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넷 역사사진 자료들 펌하다 보면...정말 같지않은게...
뭔 지가 찍은 사진도 아니면서...펌을 강하게 막아놨단 쫀쫀함입니다.
그냥 공유하면 됄 옛 자료들을...뭔 지가 거기 가서 직접찍은 사진마냥 혼자서 쥐고있다가...
어찌해서 펌이라도 돼어 광범위하게 퍼지면...
원본자료를 지워...참고한 모든 자료글들의 사진을 한방에 다 병신을 만들어 버립니다.
벤댕이 소갈딱지로 뭔 역사얘길 하겠단 건지...ㅡ. .ㅡ
구한말기 북경의 청나라 사진들을 보면...
어린 환관들이나... 어린 광서제등의 두발형식이 양갈래로 땋은 머리입니다.
이는 사서가 말한 청나라령 한족출신 총각들의 전형적인 총각머리입니다.
고로, 구한말기 북경에 거하던 어린 광서제와 그 어린 환관들 같은 자들은 한족 어린이였단 얘기가 돼니...
구한말기 북경에서 촬영됀 청나라인들은...한족(漢族)이란 말이 됍니다.
고로, 이미 서양제국들의 아세아 침공이 절정였던 청일전쟁 이후엔...
청나라란 나라는 이미 중앙아에선 없어지는 단계였다 보이며...
북경의 청나라라던 나라는...패망한 서역의 청나라와 서남아 인도등지에서 진출한 남명(무굴)의 잔당들...
그리고... 태평천국의 난으로 동북으로 몰린 대륙조선의 문명이 짬뽕됀 문명의 실체라 여겨집니다.
밑의 사진자료에 나오는 광서제 재첨과...
그 밑의 조선사서가 기록한 청나라인들과 한족의 두발차이에 대한 글을 참고하면...
광서제등...구한말기 북경에서 촬영됀 청나라 아이들의 두발은...
한족아이들의 전형인 양갈래로 땋은 머리임이 들어납니다.
고로, 구한말기의 북경은...
만주족 청나라가 아닌...최소한 한족 아이들이 청나라 황제로 둔갑한 짝퉁 청나라이자...
대륙조선 망할 시기의 만주족,한족,조선족이 짬뽕됀 아세아 마지막 제국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만주족 청나라도 중앙아에 있었고...한족이라 나대던 남명족도 서남아 무굴제국에 잔존하고 있었고...
진국(震國=진나라=지나)인 중원에 있던 삼한땅의 대륙조선도 있었는데...
공히, 태평천국(원조동학난)의 난 이후...양이들과 왜놈들에 대륙조선의 남방이 망해...남명과 만주족들이 진출하고...
이들이 다시 ...대륙조선과 짬뽕이 돼어...동북아로 격리수용돼는 단계였다 예상합니다.
밑의 주소클릭하시면 ..자료사진 중...광서제의 4살때 머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밑의 자료사진에서...어린 광서제의 말고삐를 잡은 환관(?)은...
당시 북경 청나라 군인이나 관료들 기록사진에... 매번 출연한 전문 모델이십니다...^. .^
엄청 낯이 익습니다.
http://blog.daum.net/dk-choi/7275200
홍길동 님의 도움으로 ...사진을 정상적으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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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이 나라를 세운 규정은, 풍속을 금수가 되게 인도하고 천하의 백성을 어리석게 통솔하니, 등위(等威 신분, 등위(等位)에 맞는 위의(威儀))를 업신여기고 명분과 법도를 천히 여기고 재화를 숭상한다. 그런데 지난 숭정(崇禎) 이후부터 지금까지 거의 200년 동안 항간에 더러 취할 만한 조그마한 형식과 예절이 있는 것은 옛날 중국의 유풍(遺風)이 없어지지 않아서인가?
