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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꼴베 순례이야기
조선인학교. 보통은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들어오는 부관연락선에 몸을 싣고 징용징병이 됐다. 더 멀게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조선통신사의 행렬도 마찬가지. 그렇게 일본으로 들어가서 일본 전역 곳곳에서 제철과 탄광의 막일을 해야 했다. 해방되기 전까지는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착취와 약탈을 하던 이들은 자신들이 패망에 이르자 헌신짝 버리듯 버렸다. 도쿄의 한일관계사사료관에 가면 심지어 그 수가 일본인과 조선인이 대등할 정도였다는 도표도 나온다. 해방이 되고 그동안의 눈물과 설움을 딛고 고국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은 다시 일본 전역에서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역순의 행렬을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만을 간직한 채인 우키시마호의 폭침은 불과 하루면 건널 수 있는 관부연락선에 몸을 싣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제야저제야. '조금 더 여기도거기도 좋아지면 가자.'던 것이 벌써 세대를 두 번이나 지났다. 시모노세키의 달동네인 똥굴마을에 들어서면 징용과 징병의 역사와 위안부, 그리고 이념과 갈등의 역사도 한 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거의 대부분이 경상도 출신들이예요.'라는 사람들의 말이다. 그렇게 아들세대에 이어 손주세대가 됐다. 그래도 말만은 잃지 말자며 세웠다. 학교를. 서로 사상은 달라도 일단 언어는 배우고. 철저히 이용한 일본은 인정하지 않았고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다. 북녘도 남녘도 무관심한 것은 마찬가지. 저마다 먹고살기 힘들 때는 그래서려니 하지만 이제 나아져도 굽어보거나 넘어보기를 주저하고 꺼려한다. '내 소명인 것 같아요.' 예수회의 일본인 나카이준신부의 이 말이 마음속을 계속 울리는 것은 이방인[Gentile]의 친절함[Gentle]을 보기 때문이다. 그가 손에 든 '조선어학교 이어가도록 살펴주세요.' 하는 전단지가 뇌리에서 계속 맴도는 것도 어쩌면.
달동네 똥굴마을에 모여든 사랑들은 모두 제각각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심장에 수녀들이 산다. '작은자매회'. 예수의 원형과 프란치스코의 전형과 샤를드푸코의 전형을 따르는 수녀들은 '가난'이 가장 큰 키워드다. 빅토르위고가 말하는 "가난한사람들"이 압권인 것은 가난한 해안가의 어부 가족이 옆집 과부의 두 아이를, 그것도 그 중 한 아이는 이제 갓난 아기를 아내가 몰래 입양해 다락방에 숨겨놓았는데, 고기잡이에서 돌아온 남편이 식사중에 고민하고 망설이다 죽은 옆집 과부에 관한 얘기를 꺼내며 '담배나 술까지 끊을테니 아이들을 거두면 어떻겠냐.'고 하고, 그러자 아내는 눈물섞인 웃음을 보이며 말없이 다락방을 보여주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단편이지만 인상적이다. 딱 그 말처럼 작은자매회의 '작은'은 '가난'을 담고 있다. 스스로도 가난하고 이웃들도 가난한데 그렇지만 보듬으며.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모습이 똥굴마을의 심장에 있다. 그 심장이라고 하는 곳은 똥굴마을이 똥굴마을인 이유이다. 비만 오면 온깆 오폐수를 가지고 내려와 생긴 물웅덩이. 그래서 붙은 똥굴마을의 그 심장부에 수녀들은 움을 텄다. 수녀들이 말하는 한 사람 막달레나의 얘기가 삶의 표양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연은 모르지만 달동네에서 정붙이고 남편을 만나 소박하게 살았지만, 남편이 세상을 뜨자 오로지 홀로가 됐다. 달동네에서조차 이념을 가지고 다투는 틈바구니에서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신앙. 그런 그녀에게 말벗이 된 것이 수녀들이다. 묘한 아이러니는 쌀이라도 보급이 되면, 그것을 끌개에 끌고 수녀들에게 건넨다는 것이다. '굶어죽을까봐 [?]' 바로 여기에 가난한사람들의 핵심이 있다. 가난이 분명 시련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가난할 때 서로 나누는 것이 가장 큰 나눔인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에게 하늘나라를 건네겠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으뜸의 것을.
