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하심
남 탓하면 절대로 공부 안돼
오늘 저는 선원에서 정진하는 한 사람으로서 정진하는 마음을 주제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살면서 가장 두렵고, 급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또 그러한 문제들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요즘은 인터넷, 텔레비전, 라디오 등을 통해 큰 스님들의 법문을 쉽게 접할 수 있어 고통의 근원이 생로병사에서 오는 것임을 잘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나의 문제가 아닌 남의 일로 여겨진다면 문제 해결의 의지는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내 문제로 여겨질 때 마음이 급해지고,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세상에 오신지 일주일 만에 어머니를 여위었습니다. 세상에 오면서부터 죽음의 문제를 안고 태어난 겁니다. 태자 시절에는 동서남북 사대문에서 세상의 생로병사를 여실히 관찰하셨습니다. 또 땅에서 기어 나온 벌레를 새가 잡아먹고, 그 새를 더 큰 날짐승이 낚아채는 것을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학문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불교는 누가 뭐래도 생사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12연기법으로 세분화해 설명할 수 있으나 실상 잘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생명 있는 것들은 왜 죽어야 하는 걸까요? 우리는 보편적으로 늙어서 죽는다고 말합니다. 또 늙는 것과 병든 것을 같이 취급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일까요?
역으로 생각해보면 죽음의 원인은 늙고 병들기 때문이고, 늙고 병드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태어남이 곧 죽음의 원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태어난 것일까요? 태어나기 이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왜 죽음은 괴롭고 두려운 공포의 대상일까요? 그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마솥 안에 손을 넣을 때 그 속에 펄펄 끓는 물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충분히 대비를 할 것입니다. 또 차가운 물로만 채워져 있다면 서슴없이 그 속에 손을 넣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가마솥 안이 어떤 것으로 채워져 있는지 알 수 없다면 두렵고 불안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모습을 명확히 안다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게 됩니다. 만약 사후 모습이 지금보다 더 행복하다면 여러분은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윤회와 고통이 바로 무명(無明)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무명이란 밝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진여의 세계에 대해, 나의 참 모습에 대해,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해 밝지 못하다는 겁니다. 이를 뒤집으면, 밝고 또렷하며 바로 본다는 뜻의 명(明)이 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밝지 못한 것입니다.
이 우주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낮과 밤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기독교에서는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중세에는 이것을 두고 재판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낮과 밤은 조물주의 창조가 아닌 빛을 등지면 어둡고, 바라보면 밝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의 결과입니다. 지구를 벗어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관념에 묻혀 전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인 것입니다. 바로 무명에 갇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변허공 각소현발(無邊虛空 覺所顯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없이 넓고 무한한 허공도 나온 곳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마음입니다. 크기로 말하자면 마음처럼 큰 것이 없으나 작기로 말해도 마음만한 것이 없습니다. 각이라는 것, 마음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천년을 묵은 어둠이라도 한줄기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무명만 없어지면 명이 됩니다. 구름에 가리웠다고 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름을 걷어내 본래 가지고 있는 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아석소조제악업 개유무시탐진치 종신구의지소생 일체아금개참회(我昔所造諸惡業 皆有無始貪瞋癡 從身口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 지난 세월 지은 바 모든 악업은 무시이래 탐진치로 말미암아서, 몸과 말과 뜻으로 지었사오니 제가 이제 그 모두를 참회합니다.
『천수경』에 나오는 참회게입니다. 명(明)해지려면 무명(無明)을 제거하면 됩니다. 그런데 무명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업(業)에는 선업과 악업이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체가 모두 업인 것입니다. 우리는 두껍게 쌓인 무명에 가려서 악업을 짓게 됩니다.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악업을 짓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왜 죄를 짓게 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무시(無始)란 시작을 알 수 없는 끝없는 옛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무시이래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탓으로 악업을 지었다 이겁니다. 소유하고자하는 탐심과 화를 내는 진심 그리고 어리석은 치심이 행동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탐진치는 따로 구분돼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악업을 짓게 되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게 되며 본래 맑은 것이 무명의 구름에 가려지게 되는 겁니다.
