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한복판에 ‘그을린 사랑’을 보았다. 영화를 본 후 대화가 간절할 때가 있다. 이 영화가 그랬다. 극장문을 나서는 누군가를 붙잡고 ‘우리 영화 이야기 좀 해요.’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이었다. ‘시간 내서 그을린 사랑, 꼭 보세요.’라고. 저녁이 내려앉고 가랑비가 흩날린다. 쓸쓸함에 익사할 것 같다. 광화문 교보문고로 숨어들었다.
며칠 후 조카가 서울나들이를 했다. ‘영화 보고 오랜만에 눈물, 이모 그을린 사랑 감상문 꼭 써줘’ 늦은 밤 문자가 왔다.
영화 본 지 한 달이 지나고 조카가 수시로 채근을 하였지만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글 감각을 점점 잃어가는 무디어진 감성에 게으름이 더해진 때문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내전, 정치상황이 복잡한 중동의 레바논에서 겪은 한 여인의 비극, 전쟁이라는 총론이 개인이라는 각론과 만났을 때 개인의 실존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를 극단까지 밀고나간다. 충격적인 마지막 반전, 운운하던 홍보용 문구는 영화 중반 이후부터 조금씩 간파되어서 마지막 충격 한 방은 없었지만 인물의 관계도는 충격, 세상에 이런 막장드라마가 없다. 설령 영화적 작위였다 해도 전쟁의 비극 속에서 그보다 더한 충격이 개인을 박살내버리는 일이 허다하지 않을까. 그러니 굳이 지나친 설정이라고 비난할 이유는 없다.
자세한 줄거리와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중동의 정치와 종교가 뒤섞인 갈등의 역사는 영화의 공식홈페이지 안내를 참조하면 된다.
http://blog.naver.com/incendies?&t__nil_story=homepage
영화의 몰입도는 상당히 높다. 웃기는 장면 한 번 없이 상영 시간이 2시간이 넘지만 지루하지 않다. 레바논에서 미르완으로 살다가 캐나다에서 나왈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갔던 한 여인의 비극과 어머니의 과거를 찾아가는 잔느와 시몽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서서히 밝혀지는 미르완과 나왈이 겪은 비극의 실체와 마주칠 때마다 그 충격적인 내용을 이렇게 건조하게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올까, 궁금해졌다. 이 비극은 전쟁의 악몽에서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비인간적인 고통으로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보편성으로 지평을 확장한 주제를 관찰자적 시점과 간간이 끼어드는 다큐적 영상과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이야기 방식으로 펼쳐 보이니 영화를 계속 응시하게 만든다. 그녀의 분노와 그녀의 증오와 그녀의 사랑과 그녀의 용서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감정이입 되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미덕이다. 감독의 카메라는 그녀의 삶 밖에 서 있다. 밖에서 볼 때 비로소 안이 보이고,. 밖에서 보아야 찬찬히 다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공감은 무조건적 이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전후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니 편이야’ 라고 할 때 그것의 지속성은 과연 길까. 너의 행위 자체가 온당하냐 그렇지 않냐를 떠나, 전체 맥락 속에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상황을 온전히 이해한 후에 고개 끄덕이고 안아주는 것이 진정한 공감 아닐까. 그래서 나는 그동안 무조건적인 공감에 동의하지 않고 살았나 보다. 가끔 쌀쌀맞다는 말을 들었나 보다.
그녀는 나왈이라는 새 이름으로 캐나다에서 공증인의 비서를 하며 평범한 생활을 한다. 수영장에서 만난 한 남자, 문신을 한 발뒤꿈치를 발견한 순간의 환희를 터트리기도 전에 보아버린 그 남자의 얼굴, 그렇게 찾아 헤맸던 아들이 자신을 강간하여 임신시킨 고문기술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그 후 나왈은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살았을까. 그 고통이 결국 그녀를 나달나달해지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나달나달해지면서 증오와 분노가 더욱 커질 텐데 그녀는 그것을 어떻게 견뎠을까. 다만 견뎌내려고만 했다면 그녀는 완전히 부서졌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부서진다. 그러나 나왈은 견디기만 하는 수동적인 삶에서 한 발 나아가 과거를 인정하고 미래를 향한 용서를 선택했다. 자신이 겪은 비극적 현상을 인정할 때 비로소 과거는 숨겨야만 하는 고통의 쓰레기가 아니라 사랑으로 다시 써야 하는 미래의 일기장이 되기도 한다. 진실을 마주 볼 용기를 지닐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워져야만 과거의 비극적 흐름을 끊어낼 수 있는 사랑이 싹트고 사랑으로 빚은 용서는 세상을 구원하는 노아의 방주가 될 수 있다.
잔느와 시몽으로부터 각각 편지를 전해 받은 한 남자,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더 큰 고통과 맞닥뜨린 그 남자, 어머니의 과거를 찾아 멀리 레바논까지 갔다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온 잔느와 시몽, 그들에겐 언제라도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과연, 나왈이 만들어 띄운 용서의 방주에 이 세 사람이 올라타서 ‘함께 존재하는 것은 멋진 일’임을 깨닫게 될까.
그런데 내 문자를 받은 친구는 이 영화를 보았을까?
미루나무 한 그루 |
출처: 엽서 한 장 원문보기 글쓴이: 미-----루
첫댓글 영화를 보진 못했으나 후기 잘 읽었어요 여행하며 올리신 글과 사진도~~
우미갈에 뛰어나신 분들이 많으신듯 해요 감사히 읽고 갑니다
영화, 국내 짧은 여행 등 소소한 나들이를 좋아해요. 마음의 오솔길에 건조한 바람이 불 때 봄비처럼 촉촉히 적셔 줄 그 무언가가 필요하잖아요. 내게 영화와 여행은 그런 것이랍니다.
비우티풀도 추천합니다. 비우티풀을 보시고도 멋진 감상평 부탁드립니다.
비우티풀, 메모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