재상의 자식이 시정아치 노릇을 하고 시정아치의 자식이 재상 노릇을 하고 있다. 한번은 진희증(陳希曾)의 조부 세작(世爵)의 가장(家狀)을 보니,
“세작은 대대로 벼슬하던 집안의 자식으로 집안 형편이 몰락하자, 곧 연(燕)ㆍ제(齊)ㆍ민(閩)ㆍ월(越) 등의 지방에서 무역하여 누거만금의 자산을 모았고, 그의 아들 진도중(陳道中)은 진사(進士)에 합격, 자급이 자정대부(資政大夫)에 이르렀다.”
하여, 진도중이 그 근고하게 재물 늘린 재주를 칭송하여 빠짐 없이 찬술(撰述)하여 찬양하는 듯하니, 풍속이 명검을 천히 여김을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재상이 아문으로 출사(出仕)할 적에는 궐문 안으로 들어간 뒤에 1인이 앞에서 호창(呼唱)한다. 도로에서는 태학사(太學士) 이하는 갈도(喝道)하는 규정이 없고, 비록 천한 하인이라도 역시 말을 타고 지나가고 조금도 기탄이 없으며, 오직 길에서 황자(皇子) 및 친왕(親王)을 만나면 대소의 관원이 다 말에서 내린다.
한인(漢人)으로서 벼슬할 경우에는 청어(淸語)를 배운다. 대개 공식 모임에는 청어를 쓰고 주어 문자(奏御文字)는 모두 청어로 번역한다. 그러나 항간에는 만인이건 한인이건 한어를 통용한다.
관원의 행차에는 1기(騎)가 좌석을 가지고 앞서 가니, 그것은 좌석으로 그 품급의 고하를 구별하기 때문이다. 벼슬이 높은 자는 모두 가마를 탄다.
귀인의 행차에는 1기(騎)가 수레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 따르는 자가 혹 수십 기에 이르기도 한다. 만약 거리가 좁아 거마(車馬)가 막혀서 앞서 가는 자가 가지 않으면 뒤에 선 자가 벽제(辟除)하는 적이 없으며, 이따금 수레 안에서 책을 보거나 눈을 붙이면서 한식경을 끌기도 하여, 앞선 자가 나가면 고기 꿰미처럼 일렬로 따라간다. 이 때문에 수레를 타는 것이 더러는 걸어가는 것보다 빠르지 못하기도 하다.
남자는 모든 생업에 노력하느라 매일 겨를이 없고, 옷 꿰매고 베 짜고 방아 찧고 밥짓는 일도 스스로 한다. 여자는 아무리 천인의 부녀라도 집안 살림의 약간만 여유가 있으면 온돌방 위에 편안히 앉아서 얼굴 단장만 하고, 그 하는 일도 버선이나 신 바닥 꿰매는 것뿐이다. 이보다 나을 경우에는 양모(涼帽 등(藤)나무를 짜서 만든 모자) 짜는 것을 업으로 삼으며, 의복도 모두 남의 손을 빌려 만든다. 남의 삯바느질하는 자도 역시 이것을 생업으로 하는 남자이다. 도중에서 이따금 여자가 때묻은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로 문밖에 앉아 의복 꿰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솜씨가 서툴러서 여인의 본색이 보이지 않았다. 대개 북방은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적고 또 얼굴이 아름다우므로 남자는 흔히
봉천(奉倩)과 같은 버릇이 있어 그 응석부리는 대로 맡겨 둔다. 그런데 남방은 그렇지 않아 옷 짓고 수놓는 것을 다 여자가 한다고 한다.
남자는 나서부터 머리를 깎고 오직 한 움큼의 털만 남겨 두어 뒷꼭지에다가 땋아 늘이니, 이것을 변자(辮子)라 한다. 비록 나이 많아 머리가 허연 자라도 등 뒤에서 보면 역시 우리나라 어린아이와 같다. 승려[僧]는 변자(辮子)까지 아울러 깎아 버리고, 도사(道士)는 머리를 깎지 않고 묶어서 상투를 틀기도 하고 흐트려서 늘어뜨리기도 한다.