한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대사문이시여 당신이 내세우는 최고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내가 듣기로는 니르바나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과연 니르바나를 얻으면 어떻게 됩니까?” 부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이에 화가 난 바라문이 부처님께 욕을 하며 뒤돌아 나갔습니다. 그때 부처님의 옆에서 시봉을 들던 사리불 존자가 그 바라문을 조용히 불러 부처님께 듣고 싶었던 대답을 자신이 대신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라문에게 “여기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불꽃이 활활 타 연소돼 완전히 꺼져 재마저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니르바나입니다. 니르바나를 얻으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은 모두 불타 재마저 사라진 자리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고 했습니다.
탐진치 삼독심이 완전히 연소된 것이 니르바나라는 대답입니다. 물론 이 대답이 니르바나에 대한 완벽한 설명은 아니지만 바라문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설명이 있겠습니까. 스스로 찻잔의 물을 마셔야 뜨거운지 차가운지, 그냥 맹물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법입니다.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바라문이 스스로 깨달아 니르바나를 경험하도록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이 악업을 신구의로 지었으니,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내가 일체를 현재 이 자리에서 몰록 참회합니다. 참(懺)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죄를 뉘우치는 것이고, 회(悔)는 지금부터 미래의 일까지 다시는 이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서원하는 것입니다.
참회란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이 함께 되어야 합니다. 이참은 마음으로 이치를 따져 모든 번뇌와 죄악을 끊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사참은 절이나 독경 등 자신의 죄를 스스로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몸으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참회는 이와 같이 이참과 사참이 함께 되어야 진정한 참회라 할 수 있습니다.
백겁동안 쌓인 죄도 일념으로 참회하면 마른 풀이 불타듯 완전히 소멸돼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원래 내가 부처이고, 밝은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을 날리면 태양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선(禪)의 도리이고 원칙입니다. 빠른 길이 있는데 왜 돌아가려고 합니까.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철저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심이 생기는 겁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근심은 풀어지지 않습니다. 시골에 사시는 분들은 문을 걸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심에 사시는 분들, 그 중에서도 많은 것을 가진 분들은 문을 굳게 닫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런저런 경비시설을 설치한다고 합니다. 가진 만큼 근심의 크기도 큰 법입니다.
제가 예전에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입니다. 장기간 여행을 계획하고 떠난 까닭에 배낭을 앞뒤로 메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짐이 많다보니 버스 타는 것은 고사하고, 화장실 한 번 마음 편히 가기 어려웠습니다. 필요 없는 짐만 버려도 한결 간편했을 터인데 당시에는 그렇게 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내가 가진 필요 없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지요.
최근 언론을 통해 부탄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몽골 유목민들의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부탄이나 몽골 유목민이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가난하고 잘 살지 못하는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돈이 많다는 것이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반증일 것입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욕심 없는 그 마음이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마음 따라 일어나는 죄는 마음이 멸하면 함께 사라집니다. 죄와 마음이 모두 멸해 모두가 원만하게 공하게 될 때 그것을 진짜 참회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음을 소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멸시켜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될까요? 마음이 본래 부처라는데 여러분은 부처입니까? 여러분은 부처님처럼 행동하고 있습니까? 왜 여러분은 부처이면서 부처가 아닐까요?
그것은 여러분이 자신이 부처임을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내가 부처임을 확인하는 작업을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나옹 선사는 “생각이 일어나면 생(生)이요, 일어나지 않으면 사(死)”라고 했습니다. 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사에 즈음해서 마땅히 화두에 진력하라”고 했습니다. 생사문제를 해결하려면 참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부처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서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왕자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왕이 되는 교육을 철저히 받아야 합니다. 달라이라마도 달라이라마가 되기 위해 철저한 교육을 받습니다. 나도 법왕이 되려면 끝없이 수행하고 정진해야 하는 법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다보면 산이 물 되고, 물이 산이 될 때가 있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무엇인가 보일 때도 있고, 상기병을 얻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공부를 잘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공부에 매진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세계는 미국 월가에서 비롯된 금융위기로 공황상태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만원의 가치밖에 없는 상품을 몇 배로 뻥튀기해 돈 잔치를 벌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체가 아닌 거품을 실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실체가 아닌 거품을 보고 살아갑니다.
마음이 평온하면 뚜렷이 볼 수 있으나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면, 우리의 시야는 탁해집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안정시키면 다시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본래 마음이 부처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해야 합니다. 실체가 아닌 헛것은 잡으려 한다고 잡히지 않습니다. 악몽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뿐입니다.
