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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6강
II. 하나님 중심적 관점 – 성화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앞에서 우리는 바울의 윤리적 명령은 구원의 직설법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새로운 품성을 입었으므로, 그 존재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그분 자녀가 된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위에 인용한 레 19:2 말씀은 레위기 전체 말씀을 관통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그리고 그분 자녀인 우리가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레위기 전체는 이스라엘이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구체적인 계명이다. 이와 같이 리덜보스도 구체적인 계명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전에 본 단원에서 먼저 계명의 성격을 밝힌다: 의와 거룩함
바울은 교회에 많은 구체적인 권면(윤리적 명령)을 주었는데, 우리는 이것들은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러한 새로운 순종이 일반적으로 어떤 성격의 것인지 알아본다. 이 주제에 관련하여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본문이 로마서 6장인데, 여기에서 새 생명을 급진적인 도덕적인 전환(방향을 완전히 반대로 돌리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을 설명하고자 바울은 옛 사람의 도덕적 생활방식과 새 사람의 도덕적 생활방식을 대립시킨다.
옛 삶은 “죄가 죽을 몸을 지배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게” 한 삶이었고,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는” 삶이었던 반면에,
새로운 순종은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자신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다(6:12-13).
마찬가지로, 신자가 된 자들의 옛 삶은 “죄의 종”이 되어서 “의에 대하여 자유로운” 삶이었다(20). 하지만 이제 그들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되었다”(22). 죄의 종이란 죄의 소욕에 이끌려 사는 삶이다. 겉으로 볼 때에는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계명)과는 멀리 떨어져 하나님의 원수로 사는 삶이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종, 하나님의 뜻에 매어있는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자유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그리스도인은 진정으로 자유함으로 육신의 소욕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섬길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새로운 삶, 새로운 순종은 하나님 중심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고,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에 가능해졌고, 또한 내가 이 사실을 영접함으로써 나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6:13)가 되어, 이러한 나의 새 삶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옛 중심(죄, 육신, 과거의 나)과 거기에 속한 핵심적인 권세(“정욕”)의 지배를 벗어나서 자신의 실존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울의 자세한 개별적인 권면은 이러한 것을 기반으로 나타난다. 이곳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이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 내주지 말고”라고 한 것이 12장에서부터 이것이 현실 삶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바울이 구체적으로 권면한다. 새 생명은 이렇게 지향성과 방향성에서 하나님 중심이라는 철저한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는 죄의 소욕을 벗어나서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살도록 애써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자기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리덜보스는 바울의 구체적인 권면의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그 권면이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를 먼저 밝힌다. 앞에서 인용한 레 19:2 말씀은 계명을 주시는 중간에 계속 등장한다. 그만큼 계명을 지켜야 하는 동기가 중요하다: 19:36; 20:24, 26; 21:8, 12, 15, 23…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10:1-3에서 하나님께서 아론의 두 아들인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를 치신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의 인간론적 관점은 그의 이러한 권고가 하나님 중심적이라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즉, 진정한 인간성이란 단지 그가 모든 것을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어 행할 때 드러나고 전개된다는 것이다. 로마서 6장에서 이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6:22-23을 보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다. 즉 육신의 생각을 죽이지 않으면 그가 열매를 맺어 사망에 이른다. 그러나 하나님께 종이되어 그분을 섬기면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 영생에 이른다(„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하게 살 때 그 열매로 영생을 얻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의 의미도 분명히 드러난다. 교회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자유를 받았다(율법으로부터의 자유도 포함). 즉, 교회는 참된 인간성을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받았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사람을 옭아매어 가두어버리는 반면에,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롬 8:6,8)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일들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을 방해해서 참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는 반면에(갈 5:19-22), „성령의 열매“는 „희락과 화평“이고(갈 5:22; 롬 14:17)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롬 8:15)이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가 깨어서 이 자유와 화평과 희락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이렇게 바울의 권면에서 하나님 중심적 관점과 인간론적 관점이 동시에 등장하고 서로 연관되었다고 할지라도 후자는 전자에 종속되어 있으며, 전자는 후자로부터 생겨난다는 것, 그리고 그 반대의 순서는 성립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 뜻을 섬기기 위해 있으며,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곳에서는 바울의 권면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고전 10:31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희락과 평강을 누리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근간 중의 하나이다. (구약 율법에는 하나님 백성이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즉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 규정된 수많은 정결 예식이 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인을 이 모든 규례로부터 자유케 했다. 이제부터는 그가 자기 마음을 정결하게 지킴으로써 그 규례가 의도하던 것, 즉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이 된다).
바울은 권면 전체에서, 심지어 로마서 12-15장에서처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권면이 나오는 곳에서도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이 중심에 있다. 이 긴 권면의 출발점에 12:1-2가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앞으로 올 모든 권고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구속사역이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당연히 도덕적인 의무를 다해야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행위와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있으므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옛 시대의 삶의 방식(“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과 새 생명의 삶의 방식을 대립시키면서, 새 생명의 전개방식인 새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자세히 펼친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된 새로운 삶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러한 새로운 욕구가 마음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새로운 삶을 방해하는 요소(자기 안에 있는 옛 사람의 소욕)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는다면 아직 그에게 새 생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바울은 12장에서 구체적인 권면에 들어가기 전에 6장을 요약해서 12:1-2[1]에서 다시 가르친다: “너희 몸을 살아 있고 거룩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영적 예배”이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한다. 이것은 “이 세대”의 사람으로 살다가 온전히 회심하여 더는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마음(누스)을 완전히 새롭게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각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창조된 마음이 하나님의 음성(성경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렇게 우리 생각과 삶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바뀐다. 이것이 이루어져야 바울의 구체적 권면을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 나오는 많은 권면의 축으로서 하나님 중심적 관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양한 권면들을 요약해서 정의하는 일반적인 개념들이 있는데, 이것은 “의”와 “성화”로서 이 개념들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먼저 “의” 개념을 살펴본다.