내가 첨수참(甜水站)을 지날 적에 유씨(劉氏) 성(姓)을 가진 아이를 보니, 머리를 두 가닥으로 땋아서 뒤로 늘어뜨렸다. 내가 그 까닭을 물으니, 유씨는,
“장가들지 않은 한인(漢人)은 으레 다 이와 같이 하고, 장가들면 반드시 한 가닥으로 합니다.”
하였다.
첫댓글 가설은 필요하나 역사에서 소설은 안됩니다. 한족은 허구인데 한족이 무굴이라는걸 증명 하세요. 매번 소설 쓰면 안됩니다. 가설과 소설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전에 해무님이 올리신 무굴(인도)인들 기록화 못 보셨습니까...?
청나라 속민들였던 명나라인들과 같은 변발였습니다.
그럼 말 다한거 아닙니까...?
한(漢)족 왕조가 존재했는가? 아니면 조작된 왕조인가? 하는 문제는 여러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나의 주장은 "한족왕조"는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명확한 증거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방과 그의 부모, 그의 처인 여황후등을 보면, 조선인이라는 고증은 가능합니다. 존재하였는가? 조작된 왕조인가 하는 문제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무굴이 한족이란 말, 역시 더 많은 고증이나 증거를 찾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무굴(인도)인들이 한족일 순 절대 없겠죠...
무굴황제 조차도 정확히 한족일 수 없겠고요...몽골족 혼혈이겠죠...그래 몽골군벌인 격이고여...
그러나 한으로 대표돼는 중원(중앙아)족들은...그 혼혈의 무굴황가에 기대를 했고...
때마침 일어난 홍건난으로 중원이 혼란하고...북원의 기황후계와 바얀계가 대립하던 황제계승전의 틈에서...
몽골을 이끌던 탈탈이 제거됀 연후엔...
한족혼혈의 무굴군벌이 패권을 잡아가는과정이 명나라의 시작이라 보입니다.
이 과정중에...기황후계와 대립하던 공민왕계는 무굴을 선택하는게 친명정책의 시작이요...
그 당대의 기록들론 확곽첩목아(왕보보)가 그 주인공였으니...
실제의 명태조는 쿠쿠티무르란 확곽첨목아일 확률 많다 봅니다.
아직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당대 기록들의 종합으로 보면 그럴 정황이 많단 겁니다.
제 생각엔 한족(漢族)은 있었습니다.
타클라마칸 남부와 티벳 북부정도가 그들의 중심지라 보이는데...
낙랑과 현도의 경영이후엔 요동으로 보이는 돈황에도 존재했다 보입니다.
그래, 연행사들이 요동가는길에 한족이 자꾸 거론됀 거라 봅니다.
청나라에 명이 밀리면선...자연히 남으로 밀려 카라코름과 히말라야를 넘게 돼고...
중원에선 다 없어지고...아랍동부인 파키와 인도에만 존립한게 명나라요 무굴제국이고...
당연 지배층은 몽골혼혈 한족들이였다 보이니...
더 많은 인구의 한족들은...그 무굴황가를 한족황가로 존숭했을 것이니...
인도(천축)의 백성들이야 한족은 당연 아니겠으나...무굴의 지배계급은 몽골족혼혈 한족 왕가에...
한족들이 대부분인 귀족들로 구성됀 왕조였다 보입니다.
명나란 이미 황제권을 잃었으니...남명(南明)이란 존재로 중원역사에서 거의 거론도 돼지 못한거라 보이고여...
그러나 이들은...서남아해양 옛 왜들의 영역까지 차지했다 봅니다
홍건왜족들과 섞여버리는 과정이지요...
이후, 홍건왜적들인 서남아 짱께들은...무굴(명나라)이 원래 지들 홍건왜족이자 한족나라라 왜곡을 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홍건왜도 아주 희미한 한족 튀기이지만...정통한족이라 우기는 것이겠고여...
아직까진 제 예상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