 알아서 모실 것이다. 특급호텔 앞에 고급차들만 주차하여 있는 이유는 발리 파킹 비용을 내거나 팁을 주기 때문이지 차가 좋아서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수고객에게는 특별 대접을 하고 불성실한 고객과는 의도적으로 거래를 줄이는 디마케팅(demarketing)은 당연한 현상이다. 부자 마케팅의 이면에는 부자고객에게 많은 혜택을 주기 위해 상대적으로 서민 고객에게 불이익이 돌아가는 차별적 구조가 감춰져 있다고? 아니 무슨 불이익?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는 이렇다. 더 편하고 더 좋은 것을 원한다면 대가를 지불하라. 지불할 돈이 없다고? 그렇다면 덜 편하고 덜 좋은 것을 가지면 된다. 그게 불이익이냐? 입석과 좌석의 차이가 없이 먼저 뛰어가 타는 놈이 앉아 간다는 원칙이 통용되는 곳은 절대로 좋은 사회가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당신은 그런 시스템을 "돈 앞에서 평등한 사회"로 믿을지 모른다. 기억해라. 그런 사회는 공산주의가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정말 좋은 사회는 "대가를 많이 지불한 사람들"과 "이 사회에서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인하여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 받을 수 없는" 장애인들이 먼저 앉는 사회이다(은행에서도 장애인들 만큼은 특별 대우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족; 우리나라 항공사 직원들 중 탑승구 앞에서 표를 받는 직원들은 돈을 더 낸 승객들에 대한 차별적 서비스 제공에 아주 아주 둔감하고 미련하다. 탑승 순서에 대한 방송을 마이크 없이 하는 직원들도 많고 방송 멘트 역시 탑승 대기 줄은 하나이므로 1등석이나 비즈니스석 손님들은 아무때나 줄을 새치기하고 들어오면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심지어 그런 멘트 조차도 안 하는 닭대가리들도 부지기수이다. 도대체 일본 나리타 공항처럼 탑승로를 둘로 칼같이 나누어 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의 오우너였다면 아마도 사장부터 재교육을 시켰을 것이다. 미국의 어느 항공사 직원 휴게실에서 내가 본 글—"잊지마라, 우리들 월급의 절반은 일등석과 비지니스석 손님들이 제공한다”.)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6월에 기고한 글
위 글을 다른 곳에 인용하는 경우 반드시 아래 내용까지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알림:
1. 신문이나 잡지 같은 언론 매체와 위 사이트에 기고된 저의 글은 그 글이 실린 곳의 이름과 날짜, 저의 이메일 주소 sayno@korea.com 을 명시하는 한,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회비를 받건 안받건 간에 회원들만 읽을 수 있는 게시판에 수록할 경우 예외 없이 모두 불허합니다. 날짜를 밝혀 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 글이 발표된 시점에서 읽어야 하는 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저의 글을 판매 목적의 도서에 인용할 경우에는 저의 동의를 별도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3. 위 사이트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카페이지만 제가 운영하거나 개인적으로 관련된 곳은 아니며, 제가 글을 올린다고 해서 돈을 벌게 되는 사람이 생기는 곳도 아니고, 제가 말한 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이기에 가끔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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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rawPixelSizedText("훔냐리", 76, false)
훔냐리 | 2007.03.13 1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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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을 버리면 행복해 질 수 있다? 맞는 말 같다. 도가의 태평경(太平經)은 말한다. "재물이란 천, 지, 중화의 소유로서, 그것으로 사람을 함께 기르는 것이다. 부유한 집은 단지 우연히 이를 모아둔 곳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창고 안의 쥐가 늘 혼자 배불리 먹고 있지만, 이 큰 곡간의 곡식이 본래 그 쥐의 소유가 아닌 것과 같다."