『금강경』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하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하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하다”고 했습니다. 일체의 모든 현상은 꿈과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그림자 같으며 이슬 같고 번개불 같으니 응당 이렇게 관하라는 말입니다.
의정 뭉쳐 의단된 것이 화두
이 뭣고 하나로 번뇌 쳐내야
눈을 비비고 허공을 보면 꽃이 보입니다. 이것을 공화라고 합니다. 이 공화가 완전히 소멸되면 명징하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됩니다. 그때의 마음이 본래 부처입니다. 우리는 광석을 금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재련 과정을 통해 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일단 금이 되고 나면 물속에 넣어도 흙속에 넣어도 돌 속에 넣어도 금입니다. 이 마음을 이 금을 부처라고 합니다. 본래 부처를 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재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제 참선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참선을 하려면 첫째 신심이 확고해야 합니다. 여기서 신심이란 내가 부처라는 사실의 완전히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은 선지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신심이 안 되는 사람은 하심을 해야 합니다. 하심이 안 되면 신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체투지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하심(下心)입니다. 화가 나는 것도 하심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사그라져 재처럼 돼 그 마음이 어떠한 말에도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하심만 되면 신심은 저절로 생겨납니다.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공경하는데 무슨 업을 짓겠습니까. 남을 탓하면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참회하고 하심해야 신심이 굳건해져 공부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것 없이는 공부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는 대의단(大疑團)을 가져야 합니다. 선지식의 말씀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정답은 자신의 답이 아닙니다. 스스로 먹어봐야 맛을 알 수 있습니다. 일어나는 의정이 뭉쳐 의단이 된 것을 화두라고 합니다.
화두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 이것이 이뭣고입니다. 화두 없이 앉아 있으면 온갖 번뇌 망상이 치고 들어옵니다. 그러나 오직 화두 하나로 이 모든 것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이~뭣고’하면 치고 들어오는 모든 번뇌 망상이 한꺼번에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사이 또 다른 번뇌 망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일어나는 것을 없애려하면 또 다른 번뇌 망상이 일어납니다. 그 번뇌 망상들을 내버려 그만두고 오직 이뭣고에 모든 것을 실어 정신을 집중합니다.
물속에 우유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우유는 물과 하나가 돼 물속에서 우유를 구분할 수 없듯이 나와 화두가 한 덩어리가 돼야 합니다. 뭉쳐져 나눠지지 않는 것을 의단이라고 합니다. 깨닫는 측면에서 보면 화두는 분명 방편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드는 나와 들려지는 화두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주와 객이 무너지면 하나이기에 화두를 더 이상 방편이라고 표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면 공부는 멀지 않습니다.
경허 스님 말씀 중에 염궁(念弓)문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밤길을 걷다 호랑이를 만난 사냥꾼이 온 힘을 다해 화살을 날렸습니다. 화살은 호랑이에게 명중했으나 호랑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두 번째 화살을 날렸는데 이번에는 화살이 튕겨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그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커다란 바위였습니다. 첫 번째 화살은 생사를 걸고 쏜 것이기에 바위마저 뚫을 수 있었으나, 의심을 가지고 쏜 두 번째 화살은 튕겨져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화두도 몸과 마음을 실어 완전히 들어야 합니다.
백 천 가지 물이 강으로 모여 바다로 흐릅니다. 웅덩이가 있으면 잠시 고였다가 다시 흐르고,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기도 하지만 강물이 향하는 곳은 오직 바다입니다. 본래 부처를 확인하는 작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과 근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본래 부처 자리를 향해 한발이라도 내딛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몰록 내가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는 첩경입니다.
선방을 흔히 선불장(選佛場)이라고 합니다. 부처를 뽑는 과거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선방뿐 아니라 공부하는 곳 모두가 선불장입니다. 나는 선원에서 정진하는 사람으로 참선을 하는 방향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 길을 향해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발원합니다.
정리=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영진 스님은
1972년 금산사에서 도영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용봉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석암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1999년부터 3년간 조계종 기초선원장 겸 동화사 선원장을 맡아 종단 간화선 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스님은 기초선원장 소임을 맡은 때를 제외하고는 봉암사, 해인사, 통도사, 백담사 무금선원, 은해사 기기암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에만 전념하고 있다.