군함도[하시마]에 가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본인들은 '스고이[굉장해]'를 연발한다. 해설사는 신이 나서 그런 비슷한 얘기들로 추임새를 유발한다. '당시에 이런 아파트를 지을 생각을 하다니'. '근대문명을 이끈 미쓰비시[三菱]는 대단해'. 바다의 가는 길목 오는 길목 안의 미쓰비시의 군수공장과 전함공장을 보면서 더더욱 놀란다. 몇몇 일본인들의 침묵. 몇몇 한국인들의 침묵. 이름처럼 못된 마름[菱]은 바다와 갯벌을 간척해 땅을 만들어 농투성이들을 소작에 붙이고, 결국 빚의 고리로 이끌어 징용으로 연행한다. 더러는 불순하다는 이유로 강제연행되고. 이어지는 탄광노동. 무슨 '빠삐용' 영화에나 나올 법한 탈출이 감행되는데, 무려 절반도 넘는 숫자가 바닷가 물개구멍으로 시도하다가 죽거나 맞거나 더 가혹한 탄광으로 이끌려, 살아나온 사람의 얘기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나가사키는 어떤가. 아주 먼, 하지만 잊어서는 안될 임진왜란/정유재란 시대에 끌려온 사람들. 그런가 하면 고토섬에서는 유배로 떠나와 가난으로 점철된 가쿠레기리스탄이 있고, 그 안에 조선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옹기/종이/기와 등의 파편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역사 안에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비켜갈 수 없었던 원폭이 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굳이 말한다면 예수칠고/성모칠고 등처럼 칠고 정도라고 하면 약과일까. 전쟁/노예/가난/유배/박해/징용/원폭. 일본 어디를 돌건 마찬가지겠지만 '스고이[굉장해]'의 이면에 '히카게[어두움]'가 있다. 성당 도처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예수성심이다. 고통의 되물림[대물림]을 인고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예수성심 곁에 흔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성모성심. 예수통고[Passion] 곁의 성모통고[Com-Passion]. 그것이 아닌 무염[無染]과 희망과 사랑의 성모자가 있다. 그래서일까. 무겁게 며칠을 보내고 나면 그들이 고통의 되물림[대물림]이 아닌 평화의 되물림[대물림]인 것을 깨닫게 된다.
'평화, 예수의 이름[La Paix, C'Est La Paix, C’Est Le Nom De Jésus]'이라는 표현을 프랑스에서 곧잘 한다. 이병호주교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는 예수의 말씀을 누차 강조한다. 김성환신부가 말하는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의 가치도 분명 그 범위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평화순례는 그런 가치의 공통분모에 있는 사건과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평화라는 추상적일 수 있는 가치를 체화하는 기회이다. 양운기수사는 다른 여행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하라고 한다. 장현근선생도 마찬가지다. 놀러가는 것이 아니다. 쇼핑하는 것이 아니다. 돈벌려는 것이 아니다. 누차 강조하는 것에 따라 여러 차례 평화순례를 이렇게 또 저렇게 하면 조금은 그 기운이 느껴진다. 뤼순감옥에서 죽임을 당한 안중근의사의 교수형자리. 그리고 여러 차례 공사중이어서 못본 곳에서, 옛 사형수들의 죽음 뒤에 독방보다도 조그마한 나무통에 꾸부정하게 앉은 채로 묻었다는 모습의 재현을 보면, 평화를 갈구하던 안중근의사도 그렇게 여전히 있으면서 '너무나 오래 꾸부정하게 움츠리고 있어서 팔다리도 목허리도 너무 아프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런 곳에 서면 절로 성호도 그어지고 절로 기도도 토해진다. 허용되는 범위에서 아주 가까이 있을 법한 안중근의사의 무덤을 위해 여기저기를 헤매기도 하고. '찾아야지. 찾아야겠다. 찾아야한다.' 하면서. 문정현신부/문규현신부 등과 함께 한 만주순례에서 '진지하게. 진지하게.' 찾았으면 좋겠다는 다짐을 받는 두 형제신부의 바람도 '평화를 찾아야지. 평화를 찾아야지.' 하는 것 같다. 올해 평화순례그룹과 함께하는 상해/항주/남경 평화순례. 사라질 뻔했던 상해임시정부청사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거리의 기운도 느끼게 될 것 같다. 거기를 김대건과 안중근과 로베르가 평화를 생각하며 걸었던 까닭에.