성경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위기 25:23)고 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장려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행무상(諸行無常:一切有爲法無常)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 어느 종교이건 그 가르침대로 살았던 성인들은 모두 돈을 초월하여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저 성인들을 존경하며 그 마음이나마 조금 배워보고자 하는 속세의 나 같은 사람들은 돈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바람을 피우지도 않고 도둑질도 하지 않았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정당하게 부를 획득한 자라고 하여도 종교 안에서는 안심하지 못한다. 예수는 그런 사람에게 그 부 "모두를 팔아" 이웃에게 나눠주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하였다(누가복음 18:18-30). 참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주문 아닌가. 그래서 나 같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하지만 세리장 삭개오가 자신의 소유 모두가 아니라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했을 때는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했다(누가복음 19:9). 왜 세무서 직원에게는 천국이 50% 세일가로 제공되는지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재산의 절반 정도를 나누어 주는 조건이라면 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성실하게 농사지어 부자가 된 농부가 이제는 좀 놀면서 쉬려고 하는데 예수는 그를 "어리석은 자여"라고 책망한다(누가복음 12:16-21).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요지는 베풀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행복해 질까?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종교에서도 일하지 말라는 말은 없다. 오히려 성경의 달란트 비유를 보면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갖고 있다가 주인에게 돌려 준 종은 주인에게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고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는" 벌을 받는다(마태복음 25:14-30).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방관하는 자는 "그 있는 것 까지 빼앗기고" "있는 자는 그것 마저 받아 더 풍족하게 된다". 게으른 자들 덕분에 부자가 되는 사람도 있다는 해석도 할 수 있고 부익부 빈익빈은 피할 수 없다는 말도 될 성 싶다.
종교적 차원을 떠나 자연 속에서 무소유의 삶을 산다면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 것 같다. 무소유의 삶은 분명 소유를 위한 전쟁에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에게는 대안적 삶이다.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를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신이 법정 스님이나 디오게네스처럼 혼자 산다면 무소유의 삶을 살아도 된다. 그것은 정말 대단한 용기이다.
그러나 가족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식의 행복 추구는 너무나 이기적이다. 아니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법정 스님 조차 돈 자체는 잘 번다. 99년 1월 국민일보 기사에는 법정 스님이 98년도에 인세로 받은 돈만 2~3억원이라고 하였다. 디오게네스는 돈 대신 프리 섹스를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실적으로 선택 가능한 무소유의 삶은, 인간과 동식물과 자연이 공생하며 행복해지는 삶을 제시했던 일본의 농부 야마기시 미요조(1901~1961)의 영향을 받아 전세계 50여곳에 세워진 무소유 공동체들에서 엿 볼 수 있다. 무소유는 공동소유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이들은 세상의 어떤 것도 소유될 수 없으며 다만 쓰일 뿐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소유욕이 옭아매는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더할 나위 없는 마음의 여유를 누리는 것 같다. www.yamagishism.co.kr 을 찾아보면 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소유냐 무소유냐의 길은 각자의 선택이다. 나는 무소유의 길을 존경하지만 자발적으로 원하였던 적은 없다. 무소유를 실천하기에는 나는 너무 하고 싶은 것이 많다. 속인이라고? 물론이다. 성인인척 한 적도 없지 않은가. 나 같은 속인들을 위하여 이미 60년대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참 부자가 되려면 읽어라)에서, 소유함으로써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소유형 인간이 되지 말고 존재형 인간이 되라고 하였다. 소비주의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삶과 상호이해를 기반으로 한 삶의 태도를 가진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인들의 삶에서 진정한 휴머니즘적인 존재양식을 제안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의 말이 우리의 이성을 움직인다 하여도 우리가 순식간에 소유로부터 초월하여 존재형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제러미 리프킨이 "소유의 종말"에서 “더 이상 소유는 필요하지 않다”고 아무리 말하여도 무소유의 길을 택하지 않은 삶에서는 소유가 여전히 행복의 한 조건으로 남아 있는다.
간디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는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 성인이다.