971호 [2008년 10월 28일 17:54]
첫댓글 이 법문도 같습니다 수행.... 오로지 수행... 수행이 전부인 우리의 부처님~~!!!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이런 법문에 속지() 마세요 제가 잘못된 것인지 몰라도, 참 안타깝고 또 안타깝습니다. 말씀은 그럴 듯() 하지만, 제가 볼 때 이런 법문은 범부들에게는 로 도움이 안 되는 법문입니다.21 세기 한국 불자님들은, 이제 이런 식의 법문은 뛰어 넘을 때가 되었다고 저는 봅니다. 이곳에 계속 올라오는 광덕큰스님의 법문과 한번 비교해 보세요 그러면 제 뜻을 아실려나...
하심이 힘들까요 신심이 힘들까요 스님은 신심이 더 힘들다 하셨는데, 그래서 하심이 되면 신심은 저절로 나온다 했는데, 신심이 저절로 나오는 하심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요 신심과 하심은 다른 것일까요 그래서 하심을 먼저 닦고 신심을 발하는 것일까요
제가 누차 말씀드리지요 하심 대신 공경하시라고 공경이 훨씬 쉽다고...하심은 나를 죽이는 것이기에 말은 좋지만 사람들이 하기가 힘들다는 것.그 반면 공경은 나를 장 시키는 것이기에 마치 순풍에 돛을 듯 그 자체가 우리에게 맞다는 것 또 하심은 그 출발점이 내 잘난 자리에서 시작하기에 하심을 한다고 할수록 내 잘남도 그와 비례해서 커진다는 것 표면의식은 하심을 할지 모르지만, 잠재의식은 절대로 내 잘남을 떠날 수 없는 게 하심이라는 것 그러니 '하심' 대신에 일체를 '공경'하라는 것...
그리고 답답하신 스님. 그 참회게가 어디 천수경에 나오는 겁니까 화엄경 보현행원품 게송에 나오는 걸, 천수경 만드신 조선 중기 해동의 옛스승님들이 인용하신 것이지...보현행원품 일독만 하셨어도 참회게 출처가 행원품인 걸 아실텐데...
신심이 진정으로 확고히 서면 상심, 하심, 평등심이 다 생겨요. 모든 생명 본래불이라고 믿으면 자연 공경심., 자비심, 마하반야바라밀이 꿈틀거리지요. 문수행, 보현행, 관음행, 지장행...대자비 서원이 일어납니다. 눈물도 마구 쏟아지고 상심, 하심 그런게 중요한건 아닙니다. 오로지 믿음과 자비서원이 굳건히 서야 모든게 이루어집니다. 바른 믿음, 자비서원 바른믿음. 자비서원....
문제는 신심이 그렇게 쉽게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발심도 믿음에서 온다고 화엄은 말하는데, 그래서 그 때 일으킨 그 마음, 그 초발심이 정각을 이룬다고 하는데, 그런 정각을 일으키는 믿음이 그렇게 쉽게 올까요...쉽게 온다면 깨닫지 못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문제겠지요...
내가 본래불이라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을 보조스님도 애타도록 저희에게 부탁하셨지만, 어디 못난 중생이 그 말이 쉽게 믿어집니까 쉽게 믿으면 쉽게 믿지 않게 되겠지요...그러니 개신교의 믿음이 그렇게 추풍낙엽 아니겠습니까...
체험이 없으면, 그래서 체험 없이 믿음을 일으키면 그건 맹신이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개신교의 믿음이, 내가 본래불이라는 불교의 믿음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믿음은 체험에서 나오는 것인데, 체험 없이 믿음을 논한다면 맹신이기는 오십보 백보 아닐까요. 체험이 없이 그저 믿는 것 믿음만 강조하는 것 그것은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경계할 일이겠지요...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만, 저 같은 경우 큰스님의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그 한말씀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그자리에서 믿어버렸지요. 그 믿음이 바탕이 되어서....그게 그렇게 어려울까요? 그리고 그 믿음에 체험이 있다면 바로 사실확인이 되는데 사실 앞에서도 믿는다고하나요? 그럴때는 이미 믿음도 사라져 버립니다. 엄밀히 말하면 믿음은 미확인 사실을 두고 말하지요.
