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는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그윽하고 아련한 존재다. 넓은 대양을 마음껏 떠도는 '자유로운 방랑자'이기도 하면서, 별자리를 보며 삶의 길을 잡는 '지혜로운 길 안내자'로 상징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바다의 잉태'를 주재하기도 하고, '우주와 우주 사이'를 유영하기도 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신화의 한 정점'에 서기도 한다.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 고래는 다가가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신화의 존재를 극복함으로써 신화로 태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내재된 욕망이, 인간과 고래의 역사를 웅변하는 것이다.
몇몇 식당만 남은 쇠락한 포구
석유공단의 검은 연기에 더 황량
고래박물관·문화마을·광장 등에
사람들, 옛 추억 다시 불러내
고소한 뱃살·오돌오돌한 오베기…
12가지의 맛을 낸다는 '고래고기'
한 점 먹을 때마다 더듬는 희로애락
고래는 신화 속에서 생명의 잉태를 꽃피우는 존재다. 고래의 힘찬 꼬리 짓에 '결실의 숲'은 탄생하고, 그 숲에서 인간의 인연이 씨줄, 날줄로 연결되며, 전생과 후생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래 뱃속 같은 마을, 울산 장생포로 간다. 장생포는 고래의 아련한 신화가 숨 쉬고 있는 곳. 그러면서도 고래를 음식으로 파는 전문식당이 도열해 있는 곳. 고래에게서 꿈과 희망을 찾는가 하면, 12가지 고래 맛의 황홀한 미각 기행을 펼쳐내는 난장과 같은 곳이다.
우리 역사에 있어 '장생포'는 반구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래들의 회유 해면으로, 또 러시아, 일본 등 외국 열강의 고래 수탈 전진기지로, 그리고 우리 포경산업을 꽃피운 포경의 중심지로 부침을 거듭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울산 해양산업 관련 중심지이면서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되어 있지만, '상업포경'이 금지된 1986년 이후 장생포는, 울산공단에 둘러싸인 퇴락한 포구였다. 오로지 고래 목숨으로만 연명했기에, 이 포구에서 '고래의 부재'는 '상실의 시간'이며 '모든 것들의 부재'이기도 했다.
'장생포 가는 길은 쓸쓸하고 황량했다. 검은 연기 자욱한 석유공단 틈새로, 이미 발길 끊긴 장생포는 무덤처럼 잠자고 있었다. 몇 집의 고래식당만이 이 쇠락한 포구가 장생포임을 힘겹게 알리고 있었다. 이미 장생포에는 고래가 없었다. 폐선 된 포경선도, 군수 월급의 2배 받던 4백여 명의 포경선원도 없었다. 장생포초등학교 고래턱뼈로 만든 교문과 장생포 사진관, 몇 장의 고래사진 속에서만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고래를 볼 수가 있었다. 하루에도 몇 마리씩 고래 배를 갈랐던 고래해체 터 빈 바람 속의 고래울음소리만이, 펄럭이던 푸른 고래시대 깃발이 꺾인 장생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졸문 '장생포 가는 길' 중에서)
이처럼 장생포는 '고래'로 해가 뜨고, 고래로 밤을 맞았던 곳이다. 때문에 고래가 떠난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래를 추억하고 고래를 다시 불러내고 있다. '고래박물관'을 짓고, 고래의 길을 좇는 '고래크루즈'와 '고래문화마을'을 만들어 함께 고래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장생포 언덕에 있는 '고래문화마을'로 오른다. 1970~80년대 포경시대의 장생포 마을을 재현해 놓았다. '고래 해체장'에서는 한창 포경한 밍크고래를 해체하고 있다. 고래 기름을 짜는 착유장과 포경선원들이 고래고기 한 접시에 소주 한잔 하는 '고래막집'도 보인다. 마을 안쪽으로 티켓다방과 사진관, 연탄가게 등 그 시절 마을 모습도 새록새록 하다.
고래광장에는 대왕고래, 귀신고래, 혹등고래, 밍크고래, 향고래, 범고래 등 고래들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울산대교를 배경으로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귀신고래, 대왕오징어를 잡아먹는 향고래, 혹등고래와 밍크고래의 모습도 생생하다. 고래 하나하나가 실물 크기라서 어린이 체험교육장으로도 유용하겠다.
고래는 넓은 바다를 유영하며 '다양한 삶의 길'을 내는 '개척 정신'과, 별자리를 따라 '신화의 길'로 안내하는 '모험 정신'의 대표적 상징이다. 세상을 사는 이들에게 고래는 '삶의 길잡이'이거나 '방랑의 여행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래를 먹는다. 고래를 먹으며, 고래의 신화 같은 꿈을 읽는다, 거친 물살 헤치며 회유의 길을 잡는 혜안과, 푸른 별자리 등대 삼아 세상의 이치를 밝히는 지혜를, 고래에게서 얻으려 하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우리 인생의 바다에 고래 몇 마리 넉넉하게 풀어놓으려는 것이다.
부위별로 12가지의 맛을 낸다는 고래고기. 환상적인 맛의 극치로, '미각의 향연'을 펼쳐 보이는 음식. 먹는 방법이 수백여 가지나 된다는 고래고기는, 맛도 맛이려니와 '고래의 신화'를 먹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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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위별로 12가지의 맛을 낸다는 고래고기. |
한 점 한 점 고래를 먹을 때마다, 고래의 꿈과 좌절, 우리의 희망과 절망이 함께 겹쳐지는 것을 본다. 고래의 일생을 맛보면서,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과 오욕칠정의 맛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고소하게 살살 녹는 뱃살(우네), 쫄깃쫄깃 오돌오돌한 꼬리지느러미(오베기), 지방과 껍데기, 살코기가 잘 배합된 등살(바가지), 진한 동물적 냄새의 내장, 차지고 부드러운 야성적인 고래육회 등…. 부위마다 맛이 다르고 씹히는 차이가 확연해, 고래의 다채로운 일생을 일별해 볼 수가 있다.
시인 지망생이던 시절. 몇몇 지인들과 좌판 고래를 먹던 시절이 있었다. 고래고기 좌판에 앉아 열띤 문학 토론과 고래고래 노래도 부르고, 암울한 시대적 불만을 서로 주먹질로 풀던 1980년대. 고래는 우리의 '술안주'이기도 했지만, 사람으로 살기 위한 몸부림의 '목격자'이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는, '고래의 사랑'과 '고래의 희생'과 '고래의 배려'를 함께 나누려 했는지도 모른다.
대자연과 우주를 향해 '꿈과 희망'을 젖 먹이던 고래. 고래의 따뜻한 젖 한 모금으로, 모든 삼라만상이 든든하게 배불리고 포근한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온 세상이 고래를 닮아가는 꿈을 꾼다.
'별들이 가끔 바다에 빠지는 까닭은 / 바다의 고래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다 // 고래가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 오르는 까닭은 / 밤하늘 별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다 // 오늘 밤에도 검푸른 동해 장생포 앞바다에서 / 별들은 고래의 젖을 배불리 먹고 싶다 / 고래도 별들에게 마음껏 젖을 먹이고 싶다'(정호승의 시 '고래와 별' 전문). cowejoo@hanmail.net
최원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