보통은 여러 차례 혹은 수십 차례 순례건 여행을 하면 매너리즘에 빠진다. 하지만 평화순례는 다르다. 하나씩하나씩 새로운 내용이 곁들여진다. 때로는 그것이 매우 놀라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전에 참여했던 순례자가 다시 참여한다. 지금도 자취가 남아있는 상해임시정부청사와 항주임시정부청사는 실은 더 이전의 전신이 있었다. 묘하게 이번 평화순례에서는 두 곳에 갔다. 항주임시정부청사의 전신인 여관[호텔]은 내부의 중랑까지도 들어갔다. 다음에는 여기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잠시 몸을 뉘였을 곳에 기대기도 하겠지. 상해임시정부청사의 전신은 사라졌기에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김가항성당이 공사중이어서 찾은 우캉맨션. 가는 길에서 수많은 인파의 난징동루도, 노르망디와 오봉막쉐를 닮은 프랑스조계지의 옛정취 가득한 거리를 보면서 상해임시정부청사의 전신이자 최초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거리를 만끽한다. 그 거리의 이름은 다양했다. 수녀들거리[Route Des Soeurs].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수녀회가 있던 곳에 떼이야르드샤르댕의 누이인 프랑수아즈도 거기서 자신의 평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다가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뒸다. 김신부로[金神父路]. 여러 중의적인 이름. 우리로서는 김대건신부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파리외방전교회의 로버트[金河伯]신부도 떠올릴 수 있다. 프랑스조계지를 구축하는데 기여한 그는 김대건신부를 적극적으로 도왔기에, 어쩌면 자신의 성을 김[金]으로 한 것도 그런 연유인지도 모른다. 또다른 프랑스식 이름인 로베르거리[Route De Robert]. 이 역시 앞선 로베르와 중의적일 수 있지만, 또다른 이름의 로베르[Robert Jacquinot De Besange]신부를 떠올릴 수 있다.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없는 거룩함을 거리는 기운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수천수만의 중국인들은 일제의 상해학살을 모면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로베르신부가 프랑스조계지에 마련한 안전지대[The Shanghai Safety Zone / 南市难民区] 덕분이었다. 외팔이신부인 로베르는 이후 하나의 모델[De Besange Model]이 됐고, 남경의 존라베의 안전지대의 모범도 됐다. 그래서일까. 그를 기리는 중국인들은 천주교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성황묘에 모시고 기억한다. 그런 거리이름이 지금은 서진로[瑞金路]로 불린다. 근대혁명의 모태가 된 루이진시[瑞金市]를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래서 최초의 상해임시정부청사가 있던 곳은 서김이로골목[瑞金二路 48[50]弄]이 되는 것이다. 이곳은 주은래가 프랑스에서 돌아와 혁명을 준비하면서 사람들과 이렇게저렇게 모이고 지하서클을 펼쳤던 곳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주은래의 동상이 서 있다. 주은래는 누구인가. 남편인 주은래[周恩來]가 연출하고 아내인 등영초[鄧穎超]가 배우였던 작품이 안중근이고, 거기에서 싹튼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진다. 주은래는 말한다. '안중근이 혁명의 효시이다.'라고. 그런 깊은 인연들을 떠올리며 그 거리를 보면 건물은 사라졌지만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그려진다. 김대건신부가 조선입국을 생각하며 걸었을 거리. 로베르신부가 조선도움을 모색하며 걸었을 거리. 안중근의사가 조선앞날을 걱정하며 걸었을 거리. 떼이야르수녀 가난백성을 보살피며 걸었을 거리. 백범김구선생 대한민국을 떠올리며 걸었을 거리. 주은래선생이 조선사람을 우러르며 걸었을 거리. 로베르신부가 환난백성을 보호하며 걸었을 거리. 이 모든 것이 뭉뚱그려 있는 거리의 조그마한 골목길 한 귀퉁이는 루이뷔통의 난징동루, 색계로서의 우캉맨션 등에 비견도 안될 정도의 거룩함이 깃든 명품거리[골목]가 아닐까. 그 기운을 한껏 그리고 함껏 들이킨다.