그리고 근기 뛰어난 분들을 그 자리에서 깨닫게 해 주시는 일은, 선지식의 존재가 대단히 중요하답니다. 아무리 근기가 뛰어나도 선지식을 못 만나면 그렇게 한 생을 살게 되십지요. 육조 시대에 그렇게 육조의 언하에 대오하신 분들이 많은 것은, 그 분들의 근기도 근기지만 육조라는 뛰어난 선지식이 계셨기에 그런 것입지요. 그러니 큰스님 가르침을 직접 받으실 수 있었던 불광 불자님들은 얼마나 과거생에 좋은 공덕을 지으신 분들인지, 불광불자님들 스스로가 그걸 아시고 또 자부심을 가져도 좋으실 겁니다요...
또한 우리가 전법을 할 땐, 항상 듣는 분들의 입장에서 법을 생각해 봐야 할 겁니다. 내 경험을 일반화시키면 필히 우를 범하게 되기 쉽지요. 나는 참선해서 깨았는데, 나는 염불해서 이런 경지에 왔는데, 나는 사경을 해서 이렇게 되었는데...하며 대다수의 수행자들이 당신 공부에서 못 벗어나는 것을, 그래서 누구에게나 당신 공부법을 강조하시는 것을 우리는 자주 뵈옵지 않습니까물론 그분들로서는 최선을 다하시는 것이겠지만, 이런 일들이 자기 경험의 보편화 또는 일반화라 하겠지요. 그러다보니 배타적 생각도 생기는 것이고..이런 일을 피하려면 언제든 우리는 듣는이의 입장에서 법을 생각해야 할 겁니다요..
나무마하반야바라밀다 !!!!!!!!!!!!! 법당 방문한지 얼마 안돼는데...^^ 바로 하심(?) ^^ 공경이 쉬운것을..........._()_
믿음은 어떻게 오는가? '체험'으로 옵니다. 이해하고 체험함으로써 진정한 믿음이 오게 됩지요. 그러니 화엄경에서는 믿음을 설하는 장이 처음에는 나오지 않고 나중에사 나오는 겁니다. 화엄 편찬자들이 그렇게 깊게 생각하시고 경전의 순서를 생각하신 것이지요.
화엄은 처음에는 부처님의 찬탄, 부처님 세계의 이해에 대한 말씀들이 펼쳐집니다. 화엄의 핵심 중의 하나가 믿음인데, 그렇게 중요한 믿음을 처음부터 설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범부 중생들이 알아 듣기 쉽지 않고, 공부가 되지 않는 분들에게 믿음을 강조할 때 생길 수 있는 황망함을 고려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은 부처님 공경, 부처님 찬탄, 부처님 공양을 노래한 후, 나중에서 현수품에서 믿음의 중요성을 설하시지요. 그리고 초발심의 중요함도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이야기하고도 몇 단계를 더 지나서야 비로소 말씀을 꺼내시는 겁니다.
체험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보현님, 화엄경뿐만 아니라 모든 경전이 본래불이란 믿음을 유발하기위한 전초작업을 했어요. 진리의 세계가 이러하다. 어떻게하면 그 세계를 알 수 있다...이를 이해하면 믿게 되지요. 부처님의 가르침 핵심이 우리모두 본래불이라는데에 있지요. 49년의고구정녕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여기 우리 보현행자들은 이미 그 단계에 와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보현님의 우려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자기의 이기심을 내세우며 '나는 부처다'라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구요. 그들은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진 않아요. 그런데 적어도 불교를 믿는다라고하면 본래불이라는 것을 믿는 단계라고 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을 더 드리면, 본래불이라는 것은 제가 알기로 주로 대승의 가르침입니다.상좌부는 그렇게 안 가르치지요. 물론 이런 상좌부와의 괘리를 메우기 위해 본래불 사상을 수기사상에서 찾는 노력도 대승에서는 합지요. 그런데 그렇게 쉬운()본래불을, 우리는 왜 믿지를 못할까요 보조국사께서도 '믿기만 하면 되는데'하며 왜 당시 믿지 못하는 중생들을 그렇게 안타까와 하셨을까요
그리고 부처님이 100% 옳다고, 아니 대승이 100%옳다고 우리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요 본래불은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로 대승에서 말하는 가르침이거든요 대승에서도 비교적 뒤늦게 나오는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말 안 했다는 것이지요 상좌부는 아직도 무상, 고, 무아가 최곱()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후기 가르침을 믿으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기독교의 믿음과 본래불의 믿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 분들을 '맹신'이라 말하는데, 본래불을 믿으면 정신이고 피조물이라 믿으면 맹신일까요 우리는 이런 점을 정말 심각하게 한번 고려해봐야 하리라 저는 생각합니다요...