“의”
“의”라는 말은 로마서 6장에서 새로운 순종을 나타내는 말로서 최소한 5번 등장하는데, 이것은 죄, 죽음, 부정함, 불법과 반대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이것만 볼지라도 의 개념이 매우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의는 자주 죄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자세한 연구에 따르면, 의는 구약에 나오는 히브리어 체다카(zedaka)에서 나온 말로서 구약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뜻을 지키고, 그분과의 언약을 지키는 것과, 일반적으로 경건함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신실함을 의미한다. 의는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알려주신 자기 백성으로 삼은 이들과의 도덕적 성격에 의거한다. 즉, 바울은 구약에서 사용하는 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다[2].
이 의에 대한 개념은 여러 가지 다른 뉘앙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 뜻과 부합한다(하나님 말씀, 즉 계명을 지키는 것)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고(롬 6:13 이하; 14:17; 고후 6:7; 엡 4:24; 6:14; 빌 1:11; 딤후 3:16; 4:8), 어떤 때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바른 것을 행하는 것(엡 5:9; 딤전: 6:11; 딤후 2:22), 구제를 통해 사랑을 나타낸다는 의미(고후 9:10)로도 사용된다.
o 롬 6:13-14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o 고후 6: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o 빌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성화(거룩하게 되는 것)
이 새로운 순종이 하나님 중심적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또 하나의 개념은 바울서신에 자주 등장하는 성화라는 개념이다. 성화는 롬 6:12 이하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순종의 목적이자 열매이다:
o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o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거룩함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도덕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구약의 배경에서 볼 때 하나님 백성을 나타내는 일반적 표현이었고, 원래는 제의와 밀접한 관계에서 사용되는 용어였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든 백성 가운데서 택하셔서 자기 백성을 삼았기 때문에 거룩하다(출 19:5-6). 바울도 이러한 거룩함의 개념에서 출발하여(롬 11:16), 이것을 신약 교회에 그대로 적용한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구별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고전 1:2). 교회 구성원인 교인은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자이며(롬 1:7; 고전 1:2), 거룩하고 사랑받은 선택된 자이다(골 3:12).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서의 거룩함은, 하나님 백성이라는 교회의 특권만이 아니라, 이 거룩한 신분에 어울리는 도덕적 상태도 가리킨다. 이것은 „내가 거룩한 것과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바로 이점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으로 등장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자기 „앞에 세우고자“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죄에서 구속하셨다(골 1:22; 참조: 엡 5:26-27).
이러한 연관성 속에서 볼 때 „거룩함“은 도덕적인 완전함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하며, 이 거룩함은 성령님을 통해서 생겨난다. 하나님은 교회를 이방인 중에서 선택하셨고,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사랑받고 성령님을 통해 거룩하게 된 것이다(살후 2:13). 그러나 이러한 성화(교회가 거룩하게 되는 것)는 교회 자신이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 나아갔다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은 부르심과 선택에 상응하는 도덕적인 거룩함의 상태를 말한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에 상응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써 „합당한“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o 엡 4:1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o 빌 1:27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o 골 1: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o 골 2:12 „너희를 부르사 자가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반대로 이 거룩함에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고전 11:27, 29). 교회의 합당한 행위에 내포되어 있는 동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즉 교회를 자신의 소유로 삼아 거룩하게 하여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한 것으로부터 생겨난다(살후 1:11).
바울은 이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거룩함을 설명하고자 구약에서 사용하던 제의적인 모티프를 자주 영적 의미로 전환하여 사용한다.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다(고전 3:16-17; 엡 2:21). 그러므로 이들은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하고, 이것이 그들이 드릴 영적 예배이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고 바쳐진 것은 흠 없고 순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거룩한”은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고 더렵혀지지 않은 것”의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은 것은 교회를 자기 앞에서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엡 5:26). 이것은 희생 제사와 관련된 용어이고(참조: 벧전 1:19), 거기에는 하나님 백성의 도덕적인 거룩함이 표현되어 있음이 명백하다(엡 1:4).
이렇게 “흠 없는”이 거룩함과 제의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전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특히 고후 6:14 이하에서 이것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교회는 불신자와 우상숭배자와 어울려서 자신을 더렵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 이유는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고후 7:1에 나오는 권면과 이것을 연결시킨다: “그런즉…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이러한 류의 권면은 상당히 많다: 엡 5:26; 빌 2:14; 고전 5:7; 롬 6:19; 딤전 1:5; 3:9; 딤후 2:21. 이러한 연관성 하에서 우리는 바울이 사용하는 거룩이라는 말이 구체적인 표면적 행위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도덕적 상태와 더 많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화라는 말은 사도 바울의 권면이 지향하는 목적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새 생명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상응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정결한, 책망할 것 없이 거룩한 제물로 규정된다. 이 순종의 근거와 기원이 하나님의 값 없는 택하심의 은혜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이, 새로운 순종의 종교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성격은 성화라는 개념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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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 의 개념은 법정적 의미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구약의 체다카라는 이보다 훨씬 넓은 배경과 의미를 가진 말이다.
*강의자 : 송다니엘 교수
*본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1강은 2024년 8월 25일(주일)과 9월 1일(주일)에 실시된 부천개혁교회의 사경회와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집중강의를 겸하여 강의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