하지만 나는 눈이 오는 날 , 길거리 어딘가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 자신은 사랑하는 아내와 향기 그윽한 원두 커피를 함께 마시고 싶다. 바람 부는 날 나는 깨끗하게 다림질 된 셔츠를 입고 싶다. 비가 오는 날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 놓고 크게 듣고 싶기도 하며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술 한잔 정도는 하고 싶다. 어느 뜨거운 여름 날에는 바람이 살랑거리는 창문을 열고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에 편안히 누워 팬티 바람으로 낮잠을 자고 싶다. 그곳이 바닷가 해변이라면 더욱 좋다. 매일같이 샤워도 하고 싶으며 샤워 후에 시원한 음료 한잔은 마시고 싶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 버스가 왔다고 같이 뛰어가기 보다는 택시를 잡아 편히 집까지 바래다 주고 싶었다. 손영란 시인은 이러한 나의 마음을 “별것 아닌 것을 그리워 함”이라는 시에서 비슷하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생활의 격이란 별 것 아니다 때맞춰 뜨거운 물에 목욕할 수 있고 갓 구운 빵을 커피와 함께 먹는 것이며 아침에 가끔씩 모짜르트를 듣고 매일 아침 배달 된 신문을 읽는 것이다 버스를 타도 좋으나 어쩌다 한번씩은 차를 혼자 모는 것이다 구겨진 옷이 아니라 깨끗이 다린 옷을 입고 돈은 반듯하게 펴서 지갑에 가지런히 넣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은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어야 하며 가끔씩은 집안이 환해지도록 꽃을 사는 것이다 나는 정말 별 것 아닌 것을 그리워한다 로마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몇 개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실제로 행하는 것이 만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돈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영화 ‘존 큐(John Q)’에서 주인공 존 큐는 가난한 흑인 노동자이다. 어느날 그의 아들이 심장병으로 쓰러진다. 수술비 25만 달러가 있어야 하지만 자동차 할부금도 내지 못하여 차를 빼앗긴 처지이다. 결국 그는 아들을 살리려고 병원에서 인질극을 벌인다. 아들에게 심장을 주기 위해 권총 자살을 결심한 존 큐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돈도 많이 벌어. 남을 배신하더라도…. 아빠처럼 바보같이 살진 마. 돈이 있으면 모든 게 다 쉬워… “
나 역시 내 가족이 수술비가 없어 죽어야 하는 상황은 정말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소유하고 싶은 본능을 어쩌란 말이며 황금이 돌로 안 보이는데 어쩌란 말인가. 아무리 사랑이 넘쳐 나는 부부 지간이라고 할지라도, 남편의 빚을 갚고자 아내가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지만 모두 냉냉하게 대할 때 아내는 서러워 질 것이다. 쪼들리는 살림에 쓰레기 봉투 하나를 아끼려고 지나치게 꽉꽉 눌러 담다가 그만 비닐 봉투의 옆구리가 터지고 말았을 때 아내는 서글픈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나는 내 아내와 내 가족에게 그런 서글픔 만큼은 주지 않으려고 했다.영화 ‘존 큐’에서 주인공은 경기가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카드 빚은 생각하지도 않고 새 자동차를 구입하는 한심한 가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돈을 “남을 배신하여야” 버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택한 삶은 소유의 삶이었으나, 명심하라, 사업과 투자의 종자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불필요한 소비는 최대한 억제하였다. 즉 소유를 지향하면서도 절약을 미덕으로 삼고 "행복하게 돈을 모으며" 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모은 돈들은 점점 더 불어나더니 나를 부자로 더욱 더 만들어 주었고 그때부터 비로서 소비를 하기 시작했다. 기억해라. 소유를 더 하려면 무소유에 가까운 절약부터 하여야 한다는 진리를 말이다.
우리들 생활이 철학적 사고와 지고의 선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근본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돈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 당신이 내 가족의 수술비를 줄 것도 아니라면, 그리고 당신이 간디처럼 크게 버린 사람도 아니라면, 내 글에서 아무리 돈냄새가 물씬물씬(物神物神) 나더라도 "크게 버리면 크게 얻는다"는 헛소리는 하지 말라. 크게 버릴만한 것을 가져 본 적도 전혀 없는 사람들이 무소유 어쩌고 저쩌구 하는 것이 내게는 그들만의 자위행위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6월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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