이런 부분은 공부에 있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야 정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일어나게 되겠지요. 믿음을 결코 쉽게 생각하시면 아니 될 겁니다. 믿음은 공부의 전부거든요 정말 진실한 믿음이 언제 어디서나 일어난다면 그건 이미 성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봅니다. 부처님은 100% 믿음이 있는 분이고, 보살은 99% 정도, 저희같은 범부는 거의 0 에 가까운 믿음이겠지요. 그러니 믿음은 그저 믿어라 하는 정도에서 끝나서는 안 될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 행원성보살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으니, 불자님들은 행여냐 티끌만한 오해도 일으키지 마시기를..._()_
믿음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화엄경보현행원품강의'에 실려져 있고, 앞으로도 이곳에 상세히 올라올 것입니다. 우리 카페 불자님들은 올라오는 글을 빠짐없이 읽어주시고, 제 설명에 틀린 것이 있거나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댓글로 제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불자님들의 글을 보고 부족한 것은 보완하겠습니다...
참된 믿음은 '의심 속의 믿음'입지요... 온통 믿음만 있는 건 '맹신'이고요...그러니 간화선 공부에서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나중엔 '의심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참 이율배반적이지요 물론 간화선에서 말하는 믿음과 의심은 좀 차원이 다르지만...
대승, 소승 없어요. 상좌부는 근기를 키우는 과정이지요. 그리고 부처님은 100%로 믿는 분이라하시지만 이미 믿음이라는 자체을 벗어난 분입니다. 믿음 이전의 진리 자체.즉 실상의 분에서 자신이 깨달으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일러주신데서 불교라는 것이 탄생했고 믿음이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경전에는 해박하지 못하지만 믿음에서 출발해서 믿음마져 벗겨져야한다고 알고있습니다. 그 자체....바로 그 자체.
간화선에서의 믿음과 의정은 다릅니다. 믿음은 본래불을 믿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처의 지혜와 행이 안나옵니다. 반야가 현전하지 못하니까요. 자신의 본래면목을 참구하다가 스승을 만나서는 황당한(?) 한마디를 듣게되면 그것을 물고늘어지게됩니다. 뜻길이나 말길로 따르지말고...소위 자신도 모르게 화두를 들게 됩니다. 물론 그스승을 100% 믿어야만 빠져들게 됩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정말 중요해요. 스승에대한 신뢰. 그게 없으면 진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도에서 놓지고 말아요. 앞뒤가 꽉 막히고 더 나아갈 수가 없는 지경에서도 스승의 그 황당한 말씀에 의정을 일으키고 몰두하다보면 어느 순간 팍 터집니다.
그리고 보살님의 간화선에 대한 말씀도 조금 제 생각을 드린다면, 간화선의 믿음이라는 것이 본래불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깨칠 수 있다, 우리도 다른 스승님들처럼 그런 견성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나는 왜 깨닫지 못하는가 하는 각성을 갖는 것이 분심이고, 그리하여 어떤 풀리지 않는 경계를 불같은 정열로 참구하는 것이 의단일 것이고...그렇게 의단을 갖고 참구하다 보니. 마침내 우리가 본래 부처였다는 것 본래 부동지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상은 아직 그런 단계에 가 보지 못한 얼치기 행자의 '한 생각'이었습니다요...
우리 불자님들은 간화선에서의 믿음과 의정에 대해선 smile 보살님의 설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보살님의 설명이 정하게 말씀하신 것입지요 제가 그 윗글에서 말씀드린 믿음과 의심은 이런 식으로도 한번 볼 수 있다는 차원의 말씀이고요...그래서 말미에 "물론 간화선에서 말하는 믿음과 의심은 좀 차원이 다르지만..."이라고 토를 았던 것입지요...
깨칠 수 있다. 견성할 수 있다. 의 전제는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믿음이겠지요.
마하반야바라밀...감사합니다. _()()()_
좋은 말씀들 감사합니다. 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