일본 후쿠오카의 다가와탄광에 가면 마치 '다가와[다가져와]' 하는 것처럼 일제 전범기업의 착취의 전형이 그대로 드러난다. 허리조차 펼 수 없는 갱도, 사십오도에 달하는 뜨거운 갱도 안에서 젖가슴을 드러내는 수치심조차 잊은지 오래인 여성탄광노동자. 일본인에게도 중국인에게도 조선인에게도 징용인 그곳에서, 살아남은 노동자가 당시 상황을 묘사한 만화같은 그림이 있다. 그는 말한다. '그들의 고단한 삶을 그려내서 알리긴 했지만, 한가지 거짓말을 하고 말았네요. 그곳에는 단 한줄기 빛도 없었는데, 빛을 그려넣었으니.' 루쉰은 "외침[吶喊]"의 '철방[鐵房]'에서 사방이 철방인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주저앉지 않으려면 누군가가 총알 한 발을 쏴 빛이 스며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리고 거기에 펜이든 칼이든 총이든 또 한 발 또 한 발 쏘면 한줄기 빛은 한다발 빛이,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길이 된다. 길은 없었지만 걷는 이들이 많아 길이 갖춰진다. 루쉰에게 안중근은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처음으로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만들어낸 장본인. 거기에 하나둘 자신의 주어진 역할 안에서 한 발 한 발 빛을 일구어낸 이들. 루쉰을 여러 차례 만난 이육사도 그렇게 자신을 바쳐 길을 낸다. "광야에서" 외친다. '비로소 길이 열렸다.'고.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목놓아 부르는 한 발 한 발 쏘아올린 이들의 영과 혼과 백과 넋과 얼의 마음. 우리는 지금 그 시대에 살고 있다. 아이브가 "I AM"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느 깊은 밤 길을 잃었을 때 차라리 날아오르면 보이는 그대로가 다 길인 세상'에 살고 있다. 앞선 이들이 빛을 냈으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꿈은 현실이 되고[Dreams Come True]. 단 하나. 진 빚은 갚아야지 않겠는가. 천국에서 춤추며 만세를 부르겠다던 안중근을 동토의 땅 영어의 몸 속으로부터 나올 수 있게 하는 것. 그렇게 신채호를. 그렇게 이회영을. 또 그렇게 이육사를.
'책자에 성경과 십자가 사진은 왜 넣은거죠.' 교회=평화 공식이 반드시 맞는 것이 아니라는 양운기수사가 리지샹위안소의 대목에 넣은 사진을 두고 한 말이다. 그 사진 위에는 수련수녀였다가 강제연행된 네덜란드의 루프오헤른여사의 사진이 있었으니, '루프오헤른여사의 것이냐.'는 덧붙은 질문에, '아닌 것 같다.'고 하자, 더 격앙되게 '그러면 도대체 왜 넣은 거요.' 하니 '리지샹위안소에서 본 것을 오버랩 차원에서 넣었을 따름'이라고 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리지샹위안소에서 양운기수사도 유심히 다시 확인한 성경과 십자가 아래는 '레이구이잉[雷桂英]이 간직한 성가와 십자가'라고 돼있다. 레이구이잉여사는 어린 시절 납치돼 리지샹위안소에서 성노예로 살다 탈출한 여인이었다. 루프오헤른여사도 레이구이잉여사도 박영임여사가 처음으로 고발한 것에 힘입어 오십년간의 침묵을 깬 용기있는 분들이다. 둘 다 천주교신자이다. 교회=평화 도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어쩌면 더한 것이다. 이제민신부의 "교회, 순결한 창녀"라는 책이 논란에 휩싸인 때가 있었다. 교부학자가 처음 던진 말인데도 불구하고. 수련수녀였다가 앳된소녀였다가 끌려가 성노예로 살던 여인들은, 처음 끌려가면서도 성당 안 성모 안에서 간절히 기도했고, 영화 "난징, 난징"에서 극명하게 보여주듯 모두의 죽음을 피하기 위한 대속의 희생양으로 끌려간 성노예의 어두운 단칸방에서도 성모 안에 간절히 기도했고, 그 시절이 지난 뒤에 계속 짓이겨오는 트라우마에 '용서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용서'를 곱씹으면서도 성당의 성모 안에 간절히 기도했다. 어쩌면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같은 처지의 무염시태 성모를 위로처로 삼아. 그러니 이들을 통해서 침묵하던 죄많은 교회는 비로소 정화되는 것이다. 이들로 인해서 마침내 교회=평화 방식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야키.' 나가사키의 숱한 얘기들의 파편은 아는 것들의 좀덜 혹은 좀더 하는 정도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치 금맥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나가사키 북녘의 도자기들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에 전혀 없던 일도 아니니 그리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야키'로 불리는 나가사키 북녘의 도자기마을이 파면팔수록 종전에 풀리지 않던 얘기들의 열쇠가 되고 도저히 맞춰지지 않던 퍼즐의 중요한 한 쪼가리가 나온 것처럼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어쩌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못다 푼 얘기들의 단초나 단시가 될수도. 도자기를 굽던 도공들이 끌려왔다. 토기도 도기도 아닌 옹기와 자기를 위해. 그리 온 도공들은 왜에 순응한 순왜와 왜에 저항한 항왜로 나뉘는데, 항왜의 삶은 처참했다. 갇혀서 오로지 갇혀서 도자기를 구워내야 했기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도망쳐서 숨어들 수도 없었다. 그런 그들 중 그리스도교를 접하고 세례받은 이들이 있다. 유일한 도피처였다. 예수회선교사들은 그런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소개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닥친 것은 박해였다. 가혹한 박해를 피해 점점 더 산속으로 해안으로 숨어들고, 도저히 안되면 섬으로까지 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인 도자기로 삶인 신앙인을 고백했다. 관음성모가 그것이고 누운비문이 그것이다. 더러는 목숨을 잃었고 더러는 유배를 떠났다. 선교사가 없던 시절. 그들 내에 어른[미즈카타[水方]/공소회장]을 세워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가쿠레기리스탄. 그리고는 몇백년이 흘러 새로운 선교사들이 왔고, 기도와 믿음을 조합해서 그것이 그것임을 확인했다. 잠복그리스도인. 돌아왔느냐 머무르느냐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신앙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그 얘기들을 풀 귀인들을 만났고, 모두에게 거절한 바들을 풀어주겠다고 하니, 진정성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만 남았다.
얘기를 좀 더 풀면 이런 짐작이 가능하다. 가라쓰로 끌려온 도공들은 말 그대로 항왜였다. 백여명 가까운 장인을 포함한 이들은 선교사들을 접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다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 패하면서 박해가 시작됐다. 오름가마에도 숨어보고 산골깊숙이도 숨어보고 해안절벽에도 숨어봤다. 더러는 히라도와 이키츠키 그리고 고토열도 등의 섬으로 멀리 더 멀리 떠났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로서는 어김없이 붙잡힌 그들에게 선택의 시간이 주어졌다. 순교냐 배교냐. 배교한 이들은 독실한 불교신앙인이자 고니시유키나가와 충성경쟁이 붙었다가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에 가담해 승리한 가토기요마사의 번에 속하게 된다. 불교 일연종으로 개종당한 그들은 오카와치야마 깊은 산골에서 감옥 아닌 감옥을 체험한다. 삼면이 험한 산세로 둘러싸인 곳에서 감시를 받으며 살던 이들이 그렇고 미카와야키의 골짜기마다도 처지는 비슷했다. 하지만 그들 중 거짓으로 배반한 신앙인들은 성모상의 모습의 관음상을 만들어 기도하고 죽을 때면 바닥에 십자가를 표시한 비문을 세워 신앙을 이었다. 선교사도 없이. 그렇게 이제 사백년이 흘렀다. 기도는 그것이 불교인지 신도인지 신흥인지 모를 정도로 일그러져 파편들을 주섬주섬 모아야만 그리스도교의 쪼가리를 찾을 수 있고, 팔작지붕과 도자기마다 새긴 고[高]자문양의 테두리들을 누군가가 말해줘야 적어도 조선인의 후예라는 것 정도를 겨우 알 정도로 희미해졌지만, 같은 민족을 만나면 가슴이 먼저서 뛴다. 오카와치야마 오름가마 한켠 집 마당에서 거실의 일연종 감실을 보다가 발견한 성모상. 무슨 사연이냐고 물으니, 오라버니가 나가사키로 가 아름다운 성모상을 만든다고 한다. 드디어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는 만난 민족의 후예들에게 형태도 피부도 마음도 곱다며, '예쁘다[키레이/綺麗/きれい]'를 연발한다. 고려[高麗]이니 기려[綺麗]겠지. 마치 스스로 자신을 거울 앞에서 보듯이.
